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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예배(살전, 5:12-28, 요절 5:18)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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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09년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오늘도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천국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일 년 동안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보호하여 주시고 자녀들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된 것과, 같은 신앙과 같은 부르심과 교회의 지체요 가족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기도해주고, 도와주고, 사랑해준 것에 감사합니다. 가족, 친지, 친구, 스승, 목자, 양, 우리의 삶의 현장의 모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것들뿐입니다. 찰스 웨슬리의 고백처럼 만 입이 내게 있다 해도 그 입 다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혜를 다 찬송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외쳐 봅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들은 서로 손을 잡고 “여보 감사합니다.” 자녀들은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얘들아 잘 자라줘서 감사하다”고 이야기 해 봅시다.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구약의 초막절에서 기인되지만, 지금의 추수감사절은 청교도들로부터 시작합니다. 102명의 청교도들은 1620년 오직 신앙의 자유만을 찾아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싣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출발했습니다. 먹을 물과 양식이 부족한 가운데 행해진 65일간의 항해는 험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한 때는 겨울이었습니다. 그들은 심한 식량난과 추위, 기후 차와 영양실조들의 원인으로 인해 첫 겨울에 102명 가운데 44명이나 죽었습니다. 그 나머지도 질병에 시달렸으므로 항상 일손 부족으로 인한 격무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때 심한 고통 속에 있던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은 마음 좋은 인디언들이었습니다. 인디언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청교도들에게 옥수수 등의 곡물을 가져다주었고, 농사짓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은 이들의 도움으로 다음해인 1621년 풍성한 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청교도들은 옥수수 몇 자루를 놓고 수확하도록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친절한 인디언들을 초대해 추수한 곡식과 칠면조 고기 등을 함께 먹으며 기쁜 첫 추수 감사절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첫 추수 감사절의 벅찬 환희는 단순히 한 해의 추수의 감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드린 감사는 신앙의 자유와 개척자정신의 고귀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의 이런 행동은 모든 인류의 가슴속에 진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인들은 추수감사절을 크리스마스 못지않게 여깁니다. 고향을 떠나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고향을 찾아갑니다. 미국은 시작이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중에 창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선조들이 넉넉하지 못한 데서도 자족함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족한 마음에 복이 깃들고 감사한 마음에 길이 트입니다. 어떤 형편 중에도 자족하면 감사가 생기고 기쁨이 생깁니다.
참된 신앙과 미신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미신은 기원, 기도는 있지만 감사가 없습니다. 반면에 참된 신앙은 감사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고 심판하신다면 그것은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어지지 않는 불신앙으로,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 막힌 귀로, 감사하지 않는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 중에 살면서도 마냥 울적해하고,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하여 추호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저주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입이 돼지주둥이처럼 나오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반드시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오고,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오면 기쁨이 사라지고, 기쁨이 사라지면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우울증은 자살의 지름길입니다.
현대는 과학과 기술, 물질적인 면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반면에 정신 건강 면에서는 오히려 점점 후퇴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10대 아이들의 3분의 1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럽 대학생의 25%, 미국 대학생의 60%가 ‘내면의 공허’ 또는 ‘실존적 공허’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전 세계로 점점 더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금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대학생들은 장래 희망이 없기 때문에 게임과 알코올 중독혼자가 늘고 있습니다. 다니엘 골만은 20세기의 특징이었던 ‘불안의 시대’는 이제 ‘우울의 시대’로 발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울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기쁨이 있기 위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무엇으로 인해 감사합니까? 우리가 볼 수 있는 건강, 가정의 행복, 사업의 성공, 꿈의 성취로 인해 감사합니까? 예, 물론 이런 것으로 인해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으로만 감사한다면 여러분의 감사는 1차원적인 감사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들은 가변적이고 상대적이어서 언제든 없어지거나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그 감사가 불평과 한숨으로 변할지 모릅니다. 보이는 것이 조건이 된 감사는 임시적이고 일시적입니다.
더 높은 차원의 감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삶을 풍요롭게 하는 생명과 사명, 판단할 수 있는 이성과 생각할 수 있는 상상력, 아름다움의 정서, 시련을 이길 용기와 소망, 부부의 사랑과 자녀의 귀함, 단풍진 아름다운 가을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도 다 소진할 날이 옵니다. 이를 2차원의 감사라 부릅니다.
이런 감사 말고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제 3차원의 감사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말로 말하면 감사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받은 은혜의 감사, 즉 과거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이켜 보면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저를 볼 때 하나님께서 순간마다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셨는지 형언할 수 없습니다. 말썽 피우는 자녀가 있다고 합시다. 돌이켜 보면 그 자녀로 인해 감사했던 날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나에게 베푸신 은총으로 인해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현재 누리고 있는 감사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입니다. 숨 쉴 공기를 주신 것이 감사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을 주신 것이 감사입니다. 대학에서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감사입니다.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믿음의 여인과 결혼하고, 믿음의 형제와 결혼을 한 것이 감사입니다. 사랑스러운 자녀들이 있다는 것이 큰 감사입니다. 교회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만난 것이 감사입니다. 생명 구원 역사에 쓰임 받고 있는 것이 감사입니다. 때마다 영생의 말씀으로 우리를 먹이시는 것이 감사입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기도하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것이 감사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미천한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것이 감사입니다.
또한 앞으로 받을 은혜로 인한 감사가 있습니다. 결혼하지 하지 않은 분들은 기대가 되지 않아요? 어떤 사람이 나의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될지 설렘이 있지 않아요? 결혼한 분들은 자기와 같은 자녀를 낳을 희망이 있지 않아요? 저는 자녀들이 결혼하여 손자손녀를 볼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 범사가 감사의 제목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하지요? 범사에 감사라고 하지 않아요. “범사에 감사하라.” In everything give thanks(K.J.)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NIV).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감사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항상 기뻐하라(16).
빌립보서 4장 4절을 보면 성경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Rejoice in the Lord always.)”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의 성숙도는 얼마나 기뻐하느냐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기뻐하십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계획대로 잘 되고, 결과가 좋으면 기뻐합니다. 학생들은 성적이 오르고 장학금을 타면 기뻐합니다. 부모는 아이들이 지혜롭고 총명하게 잘 자라면 기뻐합니다. 목자는 양들의 믿음이 자라면 기쁩니다. 이런 기쁨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이러한 기쁨은 삶의 활력이 되고 보람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상대적이고 잠시 뿐입니다. 환경과 처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 때 우리는 신경이 날카로워집니다. 목소리의 톤이 높아지고, 사소한 일에도 부담을 주는 표정을 짓습니다. 그래서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쁨은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주안에서의 기쁨이 영원한 기쁨이요, 완전한 기쁨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기쁨이 없는 메마른 신앙에서 기쁨이 충만한 신앙을 할 수 있습니까? 답은 ‘주 안(in the Lord)’입니다. 기쁨의 원인은 주님입니다. 하박국 3장 17,18절을 보면 그의 기쁨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 요리 문답을 보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하여주고 있습니다. What is the chief end of man? 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인생의 제 1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기쁨은 육신의 건강에도 좋고 미용에도 좋습니다. 웃을 때에는 17개의 근육이 움직이고 찡그릴 때에는 43개의 근육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러니 인상을 늘 쓰게 되면 주름살이 더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기쁨은 생명의 광채가 나게 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한 기쁨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고난과 슬픔 중에도 항상 주안에서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쉬지 말고 기도하라(17).
17절을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8절을 보면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4장 2절을 보면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무시로, 쉬지 않고,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까? 밥도 먹지 말고, 잠도 자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기도만 하라는 것입니까? 우리는 기도 하면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장소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란 장소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요, 영적인 호흡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매일 매 순간마다 우리 삶속에서 주님과의 대화가 기도입니다. 따라서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주님과의 대화는 시작됩니다. ‘주님, 오늘도 새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뜻대로 인도해 주세요.’ 버스와 전철 안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공부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음식 앞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들을 가지고 주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라는 책을 쓴 조이 도우슨 여사는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에 항상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옷을 사는 것으로 시작하여 아주 작은 일에까지도 주님과 대화를 하고 결정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것을 해야 할지, 저것을 해야 할지, 이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님께 물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도 꼭 기도해야 하는가? 어른의 신앙이라면 그런 것은 능히 혼자서도 결정할 수 있지 않는가? 이런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은 너무 유치해. 큰 것을 놓고 주님께 기도해야지?” 예, 우리가 사소한 것을 가지고 기도하면 유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편에서 보면 유치한 어린 아이에 불과합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님께 말씀도 안 드리고 제 멋대로 결정해 버린다면 부모님이 좋겠어요? 그러나 자녀들이 부모님께 작은 것까지도 한번 물면 부모님 마음이 좋지 않습니까? 기도는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는 친밀한 교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크고 위대한 일 속에서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작고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실 때 거창한 것들을 예로 들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공중의 새를 들어 말씀하셨고, 들의 백합화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에 대해 말씀하셨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옷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작은 부분까지도 인도하시고 채워주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와 교제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한혜진 탈렌트가 연기만 잘 하는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기도의 여인입니다. 그녀는 소득의 실일조는 기본이고, 시간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녀는 하루 2시간 40분을 성경을 읽고, QT하고, 기도하고, 중보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합니다. 작품까지도 기도로 결정합니다. 그녀는 모든 삶을 주님 안에서 기도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시련의 때에 오히려 감사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따라서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신앙이 깊은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가능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더 이상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지금, 이 순간, 바로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 살아계신 주님이 되십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주님이 되십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친히 보호해 주시는 주님이 되십니다.
따라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자 주신 명령이 아닙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참된 평안과 안식을 주시기 위한 명령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여 주님과의 친밀함이 더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범사에 감사하라(18).
18절을 보겠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보통 유리컵에 물이 반 정도 차있으면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에이, 반밖에 차있지 않아”, 긍정적인 사람은 “반이나 차 있네”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반을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앞으로 반을 채워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하되 범사(in everything)입니다. 축복의 때나, 궁핍의 때나, 환난의 때에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풍족한 물질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감사가 없고, 그것이 오히려 욕망과 불안, 그리고 공포를 가져다준다면 이는 참된 행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구제의 대상이 될 정도로 빈곤한 삶을 살지라도 그 마음에 감사가 있다면 이는 복된 사람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주님이 주신 복을 복으로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물량의 차원이 아니라 어떤 차원에서 생각하느냐에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경험하면서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불평과 원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결정적인 의지(determined will)와 소원적인 의지(desired will)가 있습니다. 예정, 섭리, 능력, 지혜, 권능 등은 결정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입니다. 반면에 소원적인 의지는 인격적이고 개인적이고 자발적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자녀를 낳으면 소원을 갖고 이름을 짓습니다. 제가 다윗의 이름을 지을 때 다윗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소원하여 이름을 지었습니다. 조은은 요한과 같이 감성이 풍부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도록 소원하여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소원적인 의지는 환경적이고 조건적이고, 가변적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적인 의지는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환경을 초월하고,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입니다.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하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원적인 의지이기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in all things)”,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좋은 일, 나쁜 일, 고난, 불행, 질병, 본의 아니게 당한 일, 헤어지고 만나는 일들, 실패와 성공, 살고 죽는 일 등, 살면서 당하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합력(all together)”은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하나님이 손길입니다. “선”은 완전한 구원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한 가지 확신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삶에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실패와 좌절과 질병 환난 등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중에도 일일이 개입하셔서 완전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때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밤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시련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을 만나기도 합니다. 쓰라린 실패의 경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결코 실패함이 없습니다. 인간은 실패할지라도 하나님께는 절대로 실패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나를 바라보면 희망과 기쁨과 찬송과 감사가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건짐을 받은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범사에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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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09년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오늘도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천국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일 년 동안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보호하여 주시고 자녀들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된 것과, 같은 신앙과 같은 부르심과 교회의 지체요 가족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기도해주고, 도와주고, 사랑해준 것에 감사합니다. 가족, 친지, 친구, 스승, 목자, 양, 우리의 삶의 현장의 모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것들뿐입니다. 찰스 웨슬리의 고백처럼 만 입이 내게 있다 해도 그 입 다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혜를 다 찬송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외쳐 봅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들은 서로 손을 잡고 “여보 감사합니다.” 자녀들은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얘들아 잘 자라줘서 감사하다”고 이야기 해 봅시다.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구약의 초막절에서 기인되지만, 지금의 추수감사절은 청교도들로부터 시작합니다. 102명의 청교도들은 1620년 오직 신앙의 자유만을 찾아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싣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출발했습니다. 먹을 물과 양식이 부족한 가운데 행해진 65일간의 항해는 험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한 때는 겨울이었습니다. 그들은 심한 식량난과 추위, 기후 차와 영양실조들의 원인으로 인해 첫 겨울에 102명 가운데 44명이나 죽었습니다. 그 나머지도 질병에 시달렸으므로 항상 일손 부족으로 인한 격무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때 심한 고통 속에 있던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은 마음 좋은 인디언들이었습니다. 인디언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청교도들에게 옥수수 등의 곡물을 가져다주었고, 농사짓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은 이들의 도움으로 다음해인 1621년 풍성한 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청교도들은 옥수수 몇 자루를 놓고 수확하도록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친절한 인디언들을 초대해 추수한 곡식과 칠면조 고기 등을 함께 먹으며 기쁜 첫 추수 감사절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첫 추수 감사절의 벅찬 환희는 단순히 한 해의 추수의 감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드린 감사는 신앙의 자유와 개척자정신의 고귀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의 이런 행동은 모든 인류의 가슴속에 진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인들은 추수감사절을 크리스마스 못지않게 여깁니다. 고향을 떠나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고향을 찾아갑니다. 미국은 시작이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중에 창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선조들이 넉넉하지 못한 데서도 자족함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족한 마음에 복이 깃들고 감사한 마음에 길이 트입니다. 어떤 형편 중에도 자족하면 감사가 생기고 기쁨이 생깁니다.
참된 신앙과 미신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미신은 기원, 기도는 있지만 감사가 없습니다. 반면에 참된 신앙은 감사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고 심판하신다면 그것은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어지지 않는 불신앙으로,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 막힌 귀로, 감사하지 않는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 중에 살면서도 마냥 울적해하고,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하여 추호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저주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입이 돼지주둥이처럼 나오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반드시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오고,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오면 기쁨이 사라지고, 기쁨이 사라지면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우울증은 자살의 지름길입니다.
현대는 과학과 기술, 물질적인 면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반면에 정신 건강 면에서는 오히려 점점 후퇴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10대 아이들의 3분의 1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럽 대학생의 25%, 미국 대학생의 60%가 ‘내면의 공허’ 또는 ‘실존적 공허’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전 세계로 점점 더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금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대학생들은 장래 희망이 없기 때문에 게임과 알코올 중독혼자가 늘고 있습니다. 다니엘 골만은 20세기의 특징이었던 ‘불안의 시대’는 이제 ‘우울의 시대’로 발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울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기쁨이 있기 위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무엇으로 인해 감사합니까? 우리가 볼 수 있는 건강, 가정의 행복, 사업의 성공, 꿈의 성취로 인해 감사합니까? 예, 물론 이런 것으로 인해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으로만 감사한다면 여러분의 감사는 1차원적인 감사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들은 가변적이고 상대적이어서 언제든 없어지거나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그 감사가 불평과 한숨으로 변할지 모릅니다. 보이는 것이 조건이 된 감사는 임시적이고 일시적입니다.
더 높은 차원의 감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삶을 풍요롭게 하는 생명과 사명, 판단할 수 있는 이성과 생각할 수 있는 상상력, 아름다움의 정서, 시련을 이길 용기와 소망, 부부의 사랑과 자녀의 귀함, 단풍진 아름다운 가을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도 다 소진할 날이 옵니다. 이를 2차원의 감사라 부릅니다.
이런 감사 말고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제 3차원의 감사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말로 말하면 감사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받은 은혜의 감사, 즉 과거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이켜 보면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저를 볼 때 하나님께서 순간마다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셨는지 형언할 수 없습니다. 말썽 피우는 자녀가 있다고 합시다. 돌이켜 보면 그 자녀로 인해 감사했던 날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나에게 베푸신 은총으로 인해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현재 누리고 있는 감사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입니다. 숨 쉴 공기를 주신 것이 감사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을 주신 것이 감사입니다. 대학에서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감사입니다.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믿음의 여인과 결혼하고, 믿음의 형제와 결혼을 한 것이 감사입니다. 사랑스러운 자녀들이 있다는 것이 큰 감사입니다. 교회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만난 것이 감사입니다. 생명 구원 역사에 쓰임 받고 있는 것이 감사입니다. 때마다 영생의 말씀으로 우리를 먹이시는 것이 감사입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기도하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것이 감사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미천한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것이 감사입니다.
또한 앞으로 받을 은혜로 인한 감사가 있습니다. 결혼하지 하지 않은 분들은 기대가 되지 않아요? 어떤 사람이 나의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될지 설렘이 있지 않아요? 결혼한 분들은 자기와 같은 자녀를 낳을 희망이 있지 않아요? 저는 자녀들이 결혼하여 손자손녀를 볼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 범사가 감사의 제목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하지요? 범사에 감사라고 하지 않아요. “범사에 감사하라.” In everything give thanks(K.J.)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NIV).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감사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항상 기뻐하라(16).
빌립보서 4장 4절을 보면 성경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Rejoice in the Lord always.)”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의 성숙도는 얼마나 기뻐하느냐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기뻐하십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계획대로 잘 되고, 결과가 좋으면 기뻐합니다. 학생들은 성적이 오르고 장학금을 타면 기뻐합니다. 부모는 아이들이 지혜롭고 총명하게 잘 자라면 기뻐합니다. 목자는 양들의 믿음이 자라면 기쁩니다. 이런 기쁨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이러한 기쁨은 삶의 활력이 되고 보람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상대적이고 잠시 뿐입니다. 환경과 처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 때 우리는 신경이 날카로워집니다. 목소리의 톤이 높아지고, 사소한 일에도 부담을 주는 표정을 짓습니다. 그래서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쁨은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주안에서의 기쁨이 영원한 기쁨이요, 완전한 기쁨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기쁨이 없는 메마른 신앙에서 기쁨이 충만한 신앙을 할 수 있습니까? 답은 ‘주 안(in the Lord)’입니다. 기쁨의 원인은 주님입니다. 하박국 3장 17,18절을 보면 그의 기쁨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 요리 문답을 보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하여주고 있습니다. What is the chief end of man? 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인생의 제 1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기쁨은 육신의 건강에도 좋고 미용에도 좋습니다. 웃을 때에는 17개의 근육이 움직이고 찡그릴 때에는 43개의 근육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러니 인상을 늘 쓰게 되면 주름살이 더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기쁨은 생명의 광채가 나게 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한 기쁨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고난과 슬픔 중에도 항상 주안에서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쉬지 말고 기도하라(17).
17절을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8절을 보면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4장 2절을 보면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무시로, 쉬지 않고,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까? 밥도 먹지 말고, 잠도 자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기도만 하라는 것입니까? 우리는 기도 하면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장소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란 장소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요, 영적인 호흡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매일 매 순간마다 우리 삶속에서 주님과의 대화가 기도입니다. 따라서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주님과의 대화는 시작됩니다. ‘주님, 오늘도 새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뜻대로 인도해 주세요.’ 버스와 전철 안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공부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음식 앞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들을 가지고 주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라는 책을 쓴 조이 도우슨 여사는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에 항상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옷을 사는 것으로 시작하여 아주 작은 일에까지도 주님과 대화를 하고 결정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것을 해야 할지, 저것을 해야 할지, 이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님께 물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도 꼭 기도해야 하는가? 어른의 신앙이라면 그런 것은 능히 혼자서도 결정할 수 있지 않는가? 이런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은 너무 유치해. 큰 것을 놓고 주님께 기도해야지?” 예, 우리가 사소한 것을 가지고 기도하면 유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편에서 보면 유치한 어린 아이에 불과합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님께 말씀도 안 드리고 제 멋대로 결정해 버린다면 부모님이 좋겠어요? 그러나 자녀들이 부모님께 작은 것까지도 한번 물면 부모님 마음이 좋지 않습니까? 기도는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는 친밀한 교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크고 위대한 일 속에서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작고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실 때 거창한 것들을 예로 들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공중의 새를 들어 말씀하셨고, 들의 백합화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에 대해 말씀하셨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옷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작은 부분까지도 인도하시고 채워주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와 교제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한혜진 탈렌트가 연기만 잘 하는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기도의 여인입니다. 그녀는 소득의 실일조는 기본이고, 시간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녀는 하루 2시간 40분을 성경을 읽고, QT하고, 기도하고, 중보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합니다. 작품까지도 기도로 결정합니다. 그녀는 모든 삶을 주님 안에서 기도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시련의 때에 오히려 감사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따라서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신앙이 깊은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가능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더 이상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지금, 이 순간, 바로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 살아계신 주님이 되십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주님이 되십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친히 보호해 주시는 주님이 되십니다.
따라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자 주신 명령이 아닙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참된 평안과 안식을 주시기 위한 명령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여 주님과의 친밀함이 더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범사에 감사하라(18).
18절을 보겠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보통 유리컵에 물이 반 정도 차있으면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에이, 반밖에 차있지 않아”, 긍정적인 사람은 “반이나 차 있네”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반을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앞으로 반을 채워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하되 범사(in everything)입니다. 축복의 때나, 궁핍의 때나, 환난의 때에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풍족한 물질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감사가 없고, 그것이 오히려 욕망과 불안, 그리고 공포를 가져다준다면 이는 참된 행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구제의 대상이 될 정도로 빈곤한 삶을 살지라도 그 마음에 감사가 있다면 이는 복된 사람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주님이 주신 복을 복으로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물량의 차원이 아니라 어떤 차원에서 생각하느냐에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경험하면서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불평과 원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결정적인 의지(determined will)와 소원적인 의지(desired will)가 있습니다. 예정, 섭리, 능력, 지혜, 권능 등은 결정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입니다. 반면에 소원적인 의지는 인격적이고 개인적이고 자발적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자녀를 낳으면 소원을 갖고 이름을 짓습니다. 제가 다윗의 이름을 지을 때 다윗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소원하여 이름을 지었습니다. 조은은 요한과 같이 감성이 풍부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도록 소원하여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소원적인 의지는 환경적이고 조건적이고, 가변적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적인 의지는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환경을 초월하고,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입니다.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하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원적인 의지이기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in all things)”,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좋은 일, 나쁜 일, 고난, 불행, 질병, 본의 아니게 당한 일, 헤어지고 만나는 일들, 실패와 성공, 살고 죽는 일 등, 살면서 당하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합력(all together)”은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하나님이 손길입니다. “선”은 완전한 구원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한 가지 확신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삶에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실패와 좌절과 질병 환난 등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중에도 일일이 개입하셔서 완전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때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밤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시련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을 만나기도 합니다. 쓰라린 실패의 경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결코 실패함이 없습니다. 인간은 실패할지라도 하나님께는 절대로 실패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나를 바라보면 희망과 기쁨과 찬송과 감사가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건짐을 받은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범사에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