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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제 25 강(7:1-23)
겉보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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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과 행동이란 무엇인가? 이는 생각한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생각해본 질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마음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부단히 연구하였습니다. 이것이 심리학입니다. 심리학의 용어는 영어로 psychology입니다. 이 용어는 헬라어에 혼을 말하는 푸시케(psyche)와 학문이란 logy의 합성어로 영혼을 뜻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영혼이란 인간이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이지만 인간의 신체에 깃들게 되면 마음과 아울러 모든 활동을 지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 마음이란 영어로 둘이 있는데 하나는 mind이고 다른 하나는 heart입니다. mind는 보이는 실체이고, heart 보이지 않는 실체를 뜻합니다. 그리고 헬라어로 마음이란 카르디아, 가슴, 심장을 뜻합니다. 카르디아는 인간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중심부를 가리킵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속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느낌, 감정, 욕망 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은 마음으로 기쁨을 느낍니다. 인간은 마음으로 고통과 슬픔을 느낍니다. 인간은 마음으로 사랑을 느낍니다. 인간은 마음으로 욕망과 탐욕, 그리고 욕심도 갖습니다. 또한 ‘마음’은 이해 자리이고, 생각과 반성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은 의지의 자리로 결단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더욱이 인간의 ‘마음’은 경건한 삶의 근원지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는 중심이 됩니다. 인간은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순종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보시고 우리의 됨됨이를 평가하십니다. 누가복음 16장 15절을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삶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
마음이 바르고 깨끗하게 되면 행동이 바르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마음을 바르고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행동은 바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할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마음을 정결케 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유전보다 계명이 우선이다(1-13).
본문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아 고소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당국으로부터 파송된 조사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손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그들은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해하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유대인들이 식사 전에 손을 씻는 문제는 단순히 신종풀루를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한 위생상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상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장로들의 유전이 있었습니다.
율법에는 문자로 기록된 성문법과 모세 이후에 장로들을 통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구전법이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은 나이 많고 학식과 신앙심이 있는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대마다 율법을 기초로 실생활에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바벨론 포로 이후부터 성문화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탈무드입니다.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율법 이상으로 중요시하여 성문법이 물이라면 구전법은 포도주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알게 모르게 그들의 의식 세계를 넘어서 무의식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옷을 걷어 올려 손목까지 씻지 않으면 먹지 않았습니다. 또한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반드시 샤워를 하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손뿐만 아니라 잔과 주발과 놋그릇까지도 트리오로 깨끗이 씻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생활화된 종교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를 잘 지키면 믿음이 좋은 줄로 생각했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이렇게 했던 것은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하는 선한 의도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점점 형식화되어 사람을 얽어매는 올가미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제자들의 모습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부정한 자로 판단하고 정죄하여 예수님을 고소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말씀을 기초로 그들의 외식을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6,7절을 보겠습니다.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예수님은 그들의 문제가 외식하는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외식’이란 연극 용어로, 배우가 본래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가면을 쓰거나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여 작중 인물역할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외식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장로들의 유전대로 부지런히 손을 씻고 목욕하고 그릇을 깨끗하게 씻기 때문에 믿음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마태복음 23장 25, 27,28절에서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그들은 근본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그들은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6).
그들은 입술로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입술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입술만 천국에 갈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믿음이 좋은 척 신앙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철저하게 불신자답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는 훌륭한 신자였으나 회당을 나서는 순간 불신자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아니 불신자보다도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중적이 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칭찬을 더 구했습니다(요5:44). 그들은 사람의 인정과 칭찬에 얽매여 양심을 속이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개하지 아니하면 자신도 모르게 이중생활을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찬양하고 가슴으로 양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심장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슴신앙은 따뜻합니다. 심장신앙은 뜨겁습니다. 주님은 가슴신앙, 심장신앙을 원하십니다. 마음도 없으면서 열심히 하는 입술 신앙은 하나님께서 원치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고 뜨거운 심장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할 때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심장으로, heart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의 심중에 기쁨과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중요합니다.
지금 몸은 예배당에 와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나의 마음이 콩밭에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마음이 세상에 있지는 않습니까? 가슴으로, 심장으로 주님을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는 그들은 하나님 말씀보다 형식을 중히 여겼습니다(7).
종교는 의식도 중요하고 그에 비례하여 내용도 중요합니다. 의식이 없는 내용은 경박합니다. 반면에 내용이 없고 의식만 있으면 위선이 되고 형식적이 됩니다. 문제는 그들이 내용보다 의식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보다 사람들이 만든 교회의 전통과 의식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종교개혁이 왜 일어났습니까? 가톨릭이 성경보다 전통과 의식을 더 중히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복음 진리는 없고 의식만 남았습니다. 이로 인해 가톨릭은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이때 마르틴 루터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의식을 버리고 순수하게 본질로 돌아가자. 순수 복음 진리로 돌아가자. 즉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a Deo Gloria)’으로 돌아가자고 일어선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유전을 지키고자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출21:17).”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성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누구도 이 말씀을 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유익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습니다. 당시에 고르반이라는 유전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서약 형식으로서 부모님에게 드릴 생활비를 하나님께 헌물 하는 것입니다. 본래 이것은 하나님을 그 어떤 것보다 높이고 절대적으로 섬기는데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악용하여 부모님을 부양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며, 우리가 경외심을 가지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상에서 볼 때에 우리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입술신앙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의 규범이 되고, 말씀이 우리의 의식세계와 무의식 세계를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생활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14-23).
예수님은 무리들이 가식에 찬 종교 지도자들의 악영향을 받지 않도록 다시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5,16).” 이 말씀을 하신 후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세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밖에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음식이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 더러운 것이 들어가면 백혈구가 이물질과 싸웁니다. 그래서 이물질을 정화시킵니다. 그래도 안 되면 설사를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몸에 좋지 않은 음식물이 혹 들어갔다 할지라도 사람을 더럽게 하지는 못합니다. 모든 식물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것으로써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딤전4:3,4).
20절을 읽겠습니다.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21-23절에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이 무엇인가를 열거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홀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여기에 열거된 12가지 악들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입니다. 그래서 개리 스몰리는 저서 ‘관계 DNA’에서 ‘인생은 관계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부수적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만큼 인간관계는 중요합니다.
십계명 중에 첫째 계명에서 넷째 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다섯째 계명은 여섯째 계명부터 열째 계명까지의 원론이고 여섯째 계명부터 열째 계명은 한마디로 인간관계성을 다룬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12가지 악들은 여섯 번째부터 열째 계명을 어긴 것들입니다. 살인, 홀기는 눈, 훼방, 악독, 교만, 광패는 6계명에 속한 것입니다. 홀기는 눈은 사악한 눈으로 시기심을 말하고, 훼방은 남을 헐뜯고 남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악독은 악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이며, 교만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여서 타인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광패는 도덕적, 영적 무감각을 의미하는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음란, 간음, 음탕은 7계명에 속합니다. 음란은 여러 종류의 부정한 성적 행위를 말하고, 간음은 결혼한 사람의 부정한 성적 관계를 의미하며, 음탕은 무제한적이고 공공연한 비도덕적인 행위를 뜻합니다. 도적은 8계명이요, 속임은 9계명에 속하며, 탐욕은 10계명에 속합니다. 이런 악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로 손을 아무리 씻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첫째는 사람을 더럽게 하는 근원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내면이 거룩하고 아름답고 순결하고 고결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얀 백지와 같이 깨끗하고 순결하였습니다. 인간은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무한한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자 마음이 부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교만, 의심, 불신, 정욕, 탐욕 등 온갖 병균이 서식하여 더럽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져서 선을 사모하고 의를 행하기보다 악을 찾고 불의를 행하기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6장 5절은 인간 본성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인간의 마음의 생각하는 모든 경향이 항상 악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고의 선이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 없이 살고자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였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음란과 강포와 부패가 온 땅에 충만하여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홍수로 멸하시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창6:3,11-13).
다윗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가 얼마나 부패 한가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편 14편 10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인간의 본성은 짐승보다 더 탐욕스럽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아십니까?
학은 위의 80%를 채우고, 돼지는 100% 채우고, 사람은 위의 120%를 채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다는 메울 수 있지만 사람의 욕망의 바다는 누구도 메울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욕망의 바다로 빠져 들어가게 되면 그 누구도 미혹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렘17:9).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악합니다.
둘째는 사람의 마음을 정결케 하는 것은 보배로운 피 뿐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신의 소욕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반면에 의롭고 순결한 인생을 살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 또한 있습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과 육신대로 살고자 하는 소욕간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룩한 소원이 죄의 소욕에 KO패를 당한다는 것입니다(롬7:18,22,23). 사람이 죄의 소욕에 KO패를 당하게 되면 양심의 고통을 받고 죄를 씻음 받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선사업과 같은 선한 일을 하여 죄를 상쇄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고행으로 죄의 대가를 치르고자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에 몰두하여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자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멀리 이민을 떠나 잊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울어도 안 됩니다. 머리를 쥐어뜯어도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죄가 너무 지독하여서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9:22).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물건을 정결케 할 때나, 또 부정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반드시 짐승의 피를 뿌렸습니다. 짐승의 피는 그 효과가 일시적이고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하나님의 제단에 자신의 피를 뿌림으로 온전하고도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히9:12).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3,14)?”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만이 죄로 더러워진 마음을 흰 눈같이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우신 피만이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우리를 구속할 수 있습니다(벧전1:18,19).
셋째는 마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세상 정욕과 욕심과 유혹으로부터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는 4장 23절에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마음은 빈 항아리와 같아서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합니다. 마음을 탐욕과 정욕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의와 거룩함과 진실함과 하늘나라의 희망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시119:9).
그리고 영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각은 사상을 가져오고 사상은 문화를 만듭니다. 이처럼 생각은 아주 중요합니다.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생각은 자유라고 해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롬8:6).” 육신의 생각은 인생을 파멸로 이끕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입니다. 그러기 위해 기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우리를 영의 생각을 하도록 하는 귀한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 정결함을 받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버리고 마음으로 심장으로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마음으로 심장으로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지키십시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열성을 뺏는 것보다 귀합니다(잠16:32절).
겉보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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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과 행동이란 무엇인가? 이는 생각한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생각해본 질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마음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부단히 연구하였습니다. 이것이 심리학입니다. 심리학의 용어는 영어로 psychology입니다. 이 용어는 헬라어에 혼을 말하는 푸시케(psyche)와 학문이란 logy의 합성어로 영혼을 뜻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영혼이란 인간이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이지만 인간의 신체에 깃들게 되면 마음과 아울러 모든 활동을 지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 마음이란 영어로 둘이 있는데 하나는 mind이고 다른 하나는 heart입니다. mind는 보이는 실체이고, heart 보이지 않는 실체를 뜻합니다. 그리고 헬라어로 마음이란 카르디아, 가슴, 심장을 뜻합니다. 카르디아는 인간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중심부를 가리킵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속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느낌, 감정, 욕망 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은 마음으로 기쁨을 느낍니다. 인간은 마음으로 고통과 슬픔을 느낍니다. 인간은 마음으로 사랑을 느낍니다. 인간은 마음으로 욕망과 탐욕, 그리고 욕심도 갖습니다. 또한 ‘마음’은 이해 자리이고, 생각과 반성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은 의지의 자리로 결단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더욱이 인간의 ‘마음’은 경건한 삶의 근원지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는 중심이 됩니다. 인간은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순종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보시고 우리의 됨됨이를 평가하십니다. 누가복음 16장 15절을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삶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
마음이 바르고 깨끗하게 되면 행동이 바르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마음을 바르고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행동은 바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할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마음을 정결케 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유전보다 계명이 우선이다(1-13).
본문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아 고소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당국으로부터 파송된 조사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손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그들은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해하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유대인들이 식사 전에 손을 씻는 문제는 단순히 신종풀루를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한 위생상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상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장로들의 유전이 있었습니다.
율법에는 문자로 기록된 성문법과 모세 이후에 장로들을 통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구전법이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은 나이 많고 학식과 신앙심이 있는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대마다 율법을 기초로 실생활에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바벨론 포로 이후부터 성문화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탈무드입니다.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율법 이상으로 중요시하여 성문법이 물이라면 구전법은 포도주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알게 모르게 그들의 의식 세계를 넘어서 무의식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옷을 걷어 올려 손목까지 씻지 않으면 먹지 않았습니다. 또한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반드시 샤워를 하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손뿐만 아니라 잔과 주발과 놋그릇까지도 트리오로 깨끗이 씻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생활화된 종교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를 잘 지키면 믿음이 좋은 줄로 생각했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이렇게 했던 것은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하는 선한 의도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점점 형식화되어 사람을 얽어매는 올가미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제자들의 모습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부정한 자로 판단하고 정죄하여 예수님을 고소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말씀을 기초로 그들의 외식을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6,7절을 보겠습니다.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예수님은 그들의 문제가 외식하는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외식’이란 연극 용어로, 배우가 본래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가면을 쓰거나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여 작중 인물역할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외식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장로들의 유전대로 부지런히 손을 씻고 목욕하고 그릇을 깨끗하게 씻기 때문에 믿음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마태복음 23장 25, 27,28절에서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그들은 근본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그들은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6).
그들은 입술로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입술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입술만 천국에 갈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믿음이 좋은 척 신앙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철저하게 불신자답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는 훌륭한 신자였으나 회당을 나서는 순간 불신자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아니 불신자보다도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중적이 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칭찬을 더 구했습니다(요5:44). 그들은 사람의 인정과 칭찬에 얽매여 양심을 속이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개하지 아니하면 자신도 모르게 이중생활을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찬양하고 가슴으로 양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심장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슴신앙은 따뜻합니다. 심장신앙은 뜨겁습니다. 주님은 가슴신앙, 심장신앙을 원하십니다. 마음도 없으면서 열심히 하는 입술 신앙은 하나님께서 원치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고 뜨거운 심장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할 때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심장으로, heart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의 심중에 기쁨과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중요합니다.
지금 몸은 예배당에 와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나의 마음이 콩밭에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마음이 세상에 있지는 않습니까? 가슴으로, 심장으로 주님을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는 그들은 하나님 말씀보다 형식을 중히 여겼습니다(7).
종교는 의식도 중요하고 그에 비례하여 내용도 중요합니다. 의식이 없는 내용은 경박합니다. 반면에 내용이 없고 의식만 있으면 위선이 되고 형식적이 됩니다. 문제는 그들이 내용보다 의식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보다 사람들이 만든 교회의 전통과 의식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종교개혁이 왜 일어났습니까? 가톨릭이 성경보다 전통과 의식을 더 중히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복음 진리는 없고 의식만 남았습니다. 이로 인해 가톨릭은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이때 마르틴 루터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의식을 버리고 순수하게 본질로 돌아가자. 순수 복음 진리로 돌아가자. 즉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a Deo Gloria)’으로 돌아가자고 일어선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유전을 지키고자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출21:17).”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성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누구도 이 말씀을 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유익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습니다. 당시에 고르반이라는 유전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서약 형식으로서 부모님에게 드릴 생활비를 하나님께 헌물 하는 것입니다. 본래 이것은 하나님을 그 어떤 것보다 높이고 절대적으로 섬기는데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악용하여 부모님을 부양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며, 우리가 경외심을 가지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상에서 볼 때에 우리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입술신앙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의 규범이 되고, 말씀이 우리의 의식세계와 무의식 세계를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생활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14-23).
예수님은 무리들이 가식에 찬 종교 지도자들의 악영향을 받지 않도록 다시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5,16).” 이 말씀을 하신 후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세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밖에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음식이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 더러운 것이 들어가면 백혈구가 이물질과 싸웁니다. 그래서 이물질을 정화시킵니다. 그래도 안 되면 설사를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몸에 좋지 않은 음식물이 혹 들어갔다 할지라도 사람을 더럽게 하지는 못합니다. 모든 식물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것으로써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딤전4:3,4).
20절을 읽겠습니다.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21-23절에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이 무엇인가를 열거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홀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여기에 열거된 12가지 악들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입니다. 그래서 개리 스몰리는 저서 ‘관계 DNA’에서 ‘인생은 관계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부수적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만큼 인간관계는 중요합니다.
십계명 중에 첫째 계명에서 넷째 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다섯째 계명은 여섯째 계명부터 열째 계명까지의 원론이고 여섯째 계명부터 열째 계명은 한마디로 인간관계성을 다룬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12가지 악들은 여섯 번째부터 열째 계명을 어긴 것들입니다. 살인, 홀기는 눈, 훼방, 악독, 교만, 광패는 6계명에 속한 것입니다. 홀기는 눈은 사악한 눈으로 시기심을 말하고, 훼방은 남을 헐뜯고 남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악독은 악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이며, 교만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여서 타인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광패는 도덕적, 영적 무감각을 의미하는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음란, 간음, 음탕은 7계명에 속합니다. 음란은 여러 종류의 부정한 성적 행위를 말하고, 간음은 결혼한 사람의 부정한 성적 관계를 의미하며, 음탕은 무제한적이고 공공연한 비도덕적인 행위를 뜻합니다. 도적은 8계명이요, 속임은 9계명에 속하며, 탐욕은 10계명에 속합니다. 이런 악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로 손을 아무리 씻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첫째는 사람을 더럽게 하는 근원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내면이 거룩하고 아름답고 순결하고 고결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얀 백지와 같이 깨끗하고 순결하였습니다. 인간은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무한한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자 마음이 부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교만, 의심, 불신, 정욕, 탐욕 등 온갖 병균이 서식하여 더럽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져서 선을 사모하고 의를 행하기보다 악을 찾고 불의를 행하기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6장 5절은 인간 본성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인간의 마음의 생각하는 모든 경향이 항상 악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고의 선이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 없이 살고자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였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음란과 강포와 부패가 온 땅에 충만하여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홍수로 멸하시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창6:3,11-13).
다윗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가 얼마나 부패 한가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편 14편 10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인간의 본성은 짐승보다 더 탐욕스럽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아십니까?
학은 위의 80%를 채우고, 돼지는 100% 채우고, 사람은 위의 120%를 채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다는 메울 수 있지만 사람의 욕망의 바다는 누구도 메울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욕망의 바다로 빠져 들어가게 되면 그 누구도 미혹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렘17:9).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악합니다.
둘째는 사람의 마음을 정결케 하는 것은 보배로운 피 뿐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신의 소욕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반면에 의롭고 순결한 인생을 살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 또한 있습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과 육신대로 살고자 하는 소욕간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룩한 소원이 죄의 소욕에 KO패를 당한다는 것입니다(롬7:18,22,23). 사람이 죄의 소욕에 KO패를 당하게 되면 양심의 고통을 받고 죄를 씻음 받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선사업과 같은 선한 일을 하여 죄를 상쇄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고행으로 죄의 대가를 치르고자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에 몰두하여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자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멀리 이민을 떠나 잊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울어도 안 됩니다. 머리를 쥐어뜯어도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죄가 너무 지독하여서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9:22).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물건을 정결케 할 때나, 또 부정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반드시 짐승의 피를 뿌렸습니다. 짐승의 피는 그 효과가 일시적이고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하나님의 제단에 자신의 피를 뿌림으로 온전하고도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히9:12).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3,14)?”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만이 죄로 더러워진 마음을 흰 눈같이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우신 피만이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우리를 구속할 수 있습니다(벧전1:18,19).
셋째는 마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세상 정욕과 욕심과 유혹으로부터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는 4장 23절에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마음은 빈 항아리와 같아서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합니다. 마음을 탐욕과 정욕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의와 거룩함과 진실함과 하늘나라의 희망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시119:9).
그리고 영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각은 사상을 가져오고 사상은 문화를 만듭니다. 이처럼 생각은 아주 중요합니다.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생각은 자유라고 해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롬8:6).” 육신의 생각은 인생을 파멸로 이끕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입니다. 그러기 위해 기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우리를 영의 생각을 하도록 하는 귀한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 정결함을 받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버리고 마음으로 심장으로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마음으로 심장으로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지키십시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열성을 뺏는 것보다 귀합니다(잠16:3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