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 14 강(5:1-20)

광인을 회복하신 예수님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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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거라사 지방의 광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광인은 미친 사람입니다. 미쳤다는 것은 무엇인간에 매여 있는, 무엇인가에 지배를 당하는, 무엇인가에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노릇하게 되면 내 뜻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나는 거룩하게 살고 싶고 품위 있게 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로마서 7장 15절을 보면 바울은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17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종국에 가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요8:34). 사람이 죄의 종노릇하는 근본 이유를 보면 그 뿌리가 욕심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원인은 교만과 탐욕 때문입니다. 뱀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결코 죽지 않으리라. 너희가 먹는 날에는 하나님 같이 된다”고 유혹했습니다. 마귀 유혹의 핵심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연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말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자와 같이 될 수 있어요? 결코 될 수 없어요.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분수를 모르면 푼수가 됩니다. ‘푼수 떤다고 하지요?’ 사람이 푼수가 되면 피조물로서의 분수를 모르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광인이 됩니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맺는 것으로 족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과나무가 배까지 열리려고 하면 이것이 탐욕이요 교만입니다. 인간은 탐욕과 교만의 노예가 되어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탐욕을 부리다가 미치광이가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교만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미치광이 수 있습니다. 특히 현대인들은 정욕과 탐심, 얄팍한 지식이란 교만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는 마귀의 속삭임에 춤추다가 광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외쳤다가 그런 말을 한 후 얼마 못가 미치광이가 되었어요.

본문의 광인은 더러운 귀신 들려 무덤에서 살며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을 상하였습니다. 그는 더러운 귀신의 세력에 짓눌려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과 사명을 버리고 고귀한 인생을 탕진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 자아가 회복되고 사명이 회복되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귀신들린 자의 특징,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배워서 아름답고 고귀한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첫째, 더러운 귀신들린 거라사인(1-5)

예수님은 광풍을 잔잔케 하시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 거라사 지방에 이르셨습니다(1). 거라사 지방은 ‘열 도시’란 뜻을 가지고 있는 데가볼리의 한 도시로, 로마 14군단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돼지를 치는 하나님이 없는 이방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이방 문화는 우상 숭배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군인이 주둔하는 곳은 음란합니다. 또 이곳은 도시입니다. 도시는 선정적이고 향락적이고 물질적입니다. 이곳은 귀신들이 살기에 좋은 도시였습니다. 귀신은 마치 병균이 더러운 곳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추하고 더러운 곳을 좋아합니다. 예수님 일행이 거라사 지방에 도착한 시간은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예수님 일행을 환영하는 사람은 고상한 인격을 갖춘 지성인이 아니라 흉한 모습을 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었습니다(2).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거처가 무덤입니다(2).

가정은 쉼과 힘을 얻을 수 있는 안식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가정을 떠나 무덤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덤은 우리나라와 달리 동굴입니다. 무덤은 어둡고 더럽고 냄새가 지독하고 으스스 합니다. 그는 무덤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것이 더러운 귀신들린 자의 모습입니다. 산 자는 산 자와 함께 하며 생명과 더불어 삽니다. 소망과 더불어 삽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사람은 죽은 자와 함께 삽니다. 사망과 함께 합니다. 절망과 더불어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사람은 함께 살며 서로 미워도 하고, 서로 싸우기도 하며 고운 정, 미운정이 들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가정과 사회와 친구 등 모든 것과 관계성을 끊고 혼자 무덤에서 살고 있습니다(3).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덤을 친구 삼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하오락실과 만화방, 비디오방과 영화관, 노래방, 어두운 카페와 술집, 그리고 자기 방을 무덤 삼아 사람들과 관계성을 끊고 혼자 어둡고 음울한 생활을 합니다. 생명이 약동하는 청년들이 어둡고 절망적인 삶을 삽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단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희망이 없고 고독하기 때문에 어두운 밤거리를 헤맵니다. 이는 귀신이 그의 내면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옷을 벗습니다(15).

옷은 문명과 문화의 상징이요, 아름다움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는 옷을 벗고 삽니다. 아마 옷을 일부러 찢어 입기도 했을 것입니다. 머리는 몇 달 동안 감지 않아 악취가 나고,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다녀 마치 짐승 같았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을 파괴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파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크고 놀라운 은혜를 파괴했습니다. 그러면 그가 왜 옷을 벗고 다녔을까요? 몸에서 열이 나서? 아니면 기존 문화와 질서에 반발하여서? 자기를 짓누르는 어떤 세력에 대항하여서? 답은 귀신들렸기 때문에 그는 옷을 벗었습니다.

귀신들린 자의 특징은 옷을 벗는 것입니다. 오늘날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노출이 심한 옷을 걸치고 도심지와 캠퍼스를 배회합니다. 특히 일부러 옷을 찢고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다닙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예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술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두움의 문화, 밤 문화, 저질문화, 귀신의 문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문화를 떠나서 옷을 단정히 입어야 합니다.

셋째로 자기를 자제하지 못합니다(4).

본문에 나오는 광인은 자기를 자기 스스로 제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누구도 그를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르다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욕을 절제하고, 탐욕을 절제하고, 감정을 절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정과 탐욕, 그리고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면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가 분열됩니다. 신용불량자가 됩니다. 사람이 절제하지 못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면 이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니 짐승보다도 못합니다. 짐승은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먹지 않습니다. 짐승에게는 소화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소화제를 먹으면서까지 탐욕스럽게 먹습니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기관차나 자동차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인간이 제어 기능이 파괴되면 절제하지 못해 가정과 사회와 캠퍼스는 광란의 사회와 캠퍼스가 됩니다.

우리는 귀신들린 사람을 狂氣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 돈에 미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익히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급속하게 확산되는 것은 성의 狂氣입니다. 성에 걸신이 들렸습니다. 강간이 세계 제 3위입니다. 영상물과 광고와 책 등이 거의가 음란합니다. 예쁜 옷이나 아름다움은 모두 성적인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 연상시킵니다. 성이 돈벌이로 전락되고 있어요. 사람들이 왜 정욕에 걸신이 들려 있습니까? 이는 소득과 여유 시간은 늘어났지만 인격 수양과 고급 가치가 무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동물적인 성욕 밖에 추구할 것이 없게 됩니다. 졸부들이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인격과 신앙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갑자기 도시개발로 떼돈을 벌었기 때문입니다.

대학생들이 죄를 많이 짓는 이유는 초등학교 6년, 중, 고교 6년, 12년간 묶여 있다가 대학에 들어와 확 풀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 있어서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란 자기 극기, 자기 훈련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면 건강을 잃고, 시간을 잃고, 순결을 잃고, 신앙도 잃게 됩니다. 결국 그러다가 패망하게 됩니다. 잠언 25장 28절을 보면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의 마지막이 절제입니다. 먹고 입고 잠자고 모든 것을 절제하시기 바랍니다.

넷째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습니다(5).

그는 누구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습니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습니다. 누가 옷을 벗고 다닌다고 말하지 않고, 누가 밤에 잠을 자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가정이나 사회나 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나 외적으로 볼 때 완전한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자유가 없었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는 불안과 초조, 공포와 두려움으로 무덤에서 짐승 같이 울부짖습니다. 그에게는 참된 자유가 없었습니다.

자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요8:32). 그에게는 진리가 없었습니다. 그의 내면에는 오직 허무와 절망, 원망,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습니다. “나는 쓸모없는 놈이야! 더 이상 살아갈 필요가 없어! 미쳐 죽겠다!” 그는 낮은 자존감으로 자신을 부정하고 자학했습니다.그러면 이 사람은 왜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까? 왜 이처럼 몹쓸 사람이 되었습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바 된 가치 있고 고결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이처럼 추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부모가 돈 때문에 늘 싸워 가정이 싫어서? 아버지가 술을 먹고 들어와 어머니를 때리고 밥상을 뒤엎어 집이 싫어서? 결손 가정에서 자라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사랑하던 여자가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도시의 선정적인 분위기에 병들어서? 아니면 돼지를 인간보다 더 중히 여기는 물질적인 가치관 때문에? 아마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물질이 왕 노릇하여 인간은 단순히 물질적인 존재로 전락되었습니다. 절대적인 진리, 가치관, 윤리와 도덕이 붕괴되어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공동화 현상이 생겼습니다. 사회는 점점 세분화되고, 조직화되어 인간소외란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인간은 물질과 제도의 노예가 되어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관을 상실하였습니다. 빈부의 격차는 젊은이들을 미치도록 만듭니다. 도시의 선정적인 문화는 사람을 미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를 정작 미치게 하는 것은 이런 외부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에 끊임없이 파고드는 죄의 소욕입니다. 죄가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경쟁심과 시기심, 미움이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죄가 손과 발 브레이크를 파열시켜 미치게 합니다. 죄가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어두움이 지배하는 무덤으로 몰아냅니다. 자제력을 파괴시켜 짐승으로 전락시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사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습니까? 3b,4절을 보겠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사람들은 그를 가정에 붙들어 매기 위해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꽁꽁 묶어 두었습니다. 그럴수록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쇠사슬과 쇠고랑을 뚝뚝 끊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이 사람을 도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의 내면을 조금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해 외적으로 규제만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더 발광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귀신들려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외적인 쇠고랑으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제도로 묶어 두고자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젊은이들은 더 발악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를 어떻게 도우십니까?

둘째, 네 이름이 무엇이냐(6-17).

사람들은 그를 심히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부담스러워 하지 않고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달려와 넙죽 절하며 큰 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7).” 그의 말은 행동과 상반됩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수님과의 관계성을 맺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 안에 귀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사람을 싫어하며 혼자 있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반발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반발하고 있습니까? 이는 이미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8)”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귀신을 내쫓으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는 예수님은 영혼을 가진 고귀한 존재로 보십니다.

그의 육체는 상할 대로 상하여 마치 짐승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도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귀한 존재로 보셨습니다. 사람이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치료 방법도 달라집니다. 인간을 단지 육체로 보면 칼 맑스, 프로이드와 같이 인간을 단지 물질로 밖에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육체와 영혼을 가진 고귀한 존재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인간을 파멸케 하는 것을 귀신으로 보십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이 때 우리는 자신과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절망합니다. 이는 내면에 역사하는 귀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면에 역사하는 귀신의 존재를 알게 되면 자신과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정죄하지 않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 속에 귀신이 역사하는 것을 아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으시자 귀신이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도전하여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9)?” 이 때 귀신들린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군대’란 ‘레기온’으로 로마 군대의 6,000명으로 구성된 군단을 말합니다.

이를 볼 때 그에게는 6,000마리의 귀신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만 귀신, 정욕 귀신, 음란 귀신, 시기심 귀신, 자의식 귀신, 반항 귀신, 절망 귀신, 안일 귀신, 원망 귀신, 물질 귀신, 열등감 귀신, 운명 귀신 등 갖가지 귀신이 떼를 지어 그의 지, 정, 의를 지배하고 조종하고 다스렸습니다. 그는 귀신이 원하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 다녔습니다. 절망 귀신이 발작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눕고, 안일 귀신이 발작하면 하루 종일 잠을 잡니다. 정욕 귀신이 발작하면 거리를 헤맵니다. 고독 귀신이 발작하면 술을 마십니다. 탐욕 귀신이 발작하면 주와 복음 역사를 섬기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에게 이름을 물어 보셨습니까?

첫째는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귀신의 속성은 속이는 것입니다. 귀신은 교활한 거짓말 장입니다(요8:44). 그러므로 귀신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의 존재를 속이고 사람 속에 거하여 그를 다스리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아 나오라” 하셨지만 귀신은 계속하여 자신의 정체를 속이고자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에게 이름을 물어보심으로 그 정체를 폭로시켰습니다.

둘째는 예수님 앞에서 참 자아를 발견케 하고자 함입니다.

‘이름’이란 그 사람의 인격과 존재를 나타냅니다. 이때까지 그는 자기가 왜 그런 생활을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좋아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현재의 모습이 본래 자기 모습인 줄로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 중 가장 비참한 것은 자아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에게 제일 먼저 찾아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심으로 자아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명예, 사랑, 물질을 추구하다가 자아를 상실한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심으로 자아를 찾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참된 자아를 알지 못하면 미치게 됩니다. 그런데 참된 자아는 하나님 앞에서 살 때만이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된 자아를 찾게 될 때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싸울 내적인 힘이 생기게 됩니다.
셋째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귀신의 목적은 관계성 단절입니다. 귀신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단절시킵니다. 자기 자신과도 단절시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귀신은 영혼과 마음과 육신을 파괴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 부모님, 친구, 사회, 목자와 양과의 관계도 올바르게 됩니다. 그리고 영혼과 마음과 육신이 건강케 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귀신의 정체가 폭로되자 귀신은 더 이상 그 사람 속에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순순히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귀신은 제발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말라고 간구했습니다. 이 때 마침 돼지 떼가 산비탈에서 먹고 있는 것을 보자 귀신은 돼지에게로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돼지들이 귀신들려 꿀꿀거리며 바다로 내리달아 몰사했습니다. 이 때 귀신들린 사람은 온전하여 옷을 단정히 입고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돼지 2,000마리를 희생시켰습니다. 이는 한 영혼이 돼지 2,000마리보다도 더 귀하다는 것과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이 따름을 보여 주고자 하심입니다. 생명 역사는 희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자연의 원칙이요, 생명의 원칙입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목숨을 온전히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에 대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돼지 떼를 희생시켜서라도 한 인간을 살리시는 것을 보았다면 예수님을 모시고 말씀을 듣고 그들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이 이곳에 오래 계시면 돼지 떼가 전멸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이어서 생명의 구주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셋째, 사명을 주신 예수님(18-20).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셨지만 한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하시고 떠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귀신들렸던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가기를 간구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함께 가기를 허락하지 않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19).”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신 동기는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신음하고 고통 하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서 인생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사망 권세를 파하시고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주님께서 그에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셔서 그를 불쌍히 여기셨는지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속에 이루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구원받은 성도가 해야 할 일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b).”

더러운 귀신이 들려 발광하는 한 젊은이가 예수님을 만나 자아와 사명이 회복되어 주님을 증거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자신을 고백하고, 자아가 회복되고, 사명이 회복되어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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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그마 프레스,2015)

                          마가복음에서 만난 예수님
                          (킹덤북스,2014)

                            사도행전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3)

                              로마서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2)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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