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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제 39강(11:27-12:12)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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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3월 31일 프랑스 파리에는 프랑스 대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만국 박람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기념 조형물로 에펠탑이 세워졌습니다. 지식인들과 시민들이 철로 세워진 에펠탑 철거 시위를 벌였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20년 후에 철거하기로 하고 추진했습니다. 20년이 지난 1909년 다시 철거가 논의되었지만 꼭대기에 설치된 전파 송출장치 덕분에 철거 위기를 넘겼습니다. 이처럼 천박한 흉물로 취급을 받던 철탑, 에펠탑이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천덕꾸러기 철탑이 파리의 귀부인이 되었습니다. 2004년 한 해에 프랑스 외국 관광객이 2500만을 넘었는데, 프랑스 명소 제 1위가 에펠탑입니다. 왜 그리되었습니까? 단순히 노출효과 때문이었습니다. 이탑의 높이가 무려 332,75미터가 되기 때문에 시민들은 좋든, 싫든 눈만 뜨면 에펠탑을 봐야 했습니다. 이를 에펠탑 효과라고 합니다. 파리 시민들이 날마다 보니 에펠탑이 정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자주 보면 호감이 증가됩니다. 자꾸 보면, 보는 것만으로도 호감이 증가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자꾸 보면 말씀이 은혜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자꾸 주님께 예배를 드리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관계성이란 보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을 매일 바라보십시오. 성경을 매일 읽으십시오. 무시로 기도하십시오. 기회가 되는대로 전도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질 것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아무 부족함이 없는 포도원을 만드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의 극진한 사랑이 나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잊고 끊임없이 은혜를 배반하는 인간의 죄악상이 나타납니다. 이는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가져옵니다. 탐욕은 하나님을 외면토록 합니다. 하나님은 탐욕으로 은혜를 배반한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종들을 보내시고, 마침내는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기를 바랍니다.
첫째, 포도원을 주신 하나님(11:27-12:1)
12장 1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더니” 한 사람이 크고 아름다운 포도원을 만들고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사5:1,2). 도적이 틈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견고하게 쳤습니다. 또 즙을 짜는 구유를 파서 포도주나 포도 넥타 등을 만들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적의 침입을 사전에 알아볼 수 있도록 망대를 높이 세웠습니다. 주인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모든 환경을 완벽하게 갖추어 놓은 후에 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당시 농부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날품팔이들이었습니다. 일할 곳이 없어 빈둥빈둥 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주인의 특별한 은혜로 아름다운 포도원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포도원에 대한 소유권만 없을 뿐이지 경영권을 가진 실상 주인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주인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껏 자율경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주인이 떠나자 농부들은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과거 날품팔이 시절에는 주인의 눈치를 보며 시간을 때다 일당만 받아 가면 그만이었지만, 이제는 경영가의 위치에서 마음을 드려 일했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3년 정도 일하자 드디어 탐스러운 포도열매가 맺혔습니다. 농부들은 그 동안 돈 주고 사먹던 포도와는 그 맛이 달랐습니다. 포도나무는 보통 심은 지 3년 후에나 첫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나 세를 바칠 만큼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심은 지 5년 후부터 세를 받았습니다(레19:23-25). 그러므로 이 주인도 5년이 경과한 후에 세를 받으려고 그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여기서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받는 주인으로서 당연한 권리입니다. 보통 주인들은 소작농과 5:5 내지는 4:6으로 계약을 맺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주인은 농부들에게 1:10(십일조)만 바치도록 했습니다. 십분의 일은 주인과 농부들과의 관계를 유지시켜 주는 최소한의 것입니다. 이것만 드리면 농부들은 얼마든지 포도원을 경영할 수 있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농부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좀 더 넒은 의미로 보면 포도원은 세상을, 농부는 인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위하여 아무 부족함이 없는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각종 나무의 실과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게 하시고,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심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창2:16,17). 인간은 이 축복된 환경 가운데서 이 말씀에 순종하여 영적 질서를 지키며 사명을 감당하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범하여 에덴을 상실하자 만민 구속 역사를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 사명을 감당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축복하였습니다. 로마서9장 4,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영적 축복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양자로 삼으시고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과 약속을 주셨습니다. 온 세계가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예배제도를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모세, 다윗 등 많은 믿음의 조상들을 주셨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온 세상의 구주인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탄생하였습니다.
나 자신은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해 만드신 아름다운 포도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의 영인 성령을 우리 안에 내주케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각양 좋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가정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를 주셨고 귀여운 자녀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장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보고, 인재의 산실인 아름다운 캠퍼스 포도원에서 복음을 전하는 축복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열방을 향한 세계선교의 사명도 주셨습니다. 이 은혜와 특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청지기 의식이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가는 것을 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수고로 얻은 것인 양 착각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되돌려 드리기보다 더욱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는 시간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세상에는 수많은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필요를 채우는 손길을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주님께 감사하며 물질을 드리는 것을 아까워합니다. 그것은 시간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재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물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기 때문이요 청지기 의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은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 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 하셨사오니(삼하7:28)”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은사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12:2-12)
때가 되자 주인은 종을 보내어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2).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공항까지 나가서 영접하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의 종을 어떻게 대접했습니까? 3절을 보면 농부들은 주인의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종의 보고를 받은 주인은 당장에 달려가서 농부들을 요절을 내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4a절을 보면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농부들의 행실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동안 주인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다 보니 욕심이 생겨 순간적으로 실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종이 너무 거만하게 굴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훈련되고 성숙한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더욱 악해졌습니다(4b). 종을 능욕하였습니다. 종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다리에 기브스 한 채 목발을 집고 돌아왔습니다. 주인은 치명상을 입고 돌아온 종을 보고도 또 참았습니다. 당장 달려가 포도원을 빼앗아 다른 농부들에게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경우 농부들이 다시 과거처럼 날품팔이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불쌍하였습니다. 또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 해도 그들의 마음이 이 농부들처럼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주인은 어찌하든지 악한 농부들의 마음을 돌이키고, 관계성을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또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이제 그 종을 아예 죽여 버렸습니다. 주인은 계속하여 많은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계속해서 혹은 때리고, 혹은 죽였습니다.
주인은 이제 농부들에게 세를 받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보낼 만한 종들이 없었습니다. 이제 주인은 농부들에 대한 사랑을 거두어들이고 군대를 보내 그들을 진멸하고 다른 사람에게 포도원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6절을 보겠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이었습니다. 난폭해진 농부들에게 사랑하는 외아들을 보낸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농부들과 바른 관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외아들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에 대한 변치 않는 주인의 사랑과 신뢰를 보이는 길은 그 길 밖에 없었습니다. 주인은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보내면서 농부들이 자기 아들만큼은 공경하리라 기대했습니다. 아들만 공경하면 지금까지 행한 모든 죄악을 용서해 주고, 이전보다 더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 속에서 포도원을 맡기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외아들을 보낸 포도원 주인은 바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끝까지 변치 않는 사랑, 믿어 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 동안 수많은 종들을 보내는 가운데서 인간이 얼마나 악하고 죄악 된가를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이 아무리 죄악 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만은 영접하고 공경할 줄 알았습니다.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죄악 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사랑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기 위한 하나의 수순으로 예수님을 보낸 것이 아니라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보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믿어 주고, 기대를 걸고, 소망을 가져 주는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은 요한복음 2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망간 제자들을 찾아가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은혜를 배반한 사람은 원수보다 밉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배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베드로는 그의 서신서에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라고 기록하였습니다(벧전4:8).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 사랑(unchangeable love), 끝없는 사랑(endless love), 거룩한 사랑(holy love), 무조건적인 사랑(unconditional love) 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할 때 태산을 옮기는 믿음이 생겨나고 우리의 내면에 소망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의 외아들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의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던졌느니라(7,8).” 이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상속자인 줄 알고 고의적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포도원 밖에 던져 버렸습니다. 상속자만 죽이면 포도원이 자기들의 소유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은혜를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은혜를 잊고 교만해졌습니다. 이 때 그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악신이 들려 고통 하다가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 역사상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모두 은혜를 기억한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본래 시골에서 양을 치던 소년에 불과한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이요 목자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7:18)”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a)” 그는 자신을 구원하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격하여 외쳤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딤전1:15).”
둘째는 욕심의 미혹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15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이 왜 미혹됩니까? 욕심에 끌려 미혹됩니다. 미혹이란 낚시꾼이 고기를 잡을 때 미끼를 던지는 모습을 말합니다. 미끼는 아름답고 좋을수록 좋습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것을 던져서 꾑니다.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나타납니다(고후11:14). 사단이 에덴에서 아담을 유혹할 때 어떻게 유혹했습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았을 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느껴 이 미혹의 덫에 넘어가도록 했습니다. 한마디로 침이 ‘꼴깍’ 삼켜지도록 유혹했습니다. 롯도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할 때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습니까? 롯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는 음란과 광란의 도시였습니다. 다윗이 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했습니까? 한 여인의 목욕하는 심히 아름다운 것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죄악의 결과를 보여 주지 않고 쾌락만 보여 줍니다.
사단은 십자가가 없는 달콤한 것만을 보여 줍니다. 달콤한 유혹에는 반드시 사단의 덫이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죄는 우리에게 거부감이나 불쾌감을 주지 않습니다. 죄에도 낙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죄악의 낙이라 했습니다(히11:25). 모험, 스릴, 서스펜스 등이 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이 담배를 몰래 피우는 것은 몰래 피우는 스릴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청년의 때는 성적 유혹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중년의 때에는 혈기가, 그리고 노년에는 소위 노욕(老欲)으로 표현되는 탐욕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이러한 욕심과 유혹이 우리를 망하는 길로 가게 만듭니다.
우리가 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죄가 가져오는 궁극적인 결과가 사망이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 중심, 예수님만을 잡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예수 사라지면 다 망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야 구원이 있고, 회복이 있으며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께 가면 목적 있는 인생이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인생의 목표를 예수님께 두게 됩니다. 예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탐욕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9).” 주인은 아들까지 죽인 배은망덕한 원수들을 진멸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길이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치 않는 자들을 철저히 진멸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반드시 심판하시고 진멸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10,11).” 여기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또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은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삼 일만에 다시 살리셔서 인류 구속 역사의 초석이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역사입니다(11). 하나님은 기이한 방법으로 역사하셔서 승리를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실패가 없으신 하나님이시요, 승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건축자의 버린 돌과 같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낙오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기이한 방법으로 우리의 인생에 승리를 가져다주십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축복하시고 승리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버림받더라도 하나님께 택함 받는 종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포도원을 일터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축복을 누리는 길은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완악한 우리를 위해서 많은 종들을 보내 주시고, 최후에는 외아들을 보내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순간순간 완악한 마음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끝까지 나를 참아 주시고, 믿어 주시고, 소망을 걸어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청지기 직분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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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3월 31일 프랑스 파리에는 프랑스 대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만국 박람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기념 조형물로 에펠탑이 세워졌습니다. 지식인들과 시민들이 철로 세워진 에펠탑 철거 시위를 벌였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20년 후에 철거하기로 하고 추진했습니다. 20년이 지난 1909년 다시 철거가 논의되었지만 꼭대기에 설치된 전파 송출장치 덕분에 철거 위기를 넘겼습니다. 이처럼 천박한 흉물로 취급을 받던 철탑, 에펠탑이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천덕꾸러기 철탑이 파리의 귀부인이 되었습니다. 2004년 한 해에 프랑스 외국 관광객이 2500만을 넘었는데, 프랑스 명소 제 1위가 에펠탑입니다. 왜 그리되었습니까? 단순히 노출효과 때문이었습니다. 이탑의 높이가 무려 332,75미터가 되기 때문에 시민들은 좋든, 싫든 눈만 뜨면 에펠탑을 봐야 했습니다. 이를 에펠탑 효과라고 합니다. 파리 시민들이 날마다 보니 에펠탑이 정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자주 보면 호감이 증가됩니다. 자꾸 보면, 보는 것만으로도 호감이 증가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자꾸 보면 말씀이 은혜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자꾸 주님께 예배를 드리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관계성이란 보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을 매일 바라보십시오. 성경을 매일 읽으십시오. 무시로 기도하십시오. 기회가 되는대로 전도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질 것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아무 부족함이 없는 포도원을 만드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의 극진한 사랑이 나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잊고 끊임없이 은혜를 배반하는 인간의 죄악상이 나타납니다. 이는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가져옵니다. 탐욕은 하나님을 외면토록 합니다. 하나님은 탐욕으로 은혜를 배반한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종들을 보내시고, 마침내는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기를 바랍니다.
첫째, 포도원을 주신 하나님(11:27-12:1)
12장 1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더니” 한 사람이 크고 아름다운 포도원을 만들고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사5:1,2). 도적이 틈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견고하게 쳤습니다. 또 즙을 짜는 구유를 파서 포도주나 포도 넥타 등을 만들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적의 침입을 사전에 알아볼 수 있도록 망대를 높이 세웠습니다. 주인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모든 환경을 완벽하게 갖추어 놓은 후에 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당시 농부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날품팔이들이었습니다. 일할 곳이 없어 빈둥빈둥 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주인의 특별한 은혜로 아름다운 포도원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포도원에 대한 소유권만 없을 뿐이지 경영권을 가진 실상 주인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주인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껏 자율경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주인이 떠나자 농부들은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과거 날품팔이 시절에는 주인의 눈치를 보며 시간을 때다 일당만 받아 가면 그만이었지만, 이제는 경영가의 위치에서 마음을 드려 일했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3년 정도 일하자 드디어 탐스러운 포도열매가 맺혔습니다. 농부들은 그 동안 돈 주고 사먹던 포도와는 그 맛이 달랐습니다. 포도나무는 보통 심은 지 3년 후에나 첫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나 세를 바칠 만큼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심은 지 5년 후부터 세를 받았습니다(레19:23-25). 그러므로 이 주인도 5년이 경과한 후에 세를 받으려고 그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여기서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받는 주인으로서 당연한 권리입니다. 보통 주인들은 소작농과 5:5 내지는 4:6으로 계약을 맺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주인은 농부들에게 1:10(십일조)만 바치도록 했습니다. 십분의 일은 주인과 농부들과의 관계를 유지시켜 주는 최소한의 것입니다. 이것만 드리면 농부들은 얼마든지 포도원을 경영할 수 있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농부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좀 더 넒은 의미로 보면 포도원은 세상을, 농부는 인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위하여 아무 부족함이 없는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각종 나무의 실과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게 하시고,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심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창2:16,17). 인간은 이 축복된 환경 가운데서 이 말씀에 순종하여 영적 질서를 지키며 사명을 감당하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범하여 에덴을 상실하자 만민 구속 역사를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 사명을 감당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축복하였습니다. 로마서9장 4,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영적 축복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양자로 삼으시고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과 약속을 주셨습니다. 온 세계가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예배제도를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모세, 다윗 등 많은 믿음의 조상들을 주셨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온 세상의 구주인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탄생하였습니다.
나 자신은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해 만드신 아름다운 포도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의 영인 성령을 우리 안에 내주케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각양 좋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가정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를 주셨고 귀여운 자녀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장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보고, 인재의 산실인 아름다운 캠퍼스 포도원에서 복음을 전하는 축복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열방을 향한 세계선교의 사명도 주셨습니다. 이 은혜와 특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청지기 의식이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가는 것을 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수고로 얻은 것인 양 착각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되돌려 드리기보다 더욱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는 시간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세상에는 수많은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필요를 채우는 손길을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주님께 감사하며 물질을 드리는 것을 아까워합니다. 그것은 시간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재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물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기 때문이요 청지기 의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은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 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 하셨사오니(삼하7:28)”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은사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12:2-12)
때가 되자 주인은 종을 보내어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2).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공항까지 나가서 영접하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의 종을 어떻게 대접했습니까? 3절을 보면 농부들은 주인의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종의 보고를 받은 주인은 당장에 달려가서 농부들을 요절을 내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4a절을 보면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농부들의 행실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동안 주인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다 보니 욕심이 생겨 순간적으로 실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종이 너무 거만하게 굴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훈련되고 성숙한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더욱 악해졌습니다(4b). 종을 능욕하였습니다. 종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다리에 기브스 한 채 목발을 집고 돌아왔습니다. 주인은 치명상을 입고 돌아온 종을 보고도 또 참았습니다. 당장 달려가 포도원을 빼앗아 다른 농부들에게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경우 농부들이 다시 과거처럼 날품팔이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불쌍하였습니다. 또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 해도 그들의 마음이 이 농부들처럼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주인은 어찌하든지 악한 농부들의 마음을 돌이키고, 관계성을 회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또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이제 그 종을 아예 죽여 버렸습니다. 주인은 계속하여 많은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계속해서 혹은 때리고, 혹은 죽였습니다.
주인은 이제 농부들에게 세를 받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보낼 만한 종들이 없었습니다. 이제 주인은 농부들에 대한 사랑을 거두어들이고 군대를 보내 그들을 진멸하고 다른 사람에게 포도원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6절을 보겠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이었습니다. 난폭해진 농부들에게 사랑하는 외아들을 보낸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농부들과 바른 관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외아들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에 대한 변치 않는 주인의 사랑과 신뢰를 보이는 길은 그 길 밖에 없었습니다. 주인은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보내면서 농부들이 자기 아들만큼은 공경하리라 기대했습니다. 아들만 공경하면 지금까지 행한 모든 죄악을 용서해 주고, 이전보다 더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 속에서 포도원을 맡기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외아들을 보낸 포도원 주인은 바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끝까지 변치 않는 사랑, 믿어 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 동안 수많은 종들을 보내는 가운데서 인간이 얼마나 악하고 죄악 된가를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이 아무리 죄악 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만은 영접하고 공경할 줄 알았습니다.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죄악 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사랑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기 위한 하나의 수순으로 예수님을 보낸 것이 아니라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보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믿어 주고, 기대를 걸고, 소망을 가져 주는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은 요한복음 2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망간 제자들을 찾아가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은혜를 배반한 사람은 원수보다 밉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배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베드로는 그의 서신서에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라고 기록하였습니다(벧전4:8).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 사랑(unchangeable love), 끝없는 사랑(endless love), 거룩한 사랑(holy love), 무조건적인 사랑(unconditional love) 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할 때 태산을 옮기는 믿음이 생겨나고 우리의 내면에 소망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의 외아들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의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던졌느니라(7,8).” 이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상속자인 줄 알고 고의적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포도원 밖에 던져 버렸습니다. 상속자만 죽이면 포도원이 자기들의 소유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은혜를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은혜를 잊고 교만해졌습니다. 이 때 그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악신이 들려 고통 하다가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 역사상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모두 은혜를 기억한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본래 시골에서 양을 치던 소년에 불과한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이요 목자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7:18)”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a)” 그는 자신을 구원하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격하여 외쳤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딤전1:15).”
둘째는 욕심의 미혹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15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이 왜 미혹됩니까? 욕심에 끌려 미혹됩니다. 미혹이란 낚시꾼이 고기를 잡을 때 미끼를 던지는 모습을 말합니다. 미끼는 아름답고 좋을수록 좋습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것을 던져서 꾑니다.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나타납니다(고후11:14). 사단이 에덴에서 아담을 유혹할 때 어떻게 유혹했습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았을 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느껴 이 미혹의 덫에 넘어가도록 했습니다. 한마디로 침이 ‘꼴깍’ 삼켜지도록 유혹했습니다. 롯도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할 때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습니까? 롯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는 음란과 광란의 도시였습니다. 다윗이 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했습니까? 한 여인의 목욕하는 심히 아름다운 것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죄악의 결과를 보여 주지 않고 쾌락만 보여 줍니다.
사단은 십자가가 없는 달콤한 것만을 보여 줍니다. 달콤한 유혹에는 반드시 사단의 덫이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죄는 우리에게 거부감이나 불쾌감을 주지 않습니다. 죄에도 낙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죄악의 낙이라 했습니다(히11:25). 모험, 스릴, 서스펜스 등이 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이 담배를 몰래 피우는 것은 몰래 피우는 스릴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청년의 때는 성적 유혹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중년의 때에는 혈기가, 그리고 노년에는 소위 노욕(老欲)으로 표현되는 탐욕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이러한 욕심과 유혹이 우리를 망하는 길로 가게 만듭니다.
우리가 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죄가 가져오는 궁극적인 결과가 사망이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 중심, 예수님만을 잡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예수 사라지면 다 망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야 구원이 있고, 회복이 있으며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께 가면 목적 있는 인생이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인생의 목표를 예수님께 두게 됩니다. 예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탐욕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9).” 주인은 아들까지 죽인 배은망덕한 원수들을 진멸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길이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치 않는 자들을 철저히 진멸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반드시 심판하시고 진멸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10,11).” 여기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또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은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삼 일만에 다시 살리셔서 인류 구속 역사의 초석이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역사입니다(11). 하나님은 기이한 방법으로 역사하셔서 승리를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실패가 없으신 하나님이시요, 승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건축자의 버린 돌과 같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낙오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기이한 방법으로 우리의 인생에 승리를 가져다주십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축복하시고 승리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버림받더라도 하나님께 택함 받는 종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포도원을 일터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축복을 누리는 길은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완악한 우리를 위해서 많은 종들을 보내 주시고, 최후에는 외아들을 보내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순간순간 완악한 마음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끝까지 나를 참아 주시고, 믿어 주시고, 소망을 걸어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청지기 직분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