글 수 515
2009년 부활절 말씀(고전15:1-11, 요절:15:3,4)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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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기독교의 핵심, 다시 말하여 복음의 핵심,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역사 이래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죽은 모든 사람들에게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세상에 가장 비극적인 소식은 죽었다는 소식일 것이며 반면에 가장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은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소식,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수 있다는 소식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우리의 주요 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오늘 아침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부활의 소망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부할 신앙을 소유하여 죽음이 주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떨치고 역동적인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셨습니다(1-3).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영접하고 복음을 굳게 지켰습니다(2).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세상 풍조, 특히 육은 추하고 영은 선하다는 2원론인 영지주의가 파고 들어왔습니다. 이 사상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합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부활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3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죄’하면 일반적으로 도덕적·윤리적인 죄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란 헬라어로 하말타야로, 과녁에 화살이 빗나가다는 뜻입니다. 과녁에는 여러 크기의 원으로 이루어진 점수가 있습니다. 양궁에서 제일 가운데 원을 맞추어야 명중이고 가장 높은 점수를 줍니다. 물론 사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처럼 하나님의 법에서 떠나는 것이 죄입니다. 구체적으로 소요리 문답에 죄에 대해 잘 나와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불순종이 죄임을 선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참회의 기도를 드리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죄를 성경이 말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를 국법을 어기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만일 국법을 어겼다면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될 텐데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니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사죄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처럼 국법을 어겼을 때만 죄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을 때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죄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또 ‘하지 말라’는 것을 어길 뿐만 아니라 ‘하라’는 것을 어기는 것도 죄입니다.
우리는 ‘하지 말라’는 것을 행하게 되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 머릿속에는 부정적인 금지사항을 어긴 것만을 죄라고 생각하지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라. 범사에 감사 하라. 항상 기뻐하라. 사랑하라. 섬겨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 등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의 기준이 주관적이고 자의적입니다. 그러니 죄의식이 없고 회개가 없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하라’와 ‘하지 말라’의 계명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어기는 것이 불법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3:3).
뿐만 아니라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속의 생각도 죄임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흔히 죄를 생각할 때 우리가 행동으로 옮긴 것에 대해서만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행동으로 옮기기 전까지의 우리가 말한 것이나 혹은 우리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에 대해서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만이 죄가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고, 마음속으로 분개하고, 적개심을 가지고 상대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욕설과 비방하는 행위 속에 담긴 속사람을 지적하십니다. 이러한 행동 뒤에는 상대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악한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을 죽인 것과 동일한 죄이며, 하나님의 기준에 어긋난 행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죄란 구체적으로 십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 1 계명은 우리의 건강과 명예와 가족까지도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2 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는 올바른 방법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방식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3 계명은 우리가 자신의 부모의 존함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듯, 하나님의 존재와 위엄과 성품을 결코 가볍게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 4 계명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심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는 날로 지내라는 말씀입니다.
제 5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는 꼭 낳아주신 부모님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직장 상사, 선생님들 그리고 교회에서는 목회자와 교사들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사랑과 존중으로 돌아보아야 할 책임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 6 계명은 나 자신이나 혹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7 계명은 하나님께서 가정을 이룬 부부에게만 성적인 관계를 맺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혼을 약속하지 않았다면 그 누구와도 손을 잡고 다니지 마세요. 포옹하지 마세요. 어깨동무하고 다니지 마세요. 이게 다 불법적인 성행동입니다.
제 8 계명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재산을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제 9 계명은 다른 사람의 명예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말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 10 계명은 우리의 삶 자체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자족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욕심을 가지고 불만 가득한 삶을 살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왜 지금 경제 위기를 맞고 있습니까? 탐심 때문입니다. 부정한 방법, 탐욕으로 재산을 축적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주식 투기, 딴 투기, 아파트 투기, 환투기 등은 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증식하는 행위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성경은 내가 정한 법이나 다른 사람이 정한 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한 법을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서 어기는 것을 모두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 모두가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깨끗하고 정결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에 대한 기준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a). 인간은 죄로 인해 일생 수고하다가 결국에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보면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우리가 목욕탕에 들어갈 때는 뜨거워 그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발부터 조금씩 담급니다. 그런데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죄의 결과는 고통스럽고 무서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짓는 순간에도 죄의식으로 뼈가 쇠하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로 멸망할 인간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3b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십니다(빌2:6).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영광의 면류관 대신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당해야 할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시고 아무 죄가 없으시지만 사형 판결을 받으시고 채찍질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심으로 가시에 찔리셨습니다. 군병들에게 조롱과 침 뱉음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70Kg이란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손목과 발목에는 굵은 대못이 박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몸은 뒤틀리고 경련이 일어났습니다. 물과 피가 쏟아지면서 극심한 갈증으로 목이 타들어갔습니다. 시편 기자는 예수님의 고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시22:14,15).”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저마다 비웃었습니다. ‘자기도 구원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남을 구원하겠다고 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으로 절규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사람의 욕구 중에 소속감의 욕구가 있습니다. 이게 결핍되면 자살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부터,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부담스러워 외면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나의 질고와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사야서 53장 4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질고’란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건강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특히 경쟁 사회가 치열한 도시사회에 살다 보면 스트레스로 인해 각종 질병에 시달립니다. 우리가 질병으로 인해 고독과 마음에 슬픔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이런 나의 질고를 슬픔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육신의 질고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인해 병든 질고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무지와 교만으로 병든 나의 영혼의 질병을 담당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나의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사야서 53장 5,6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허물’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의미하고, ‘죄악’은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부정과 불법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허물과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꽃병에 꽂힌 꽃과 같이 생명이 없습니다. 자라고 싶어도 자랄 수 없고 열매를 맺고 싶어도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을 섬길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결국 어리석은 우상 숭배자가 되며 더러운 정욕의 노예가 됩니다(롬1:21-23).”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는 순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무엇입니까?
첫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자들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평의 십자가요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을 받는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수의 관계에서 화평의 관계가 됩니다. 이로 인해 담대하게 하나님의 보좌에 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음의 화평, 평안은 하나님과 관계가 새로워질 때만이 가능합니다.
둘째로 나음을 입게 됩니다.
사람들은 죄와 허물로 인해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렇게 저렇게 받은 상처로 인해 남모르는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 상처들은 시간이 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바뀐다고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뇌 구조를 보면 뇌간, 대뇌변연계, 대뇌피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뇌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변연계인데, 이것은 희로애락을 관장하고 감정을 인식합니다. 변연계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변연계가 각종 스트레스로 위축되고 쪼그라듭니다. 그리고 변연계의 편도에서는 부정적인 것들을 죽을 때까지 기억합니다. 그래서 슬픔, 상처 등이 우리의 무의식과 의식 세계에 남아 우리를 괴롭히고 미치게 합니다. 특히 죄로 인한 상처는 그 어떤 것으로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에 찔리시고, 십자가에 피 흘리며 돌아가신 예수님께 나아가 다 고백하고 다 털어놓을 때 모든 상처가 깨끗하게 치료됩니다. 예수님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곪아터진 상처까지 깨끗하게 치료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의 상처를 안고 혼자서 괴로워하지 마세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단번에 대속하신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모든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으십시오. 이 시간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대속하신 예수님께 슬픔과 상처를 다 내려놓습니다.. 모든 상처와 슬픔을 주님의 십자가로 옮겨 놓습니다. 이제 나의 상처가 치료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감사 찬양합니다. 아멘. 이 은혜를 체험한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둘째, 예수님은 성경대로 살아나셨습니다(4).
예수님은 내가 지어야 할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나 4절을 보겠습니다.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성경대로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수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인류를 그토록 괴롭히던 죽음이란 단어가 이 땅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줄음은 영원히 아듀!
그동안 사탄은 죽음이 주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우리를 지배해 왔습니다. 죽음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죽음은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를 소심하게 만듭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즐거운 일이 있어도 즐겁지 않게 합니다. 은혜로운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감사와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사람을 신경질적으로 만듭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원망과 불평이 절로 나오도록 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니 부정 지수가 올라갑니다.
2007년(2009년 OECD통계연보) 우리나라 생활만족도를 보면 긍정지수가 23.1로, 평균 54.3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반면에 부정지수는 61.5로 평균 35.6의 거의 배가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우리를 불행의 길로 인도하는 가장 큰 원수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죽음이 주는 두려움과 부정적인 생각, 불안에 더 이상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롬6:23b). 요한복음 5장 25절은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씀을 들을 때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죽은 영혼이 소생합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한 말씀이라도 영접하면 의심과 두려움이 물러갑니다. 우울증이 물러가고 생명이 약동합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은 순간 이성과 감정을 넘어서서 생명의 리듬, 생명의 힘이 증폭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산 소망을 갖게 됩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그리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육도 부활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믿음을 소유할 때에 죽음은 나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가정과 캠퍼스, 그리고 직장, 민족을 새롭게 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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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기독교의 핵심, 다시 말하여 복음의 핵심,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역사 이래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죽은 모든 사람들에게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세상에 가장 비극적인 소식은 죽었다는 소식일 것이며 반면에 가장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은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소식,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수 있다는 소식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우리의 주요 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오늘 아침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부활의 소망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부할 신앙을 소유하여 죽음이 주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떨치고 역동적인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셨습니다(1-3).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영접하고 복음을 굳게 지켰습니다(2).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세상 풍조, 특히 육은 추하고 영은 선하다는 2원론인 영지주의가 파고 들어왔습니다. 이 사상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합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부활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3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죄’하면 일반적으로 도덕적·윤리적인 죄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란 헬라어로 하말타야로, 과녁에 화살이 빗나가다는 뜻입니다. 과녁에는 여러 크기의 원으로 이루어진 점수가 있습니다. 양궁에서 제일 가운데 원을 맞추어야 명중이고 가장 높은 점수를 줍니다. 물론 사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처럼 하나님의 법에서 떠나는 것이 죄입니다. 구체적으로 소요리 문답에 죄에 대해 잘 나와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불순종이 죄임을 선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참회의 기도를 드리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죄를 성경이 말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를 국법을 어기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만일 국법을 어겼다면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될 텐데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니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사죄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처럼 국법을 어겼을 때만 죄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을 때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죄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또 ‘하지 말라’는 것을 어길 뿐만 아니라 ‘하라’는 것을 어기는 것도 죄입니다.
우리는 ‘하지 말라’는 것을 행하게 되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 머릿속에는 부정적인 금지사항을 어긴 것만을 죄라고 생각하지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라. 범사에 감사 하라. 항상 기뻐하라. 사랑하라. 섬겨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 등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의 기준이 주관적이고 자의적입니다. 그러니 죄의식이 없고 회개가 없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하라’와 ‘하지 말라’의 계명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어기는 것이 불법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3:3).
뿐만 아니라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속의 생각도 죄임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흔히 죄를 생각할 때 우리가 행동으로 옮긴 것에 대해서만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행동으로 옮기기 전까지의 우리가 말한 것이나 혹은 우리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에 대해서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만이 죄가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고, 마음속으로 분개하고, 적개심을 가지고 상대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욕설과 비방하는 행위 속에 담긴 속사람을 지적하십니다. 이러한 행동 뒤에는 상대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악한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을 죽인 것과 동일한 죄이며, 하나님의 기준에 어긋난 행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죄란 구체적으로 십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 1 계명은 우리의 건강과 명예와 가족까지도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2 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는 올바른 방법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방식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3 계명은 우리가 자신의 부모의 존함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듯, 하나님의 존재와 위엄과 성품을 결코 가볍게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 4 계명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심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는 날로 지내라는 말씀입니다.
제 5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는 꼭 낳아주신 부모님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직장 상사, 선생님들 그리고 교회에서는 목회자와 교사들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사랑과 존중으로 돌아보아야 할 책임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 6 계명은 나 자신이나 혹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7 계명은 하나님께서 가정을 이룬 부부에게만 성적인 관계를 맺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혼을 약속하지 않았다면 그 누구와도 손을 잡고 다니지 마세요. 포옹하지 마세요. 어깨동무하고 다니지 마세요. 이게 다 불법적인 성행동입니다.
제 8 계명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재산을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제 9 계명은 다른 사람의 명예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말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 10 계명은 우리의 삶 자체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자족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욕심을 가지고 불만 가득한 삶을 살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왜 지금 경제 위기를 맞고 있습니까? 탐심 때문입니다. 부정한 방법, 탐욕으로 재산을 축적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주식 투기, 딴 투기, 아파트 투기, 환투기 등은 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증식하는 행위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성경은 내가 정한 법이나 다른 사람이 정한 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한 법을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서 어기는 것을 모두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 모두가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깨끗하고 정결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에 대한 기준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a). 인간은 죄로 인해 일생 수고하다가 결국에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보면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우리가 목욕탕에 들어갈 때는 뜨거워 그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발부터 조금씩 담급니다. 그런데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죄의 결과는 고통스럽고 무서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짓는 순간에도 죄의식으로 뼈가 쇠하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로 멸망할 인간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3b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십니다(빌2:6).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영광의 면류관 대신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당해야 할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시고 아무 죄가 없으시지만 사형 판결을 받으시고 채찍질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심으로 가시에 찔리셨습니다. 군병들에게 조롱과 침 뱉음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70Kg이란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손목과 발목에는 굵은 대못이 박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몸은 뒤틀리고 경련이 일어났습니다. 물과 피가 쏟아지면서 극심한 갈증으로 목이 타들어갔습니다. 시편 기자는 예수님의 고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시22:14,15).”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저마다 비웃었습니다. ‘자기도 구원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남을 구원하겠다고 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으로 절규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사람의 욕구 중에 소속감의 욕구가 있습니다. 이게 결핍되면 자살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부터,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부담스러워 외면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나의 질고와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사야서 53장 4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질고’란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건강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특히 경쟁 사회가 치열한 도시사회에 살다 보면 스트레스로 인해 각종 질병에 시달립니다. 우리가 질병으로 인해 고독과 마음에 슬픔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이런 나의 질고를 슬픔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육신의 질고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인해 병든 질고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무지와 교만으로 병든 나의 영혼의 질병을 담당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나의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사야서 53장 5,6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허물’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의미하고, ‘죄악’은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부정과 불법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허물과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꽃병에 꽂힌 꽃과 같이 생명이 없습니다. 자라고 싶어도 자랄 수 없고 열매를 맺고 싶어도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을 섬길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결국 어리석은 우상 숭배자가 되며 더러운 정욕의 노예가 됩니다(롬1:21-23).”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는 순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무엇입니까?
첫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자들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평의 십자가요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을 받는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수의 관계에서 화평의 관계가 됩니다. 이로 인해 담대하게 하나님의 보좌에 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음의 화평, 평안은 하나님과 관계가 새로워질 때만이 가능합니다.
둘째로 나음을 입게 됩니다.
사람들은 죄와 허물로 인해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렇게 저렇게 받은 상처로 인해 남모르는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 상처들은 시간이 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바뀐다고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뇌 구조를 보면 뇌간, 대뇌변연계, 대뇌피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뇌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변연계인데, 이것은 희로애락을 관장하고 감정을 인식합니다. 변연계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변연계가 각종 스트레스로 위축되고 쪼그라듭니다. 그리고 변연계의 편도에서는 부정적인 것들을 죽을 때까지 기억합니다. 그래서 슬픔, 상처 등이 우리의 무의식과 의식 세계에 남아 우리를 괴롭히고 미치게 합니다. 특히 죄로 인한 상처는 그 어떤 것으로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에 찔리시고, 십자가에 피 흘리며 돌아가신 예수님께 나아가 다 고백하고 다 털어놓을 때 모든 상처가 깨끗하게 치료됩니다. 예수님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곪아터진 상처까지 깨끗하게 치료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의 상처를 안고 혼자서 괴로워하지 마세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단번에 대속하신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모든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으십시오. 이 시간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대속하신 예수님께 슬픔과 상처를 다 내려놓습니다.. 모든 상처와 슬픔을 주님의 십자가로 옮겨 놓습니다. 이제 나의 상처가 치료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감사 찬양합니다. 아멘. 이 은혜를 체험한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둘째, 예수님은 성경대로 살아나셨습니다(4).
예수님은 내가 지어야 할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나 4절을 보겠습니다.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성경대로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수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인류를 그토록 괴롭히던 죽음이란 단어가 이 땅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줄음은 영원히 아듀!
그동안 사탄은 죽음이 주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우리를 지배해 왔습니다. 죽음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죽음은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를 소심하게 만듭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즐거운 일이 있어도 즐겁지 않게 합니다. 은혜로운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감사와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사람을 신경질적으로 만듭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원망과 불평이 절로 나오도록 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니 부정 지수가 올라갑니다.
2007년(2009년 OECD통계연보) 우리나라 생활만족도를 보면 긍정지수가 23.1로, 평균 54.3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반면에 부정지수는 61.5로 평균 35.6의 거의 배가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우리를 불행의 길로 인도하는 가장 큰 원수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죽음이 주는 두려움과 부정적인 생각, 불안에 더 이상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롬6:23b). 요한복음 5장 25절은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씀을 들을 때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죽은 영혼이 소생합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한 말씀이라도 영접하면 의심과 두려움이 물러갑니다. 우울증이 물러가고 생명이 약동합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은 순간 이성과 감정을 넘어서서 생명의 리듬, 생명의 힘이 증폭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산 소망을 갖게 됩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그리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육도 부활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믿음을 소유할 때에 죽음은 나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가정과 캠퍼스, 그리고 직장, 민족을 새롭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