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마가복음 제 33 강(10:1-16)
결혼 의미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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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머니 복중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가정에서 먹는 법을 배우고, 말하는 법을 배우고, 걷는 법, 삶의 법, 남을 섬기는 법, 서로 돕는 법 등을 배우며 사회화됩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은 가정에서 태어나서 가정에서 죽어갈 만큼 가정은 평생의 보금자리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가정을 근원으로 유지되고 발전되어 왔습니다. 이런 가정은 결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결혼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가정은 물론 사회와 국가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러시아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바다로 갈 때에는 한번 기도하여라. 전쟁터로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여라. 그러나 결혼식장에 나갈 때는 세 번 기도하여라.”
이 격언은 결혼이란 바다의 항해보다도,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보다도 더 위험일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결혼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결혼은 위험한 것이 아니라 가슴을 설레게 하는 하나님의 천국이 될 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결혼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정이 깨집니다. 우리나라는 2004년부터 이혼율이 점점 줄다가 작년에 이혼율이 늘었습니다. 한국은 여전히 OECD국가 중 이혼율 1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의 세대가 안전한 세대가 아니라 염려의 세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단어를 결혼이란 “결, 결국, 혼, 혼자되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들은 푸시킨의 시를 이렇게 곡해하여 읽기도 합니다. “오늘 사랑하는 사람이 내일 남이 된다 하지라도 그대는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오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결혼의 의미를 새롭게 마음에 각인하여 결혼할 적령기에 있는 사람들이나 이미 결혼한 여러분들에게 결혼의 항해가 주님 안에서 건강한 항해, 멋진 항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혼의 사회학적 정의를 보면 “결혼이란 성인 남녀가 그들이 거주하는 사회의 법률에 따라 정서적 관계와 서로에 대한 법적 책임, 공적인 의식을 갖는 하나의 합의다”라고 했습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결혼은 정서의 관계이다. 둘째, 결혼은 일부일처의 관계이다. 셋째, 결혼은 법적 책임의 관계이다. 넷째, 결혼은 자녀의 적출을 보장하는 관계이다. 다섯째, 결혼은 공적 의식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부모를 떠나라(7).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에서 임명된 분봉왕이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 그 헤롯왕이 이혼하여 전국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의 이혼과 불륜을 비판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힐렐’과 ‘샴마이’라는 두 학파가 있었습니다. 힐렐 학파는 이혼에 대해 관용하는 입장이었다면 샴마이 학파는 이혼은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혼의 이슈를 갖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 질문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2)?” 이 질문은 어떤 해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정치적 곤경 속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듣고 모세가 왜 이혼 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허락했는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완악함 때문이었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당시 백성들은 출애굽한지 얼마 되지 않아 노예근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노예근성의 특징은 눈에 보이는 대로, 듣는 대로, 느끼는 대로 행동하는, 육신적이고 감정적인 것이 노예근성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하였다가 마음에 맞지 않으면 아무 죄책감 없이 커피 마시듯이 쉽게 이혼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완악한 백성들 때문에, 인간의 죄성 때문에 함부로 이혼하는 그들에게 이혼을 하려면 반드시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도록 명했습니다. 그리고 이혼 조건도 아주 까다로웠습니다. 마태복음 19장 9절을 보면 간음, 음행의 연고 외에 어떤 이혼도 금했습니다.
주님은 이제 그들에게 이혼이 합법적인가, 불법적인가를 말씀하시지 않고 창세기 말씀에 기초한 결혼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결혼은 떠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누구로부터 떠나야 합니까? 부모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이것은 결혼의 사회적 혹은 법적인 의미를 말합니다. 여기서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부모를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모를 소홀히 여기라는 의미는 더욱 더 아닙니다. 이 말씀의 깊은 의미는 결혼이란 새로운 하나의 가정을 만들기 위한 제도적 독립성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습니다. 부모님의 우산 아래 있습니다. 부모님을 의존하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결혼하면, 하나의 새로운 가정이 세워지면 부모님으로부터 심리적, 그리고 경제적인 독립을 해야 합니다. 제가 이 여인을 만나, 제가 이 남자를 만나 결혼하면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자력으로 인생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결단, 이게 부모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법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혼인신고입니다.
만일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부모님의 도움을 기대한다든지, 혹은 부모가 자녀가 안쓰러워 계속적인 도움을 준다면 이것은 본인이나 자녀에게 도움이 결코 되지 않습니다. 도움은커녕 부모를 의존하는 중풍병자로 만드는 큰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결혼하면 이제 보모를 떠나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며느리에게로 떠나보내야 합니다. 끝까지 붙들고 헬리콤터 형으로 자녀를 키우면 안 됩니다. 요즘 남편은 미워도 다시 한 번, 딸은 영원한 나의 사랑, 아들은 며느리의 남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중에 아들은 며느리의 남편이라는 말속에는 섭섭한 생각이 묻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철저하게 아들을 며느리의 남편이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만일 우리 중에 결혼을 하고도 부모를 계속 의존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하루 빨리 그 의존에서 벗어나십시오. 물론 자녀들이 안타까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한두 번 도움을 주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자녀들이 손을 내밀면 부모의 의존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부부가 다투고 짐 싸들고 친정으로 가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부모를 떠나지 않은 것입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부부끼리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짐 싸들고 오는 딸 집안으로 들이는 것은 그 딸을 망치게 만드는 행태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 줄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대개 가정이 우애의 금이 가는 것은 유산 때문입니다. 청교도들의 전통 중의 하나는 유산을 자녀들에게 남겨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산을 자녀들에게 남기기보다 사회나 학교, 그리고 교회에 환원하는 것이 중요한 전통입니다. 이것은 결혼한 자녀들에게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저 같은 사람이야 자녀들에게 물려 재산도 없지만 만약 재산이 좀 있게 된다면 교회의 선교 사업에 물려주고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자녀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개척하기보다, 부모의 유산을 바라보는, 자립적이지 못한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부모를 의존하는 의존심, 의존의 끈을 끊도록 도와서 독립적인, 자립적인, 스스로 개척하는 그런 삶,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녀를 도와주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재산이 있다면 지금부터 자녀들에게 이렇게 교육을 시키십시오. “이 집은 하나님이 주신 집인데 앞으로 아빠 엄마가 죽으면 이 아파트를 교회의 선교 사업을 위해, 나를 키워준 사회에 장학재단으로 증여할 거야. 그러나 아빠 엄마가 힘닿는 데까지 공부를 시켜 줄 거야. 그리고 결혼할 때 힘닿는 데까지 도와 줄 거야. 그러나 결혼하면 이제는 네가 자립해서 살아야 해.” 부모가 자녀가 결혼했는데도 헬리콥터 형이 되면 안 됩니다. 결혼하면 부모를 의존하는 의존심에서 떠나야 합니다.
둘째, 둘이 한 몸이 되어라(8).
부모를 떠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둘이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남자와 여자는 분명히 다른 두 개체입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게 되면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결혼하면 1+1=2 가 아니라 ‘1’ 입니다.
둘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연합을 의미합니다. 연합이란 말은 본래 종이 대용품인 파피루스에 아교풀 같은 것으로 붙이는 것을 뜻합니다. 두개의 파피루스를 아교풀 같은 것으로 붙이면 하나의 파피루스처럼 딱 붙어버리게 됩니다. 두 장의 파피루스가 한 장의 종이처럼 되는 것이 연합입니다. 만일 붙어있는 두 장의 종이를 다시 분리시켜 보세요. 이것을 다시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강제로 떼면 그 종이는 찢어져 못쓰게 됩니다.
이와 같이 결혼을 하게 되면, 한 남자와 한 아내가 부부로 연합하게 됩니다. 이 관계는 다시는 찢어질 수 없는, 찢어져서도 안 되는,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아무도 끼여 들어갈 수 없는 하나 됨, 그것이 부부의 연합이요, 결혼의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부모로부터 떠나라는 사실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또 다른 이성, 내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배우자를 찾아 그에게 소속하고 연합하라고 말씀합니다.
매슬로우 심리학자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나눴습니다. 생리적 욕구-안전욕구-소속감과 사랑의 욕구-존중욕구-자아실현 욕구입니다. 세 번째 단계가 소속감의 욕구입니다. 우리가 어딘가, 누구엔가, 혹은 어떤 공동체엔가, 의미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게 소속되지 않고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독립, 해방, 혼자 마음대로 살고 싶은 욕망,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어느 단체에 소속해서 안정을 찾고 싶어 하는 이중적인 심리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이 소속감이 충족되지 않으면 방황하게 됩니다. 바로 결혼은 서로가 서로에게 소속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안정, 인간의 삶의 욕구가 충족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혼자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없습니다. 보통 하는 말이 ‘올드미스 히스테리’, ‘노총각 심술’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으려면 결혼을 하기 바랍니다.
부부는 둘이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도 그 사이에 낄 수가 없습니다. 그 사이에는 심지어는 자녀도 낄 수가 없습니다. 한국의 여인들은 아기를 낳으면 그 다음부터 남편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식들에게 집착하는 어머니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자식을 낳아도 우선순위는 부부입니다. 내가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내 남편이고, 내 아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 우선순위가 깨지면 사랑의 정서가 메말라 가기 시작합니다. 사랑의 정서가 메마르게 되면 마음의 안정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들은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시선을 다른 데로 옮겨 가게 됩니다. 이때부터 가정의 위기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한 남자와 한 여인의 온전한 연합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조화로운 연합을 뜻합니다. 조화로운 연합을 이루려면 두 사람의 육체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영적으로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는 사람은 불신자와 근본적으로 결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조화로운 연합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15절을 보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신명기 7장 3,4절을 보면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노아 시대가 강포가 충만하고 패역했던 것은 신자들이 불신자들과 자연스럽게 결혼한 데 있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삼고 왕궁 내에 그 아내들을 위해 이방 신전을 세워줌으로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의 분열 또한 솔로몬이 이방 여인을 취한 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과 결혼해야 조화로운 연합이 됩니다.
셋째,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히13:4).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었으면 서로에게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히13:4).” 그리고 잠언 5장 15절 이하를 보면 결혼한 아들에 대해 아버지가 주는 지혜로운 충고가 나옵니다.
5장 1절을 보면 내 아들아,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부부의 결혼생활을 매우 아름다운 은유적인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5절입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다른 샘가지 말고,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셔라. 그 다음절에는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그 다음 계속되는 말씀에는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그 다음절에 보시면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아내를 엔조이 하라고 했습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satisfy, 만족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부는 성적 교제를 통해서 삶의 즐거움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부는 서로의 성적 요구를 거절하지 말고 수용할 줄 아는 아름다움이 피차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속에 부부들을 향한 편지 가운데서 기도할 잠시의 틈을 얻기 위한 예배를 빼놓고는 부부는 분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부생활을 통하여 남편으로서, 혹은 아내로서, 부부사이에 진정한 사랑을 주고받음으로서 사랑 받고 또 사랑을 누리는 존재로서의 자기 확인, 바로 이것을 위해서 주님은 결혼을 허락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외도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부부의 성적 교제를 통해서 자녀가 출산되고 자녀가 양육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녀를 낳고 자녀를 키우는 것은 우리 가정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만듭니다. 우리가 키우는 자녀들이 우리 다음의 역사를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자녀 출산과 자녀 양육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혼이란 장난이 아닙니다. 결혼은 게임이 아닙니다. 결혼은 엄숙한 역사적 책임을 동반하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결혼에 임하는 사람들은 내가 내일의 역사를 만드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만드는 이런 역사적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혼은 결코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말라기서 2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미워하신다는 단어가 매우 강력한 단어, hate,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혼하는 사람을 미워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혼한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이혼한 사람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다시 재기하기를 하나님은 소망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혼 그 자체를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이혼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계획을 파괴하는 죄입니다. 이혼은 가정을 통해서 우리가 누려야 할 진정한 삶의 풍성한 기쁨을 박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십니다. 이혼은 죄입니다. 죄는 때로 이기심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이 이기심이 있으면 통장을 맡기지 못하고 인감을 맡기지 못하고 서로 각자 비자금을 관리하게 됩니다. 때로 학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죄는 때로 불친절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처럼 부부관계를 흔들고 가정을 파괴하는 행위의 밑바탕에는 죄가 도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하나님이 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기심, 우리의 욕망, 우리의 정욕, 우리의 모든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이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욕망의 바다가 춤을 출 때마다 십자가 앞에 서십시오.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나의 죄 때문에, 나의 이기심 때문에, 나의 욕심 때문에, 나의 욕망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시는, 그 피로 다시 한 번 죄 사함을 받으십시오. 그 피로 나의 죄를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가정은 회복이 됩니다.
복음성가 “아주 먼 옛날”을 부르겠습니다. ♬아주 먼 옛날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 당신을 향한 계획 있었죠.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좋았더라고 말씀 하셨네. 이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게 나의 손으로 창조하였노라. 내가 너로 인하여 기뻐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사랑해요. 축복해요. 당신의 마음에 우리의 사랑을 드려요. 사랑해요. 축복해요. 당신의 마음에 우리의 사랑을 드려요.♬
하나님은 둘이 한 몸 되어 천국 같은 가정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내어놓고 우리의 가정을 위해, 또 우리 자녀들이 이룰 그 가정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시어 아름답고 건강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넷째, 아이를 용납하라(13-16).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지금 이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꼬마들이 들으면 안 된다고 꾸짖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무시하는 마음 때문에 함부로 대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엄격한 가부장적 제도하에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은 숫자에 치지 않을 정도로 무시했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은 분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약한 여인이라고 해서 함부로 이혼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로 인해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도 이런 바리새인적인 요소가 있는 것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권위주의를 책망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리고 계속해서 어떤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15).”
예수님께서 보실 때 어린아이들은 어떤 점에서 귀합니까? 첫째로, 어린아이들은 순수하고 진실합니다. 이들은 겉과 속이 같습니다. 이들은 자신을 감추거나 꾸미지 않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옵니다. 둘째는, 신뢰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을 다 공급해 줄 것을 믿고 조금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셋째는, 겸손하게 배우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진실하며 신뢰하고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16).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내면을 가진 자를 사랑하십니다.
결혼 의미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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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머니 복중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가정에서 먹는 법을 배우고, 말하는 법을 배우고, 걷는 법, 삶의 법, 남을 섬기는 법, 서로 돕는 법 등을 배우며 사회화됩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은 가정에서 태어나서 가정에서 죽어갈 만큼 가정은 평생의 보금자리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가정을 근원으로 유지되고 발전되어 왔습니다. 이런 가정은 결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결혼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가정은 물론 사회와 국가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러시아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바다로 갈 때에는 한번 기도하여라. 전쟁터로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여라. 그러나 결혼식장에 나갈 때는 세 번 기도하여라.”
이 격언은 결혼이란 바다의 항해보다도,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보다도 더 위험일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결혼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결혼은 위험한 것이 아니라 가슴을 설레게 하는 하나님의 천국이 될 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결혼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정이 깨집니다. 우리나라는 2004년부터 이혼율이 점점 줄다가 작년에 이혼율이 늘었습니다. 한국은 여전히 OECD국가 중 이혼율 1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의 세대가 안전한 세대가 아니라 염려의 세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단어를 결혼이란 “결, 결국, 혼, 혼자되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들은 푸시킨의 시를 이렇게 곡해하여 읽기도 합니다. “오늘 사랑하는 사람이 내일 남이 된다 하지라도 그대는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오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결혼의 의미를 새롭게 마음에 각인하여 결혼할 적령기에 있는 사람들이나 이미 결혼한 여러분들에게 결혼의 항해가 주님 안에서 건강한 항해, 멋진 항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혼의 사회학적 정의를 보면 “결혼이란 성인 남녀가 그들이 거주하는 사회의 법률에 따라 정서적 관계와 서로에 대한 법적 책임, 공적인 의식을 갖는 하나의 합의다”라고 했습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결혼은 정서의 관계이다. 둘째, 결혼은 일부일처의 관계이다. 셋째, 결혼은 법적 책임의 관계이다. 넷째, 결혼은 자녀의 적출을 보장하는 관계이다. 다섯째, 결혼은 공적 의식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부모를 떠나라(7).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에서 임명된 분봉왕이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 그 헤롯왕이 이혼하여 전국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의 이혼과 불륜을 비판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힐렐’과 ‘샴마이’라는 두 학파가 있었습니다. 힐렐 학파는 이혼에 대해 관용하는 입장이었다면 샴마이 학파는 이혼은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혼의 이슈를 갖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 질문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2)?” 이 질문은 어떤 해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정치적 곤경 속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듣고 모세가 왜 이혼 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허락했는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완악함 때문이었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당시 백성들은 출애굽한지 얼마 되지 않아 노예근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노예근성의 특징은 눈에 보이는 대로, 듣는 대로, 느끼는 대로 행동하는, 육신적이고 감정적인 것이 노예근성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하였다가 마음에 맞지 않으면 아무 죄책감 없이 커피 마시듯이 쉽게 이혼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완악한 백성들 때문에, 인간의 죄성 때문에 함부로 이혼하는 그들에게 이혼을 하려면 반드시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도록 명했습니다. 그리고 이혼 조건도 아주 까다로웠습니다. 마태복음 19장 9절을 보면 간음, 음행의 연고 외에 어떤 이혼도 금했습니다.
주님은 이제 그들에게 이혼이 합법적인가, 불법적인가를 말씀하시지 않고 창세기 말씀에 기초한 결혼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결혼은 떠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누구로부터 떠나야 합니까? 부모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이것은 결혼의 사회적 혹은 법적인 의미를 말합니다. 여기서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부모를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모를 소홀히 여기라는 의미는 더욱 더 아닙니다. 이 말씀의 깊은 의미는 결혼이란 새로운 하나의 가정을 만들기 위한 제도적 독립성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습니다. 부모님의 우산 아래 있습니다. 부모님을 의존하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결혼하면, 하나의 새로운 가정이 세워지면 부모님으로부터 심리적, 그리고 경제적인 독립을 해야 합니다. 제가 이 여인을 만나, 제가 이 남자를 만나 결혼하면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자력으로 인생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결단, 이게 부모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법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혼인신고입니다.
만일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부모님의 도움을 기대한다든지, 혹은 부모가 자녀가 안쓰러워 계속적인 도움을 준다면 이것은 본인이나 자녀에게 도움이 결코 되지 않습니다. 도움은커녕 부모를 의존하는 중풍병자로 만드는 큰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결혼하면 이제 보모를 떠나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며느리에게로 떠나보내야 합니다. 끝까지 붙들고 헬리콤터 형으로 자녀를 키우면 안 됩니다. 요즘 남편은 미워도 다시 한 번, 딸은 영원한 나의 사랑, 아들은 며느리의 남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중에 아들은 며느리의 남편이라는 말속에는 섭섭한 생각이 묻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철저하게 아들을 며느리의 남편이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만일 우리 중에 결혼을 하고도 부모를 계속 의존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하루 빨리 그 의존에서 벗어나십시오. 물론 자녀들이 안타까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한두 번 도움을 주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자녀들이 손을 내밀면 부모의 의존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부부가 다투고 짐 싸들고 친정으로 가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부모를 떠나지 않은 것입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부부끼리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짐 싸들고 오는 딸 집안으로 들이는 것은 그 딸을 망치게 만드는 행태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 줄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대개 가정이 우애의 금이 가는 것은 유산 때문입니다. 청교도들의 전통 중의 하나는 유산을 자녀들에게 남겨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산을 자녀들에게 남기기보다 사회나 학교, 그리고 교회에 환원하는 것이 중요한 전통입니다. 이것은 결혼한 자녀들에게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저 같은 사람이야 자녀들에게 물려 재산도 없지만 만약 재산이 좀 있게 된다면 교회의 선교 사업에 물려주고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자녀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개척하기보다, 부모의 유산을 바라보는, 자립적이지 못한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부모를 의존하는 의존심, 의존의 끈을 끊도록 도와서 독립적인, 자립적인, 스스로 개척하는 그런 삶,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녀를 도와주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재산이 있다면 지금부터 자녀들에게 이렇게 교육을 시키십시오. “이 집은 하나님이 주신 집인데 앞으로 아빠 엄마가 죽으면 이 아파트를 교회의 선교 사업을 위해, 나를 키워준 사회에 장학재단으로 증여할 거야. 그러나 아빠 엄마가 힘닿는 데까지 공부를 시켜 줄 거야. 그리고 결혼할 때 힘닿는 데까지 도와 줄 거야. 그러나 결혼하면 이제는 네가 자립해서 살아야 해.” 부모가 자녀가 결혼했는데도 헬리콥터 형이 되면 안 됩니다. 결혼하면 부모를 의존하는 의존심에서 떠나야 합니다.
둘째, 둘이 한 몸이 되어라(8).
부모를 떠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둘이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남자와 여자는 분명히 다른 두 개체입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게 되면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결혼하면 1+1=2 가 아니라 ‘1’ 입니다.
둘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연합을 의미합니다. 연합이란 말은 본래 종이 대용품인 파피루스에 아교풀 같은 것으로 붙이는 것을 뜻합니다. 두개의 파피루스를 아교풀 같은 것으로 붙이면 하나의 파피루스처럼 딱 붙어버리게 됩니다. 두 장의 파피루스가 한 장의 종이처럼 되는 것이 연합입니다. 만일 붙어있는 두 장의 종이를 다시 분리시켜 보세요. 이것을 다시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강제로 떼면 그 종이는 찢어져 못쓰게 됩니다.
이와 같이 결혼을 하게 되면, 한 남자와 한 아내가 부부로 연합하게 됩니다. 이 관계는 다시는 찢어질 수 없는, 찢어져서도 안 되는,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아무도 끼여 들어갈 수 없는 하나 됨, 그것이 부부의 연합이요, 결혼의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부모로부터 떠나라는 사실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또 다른 이성, 내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배우자를 찾아 그에게 소속하고 연합하라고 말씀합니다.
매슬로우 심리학자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나눴습니다. 생리적 욕구-안전욕구-소속감과 사랑의 욕구-존중욕구-자아실현 욕구입니다. 세 번째 단계가 소속감의 욕구입니다. 우리가 어딘가, 누구엔가, 혹은 어떤 공동체엔가, 의미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게 소속되지 않고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독립, 해방, 혼자 마음대로 살고 싶은 욕망,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어느 단체에 소속해서 안정을 찾고 싶어 하는 이중적인 심리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이 소속감이 충족되지 않으면 방황하게 됩니다. 바로 결혼은 서로가 서로에게 소속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안정, 인간의 삶의 욕구가 충족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혼자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없습니다. 보통 하는 말이 ‘올드미스 히스테리’, ‘노총각 심술’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으려면 결혼을 하기 바랍니다.
부부는 둘이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도 그 사이에 낄 수가 없습니다. 그 사이에는 심지어는 자녀도 낄 수가 없습니다. 한국의 여인들은 아기를 낳으면 그 다음부터 남편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식들에게 집착하는 어머니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자식을 낳아도 우선순위는 부부입니다. 내가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내 남편이고, 내 아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 우선순위가 깨지면 사랑의 정서가 메말라 가기 시작합니다. 사랑의 정서가 메마르게 되면 마음의 안정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들은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시선을 다른 데로 옮겨 가게 됩니다. 이때부터 가정의 위기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한 남자와 한 여인의 온전한 연합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조화로운 연합을 뜻합니다. 조화로운 연합을 이루려면 두 사람의 육체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영적으로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는 사람은 불신자와 근본적으로 결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조화로운 연합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15절을 보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신명기 7장 3,4절을 보면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노아 시대가 강포가 충만하고 패역했던 것은 신자들이 불신자들과 자연스럽게 결혼한 데 있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삼고 왕궁 내에 그 아내들을 위해 이방 신전을 세워줌으로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의 분열 또한 솔로몬이 이방 여인을 취한 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과 결혼해야 조화로운 연합이 됩니다.
셋째,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히13:4).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었으면 서로에게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히13:4).” 그리고 잠언 5장 15절 이하를 보면 결혼한 아들에 대해 아버지가 주는 지혜로운 충고가 나옵니다.
5장 1절을 보면 내 아들아,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부부의 결혼생활을 매우 아름다운 은유적인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5절입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다른 샘가지 말고,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셔라. 그 다음절에는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그 다음 계속되는 말씀에는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그 다음절에 보시면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아내를 엔조이 하라고 했습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satisfy, 만족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부는 성적 교제를 통해서 삶의 즐거움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부는 서로의 성적 요구를 거절하지 말고 수용할 줄 아는 아름다움이 피차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속에 부부들을 향한 편지 가운데서 기도할 잠시의 틈을 얻기 위한 예배를 빼놓고는 부부는 분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부생활을 통하여 남편으로서, 혹은 아내로서, 부부사이에 진정한 사랑을 주고받음으로서 사랑 받고 또 사랑을 누리는 존재로서의 자기 확인, 바로 이것을 위해서 주님은 결혼을 허락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외도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부부의 성적 교제를 통해서 자녀가 출산되고 자녀가 양육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녀를 낳고 자녀를 키우는 것은 우리 가정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만듭니다. 우리가 키우는 자녀들이 우리 다음의 역사를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자녀 출산과 자녀 양육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혼이란 장난이 아닙니다. 결혼은 게임이 아닙니다. 결혼은 엄숙한 역사적 책임을 동반하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결혼에 임하는 사람들은 내가 내일의 역사를 만드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만드는 이런 역사적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혼은 결코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말라기서 2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미워하신다는 단어가 매우 강력한 단어, hate,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혼하는 사람을 미워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혼한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이혼한 사람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다시 재기하기를 하나님은 소망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혼 그 자체를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이혼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계획을 파괴하는 죄입니다. 이혼은 가정을 통해서 우리가 누려야 할 진정한 삶의 풍성한 기쁨을 박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십니다. 이혼은 죄입니다. 죄는 때로 이기심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이 이기심이 있으면 통장을 맡기지 못하고 인감을 맡기지 못하고 서로 각자 비자금을 관리하게 됩니다. 때로 학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죄는 때로 불친절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처럼 부부관계를 흔들고 가정을 파괴하는 행위의 밑바탕에는 죄가 도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하나님이 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기심, 우리의 욕망, 우리의 정욕, 우리의 모든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이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욕망의 바다가 춤을 출 때마다 십자가 앞에 서십시오.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나의 죄 때문에, 나의 이기심 때문에, 나의 욕심 때문에, 나의 욕망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시는, 그 피로 다시 한 번 죄 사함을 받으십시오. 그 피로 나의 죄를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가정은 회복이 됩니다.
복음성가 “아주 먼 옛날”을 부르겠습니다. ♬아주 먼 옛날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 당신을 향한 계획 있었죠.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좋았더라고 말씀 하셨네. 이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게 나의 손으로 창조하였노라. 내가 너로 인하여 기뻐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사랑해요. 축복해요. 당신의 마음에 우리의 사랑을 드려요. 사랑해요. 축복해요. 당신의 마음에 우리의 사랑을 드려요.♬
하나님은 둘이 한 몸 되어 천국 같은 가정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내어놓고 우리의 가정을 위해, 또 우리 자녀들이 이룰 그 가정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시어 아름답고 건강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넷째, 아이를 용납하라(13-16).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지금 이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꼬마들이 들으면 안 된다고 꾸짖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무시하는 마음 때문에 함부로 대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엄격한 가부장적 제도하에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은 숫자에 치지 않을 정도로 무시했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은 분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약한 여인이라고 해서 함부로 이혼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로 인해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도 이런 바리새인적인 요소가 있는 것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권위주의를 책망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리고 계속해서 어떤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15).”
예수님께서 보실 때 어린아이들은 어떤 점에서 귀합니까? 첫째로, 어린아이들은 순수하고 진실합니다. 이들은 겉과 속이 같습니다. 이들은 자신을 감추거나 꾸미지 않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옵니다. 둘째는, 신뢰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을 다 공급해 줄 것을 믿고 조금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셋째는, 겸손하게 배우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진실하며 신뢰하고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16).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내면을 가진 자를 사랑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