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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아가서 2:1-3(요절, 2:1)]
하나님의 은총, 가정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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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은 인간 사회의 기본 단위이자 처음이 됩니다. 가정은 모든 교육의 시초가 되고 근간이 됩니다. 유명한 발달심리학자 테일러는 92%가 가정에서 사회화 문화화 과정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동교육에 일생을 바친 페스탈로치는 일찍이 “가정이여, 너는 도덕의 학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가정을 어린이의 교육을 위한 최적의 학교로 보았으며 어머니는 하늘이 내리신 교사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어머니 복중에서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가정에서 먹는 법을 배우고, 말하는 법을 배우고, 걷는 법을 배우고, 삶의 법을 배우고, 남을 섬기는 법과 서로 돕는 법을 배우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법을 배워 사회인과 문화인이 되고, 그리고 지성인이 되고, 신앙인이 됩니다. 부모는 자녀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천재의 산실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교육을 보면 어머니 역할을 중요시합니다.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은 자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중에 있는 자녀를 양육합니다. 자녀들이 태어나면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신앙교육을 시킵니다. 어머니는 앉으나 서나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자녀들에게 성경 말씀을 암송시키고,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교육하고, 부권을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 자녀는 무의식의 세계까지 어머니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했을 때 그들은 노벨상이 전체 33%, 저명한 미국 3,000개의 대학 교수 45%, 국제 금융과 언론을 지배합니다.
사람들은 자녀를 낳기만 하면 부모가 저절로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가장 힘든 것이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란 직업은 세상의 어떤 전문직보다 정교하고 복잡하고 고도의 실력이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면허증이 없는 무면허 부모들이 많습니다. 무면허 운전사가 난폭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내듯이, 무면허 부모, 무면허 부부들로 인해 가정이 깨지고, 아이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어머니들은 무면허 부모가 아니라 성경을 사랑하고 지혜와 지식이 겸비된 참된 면허증을 소유한 부모들입니다.
가정의 기본 단위는 부부입니다. 첫째로 부부는 혼인이라는 의식과 제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둘째로 부부는 비 혈연적이지만 가장 친밀한 관계입니다. 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에 가장 상처를 받고 받을 수 있는 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바른 지식과 가치관과 노력과 기도를 하지 않으면 가장 불편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부부는 생리적․심리적․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보완적인 관계입니다. 넷째로 부부는 너와 내가 아닌 새로운 우리의 관계, together 입니다. 다섯째로 부부는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여섯째로 부부는 일시적 관계가 아닌 지속적인 관계입니다.
가정은 동양적인 시각에서 同居同財, 同居同饌, 함께 거하며 함께 재물을 공유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같이 살면서 한솥밥을 먹는 공동체가 가족입니다. 서양적인 시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을 영어로 family인데 혹자는 family의 initial을 따서 Father and mother I love you로 하기도 합니다. family의 어원은 라틴어 familia에서 왔습니다. 이는 노예와 재산을 뜻합니다. economy 단어 또한 헬라어 οὶκος(오이코스), 집이란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가족이란 노예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과 토지 가옥 금전 등의 재산이 포함됩니다. 따라서 가족이란 동서를 막론하고 주거와 재산의 공유를 내포합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특히 부부가 네 것 내 것을 따지며 자기 것을 챙기고 부부가 통장을 따로 관리하고 서로 비자금을 만들어 숨기는 것은 가족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족이 아니라 동거입니다. 결혼한 부부와 동거인의 차이점은 여러 차이점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결혼한 부부는 경제적으로 협력관계입니다. 반면에 동거인은 경제적으로 서로 독립적입니다. 네 통장 내 통장이 분명합니다. 경제 문제가 생기면 서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부부는 결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류의 첫 부부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둘은 별개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한 개체에서 둘이 된, 그래서 둘이자 하나입니다. 부부의 날이 5월 21일도 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창세기는 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2:21,22)” 아담과 하와는 둘인 동시에 하나입니다. 이 원리는 지상의 모든 부부들에게 깊은 생각을 갖도록 합니다.
남편들은 여러분의 아내와 둘인 동시에 하나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내들은 여러분의 남편과 둘인 동시에 하나임을 아십니까? 이렇게 탄생한 아담은 자신의 반려자에 대하여 뭐라고 말했습니까?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2:23).” 아담은 아내에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뼈와 살은 육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육체 중에 갈빗대입니다. 사람의 신체 중에 어느 곳을 맞았을 때 가장 아프지요? 머리를 맞으면 기분 나쁩니다. 뺨을 맞으면 자존심 상합니다. 정수리나 명치는 급소니까 세게 맞으면 기절하거나 죽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 다른 부위는 맞으면 아프기는 해도 해도 참을 만합니다. 그런데 갈비뼈를 쳐보세요. 온 몸에 전율이 흐릅니다. 그곳은 가장 의미 있는 부위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하와의 원형이 나온 자리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건드리면 깜짝 놀라는 방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반응은 누군가 나의 아내를 건드리거나 희롱했을 때에 보이는 반응과도 같은 것입니다.
남녀가 결혼하면 한 몸이 됩니다. 창세기 2장 24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한 몸은 영어로 united, cleave로, 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뜻합니다. 보통 산술적으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입니다. 그러나 결혼하게 되면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따라서 한 몸이 나누어지면 반쪽이 됩니다. 반쪽은 온전치 않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2009년 5월 1일자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지난해 인천의 조이혼율(1,000명단 이혼건수)이 2.8로 전국 최고입니다. 경기 2.5, 서울 2.3, 강원 2.3, 부산 대전, 충남, 충북 2.2이고, 조이혼율이 가장 낮은 지역은 대구, 광주, 전북, 경북으로 모두 2.0입니다. 그리고 부부 100 쌍 당 0.97쌍이 이혼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 결혼을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 중에 100 쌍 당 한 쌍은 이혼한다는 통계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혼을 합니까? 사람들은 성격차로 인해 이혼한다고 합니다. 성격차로 이혼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존 그레이가 쓴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를 한 번 읽어 보세요. 본래 남자는 화성인이고 여자는 금성 인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언어와 사고방식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남자는 화성인이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고 고민이 있을 때 자기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동굴에서 자신만의 해결책을 찾습니다. 반면에 금성에서 온 여자는 주위의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하소연을 통해 빠져나옵니다. 여자들이 수다를 떤다고 하잖아요? 일리가 있습니다. 동내 과일 가게 아줌마는 일 년에 한번 씩 초등학교 동창회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동창회에 가서 수다를 떨고 오면 일 년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다 풀리기 때문입니다.
또 남자는 어떤 일에 대해 무조건 해결책을 찾습니다. 답부터 찾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이것저것 사소한 부분에서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바가지를 긁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미리 예약을 해놓지 않았느냐, 이 길로 가는 게 더 빠른데 왜 그 길로 가느냐? 잔소리가 많습니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는 문제를 접근하는 시각도 다르고 문제를 푸는 해결 방법도 다릅니다. 그런 남자와 여자가 사는데 왜 갈등이 없겠습니까? 그 뿐입니까? 환경이 다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갈등이 없겠습니까? 갈등은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것 또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인간만이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모두가 문제의 갈등을 푸는 해결 도구입니다.
부부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이 없는 결혼은 아주 잘못된 결혼입니다. 잘못된 결혼은 현실도피, 반발심, 지위상승 수단, 순간적인 열정, 혼전 임신으로 인한 것입니다. 부부는 일절 사랑이어야 합니다. 거기에 다른 것이 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것은 모두 죄악입니다. 탐욕입니다. 죄악은 모든 것을 파괴시킵니다. 분리시킵니다. 부패하게 만듭니다. 약화시키고 소멸시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 이혼은 욕심, 탐심에서 비롯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 이혼은 금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 .”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랑을 회복시키기 위해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어 성령님을 보내시어 사랑을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로마서 5장 5절은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사랑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합니다. 죄와 허물조차도 덮습니다.
아가서는 남녀관계의 사랑을 가장 아름답고 극적으로 표현한 말씀입입니다. 아가서는 하나님과 그 백성, 그리스도와 교회, 주님과 성도의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여자는 겸손하게 자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사론은 팔레스타인 욥바와 갈멜산지 사이 평야입니다. 그곳에 피어 있는 수선화나 백합화는 사람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평범한 꽃입니다. 왕궁의 정원이나 여염집 앞마당에 자란 꽃이 아닌 들판에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꽃입니다. 자연과 더불어 자란 꽃입니다. 손때가 묻지 않은 꽃입니다.
그녀는 포도원에서 노동을 했기 때문에 얼굴이 검게 그을렸습니다(아1:5,6). 그녀는 거울 앞에서 화장이나 하고 손톱이나 다듬는 그런 유한마담이 아닙니다. 그녀는 일하는 여인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겸손한 여인입니다. 그는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그런 여인이 아닙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나는 고작 샤론에 핀 수선화라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바람과 이슬과 더불어 이름 없는 들판에서 자란 꽃입니다. 이름 없는 들판에 자랐기 때문에 사람의 손길이 갈리 없습니다. 그녀는 청순하고 순결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 남의 남자의 손을 한번 잡아본 적이 없는 성적인 순결은 물론 마음까지 순결한 여인입니다(4:12).
순결은 여인의 생명입니다. 요즈음 순결을 옛이야기로 생각하는 세대입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하던 순결은 여인의 생명입니다. 혼전 순결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혼전 순결치 못한 부부가 이혼할 확률이 많다고 보고 있습니다. 형제나 자매나 절대 순결하게 사십시오. 그러기 위해 자매들은 옷차림을 단정하게 하십시오. 치마를 짧게 입지 마세요. 어제 신문을 보니 여자들의 미니스커트는 알가다의 표적이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과 좀 더 다른 고매한 매력 있는 삶을 사십시오. 세상 유행을 따라 살지 마십시오. 매혹적인 삶이 아닌 매력적인 삶을 사십시오.
그랬을 때에 이 여자를 신부로 택한 남자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습니까? 2절을 보겠습니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그녀는 아주 평범한 백합화로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가시나무 가운데 피어 있는 백합, 군계일학, 백 마리 닭들 중에 있는 학이란 뜻입니다. 나의 신부, 나의 아내는 수많은 닭 무리 가운데 아름답게 돋보이는 한 마리의 학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는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 성도는 자신을 낮추고, 순결을 지키고,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할 때에, 주님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하고 순결한 자에게 존귀의 면류관을 씌워주십니다. 여러분의 아내는 가시나무 가운데 피어 있는 백합화입니다. 찬송가 88장을 부르겠습니다. ♬샤론의 꽃 예수♬
남자가 여자를 가시나무 가운데 핀 백합화라고 했을 때 여자의 눈에 비친 남자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3절을 읽겠습니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여성의 아름다움이 청초함에 있다면 남성의 멋은 푸근함에 있습니다. 사과나무는 살구나무를 뜻합니다. 이스라엘의 살구나무는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는 상록수로 그 열매는 황금빛이고 그 맛은 레몬과 오렌지를 섞은 맛입니다.
우거진 수풀 가운데 우뚝 서 있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연상해 보세요. 수풀은 아무리 우거져도 수풀일 뿐입니다. underwood, 수풀은 그늘을 제공해주지 못합니다. 휴식을 제공해주지 못합니다. 숲은 새들이 깃들지 않습니다. 숲은 양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과나무는 그늘을 제공해줍니다. 사과나무는 달콤한 과일을 제공합니다. 사과나무는 새들이 깃드는 보금자리가 됩니다. 이처럼 사과나무는 여자에게 그늘이 되어줍니다. 안식처가 되어 줍니다. 보호막이 됩니다.
숲들은 사과나무를 위해 존재하는 조연들입니다. 주인공은 오직 사과나무뿐입니다. 조연이 소중합니까? 주연이 소중합니까? 조연과 주연을 바꿀 수 있습니까? 수풀이 다소 멋져 보인다 할지라도 그럴 수는 사과나무와 비할 수 없습니다. 때론 가시가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지만 백합화와 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아내는 가시덤불 속에 피어난 청초한 아름다운 백합화요 수선화입니다. 남편은 수풀 가운데 우뚝 서있는 사과나무입니다. 남편은 깃발과 같은 존재입니다(민1:52). 젊고 푸르른 기상, 늠름한 언행,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뢰와 보호와 안락함, 연약한 자에게 보호가 됩니다. 따라서 남편과 아내는 피차 귀한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백합화는 가시나무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사과나무는 수풀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가시나무는 주연인 백합화를 부러워하며 시기합니다. 수풀 또한 주연인 사과나무를 부러워하며 시기합니다. 시기와 질투의 영들이 사정없이 달려듭니다. 다시 말해 가정을 파괴하고, 부부의 사랑의 관계를 떼어놓으려는 악한 영들이 주위에 널려 있습니다. 보통 결혼식장에서 검은 머리 파 뿌리가 되기까지 사랑한다고 서약합니다. 이 말은 처음 사랑을 영원토록 변치 말라는 서약입니다. 그런데 이런 서약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미혹의 영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년이나 일 년도 못가 티격태격합니다. 그러다 못 살겠다고 가방을 쌉니다. 특히 느낌을 강조하는 요즘 젊은 세대들은 쉽게 가방을 쌉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친정 부모님은 애간장이 타십니다. 우리 하나님도 애간장이 타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계속 가정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남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5).”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말씀]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 그리고 아내들에게 말씀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5:22,23).”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벧전3:1,2).” 복종과 순복은 같은 말입니다. 이 단어는 질서를 담고 있습니다. 잘 나서가 아니라 질서 상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교회보다 가정이 앞섭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 축복하십니다. 가정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러기 위해 가정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고 바라봄의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남편은 일절 아내만 바라보아야 하고, 아내는 일절 남편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부는 둘이 아닌 한 몸입니다. 피차 서로를 자기 몸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아끼고 보살펴야 합니다. 이게 가정의 윤리요 행복의 원천입니다.
은총이란 찬양을 다 같이 불러 봅시다.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에 뼈로다 아담과 하와의 고백은 내 고백 그대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 은총의 반려자요 즐거움이어라 영원한 나라의 기업을 나눌 자 하나님 우리의 부족함 아시어 둘이 연합하여 완성품 되어라 주님이 맺어주신 내 사랑이어라 슬픔을 나누며 행복을 나누네 그대는 영원한 인생의 동반자 하나님 진리 말씀 그 언약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내 친구이어라 에덴을 주셨던 창조의 하나님 우리의 가정에 주 사랑 채워서 주님이 원하시는 천국을 이루어 은총의 반려자와 감사로 살리라.♬
하나님의 은총, 가정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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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은 인간 사회의 기본 단위이자 처음이 됩니다. 가정은 모든 교육의 시초가 되고 근간이 됩니다. 유명한 발달심리학자 테일러는 92%가 가정에서 사회화 문화화 과정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동교육에 일생을 바친 페스탈로치는 일찍이 “가정이여, 너는 도덕의 학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가정을 어린이의 교육을 위한 최적의 학교로 보았으며 어머니는 하늘이 내리신 교사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어머니 복중에서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가정에서 먹는 법을 배우고, 말하는 법을 배우고, 걷는 법을 배우고, 삶의 법을 배우고, 남을 섬기는 법과 서로 돕는 법을 배우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법을 배워 사회인과 문화인이 되고, 그리고 지성인이 되고, 신앙인이 됩니다. 부모는 자녀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천재의 산실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교육을 보면 어머니 역할을 중요시합니다.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은 자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중에 있는 자녀를 양육합니다. 자녀들이 태어나면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신앙교육을 시킵니다. 어머니는 앉으나 서나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자녀들에게 성경 말씀을 암송시키고,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교육하고, 부권을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 자녀는 무의식의 세계까지 어머니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했을 때 그들은 노벨상이 전체 33%, 저명한 미국 3,000개의 대학 교수 45%, 국제 금융과 언론을 지배합니다.
사람들은 자녀를 낳기만 하면 부모가 저절로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가장 힘든 것이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란 직업은 세상의 어떤 전문직보다 정교하고 복잡하고 고도의 실력이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면허증이 없는 무면허 부모들이 많습니다. 무면허 운전사가 난폭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내듯이, 무면허 부모, 무면허 부부들로 인해 가정이 깨지고, 아이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어머니들은 무면허 부모가 아니라 성경을 사랑하고 지혜와 지식이 겸비된 참된 면허증을 소유한 부모들입니다.
가정의 기본 단위는 부부입니다. 첫째로 부부는 혼인이라는 의식과 제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둘째로 부부는 비 혈연적이지만 가장 친밀한 관계입니다. 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에 가장 상처를 받고 받을 수 있는 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바른 지식과 가치관과 노력과 기도를 하지 않으면 가장 불편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부부는 생리적․심리적․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보완적인 관계입니다. 넷째로 부부는 너와 내가 아닌 새로운 우리의 관계, together 입니다. 다섯째로 부부는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여섯째로 부부는 일시적 관계가 아닌 지속적인 관계입니다.
가정은 동양적인 시각에서 同居同財, 同居同饌, 함께 거하며 함께 재물을 공유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같이 살면서 한솥밥을 먹는 공동체가 가족입니다. 서양적인 시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을 영어로 family인데 혹자는 family의 initial을 따서 Father and mother I love you로 하기도 합니다. family의 어원은 라틴어 familia에서 왔습니다. 이는 노예와 재산을 뜻합니다. economy 단어 또한 헬라어 οὶκος(오이코스), 집이란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가족이란 노예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과 토지 가옥 금전 등의 재산이 포함됩니다. 따라서 가족이란 동서를 막론하고 주거와 재산의 공유를 내포합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특히 부부가 네 것 내 것을 따지며 자기 것을 챙기고 부부가 통장을 따로 관리하고 서로 비자금을 만들어 숨기는 것은 가족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족이 아니라 동거입니다. 결혼한 부부와 동거인의 차이점은 여러 차이점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결혼한 부부는 경제적으로 협력관계입니다. 반면에 동거인은 경제적으로 서로 독립적입니다. 네 통장 내 통장이 분명합니다. 경제 문제가 생기면 서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부부는 결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류의 첫 부부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둘은 별개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한 개체에서 둘이 된, 그래서 둘이자 하나입니다. 부부의 날이 5월 21일도 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창세기는 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2:21,22)” 아담과 하와는 둘인 동시에 하나입니다. 이 원리는 지상의 모든 부부들에게 깊은 생각을 갖도록 합니다.
남편들은 여러분의 아내와 둘인 동시에 하나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내들은 여러분의 남편과 둘인 동시에 하나임을 아십니까? 이렇게 탄생한 아담은 자신의 반려자에 대하여 뭐라고 말했습니까?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2:23).” 아담은 아내에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뼈와 살은 육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육체 중에 갈빗대입니다. 사람의 신체 중에 어느 곳을 맞았을 때 가장 아프지요? 머리를 맞으면 기분 나쁩니다. 뺨을 맞으면 자존심 상합니다. 정수리나 명치는 급소니까 세게 맞으면 기절하거나 죽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 다른 부위는 맞으면 아프기는 해도 해도 참을 만합니다. 그런데 갈비뼈를 쳐보세요. 온 몸에 전율이 흐릅니다. 그곳은 가장 의미 있는 부위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하와의 원형이 나온 자리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건드리면 깜짝 놀라는 방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반응은 누군가 나의 아내를 건드리거나 희롱했을 때에 보이는 반응과도 같은 것입니다.
남녀가 결혼하면 한 몸이 됩니다. 창세기 2장 24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한 몸은 영어로 united, cleave로, 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뜻합니다. 보통 산술적으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입니다. 그러나 결혼하게 되면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따라서 한 몸이 나누어지면 반쪽이 됩니다. 반쪽은 온전치 않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2009년 5월 1일자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지난해 인천의 조이혼율(1,000명단 이혼건수)이 2.8로 전국 최고입니다. 경기 2.5, 서울 2.3, 강원 2.3, 부산 대전, 충남, 충북 2.2이고, 조이혼율이 가장 낮은 지역은 대구, 광주, 전북, 경북으로 모두 2.0입니다. 그리고 부부 100 쌍 당 0.97쌍이 이혼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 결혼을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 중에 100 쌍 당 한 쌍은 이혼한다는 통계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혼을 합니까? 사람들은 성격차로 인해 이혼한다고 합니다. 성격차로 이혼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존 그레이가 쓴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를 한 번 읽어 보세요. 본래 남자는 화성인이고 여자는 금성 인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언어와 사고방식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남자는 화성인이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고 고민이 있을 때 자기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동굴에서 자신만의 해결책을 찾습니다. 반면에 금성에서 온 여자는 주위의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하소연을 통해 빠져나옵니다. 여자들이 수다를 떤다고 하잖아요? 일리가 있습니다. 동내 과일 가게 아줌마는 일 년에 한번 씩 초등학교 동창회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동창회에 가서 수다를 떨고 오면 일 년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다 풀리기 때문입니다.
또 남자는 어떤 일에 대해 무조건 해결책을 찾습니다. 답부터 찾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이것저것 사소한 부분에서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바가지를 긁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미리 예약을 해놓지 않았느냐, 이 길로 가는 게 더 빠른데 왜 그 길로 가느냐? 잔소리가 많습니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는 문제를 접근하는 시각도 다르고 문제를 푸는 해결 방법도 다릅니다. 그런 남자와 여자가 사는데 왜 갈등이 없겠습니까? 그 뿐입니까? 환경이 다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갈등이 없겠습니까? 갈등은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것 또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인간만이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모두가 문제의 갈등을 푸는 해결 도구입니다.
부부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이 없는 결혼은 아주 잘못된 결혼입니다. 잘못된 결혼은 현실도피, 반발심, 지위상승 수단, 순간적인 열정, 혼전 임신으로 인한 것입니다. 부부는 일절 사랑이어야 합니다. 거기에 다른 것이 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것은 모두 죄악입니다. 탐욕입니다. 죄악은 모든 것을 파괴시킵니다. 분리시킵니다. 부패하게 만듭니다. 약화시키고 소멸시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 이혼은 욕심, 탐심에서 비롯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 이혼은 금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 .”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랑을 회복시키기 위해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어 성령님을 보내시어 사랑을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로마서 5장 5절은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사랑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합니다. 죄와 허물조차도 덮습니다.
아가서는 남녀관계의 사랑을 가장 아름답고 극적으로 표현한 말씀입입니다. 아가서는 하나님과 그 백성, 그리스도와 교회, 주님과 성도의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여자는 겸손하게 자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사론은 팔레스타인 욥바와 갈멜산지 사이 평야입니다. 그곳에 피어 있는 수선화나 백합화는 사람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평범한 꽃입니다. 왕궁의 정원이나 여염집 앞마당에 자란 꽃이 아닌 들판에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꽃입니다. 자연과 더불어 자란 꽃입니다. 손때가 묻지 않은 꽃입니다.
그녀는 포도원에서 노동을 했기 때문에 얼굴이 검게 그을렸습니다(아1:5,6). 그녀는 거울 앞에서 화장이나 하고 손톱이나 다듬는 그런 유한마담이 아닙니다. 그녀는 일하는 여인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겸손한 여인입니다. 그는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그런 여인이 아닙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나는 고작 샤론에 핀 수선화라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바람과 이슬과 더불어 이름 없는 들판에서 자란 꽃입니다. 이름 없는 들판에 자랐기 때문에 사람의 손길이 갈리 없습니다. 그녀는 청순하고 순결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 남의 남자의 손을 한번 잡아본 적이 없는 성적인 순결은 물론 마음까지 순결한 여인입니다(4:12).
순결은 여인의 생명입니다. 요즈음 순결을 옛이야기로 생각하는 세대입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하던 순결은 여인의 생명입니다. 혼전 순결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혼전 순결치 못한 부부가 이혼할 확률이 많다고 보고 있습니다. 형제나 자매나 절대 순결하게 사십시오. 그러기 위해 자매들은 옷차림을 단정하게 하십시오. 치마를 짧게 입지 마세요. 어제 신문을 보니 여자들의 미니스커트는 알가다의 표적이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과 좀 더 다른 고매한 매력 있는 삶을 사십시오. 세상 유행을 따라 살지 마십시오. 매혹적인 삶이 아닌 매력적인 삶을 사십시오.
그랬을 때에 이 여자를 신부로 택한 남자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습니까? 2절을 보겠습니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그녀는 아주 평범한 백합화로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가시나무 가운데 피어 있는 백합, 군계일학, 백 마리 닭들 중에 있는 학이란 뜻입니다. 나의 신부, 나의 아내는 수많은 닭 무리 가운데 아름답게 돋보이는 한 마리의 학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는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 성도는 자신을 낮추고, 순결을 지키고,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할 때에, 주님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하고 순결한 자에게 존귀의 면류관을 씌워주십니다. 여러분의 아내는 가시나무 가운데 피어 있는 백합화입니다. 찬송가 88장을 부르겠습니다. ♬샤론의 꽃 예수♬
남자가 여자를 가시나무 가운데 핀 백합화라고 했을 때 여자의 눈에 비친 남자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3절을 읽겠습니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여성의 아름다움이 청초함에 있다면 남성의 멋은 푸근함에 있습니다. 사과나무는 살구나무를 뜻합니다. 이스라엘의 살구나무는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는 상록수로 그 열매는 황금빛이고 그 맛은 레몬과 오렌지를 섞은 맛입니다.
우거진 수풀 가운데 우뚝 서 있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연상해 보세요. 수풀은 아무리 우거져도 수풀일 뿐입니다. underwood, 수풀은 그늘을 제공해주지 못합니다. 휴식을 제공해주지 못합니다. 숲은 새들이 깃들지 않습니다. 숲은 양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과나무는 그늘을 제공해줍니다. 사과나무는 달콤한 과일을 제공합니다. 사과나무는 새들이 깃드는 보금자리가 됩니다. 이처럼 사과나무는 여자에게 그늘이 되어줍니다. 안식처가 되어 줍니다. 보호막이 됩니다.
숲들은 사과나무를 위해 존재하는 조연들입니다. 주인공은 오직 사과나무뿐입니다. 조연이 소중합니까? 주연이 소중합니까? 조연과 주연을 바꿀 수 있습니까? 수풀이 다소 멋져 보인다 할지라도 그럴 수는 사과나무와 비할 수 없습니다. 때론 가시가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지만 백합화와 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아내는 가시덤불 속에 피어난 청초한 아름다운 백합화요 수선화입니다. 남편은 수풀 가운데 우뚝 서있는 사과나무입니다. 남편은 깃발과 같은 존재입니다(민1:52). 젊고 푸르른 기상, 늠름한 언행,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뢰와 보호와 안락함, 연약한 자에게 보호가 됩니다. 따라서 남편과 아내는 피차 귀한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백합화는 가시나무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사과나무는 수풀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가시나무는 주연인 백합화를 부러워하며 시기합니다. 수풀 또한 주연인 사과나무를 부러워하며 시기합니다. 시기와 질투의 영들이 사정없이 달려듭니다. 다시 말해 가정을 파괴하고, 부부의 사랑의 관계를 떼어놓으려는 악한 영들이 주위에 널려 있습니다. 보통 결혼식장에서 검은 머리 파 뿌리가 되기까지 사랑한다고 서약합니다. 이 말은 처음 사랑을 영원토록 변치 말라는 서약입니다. 그런데 이런 서약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미혹의 영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년이나 일 년도 못가 티격태격합니다. 그러다 못 살겠다고 가방을 쌉니다. 특히 느낌을 강조하는 요즘 젊은 세대들은 쉽게 가방을 쌉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친정 부모님은 애간장이 타십니다. 우리 하나님도 애간장이 타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계속 가정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남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5).”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말씀]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 그리고 아내들에게 말씀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5:22,23).”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벧전3:1,2).” 복종과 순복은 같은 말입니다. 이 단어는 질서를 담고 있습니다. 잘 나서가 아니라 질서 상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교회보다 가정이 앞섭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 축복하십니다. 가정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러기 위해 가정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고 바라봄의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남편은 일절 아내만 바라보아야 하고, 아내는 일절 남편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부는 둘이 아닌 한 몸입니다. 피차 서로를 자기 몸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아끼고 보살펴야 합니다. 이게 가정의 윤리요 행복의 원천입니다.
은총이란 찬양을 다 같이 불러 봅시다.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에 뼈로다 아담과 하와의 고백은 내 고백 그대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 은총의 반려자요 즐거움이어라 영원한 나라의 기업을 나눌 자 하나님 우리의 부족함 아시어 둘이 연합하여 완성품 되어라 주님이 맺어주신 내 사랑이어라 슬픔을 나누며 행복을 나누네 그대는 영원한 인생의 동반자 하나님 진리 말씀 그 언약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내 친구이어라 에덴을 주셨던 창조의 하나님 우리의 가정에 주 사랑 채워서 주님이 원하시는 천국을 이루어 은총의 반려자와 감사로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