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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가정의 달(말씀, 골3:18-4:1, 요절3:20)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라(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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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멸망사를 썼던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이 망한 원인 중의 하나가 가정의 무너짐을 들었습니다. 로마가 제국이 되고 부강한 나라가 되자 남자들은 가정을 팽개치고 사냥과 주연을 일삼았습니다. 부인들은 사치와 쾌락에 몰입하여 가정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랐을까요?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행복했을까요? 부모는 자녀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가정은 사회의 올바른 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 = 행복한 가족 = 행복한 사회란 도식이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면 나라도 무너집니다.
로마의 황실이나 고관대작들의 자제들이나 딸들이나 며느리나 사위 할 것 없이 모두가 성적인 방종으로 인해 가정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런 중에도 크리스천들은 소수였지만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황실은 경건하게 사는 그들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리고 황실은 그들을 딸을 며느리로 삼고 사위로 삼았습니다. 거룩한 이들의 삶이 결국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A. D.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정은 인간의 행복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릇이 깨지고 그릇이 깨끗하지 않으니 행복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행복을 담는 가정이 파괴되니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사회가 주는 문화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 축복하시는데 가정이 깨지니 복의 통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스본은 “가장 좋은 설교는 가정을 살리는 설교다”라고 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최초의 기관이요,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가장 영향을 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발달심리학자 테일러는 92%가 3세 이전에 문화화 사회화 과정을 다 겪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습니다. 에릭슨이라는 사회 심리학자는 3세까지 신뢰감과 본능적 욕구를 자제하는 자율성이 형성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동서를 막론하고 3세 이전의 시기를 아주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구성 요소는 부부와 자녀입니다. 다시 말해 부모와 자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살던 시대에는 종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종은 당시 가정의 구성 요소 중의 하나였습니다. 영어 family는 라틴어 familia에서 왔습니다. familia란 노예와 재산을 뜻합니다. 가족은 노예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과 토지 가옥 금전 등의 재산이 포함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희랍어로 οὶκος(오이코스)로, 영어의 economy의 어원입니다. 가족은 재산과 주거를 뜻합니다. 여기에서 가정이란 동거동찬, 동거동재, 동거공손이란 단어가 나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정의 원초적 구성 요소인 부부간의 윤리를 말씀합니다. 그 다음에 부모와 자녀간의 윤리를 말하고, 주인과 종과의 윤리를 말씀합니다. 이 윤리는 유교의 삼강오륜의 윤리가 아닙니다. 삼강오륜은 위아래 사람이 윗사람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것이라면 기독교 윤리는 상호간의 책임윤리, 그리스도 안에서의 책임 윤리입니다. 이 윤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이 책임을 다할 때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고, 학교나 직장에서 건강한 학생으로, 건강한 시민으로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남편은 남편으로서 책임을 다합니까? 아내는 아내로서의 책임을 다합니까? 자녀는 자녀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부모는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직장에서 상사로서 혹은 부하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첫째, 부부간의 책임(18,19)
18,19절을 읽겠습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복종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ὑποτάσσω휘포타쏘)’인데, ‘권고와 충고를 따른다’는 군대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계급대로 정돈시킨다. 질서 있게 배열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 사도는 가정의 질서를 위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복종은 약한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내들이 남편들에 비해 부족하고 약하기 때문에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동등한 인격 사이에서도 복종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 최고의 실례를 보여 주신 분이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동등하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성자 하나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철저히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주안에서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이 질서를 어기면 절대로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질서가 무너지면 가정이 무너집니다. 가정은 삶의 터, 토대입니다. 터가 무너져 보세요. 그 위에 지어진 건물은 다 무너집니다. “주안에서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의 명령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하심으로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종이란 언어는 남편이 그리스도에게로 나가는 길을 열어줍니다. 이는 아내의 머리됨이 남편이고, 남편의 머리됨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스 그렌이란 여인은 “여인이 남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남편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돕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잘 돕는 것은 남편이 특별히 잘 나서, 특별히 예뻐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남편이 예수님을 머리로 잘 받들 수 있도록 함에 있습니다.
전에 어떤 아내는 인격도 못 갖춘 남편에게 어떻게 복종하는가? 제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아내가 남편의 인격에 복종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남편이 돈이 있어서, 애들하고 먹고살아야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 때문에 순종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대학원생이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지도교수님께 순종한다면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비굴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굴이라는 단어보다 더 비굴한 단어는 없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에 머리된 그 역할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남편들은 아내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19절을 보겠습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먼저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가페’란 단어입니다. 당시에는 남녀 간의 사랑을 욕정에 기초한 에로스라는 단어가 보편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욕정이 아니라 아가페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아가페는 조건이 없는 사랑, 자신을 전부 내어 주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리고 19절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구절은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이 아내를 괴롭힐 소지가 많다는 것을 아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괴롭히지 말라’는 단어는 신체적 학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괴롭힌다’는 단어는 ‘독한 말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는 말입니다. 즉, 아내를 괴롭히지 말라는 언어폭력도 포함됩니다. 말은 모진 말로 아내에게 상처를 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여성은 남자보다 훨씬 정서적입니다. 남편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아내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아내가 무너지면 가정이 온전하게 설 수 없습니다. 아내란 말은 집 안의 해라는 뜻입니다. 집안에 해가 구름에 가려보세요. 햇볕이 없는 곳에 생명이 자랄 수 없고 열매가 맺을 수 없고 기쁨과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를 괴롭히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9-12절을 보면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 받았으되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아니하고 그리고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찰스 린드버드는 미국에서 프랑스까지 대서양을 횡단한 최초로 성공한 조종사입니다. 그는 세계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 앤은 남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나의 남편을 영웅이라고 말한다. 국가의 영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남편은 국가의 영웅이기에 앞서 아내인 나의 영웅이다. 그이는 또한 우리 가정의 영웅이다. 처음 결혼했을 때, 나는 심약하고 부끄러움 많고 신경질적이고 매사에 초조해 하는 그런 여자였다. 그러나 남편은 그런 나에게 ‘늘 당신은 할 수 있어. 당신은 넉넉히 그 일을 할 수 있어. 힘을 내야 합니다’ 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내 남편은 본인이 하늘을 날기에 앞서 아내인 나로 하여금 가능성의 하늘을 날개 한 진정한 영웅이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영웅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아내 위에 군림하고 아내를 학대하는 영웅들이 아니라, 아내를 세워주고 아내를 아름답게 만들고, 아내를 건강하게 하는 이런 영웅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영웅들이 있을 때 건강한 가정, 건강한 사회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남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둘째, 부모와 자녀간의 책임(20-21)
20,21절을 보겠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가정 내의 질서를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성경은 한 가정을 가정답게 세우고 남편을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서는 아내의 복종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과는 다릅니다. 자녀는 가정의 질서유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모에 게 순종하라는 순종의 단어는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단어가 똑같습니다.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모든 권위에 순종하는 기초가 됩니다. 그래서 10 계명 중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중 첫 번째 계명이 부모에게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학교에 가서도 선생님께 순종합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에 와서 목사님에게 순종합니다. 직장에 가서는 상사에게 순종합니다. 부모님에게 순종하지 않고 말썽 피우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권위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말썽 피우는 사람은 어디를 가나 말썽을 피웁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 나가도 새게 되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와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매우 중요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자녀로서 해야 할 순종은 선택적인 순종이 아니라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집안이 잘 되려면 아버지가 고개 숙인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가 고개를 들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도 살고 자녀도 삽니다. 효자 가운데서 인물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살지 않으면 가정이 죽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권위가 세워져야 합니다. 순종이란 단어의 원어는 ‘듣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논쟁하다가 ‘이것은 말씀이다’라고 하면 논쟁을 중단하고 굴복합니다. 유대인들이 1/3의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부모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한 결과가 아닌가 유추해 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부모 세대의 가치관을 골동품이라고 비하하고 그 가치관을 존중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은 골동품이 더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물론 부모의 약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부모에 대한 존경을 부모의 가치나 인격 여하에 따라 부모를 존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존경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자녀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순종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권위에 대한 순종의 훈련이 이루어지는 첫 번째 자리가 가정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의학자요, 상담가인 제임스 답슨은 미국의 민주주의적 교육이 크게 실패했다고 지적합니다. 그 실패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제까지 미국의 교육은 자율성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자율성을 강조하는 만큼 책임감을 강조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는 독립성을 강조했지만, 독립성 못지않게 중요한 권위에 대한 순종을 가르치는 일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미국은 지금 그 실패의 열매를 거두고 있다.” 여러분, 부모에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이제 부모의 책임을 말씀합니다. 2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왜 여기서 특별히 ‘아비들아’라고 그랬을까요? ‘에미들아’ 그러지 않고 아비들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가정의 지도자요 책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책임은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자녀 교육의 책임 또한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한국의 대다수 바쁜 아버지들은 자녀 교육을 아내에게 위임합니다. 성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 교육의 궁극적인 책임은 여전히 아버지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어느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가르치느라 그랬는지 몰라도 그 집에는 식탁에 아버지 의자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안 계실 때도 그 의자에는 아무도 앉지 않는 것이 그 가정의 법칙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출장 중이었는데, 그 집의 일곱 살 먹은 꼬마가 갑자기 아버지의 의자에 가서 앉았습니다. 어머니가 야단을 치려고 하다가 ‘네가 아빠가 되고 싶은 모양이지? 그래, 오늘 한번 만이다. 오늘은 네가 아빠 역할을 하렴’ 하며 특별히 허락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장난기가 발동한 누나가 옆에 있다가 동생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식사 끝나고 우리 숙제 좀 도와주셔요.’ 그랬더니 꼬마가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아빤 바쁘단다. 너희 엄마한테 물어 봐라.’ 그 아이의 대답 속에서 그 아빠의 평소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자녀들이 어떤 경우에 부모를 향해서 분노하고 반항하게 됩니까? 혹자는 세 가지 듭니다. 첫째는 지나치게 징계할 때, 둘째는 부모가 이중적인 모습을 보일 때, 셋째는 자녀에게 무관심할 때라고 합니다. 아이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야단도 치고, 설득도 하고, 매도 들어야 하지만, 부모도 인간인지라 감정적으로 격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아이들이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보다 부모들의 이중성입니다. 자녀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부모는 그렇게 살지 못할 때, 자녀들은 부모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고, 부모에 대해 반항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자녀들이 분노하는 것은 부모의 무관심입니다. 평소에는 관심도 기울여 주지 않다가, 무슨 잘못만 했다 하면 혼을 나게 되면 자녀들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이 ‘낙심’이라는 단어는 본래 ‘용기를 잃다’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곧 그들의 미래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들을 격노케 말라.’ 이 말은 다시 바꾸면 ‘자녀를 격려하라’는 말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가슴 뜨거운 격려는 우리 자녀들과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생명과 같은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케네디 전문가로 뉴스위크와 뉴욕 타임 기자를 지낸 에드워드 클라인이라는 사람이 쓴 ‘케네디 가의 저주’라는 책이 있습니다. 케네디의 할아버지 패트릭은 돈을 사취해서 애인과 함께 아일랜드를 탈출해서 미국행 이민선을 탔습니다. 케네디 일가가 미국에 이민을 온 것이 영국의 청교도들처럼 신앙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돈 때문에 도망을 친 것이었습니다. 아일랜드 출신들은 유난히 무시를 받습니다. 거기에다 조강지처 버리고 돈까지 사기를 쳐서 미국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십 년 동안 돈을 많이 벌다가 폐결핵으로 죽은 날이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죽은 11월 22일 날짜와 같았습니다. 패트릭의 아들이자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지프는 술을 만드는 양조장과 사기로 미국 전역에 술 문화를 공급했습니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에 가톨릭 신자라는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권력과 돈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들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케네디 어머니는 가톨릭의 신비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케네디는 아버지의 위선과 어머니의 광신을 냉소했습니다. 그래서 케네디가의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정서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너희들이 무조건 최고’라고 가르쳐서 자신들을 신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위험한 일을 개의치 않고 자기 파괴적 나르시즘에 빠져서 죽음으로 다가가는 잠재적 성향을 갖게 됐다는 겁니다.
그리고 케네디 가에 돈은 많았지만 애정 결핍으로 인해 가문의 공통된 성적 방탕함이 있게 됐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다 유명한 연예인들을 끼고 방탕한 생활을 했고, 케네디 대통령도 숱한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렸습니다. 케네디의 형은 혼자 경비행기 타고 가다가 추락해서 죽고, 아들이 죽고, 암살당해서 죽고, 강간하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몇 해 전 죽은 케네디 대통령의 아들도 비행기 사고를 당했을 때 이혼 준지 중이었습니다. 그 부인도 코카인 중독이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재클린은 돈 때문에 재혼을 하고, 그 남편도 죽고, 기울고 계속 수치를 당했습니다. 에드워드 클라인은 다음 저주의 희생자가 누구인지 지켜보자고 하면서 책을 맺었습니다.
우리는 가정을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대로 세워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는 보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를 격려하고 낙심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정은 일절 깨끗함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거룩함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라(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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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멸망사를 썼던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이 망한 원인 중의 하나가 가정의 무너짐을 들었습니다. 로마가 제국이 되고 부강한 나라가 되자 남자들은 가정을 팽개치고 사냥과 주연을 일삼았습니다. 부인들은 사치와 쾌락에 몰입하여 가정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랐을까요?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행복했을까요? 부모는 자녀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가정은 사회의 올바른 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 = 행복한 가족 = 행복한 사회란 도식이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면 나라도 무너집니다.
로마의 황실이나 고관대작들의 자제들이나 딸들이나 며느리나 사위 할 것 없이 모두가 성적인 방종으로 인해 가정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런 중에도 크리스천들은 소수였지만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황실은 경건하게 사는 그들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리고 황실은 그들을 딸을 며느리로 삼고 사위로 삼았습니다. 거룩한 이들의 삶이 결국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A. D.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정은 인간의 행복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릇이 깨지고 그릇이 깨끗하지 않으니 행복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행복을 담는 가정이 파괴되니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사회가 주는 문화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 축복하시는데 가정이 깨지니 복의 통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스본은 “가장 좋은 설교는 가정을 살리는 설교다”라고 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최초의 기관이요,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가장 영향을 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발달심리학자 테일러는 92%가 3세 이전에 문화화 사회화 과정을 다 겪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습니다. 에릭슨이라는 사회 심리학자는 3세까지 신뢰감과 본능적 욕구를 자제하는 자율성이 형성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동서를 막론하고 3세 이전의 시기를 아주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구성 요소는 부부와 자녀입니다. 다시 말해 부모와 자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살던 시대에는 종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종은 당시 가정의 구성 요소 중의 하나였습니다. 영어 family는 라틴어 familia에서 왔습니다. familia란 노예와 재산을 뜻합니다. 가족은 노예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과 토지 가옥 금전 등의 재산이 포함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희랍어로 οὶκος(오이코스)로, 영어의 economy의 어원입니다. 가족은 재산과 주거를 뜻합니다. 여기에서 가정이란 동거동찬, 동거동재, 동거공손이란 단어가 나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정의 원초적 구성 요소인 부부간의 윤리를 말씀합니다. 그 다음에 부모와 자녀간의 윤리를 말하고, 주인과 종과의 윤리를 말씀합니다. 이 윤리는 유교의 삼강오륜의 윤리가 아닙니다. 삼강오륜은 위아래 사람이 윗사람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것이라면 기독교 윤리는 상호간의 책임윤리, 그리스도 안에서의 책임 윤리입니다. 이 윤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이 책임을 다할 때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고, 학교나 직장에서 건강한 학생으로, 건강한 시민으로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남편은 남편으로서 책임을 다합니까? 아내는 아내로서의 책임을 다합니까? 자녀는 자녀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부모는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직장에서 상사로서 혹은 부하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첫째, 부부간의 책임(18,19)
18,19절을 읽겠습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복종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ὑποτάσσω휘포타쏘)’인데, ‘권고와 충고를 따른다’는 군대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계급대로 정돈시킨다. 질서 있게 배열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 사도는 가정의 질서를 위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복종은 약한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내들이 남편들에 비해 부족하고 약하기 때문에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동등한 인격 사이에서도 복종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 최고의 실례를 보여 주신 분이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동등하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성자 하나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철저히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주안에서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이 질서를 어기면 절대로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질서가 무너지면 가정이 무너집니다. 가정은 삶의 터, 토대입니다. 터가 무너져 보세요. 그 위에 지어진 건물은 다 무너집니다. “주안에서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의 명령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하심으로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종이란 언어는 남편이 그리스도에게로 나가는 길을 열어줍니다. 이는 아내의 머리됨이 남편이고, 남편의 머리됨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스 그렌이란 여인은 “여인이 남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남편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돕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잘 돕는 것은 남편이 특별히 잘 나서, 특별히 예뻐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남편이 예수님을 머리로 잘 받들 수 있도록 함에 있습니다.
전에 어떤 아내는 인격도 못 갖춘 남편에게 어떻게 복종하는가? 제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아내가 남편의 인격에 복종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남편이 돈이 있어서, 애들하고 먹고살아야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 때문에 순종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대학원생이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지도교수님께 순종한다면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비굴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굴이라는 단어보다 더 비굴한 단어는 없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에 머리된 그 역할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남편들은 아내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19절을 보겠습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먼저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가페’란 단어입니다. 당시에는 남녀 간의 사랑을 욕정에 기초한 에로스라는 단어가 보편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욕정이 아니라 아가페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아가페는 조건이 없는 사랑, 자신을 전부 내어 주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리고 19절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구절은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이 아내를 괴롭힐 소지가 많다는 것을 아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괴롭히지 말라’는 단어는 신체적 학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괴롭힌다’는 단어는 ‘독한 말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는 말입니다. 즉, 아내를 괴롭히지 말라는 언어폭력도 포함됩니다. 말은 모진 말로 아내에게 상처를 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여성은 남자보다 훨씬 정서적입니다. 남편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아내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아내가 무너지면 가정이 온전하게 설 수 없습니다. 아내란 말은 집 안의 해라는 뜻입니다. 집안에 해가 구름에 가려보세요. 햇볕이 없는 곳에 생명이 자랄 수 없고 열매가 맺을 수 없고 기쁨과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를 괴롭히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9-12절을 보면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 받았으되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아니하고 그리고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찰스 린드버드는 미국에서 프랑스까지 대서양을 횡단한 최초로 성공한 조종사입니다. 그는 세계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 앤은 남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나의 남편을 영웅이라고 말한다. 국가의 영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남편은 국가의 영웅이기에 앞서 아내인 나의 영웅이다. 그이는 또한 우리 가정의 영웅이다. 처음 결혼했을 때, 나는 심약하고 부끄러움 많고 신경질적이고 매사에 초조해 하는 그런 여자였다. 그러나 남편은 그런 나에게 ‘늘 당신은 할 수 있어. 당신은 넉넉히 그 일을 할 수 있어. 힘을 내야 합니다’ 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내 남편은 본인이 하늘을 날기에 앞서 아내인 나로 하여금 가능성의 하늘을 날개 한 진정한 영웅이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영웅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아내 위에 군림하고 아내를 학대하는 영웅들이 아니라, 아내를 세워주고 아내를 아름답게 만들고, 아내를 건강하게 하는 이런 영웅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영웅들이 있을 때 건강한 가정, 건강한 사회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남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둘째, 부모와 자녀간의 책임(20-21)
20,21절을 보겠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가정 내의 질서를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성경은 한 가정을 가정답게 세우고 남편을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서는 아내의 복종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과는 다릅니다. 자녀는 가정의 질서유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모에 게 순종하라는 순종의 단어는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단어가 똑같습니다.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모든 권위에 순종하는 기초가 됩니다. 그래서 10 계명 중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중 첫 번째 계명이 부모에게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학교에 가서도 선생님께 순종합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에 와서 목사님에게 순종합니다. 직장에 가서는 상사에게 순종합니다. 부모님에게 순종하지 않고 말썽 피우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권위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말썽 피우는 사람은 어디를 가나 말썽을 피웁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 나가도 새게 되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와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매우 중요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자녀로서 해야 할 순종은 선택적인 순종이 아니라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집안이 잘 되려면 아버지가 고개 숙인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가 고개를 들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도 살고 자녀도 삽니다. 효자 가운데서 인물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살지 않으면 가정이 죽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권위가 세워져야 합니다. 순종이란 단어의 원어는 ‘듣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논쟁하다가 ‘이것은 말씀이다’라고 하면 논쟁을 중단하고 굴복합니다. 유대인들이 1/3의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부모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한 결과가 아닌가 유추해 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부모 세대의 가치관을 골동품이라고 비하하고 그 가치관을 존중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은 골동품이 더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물론 부모의 약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부모에 대한 존경을 부모의 가치나 인격 여하에 따라 부모를 존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존경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자녀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순종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권위에 대한 순종의 훈련이 이루어지는 첫 번째 자리가 가정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의학자요, 상담가인 제임스 답슨은 미국의 민주주의적 교육이 크게 실패했다고 지적합니다. 그 실패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제까지 미국의 교육은 자율성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자율성을 강조하는 만큼 책임감을 강조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는 독립성을 강조했지만, 독립성 못지않게 중요한 권위에 대한 순종을 가르치는 일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미국은 지금 그 실패의 열매를 거두고 있다.” 여러분, 부모에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이제 부모의 책임을 말씀합니다. 2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왜 여기서 특별히 ‘아비들아’라고 그랬을까요? ‘에미들아’ 그러지 않고 아비들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가정의 지도자요 책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책임은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자녀 교육의 책임 또한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한국의 대다수 바쁜 아버지들은 자녀 교육을 아내에게 위임합니다. 성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 교육의 궁극적인 책임은 여전히 아버지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어느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가르치느라 그랬는지 몰라도 그 집에는 식탁에 아버지 의자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안 계실 때도 그 의자에는 아무도 앉지 않는 것이 그 가정의 법칙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출장 중이었는데, 그 집의 일곱 살 먹은 꼬마가 갑자기 아버지의 의자에 가서 앉았습니다. 어머니가 야단을 치려고 하다가 ‘네가 아빠가 되고 싶은 모양이지? 그래, 오늘 한번 만이다. 오늘은 네가 아빠 역할을 하렴’ 하며 특별히 허락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장난기가 발동한 누나가 옆에 있다가 동생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식사 끝나고 우리 숙제 좀 도와주셔요.’ 그랬더니 꼬마가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아빤 바쁘단다. 너희 엄마한테 물어 봐라.’ 그 아이의 대답 속에서 그 아빠의 평소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자녀들이 어떤 경우에 부모를 향해서 분노하고 반항하게 됩니까? 혹자는 세 가지 듭니다. 첫째는 지나치게 징계할 때, 둘째는 부모가 이중적인 모습을 보일 때, 셋째는 자녀에게 무관심할 때라고 합니다. 아이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야단도 치고, 설득도 하고, 매도 들어야 하지만, 부모도 인간인지라 감정적으로 격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아이들이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보다 부모들의 이중성입니다. 자녀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부모는 그렇게 살지 못할 때, 자녀들은 부모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고, 부모에 대해 반항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자녀들이 분노하는 것은 부모의 무관심입니다. 평소에는 관심도 기울여 주지 않다가, 무슨 잘못만 했다 하면 혼을 나게 되면 자녀들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이 ‘낙심’이라는 단어는 본래 ‘용기를 잃다’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곧 그들의 미래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들을 격노케 말라.’ 이 말은 다시 바꾸면 ‘자녀를 격려하라’는 말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가슴 뜨거운 격려는 우리 자녀들과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생명과 같은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케네디 전문가로 뉴스위크와 뉴욕 타임 기자를 지낸 에드워드 클라인이라는 사람이 쓴 ‘케네디 가의 저주’라는 책이 있습니다. 케네디의 할아버지 패트릭은 돈을 사취해서 애인과 함께 아일랜드를 탈출해서 미국행 이민선을 탔습니다. 케네디 일가가 미국에 이민을 온 것이 영국의 청교도들처럼 신앙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돈 때문에 도망을 친 것이었습니다. 아일랜드 출신들은 유난히 무시를 받습니다. 거기에다 조강지처 버리고 돈까지 사기를 쳐서 미국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십 년 동안 돈을 많이 벌다가 폐결핵으로 죽은 날이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죽은 11월 22일 날짜와 같았습니다. 패트릭의 아들이자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지프는 술을 만드는 양조장과 사기로 미국 전역에 술 문화를 공급했습니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에 가톨릭 신자라는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권력과 돈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들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케네디 어머니는 가톨릭의 신비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케네디는 아버지의 위선과 어머니의 광신을 냉소했습니다. 그래서 케네디가의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정서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너희들이 무조건 최고’라고 가르쳐서 자신들을 신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위험한 일을 개의치 않고 자기 파괴적 나르시즘에 빠져서 죽음으로 다가가는 잠재적 성향을 갖게 됐다는 겁니다.
그리고 케네디 가에 돈은 많았지만 애정 결핍으로 인해 가문의 공통된 성적 방탕함이 있게 됐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다 유명한 연예인들을 끼고 방탕한 생활을 했고, 케네디 대통령도 숱한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렸습니다. 케네디의 형은 혼자 경비행기 타고 가다가 추락해서 죽고, 아들이 죽고, 암살당해서 죽고, 강간하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몇 해 전 죽은 케네디 대통령의 아들도 비행기 사고를 당했을 때 이혼 준지 중이었습니다. 그 부인도 코카인 중독이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재클린은 돈 때문에 재혼을 하고, 그 남편도 죽고, 기울고 계속 수치를 당했습니다. 에드워드 클라인은 다음 저주의 희생자가 누구인지 지켜보자고 하면서 책을 맺었습니다.
우리는 가정을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대로 세워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는 보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를 격려하고 낙심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정은 일절 깨끗함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거룩함이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