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제32강 하나 됨의 비결

조회 수 2394 추천 수 0 2012.07.12 07:34:15
마가복음 제 32 강(막 9:38-50, 요절, 9:50)

하나 됨의 비결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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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흔해서 쉽게 접하게 되면 그 가치를 모르게 마련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소금입니다. 소금은 우리의 하루하루 삶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생필품입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3000년부터 소금을 생산해냈습니다. 가장 오래된 소금 산지는 사천성 지방입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때부터 야채를 소금에 절인 음식을 즐겼습니다. 절인 야채가 훗날 ‘쓰촨’ 요리라는 중국의 대표 음식으로 발전했습니다. 소금으로 고기와 생선을 저장한 최초의 민족은 고대 이집트입니다. 그들은 소금을 이용해 미라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저장 기능과 방부제 역할 덕분에 소금은 서양에서 항구불변의 상징으로 통했습니다. 고대 로마는 병사들에게 급료로 소금을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salary(봉급), soldier(병사), salad(소금에 절인 salted)’가 나왔습니다. 이런 모두가 sal(소금)이라는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마태복음 말씀을 비롯해 소금기둥(창19:16절), 소금언약(민수기 18장19절) 등 소금 이야기가 30 여 곳에 나옵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 주고 또 음식물의 부패를 방지해 줍니다. 그리고 소금은 뻣뻣한 채소를 부드럽게 하여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합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갈기갈기 찢어져 있습니다. 지구상 유일하게 동족이 남북으로 갈려져 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지역과 지역이 갈라져 있습니다. 수도권과 지방이 갈라져 있습니다. 세대 간, 계층 간 갈라져 있습니다. 지역 간, 계층 간, 노사 간, 이념의 간극이 너무나 벌어져 있습니다. 화합하고자 여러 안을 제시해 보지만 갈등은 오히려 더 심화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갈등에서 사랑의 화합으로 하나 됨의 아름다운 사회를, 건강한 가정을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편협한 마음을 버리라(38-41).

38절을 보겠습니다. 요한이 분개하여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은 귀신이 나가는 것을 보고 기뻐해야 했지만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그 활동을 못하도록 중지시켰습니다. 이는 그가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가복음 9장 14-29절 말씀을 보면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밑에 있는 아홉 명의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못 고쳤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님께 와서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귀신을 내어 쫓지 못하는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제자들이 전체적으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는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무리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니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그는 자기 그룹에 속하지 않은 그들이 귀신 쫓아내는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귀신 내어 쫓는 것이 자신들의 전유물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사역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타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 하나님의 사역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마음이 편협하고 배타의식이 강했습니다. 그러니 그는 다른 사람들과 동역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배타주의, 나 이외, 우리 그룹 이외를 인정하지 않는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9,40절을 보겠습니다.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단체를 정죄하는 제자들의 독선을 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반대만 하지 않으면 다 예수님의 편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안에서의 다양한 생각, 다양한 사역을 인정하셨습니다.

좁은 마음, 편협한 마음은 사람을 원수로 만들고 동역의 역사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편협한 우월주의나 배타주의는 금물입니다. 히틀러가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도 배타주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문제는 우리 속에도 이런 배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선교단체나 타 교단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배타성이 강한 저의에는 문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백의민족, 단일민족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타민족에 대해 강한 배타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외에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편협한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은 모두 모두 동역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모습에서 이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을 보면 사도바울을 정서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고 하니 그들은 아주 좋아 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그들에 대해 태도가 어떠합니까?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8).” 그리스도가 전파된다고 하면 아무 문제가 안 된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요한에게 말씀하십니다. 41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이 말씀 역시 예수님의 포용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그것이 주님을 위하여 하는 것이면 기뻐 받으시고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

그러면 요한의 배타성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이는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에 대해 견딜 수 없는 마음, 시기심에서 나왔습니다. 시기심은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원흉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시기심은 남을 인정하지 않도록 하고, 미움과 질투, 더 나아가 살인까지 불러옵니다. 시기심은 가장 무서운 마음의 병입니다. 시기심은 나를 죽이고 다른 사람을 죽이게 하는 무서운 병으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타인을 인정하고 포옹하는 넓은 마음을 갖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둘째, 다른 사람을 배려하라(42-48).

42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여기서 ‘소자’란 믿음이 있지만 아직 어린 사람을 말합니다. 믿음이 어린 초신자는 쉽게 상처를 받고 작은 유혹에도 넘어지기 쉬운 연약한 자입니다. 또 목자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쉽게 영향을 받습니다. 실족케 한다는 것은 ‘걸려 넘어지게 한다’, ‘죄를 짓게 한다’는 뜻입니다. 목자는 어린 신자의 입장에서 섬세히 돕지 아니하면 조그마한 이유로 실족을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신자를 실족케 하는 목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믿음이 강한 자에게 있어서 대수롭지 않은 일이 믿음이 어린 자에게는 영적인 생명에 관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연못에서 돌로 개구리 맞히기 놀이를 하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재미있는 일이지만 개구리는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 신자들에게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조심하는 것이 약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배려는 강자가 약자에 대한 태도입니다. 나는 나대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생각하여 나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타인에 대한 배려입니다. 나로서는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하지 않는 것, 이게 배려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많이 있는 사람은 내 돈 가지고 내 맘대로 쓸 수 있습니다. 내 돈 가지고 내가 쓰는 것 내 마음입니다. “내 돈 갖고 내가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해” 하면서 흥청망청 쓴다면 이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아닙니다. 이것은 약자를 실족케 하고 실망케 하고 낙심케 하는 행동입니다. 요즘 빈부의 격차가 점점 심화되고, 이로 인해 계층 간의 갈등이 심각합니다. 20대 80이니 이런 말이 왜 나옵니까? 돈 많은 사람들이 돈 없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삶에 있어서 남을 배려하는 섬세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42-48절에서 죄의 심각성을 말해 주십니다. 만일 우리의 손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고, 발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고, 눈이 범죄케 하면 눈을 빼어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과 두 눈으로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무서운 곳입니다. 지옥에 들어 간 사람들은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 신앙생활 하다가 손발 다 잘리고, 두 눈도 뽑히고, 완전히 병신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어떤 분은 눈이 50개라도 하루에 다 뽑힐 지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요점은 죄의 심각성을 알도록 함에 있습니다. 요즘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즐깁니다. 한 예로 요즘 이혼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쉽게 이혼합니다. 이혼은 죄입니다. 이혼은 주님이 가장 미워하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는 죄를 죄로 알고,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사망 이후에는 둘째 사망이 기다리고 있다. 그 둘째 사망은 영원히 타는 유황불 못에 던져진다. 우리는 작은 죄라도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그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환경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야 합니다. 제 1차 제 2차 회식 자리, 그 자리가 신자로서 앉지 말아야 할 자리라면 일시적으로 욕을 먹을지라도 과감하게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죄는 타협의 성질이 아닙니다. 죄는 싸워야 할 대상, 피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그리고 죄는 전염성이 강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오염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적극적인 타인에 대한 배려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죄의 심각성을 알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자기를 죽여라(50).

70년대에 인기 절정에 있었던 ‘대부’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마피아들의 생태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그 중의 한 장면이 제 마음에 오래오래 기억되고 있습니다. 마피아 두목 일곱 명이 모여서 부하들을 다 거느린 앞에서 더 이상 싸우지 말자고 화합하는 의식입니다. 우리끼리 싸우고 보니 이긴 자나 진 자나 너무 손해가 많다. 그런고로 다시는 싸우지 말자고 합의를 봅니다. 그래서 저들은 아주 거창한 장엄한 예식과 함께 “이제는 절대 싸우지 마라” 서약합니다. 그런데 하찮은 일로 인해 틈이 벌어져 서로 싸우다가 오직 두 사람 남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들이 거창한 의식을 행한 후에 왜 하나가 되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하나 돼야 된다는 거 알고 있어요. 하나 되기로 합의하고 결심했습니다. 결국은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왜 그들이 하나가 되지 못했을까요? 불의와 거짓과 악, 죄악을 중심으로는 절대로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 됨을 외칩니다. 화합하고, 화목하자고 외칩니다. 한나라당은 친이계와 친박계가 어디 있나, 우리는 오직 한나라당이다. 그러니 하나가 되자고 합니다. 야권 또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친노가 어디 있고 반노가 어디 있나 우리는 한 뿌리다. 그러나 하나 됨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뭐입니까? 자기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항상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합, 하나 됨은 내 이익을 포기하고, 자신을 희생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나를 중심해서 모여라!”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를 중심한 하나 됨을 강조하는 곳에는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49,50절을 보겠습니다.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소금은 3대 기능을 가졌습니다. 아시는 대로 소금은 먼저 맛을 냅니다. 요즘 사람들이 짜게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며 소금을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설렁탕을 먹들 때 소금을 안치고 먹을 수 있어요. 소금을 치지 않으면 설렁탕을 무슨 맛으로 먹을 수 있습니까? 소금은 맛을 냅니다. 소금이 없는 음식 먹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식사 초대를 해서 가게 되면 “많이 드세요.” 합니다. “많이 드세요.” 이 말은 60,70년대 보리 고개 때 먹지 못할 때 하던 인사입니다. 요즘 인사는 “맛있게 드세요”입니다. 좀 더 고상한 인사는 “드시며 즐거운 시간 가지세요”입니다. 옛날 어른들은 집으로 식사를 초대하여 대접할 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간이 맞습니까?”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음식 맛이 어떠냐?’ 입니다. 소금 맛이 결국은 모든 음식의 맛을 만들어 냅니다. 소금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지금은 냉동으로 보관하지만 예전에는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방부제란 오로지 소금뿐이었습니다. 소금에 절여서 보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금에 절인 음식, 안동 간 고등어니, 짠 것을 많이 먹었습니다. 썩지 않게 하려고 소금에 절였습니다. 이처럼 소금은 방부제 역할을 했습니다.

소금의 또 하나의 특징은 고르게 하는 것입니다. 소금을 넣으면 다 고르게 됩니다. 뻣뻣한 배추에 소금을 뿌리면 잎이 노골 노골하게 됩니다. 이를 숨이 죽었다고 합니다. 뻣뻣함은 목숨이 살았다는 뜻입니다. 목숨이 산 뻣뻣함에 소금을 치면 뻣뻣한 목숨이 죽어서 하나로 모아집니다. 이와 같이 소금은 고르게 하는, 모으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제사에 소금이 쓰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 2장 13절에 보면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제물에 소금을 둘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약의 소금을 치라.” 언약의 소금, 아주 중요하고 신비로운 의미와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모든 제물은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제물 그대로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제물을 죽여서 드립니다. 산채로 드리지 않고 살아 있는 양을 죽이고, 살아있는 소를 죽이고, 살아있는 비둘기를 재단 앞에서 죽여서 드립니다.

동물뿐만 아니라 채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채소를 드리는 제사를 소제라고 합니다. 소재, 채소를 드릴 때에 뻣뻣한 것을 그대로 드릴 수 없습니다. 뻣뻣한 채소에 소금을 쳐서 부드럽게 만들어서 드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소금을 치라”는 말은 양을 죽이는 거와 똑같이, 뻣뻣한 것을 소금을 쳐서 부드럽게 하는, 숨을 죽여서 드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뻣뻣한 것, 죽여야 됩니다. 목이 곧은 사람, 목을 굽혀야 됩니다. 어깨에 힘주는 사람, 힘을 빼야 됩니다. 눈높이가 높은 사람, 낮추어야 됩니다. 결혼을 앞둔 분들, 눈높이를 반드시 낮춰야 합니다. 잘났다는 사람, 이제 자기가 가장 못난 사람으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 겸손해져야 합니다. 자기중심, 타인 중심으로 바꿔야 합니다. 내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돌려야 합니다.

내가 못하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당신 보시기에 합당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 여러 시련과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교만한 사람, 여러 훈련을 통해 낮추십니다. 잘났다는 사람, 잘났다는 생각을 깨끗이 포기할 때까지 하나님은 진노의 고삐를 늦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자기 노력과 열심히 된 양 착각하는 사람,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배은망덕한 사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독수리 훈련을 시켜 두 손 들도록 겸손하게 하십니다. 물질에 눈이 어두운 사람,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는 사람, 여러 시련을 통해 모은 물질을 흩으십니다. 우리는 이를 항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 앞에 나올 때 완전히 나를 죽여, 푹 절인 배추처럼 아주 부드러운 모습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산 제물이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가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은혜가 없는 사람, 덜 죽은 사람입니다. 숨이 좀 덜 죽은 사람입니다. 푹 절인 배추가 되지 않아서입니다. 자기가 살았기 때문에 은혜가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없고, 은혜를 받지 못하고,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성도의 교제 속에도 기쁨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얼굴이 굳어 있고 팽팽하고 일그러져 있습니다. 그가 내뱉는 말은 원망, 불평, 정죄가 튀어나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소금을 두라!” 유대의 격언에는 “소금이 없으면 세상은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만큼 소금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양을 키울 때에도 양에게 소금을 먹이지 아니하면 양이 기운을 차리지 못합니다. 소금이 꼭 필요합니다. 로마 사람들의 격언에도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것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태양이고, 다른 하나는 소금이다”고 했습니다. 이런 소금이 소금으로서의 기능을 다 하기 위해서서는 두 가지로 역사해야 합니다. 하나는 녹아집니다. 녹지 않는 소금은 소용이 없습니다. 녹아져 형체가 없어져야 합니다. 녹지 않는 소금은 소금이 아닙니다. 형체가 없어지지 아니하면 소금 구실을 못합니다.

동시에 소금은 다 녹아 없어지면서도 제 맛을 항상 지켜야 합니다. 본질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형체는 없어졌으나 본질이 살아있는 것이 소금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물체에 영향을 주지만 자기는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소금입니다. 여러분 소금 썩은 거 봤습니까? 소금이 녹아서 다른 물체에 영향을 주지만 본질이 변해서 시금털털한 것 봤습니까? 소금은 썩어지는 물체를 썩지 않게 할 수는 있어도 썩어지는 물체 때문에 자기가 썩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소금은 자기 맛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강조하십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에 쓰리요.” 소금이 제 맛을 잃어버리면 거름으로도 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소금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하나님과 우리 사람을 화목케 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이 되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어서 형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체, 거룩한 위상, 다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이여 이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서 형체가 없어지지만 예수님의 화목의 본질을 그대로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예수님은 소금처럼 녹아 없어져라.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그대로 지켜가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이기심의 형체, 자기중심의 형체, 교만의 형체를 녹아야 비로소 화해의 역사, 하나 됨이 이루어집니다.

나만 옳다고 하는 편견, 그런 고집, 하나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나를 죽여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 맛을 내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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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말씀사,2013)

                              로마서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2)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1)

                                    저서 구입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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