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릴 수 없는 구원

조회 수 2347 추천 수 0 2012.07.12 07:32:37
특강(말씀 8:1-5, 요절 8:1,2)

흔들릴 수 없는 구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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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핵심 원리가 무엇입니까? 이는 한 마디로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으면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여기에서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것은 법정에서 사용되는 단어로, 죄가 없다, 형벌에서 사면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죄가 없다고 무죄 선언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의롭다 함을 얻었다(being justified)의 시제는 현재분사입니다. 언제나, 항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율법의 매임에서 자유인이 됩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한번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해서 믿는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한 번 믿으면 흔들릴 수 없는 구원의 영원함, 구원의 확실함, 성령의 충만함을 마음 깊이 간직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구원 받은 사람은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1).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입니다. 바울 서신에 ‘그리스도 안’이란 단어가 무려 164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단지 그리스도를 믿는다. 구원을 받았다는 뜻을 넘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을 보면 예수님은 죄와 율법에 대해 단번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죄와 율법이 죽은 것이 아니라 죄와 율법에 대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율법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나도 그 자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죄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연합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들어 연합을 잘 설명하셨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떼래야 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연합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죄와 율법에 대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죄와 율법에 대해 죽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실 때에 나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무덤에 묻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나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나도 승천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니 나도 하늘 보좌 우편에 주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6)” 창세기 2장의 에덴은 마귀의 유혹을 받아 넘어질 수 있는 취약한 점이 있었지만 하늘 보좌에는 마귀가 틈탈 수 없는 존엄하고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는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장엄한 것이고, 복음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와 연합하여 죄에 대해 죽을 때에, 죄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에 누구를 막론하고 성령님이 내주하십니다(롬8:9). ‘죽었다’는 것은 통치 개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죄의 통치를 받지 않게 됩니다. 죄의 특징은 항상 산매개체를 통해 그 능력을 발휘합니다. 우리가 죄에 죽었기 때문에 죄는 죽은 우리를 더 이상 통치할 수 없습니다. 대신 내주하신 성령님이 우리를 통치하게 됩니다. 여기에 구원의 완전성, 십자가의 완전성이 있습니다.

구원의 완전성은 성경 곳곳에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합력하여 완전한 선, 완전한 구원을 이루신다고 했습니다(롬8:28).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시고,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하나님은 아무 계획 없이 나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계획과 준비를 하시고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완전무결합니다. 그런데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단어의 모든 시제가 foreknew, predestined, called, justified, glorified와 같이 과거형입니다. 아시다, 정하시다, 부르시다, 의롭다하시다는 이미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반면에 영화는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의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형, glorified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미래의 사건인 영화도 모두 완성된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불확실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무죄를 선언하다, 정죄를 해제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법정 용어입니다. 피고가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 판사와 검사, 그리고 피고를 변호하는 변호사가 입회합니다. 법정에서 율법인 검사가 피고를 정죄합니다. “피고는 몇 월 몇 시 몇 분 몇 초에 어디에서 죄를 지었지? 따라서 피고는 십계명 몇 조, 몇 항에 의거하여 사형을 구형합니다.” 그러면 피고가 검사의 심문에 답변을 합니다. “나는 이러하여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피고는 죄를 변명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과정을 다 거친 후 맨 마지막에 재판장인 하나님이 형을 선고합니다. 하나님이 무죄를 선언을 하면 바로 그 순간에 죄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하나 때문에 죄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죄가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이제 그 누구도 정죄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정죄를 받지 않았다가, 죄를 지으면 죄인으로 추락하여 정죄를 받았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확고부동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결코 구원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7장 24,25절에서 절망과 탄식 중에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죄함을 느껴서도 안 되고, 또 자신으로 하여금 정죄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연약하여 때로 넘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다가 육신이 연약하여 불의에 빠지고, 사단의 유혹에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허물진 모습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옛 생활을 청산하지 못한 채 반복하여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역경이 계속되고, 환난이 계속될 때 넘어질 수 있습니다. 술 담배를 끊지 못해 끙끙거릴 수 있습니다. 컴퓨터 게임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마귀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도록 속삭입니다. “네가 예수를 믿는데 왜 그리 아프냐? 네가 예수를 믿는데 왜 환난과 역경이 끊어질 날이 없느냐? 너 예수 믿는데 계속 그런 생활을 반복하느냐? 너 구원을 받은 것 맞아? 아니야, 너는 구원을 받지 못했어! 네가 무슨 신자야? 너 위선자야? 신자라면 행동이 올바라야지, 네가 그러고도 신자라고 할 수 있어!”

우리는 이런 사탄의 속삭임에 맞서서 외쳐야 합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고 완전한 구원을 받았으며, 그 순간부터 영원도록 그 누구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 그 어떤 세력도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다. 구원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세력도 나를 송사하거나 정죄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3-35).”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사랑의 줄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은혜의 세계에서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주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셨습니까? 내 의지나 노력이 아닌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4,5절을 보겠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살리셨다’는 것은 중생, 거듭남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의 국적과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한번 믿음으로 영원한 형벌에서 단번에, 영원히 구원 받았습니다(히9:12-14).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이 사실을 믿는 순간 이와 같은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요즘 구원이 나의 행위에 따라서 취소되기도 하고, 구원이 회복되기도 한다, 구원이 나의 행위에 따라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고 아주 해괴한 말을 하는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 현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나의 행위에 따라 취소되거나 회복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행위로 구원을 받았습니까?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행위로 구원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끊임없는 행함을 통한 구원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는 직통 계시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강조합니다.

여러분, 인간이 직통계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직접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완벽한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과 십자가는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성경과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으로 알려진 죠지 뮐러는 성경을 200번 읽었습니다. 그는 시편 68편 5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말씀에 은혜를 받고, 시편 81편 10절을 통해 입을 크게 열고 기도하여 66년 동안 15만 명의 고아들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배제하고 무릎을 꿇고 아무리 소리 지르고 외쳐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보다 오히려 악신에 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과 십자가를 배제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모두가 사이비, 무당, 이단들, 신들린 자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리고 책이라고 다 읽지 마세요. 집회라고 다 쫓아다니지 마세요. 지금 이단들이 뿌려놓은 책들이 곳곳에 즐비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단들이 뿌려놓은 짝퉁 신자, 진짜 그리스도인도 지옥으로 간다는 책들이 돌아다닙니다. 이단들이 몰래 뿌려놓고 갔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 천국에 가지 못하면 누가 갑니까? 가짜 신자, 짝퉁 신자가 천국에 갑니까? 이 용어 속에는 십자가의 완전성과 구원의 완전성을 부인하는 이단들의 교묘한 수법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가짜 구원과 진짜 구원을 누가 알 수 있어요? 그가 구원의 감별사가 됩니까? 구원에 관한 것만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영역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완전성을 부인하고, 행함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는 무리들, 직통계시, 입신, 십자가 없는, 성경 말씀이 없는 친밀한 교제 등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세요. 그들과 상종도 하지 마시고 전화도 하지마세요.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이런 이단에 빠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들은 저희가 좋아서 따라다니지만 자녀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이단으로 정죄된 집단에 다니는 자녀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단에 빠진 자녀들 잘 되는 것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복음, 은혜의 복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 이 구원은 영원하다. 구원은 행위로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십자가의 은혜와 성경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다. 직통계시는 무당들이나 하는 짓이다. 이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둘째, 구원 받은 사람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됩니다(2).

2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란 율법을 가리킵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입니다(고전15:56). 죄가 율법을 매개체로 하여 우리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갑니다. 결국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지만 사람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율법은 죄를 더하게 합니다. 율법은 불의를 행하는 자의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합니다. 율법은 죄인들을 무서운 저주로 내몹니다. 율법은 결국 죄와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이게 바로 율법입니다. 그러나 본래 율법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래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선하고 거룩합니다. 그런데 율법은 실제적으로 죄와 사망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율법이 사망을 가져다준다고 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에서 성령의 법은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헬라어로 프뉴마(πγεὓμμα)인데, 그 뜻이 바람이란 뜻입니다. 바람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은 분명 존재합니다. 바람은 우리가 만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은 반드시 흔적을 남깁니다. 바람이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처럼 성령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성령은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성령은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성령은 생명을 소성케 합니다. 성령은 생명을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성령은 저주와 원망 대신에 축복과 감사를 넘치게 합니다. 성령은 두려움에서 평강으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해방’은 자유와 구원과 같은 뜻입니다. 이 단어의 시제는 부정과거형입니다. 부정과거형은 이미 영원히 끝났음을 말해 줍니다. 사람됨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그가 어떤 자유를 누리느냐에 따라서, 무엇이 자유의 조건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경제적 자유는 누리는데, 도덕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고 할 때에, 이 사람은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누릴지 모르지만 그 삶이 도덕적이지 못합니다. 또 도덕적 자유는 누리는데 영적인 자유가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은 인간적으로 선할지 모르지만 죽을 때 두려워 떱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유는 소중합니다.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언론의 자유, 도덕적인 자유, 표현의 자유, 모두가 소중하고 귀합니다. 그러나 더욱 더 소중한 것은 영적인 해방입니다. 비록 경제적으로 자유가 있고, 언론의 자유가 있고, 도덕적 자유가 있다 하더라도 영적인 자유가 없으면 자유가 없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자유보다도 영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로운 삶,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죽음 권세에 시달려 단잠을 자지 못하고, 깜짝 깜짝 놀란다고 해보세요. 거기에 무슨 자유가 있고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까? 내가 죄를 짓지 아니해서? 내가 온전해서? 행함을 통해서? 선해서? 직통 계시를 통해서? 아닙니다. 법이 달라져서 자유해진 것입니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법이 달라지면 사람의 신분이 달라지고, 그 대우가 달라집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속하면 죄인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법에 속하면 은혜의 사람이 됩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속하면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법의 지배를 받으면 은혜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율법과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는 은혜의 사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임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 구원 받은 사람은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엡5: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나 구원 받았으니, 이제 내 멋대로 살아도 됩니까?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을 보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은 수동태 명령형입니다. 내가 스스로 성령을 충만히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사람이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요즘 광고에 부흥회에 오면 성령을 받을 수 있다. 불 받아라 선전하는데 이게 바로 미혹하는 것이고 모두가 거짓된 선전입니다. 누가 불을 줍니까? 사람이 불을 줄 수 있습니까? 그런 것에 속지 마세요. 성령께서 주체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충만은 지배를 뜻합니다. 성령께서는 구원 받은 우리를 지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지배하시도록 비워야 합니다. 그릇에 어떤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면 다른 것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불가입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동일한 공간, 동일한 시간에, 동시에 두 물체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지금 물 컵에 물이 반 정도 차 있습니다. 이 잔에 시원한 사이다를 가득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반 정도 차 있는 물을 버려야 합니다. 컵을 비우지 않으면 사이다를 채울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마음 가운데 세상의 잡념이나 여러 가지 불결한 생각들, 교만한 생각, 허영심들이 채워져 있으면 성령의 충만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로 채워져 있으면 우리 속에 진리의 영이신 예수님이 충만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미움과 시기심과 탐욕이 충만하면 사랑이신 하나님의 영이 충만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세상의 욕망으로 가득하면 하나님의 영이 충만해질 수 없습니다. 온갖 죄와 오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성령 집회 100번 1,000번 쫓아다니며 주여, 불을 주십시오. 성령의 불을 내려 주십시오. 목청껏 외쳐보세요. 후두암 걸리기 꼭 좋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려면 우리의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비워야 성령께서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비울 수 있습니까? 죄를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는 비움입니다. 회개 없이는 성령 충만할 수 없습니다. 회개할 때 성령님, 예수님의 영이, 하나님이 영이 충만해집니다. 회개가 충만하면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흘러넘치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그 충만함이 입으로 넘쳐흐르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게 되면 제일 먼저 말이 달라집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은 입으로부터 시와 찬미와 노래가 저절로 나옵니다. 주님의 은혜를 자랑하게 되고, 자기를 자랑하던 입에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정죄하던 입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자랑하게 되고 항상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눈이 달라집니다. 귀가 달라집니다. 피차 복종하게 됩니다.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손이 달라집니다. 발이 달라집니다. 삶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회개는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 또한 십자가의 은혜로만이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 때 회개가 됩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하라는 것은 계속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한번 충만했다가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회개도 계속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날마다 매 순간 붙들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날마다 기억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성령 충만함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성화의 길, 거룩한 길을 가게 됩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의 구원을 흔들 수 없습니다. 한번 구원 받았으면 구원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이제 구원 받은 사람은 성령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성령의 법은 그리스도의 마음, 사랑의 법입니다. 율법의 법이 아닌 은혜의 법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아래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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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20)

              이사야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9)

                대학선교와 세계선교를 향한 권서행전
                (지식과감성,2019)

                  야고보서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7)

                    옥중서신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6)

                      행복과 긍정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성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마가복음에서 만난 예수님
                          (킹덤북스,2014)

                            사도행전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3)

                              로마서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2)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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