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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제 44 강 (13:14-37, 요절 13:33)
깨어 있으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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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크게 여섯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이는 교만과 자만이 아닌 낮아지심과 겸손입니다. 둘째는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아픔과 외로움과 고통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화해, 이웃과의 화해입니다. 셋째는 부활의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의 역사가 아닌 살아나는 부활의 역사요 생명의 역사입니다. 넷째는 승천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만왕의 왕으로서의 선포입니다. 다섯째는 오순절의 성령강림입니다. 이는 교회의 탄생으로, 기적과 복음의 증인된 삶, 그리고 세계선교와 부흥의 역사입니다. 여섯째는 재림입니다. 이는 마지막 승리로, 미래의 승리와 영광스러운 환희입니다.
성경 곳곳에 재림에 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본문은 재림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오셨을 때에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모습으로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가난하고 슬픈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종의 형상을 입고 오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배척당하시고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영광과 큰 능력으로 심판주로서 오십니다. 그 때에는 가시 면류관 대신 금 면류관을 쓰시고, 홍포 대신에 가슴에는 금띠를 띤 빛난 옷을 입고 오십니다. 그 손에는 심판하실 홀을 들고 오십니다. 그 때에는 조용히 오시는 것이 아니라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수많은 천군 천사들의 우렁찬 나팔소리가 사방에 퍼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어느 때 오실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다만 우리는 여러 징조를 통해 재림의 임박함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종말의 징조와 종말의 때에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깨어서 재림을 준비하는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종말의 징조(14-27절)
우리는 주님의 재림 때를 알 수 없지만 여러 징조를 통해서 재림의 때가 임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말의 때에 나타나는 징조가 무엇입니까? 14절은 로마 군대로부터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있을 대환난의 그림자인 동시에 영적인 타락상에 대한 예고이기도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을 보면 종말의 때에 나타나는 영적인 타락상이 나옵니다. 종말의 때에는 가치관이 전도되어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다가 자긍하며 교만하게 됩니다. 훼방하여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질서가 무너져 가정이 해체됩니다. 감사하며 거룩한 생활보다 사납고 거칠고 배반하고 조급하며 한을 품고 삽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합니다.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어 이웃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모습이 아닙니까?
19-25절을 보면 종말의 때에 대 환난이 일어나는데 이 환난은 전무후무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날을 감하지 않으시면 구원받을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중에도 택하신 백성들을 위하여 그 날을 감하여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20b). 그리고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하여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택함 받은 백성들 미혹합니다. 이단들의 특징은 믿는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구원파가 그러하고 큰 믿음교회가 그러하고 신천지가 그러하고 안상홍의 하나님의 교회가 그러합니다. 그리고 우주 천체에 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때는 해가 어두워져 빛을 내지 않게 됩니다. 해가 한 순간이라도 비추이지 않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온도가 마이너스 몇 백도로 급강하 하여 모든 생물이 동사하는 끔찍한 사건이 순식간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날에는 해가 어두워지고 자연히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낙엽 떨어지듯이 우수수 떨어지게 되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게 되는 엄청난 이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때에 주님이 재림하십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그 때에 주님이 구름을 타고 천군천사들의 우렁찬 나팔소리와 함께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게 됩니다. 주님이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27절을 보겠습니다. “또 그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그날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읍니다.
이 날은 주와 복음을 위하여 산 자들에게는 영광의 날입니다. 이 날에 예수님은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21장 1-4절에서 마지막 날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한 것과 같습니다. 그 곳에서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하십니다. 그 때 주님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많은 눈물을 흘린 주님의 자녀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주님은 모든 고통과 슬픔을 없애 주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머리에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됩니다. 반면에 이 날은 세상과 죄악의 욕망을 좇아 살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보다 세상 욕심을 사랑했던 자들에게는 울며 이를 갈고 통곡하는 날이 됩니다. 이 날은 복음을 믿지 않은 자들에게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과 유황불 못에 던져 버림을 받는 날이 되기도 합니다(계21:8).
이상에서 볼 때 인류 역사의 시작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로 시작되었지만, 인류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이 심판주로서 인류 역사의 중심이 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희망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사람은 희망이 없으면 살아 갈 수 없습니다. 희망은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희망을 붙들고 살았는데 그 희망이 거짓된 희망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인생은 그야말로 가장 비참하고 가장 절망적인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참된 희망을 붙들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희망을 두고 삽니다. 많은 사람들이 권력이나 세상 영광에 희망을 두고 삽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벧전1:24절).
우리의 진정한 희망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온 세상을 그 뜻대로 통치하시고 장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러 오실 우리 주 예수님뿐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예수님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재림하실 주님을 붙들고 살아야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둘째, 우리의 삶의 자세(28-37)
첫째는 세상 것들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14-20).
14절을 보면 이런 징조가 보이면 신자들은 속히 산으로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침공을 받았을 때 예루살렘 성전이 안전할 줄로 알고 성전에 있다가 최후의 멸망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기억하고 요단 계곡인 펠라로 피난 간 사람들은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그날에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바로 도망을 가야 됩니다(15,16). 집에 무엇을 가지러 가서는 안 됩니다. 또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를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야 됩니다. 겉옷은 유대인들의 생활필수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것까지도 가지러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환난이 급박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들에 매이게 되면 환난의 날을 피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하나님의 천사는 롯의 아내에게 소돔과 고모라가 불과 유황불에 탈 때에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녀가 평소에 물질에 가치관을 두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가치관은 갑자기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훈련을 통해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세상과 물질에 미련을 버리고 삶의 무게를 줄이며 가볍게 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사람들과 젖을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게 됩니다. 도망을 가지 못하기 때문에 화를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환난의 날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18). 겨울에는 환난 중에 피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징조를 보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29-30).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28.29) 무화과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격동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징조를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이 시대가 지나가기 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현재적인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30).
셋째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31-37).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실 지 아무도 모릅니다(32). 천사도 예수님 자신도 모릅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만 아십니다. 재림의 때는 오직 아버지의 주권에 속한 일이기 때문에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올 지 알 수 없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처럼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35). 본문에는 ‘깨어 있으라’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33-35,37). 깨어 있으란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영적 긴장 상태를 풀지 말고 종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종말 신앙을 가지고 살라는 것은 현실을 도피하여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고 또 후회함이 없이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살 때 인생 전체가 후회함이 없는 삶이 됩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종말 신앙을 가지고 사는 자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주님께 유익을 남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모두에게 사명과 은사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아낌없이 사용해야 합니다. 겨우 믿음의 중심만 지키는 소극적인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적극적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인생이 긴 것 같지만 그렇게 길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생을 75년 정도를 산다고 할 때 그 75년을 어떻게 사용하며 사는지 설명했습니다. 20년은 잠자는 데, 20년은 일하는데, 7년은 노는데, 6년은 먹는데, 5년은 텔레비전 보는데, 5년은 내가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고민하며 옷을 사는 등 쇼핑에 시간을 보내고, 3년은 누군가를 만나고 기다리는 일에 소모하고, 2년 반은 화장실에서, 2년 반은 잡념과 잡생각을, 그리고 2년은 차를 마시는 일에, 그리고 1년은 전화 받는 일 등에 75년의 시간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사용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속도로 계산하여 10대는 10km로 달리고, 20대는 20km, 30대는 30km로 달리다가 50대, 60대가 되면 가속도가 붙어서 70 내지 140km로 달리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인생 후반부에 가서는 세월이 훨씬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화살처럼 빨리 날아가는 이 짧은 인생에서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가장 힘써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주님께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까? 내 일만 하다가 주님의 일을 할 시간이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을까요? 그때는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방황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가 일생 감당해야 할 분명한 사명을 찾아야 합니다. 사명을 찾았으면 혼신의 힘을 다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 뿐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짧은 생애 동안 엄청나고 극적인 성취를 이룬 모델을 든다면 요한 웨슬리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웨슬리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10시간 후에 오셔서 우리 생애의 종말이 된다면 그 동안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이때 웨슬리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평소처럼 내가 계획한 대로 살 것입니다.” 이 짧은 대답을 통해 그의 삶이 얼마나 철저하게 기도와 계획 속에 주어진 일을 충성스럽게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됩니다.
셋째로 준비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 지라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13절은 재림에 대비한 삶을 열 처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마25:2-4)” 기름을 준비하는 여하에 따라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로 나누어졌습니다. 당시 등불은 신랑의 안내와 환영의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습니다. 특히 당시에는 교통 사정이 좋지 않아 신랑이 늦게 오는 경우가 있어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등만 준비했습니다. 반면에 슬기 있는 다섯 처녀들은 기름까지 준비했습니다. 때가 되어 열 처녀들은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신랑이 예정 시간보다 훨씬 늦었는데도 오지 않았습니다. 밤은 점점 깊어 갔습니다. 열 처녀들은 신랑을 기다리다가 지쳐 졸다가 그만 자 버렸습니다. 한밤중이 되었습니다. 그 때 소리가 났습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열 처녀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 등불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다섯 처녀들의 등불은 기름이 없어 가물거렸습니다. 결국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신랑이 오는 시간을 자기 나름대로 생각했습니다. 등에 기름이 없어지기 전에 신랑이 올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 때 기름통을 들고 있는 친구들을 보고 “무겁게 기름통은 왜 들고 있니? 얘, 우리가 부담스럽다” 하며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신랑은 그들이 계산한 시간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생각이 깊지 못하고 근시안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생각이 깊지 못해 더디 올 것까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생각이 깊지 못해 먼 장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의 현실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미련한 사람들은 현실만을 바라보고 먼 장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비전이 없고 저 높은 곳으로 향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랑이 더디 온다 할지라도 기름을 빌려 쓰고자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어떻게 해결하여 나갔습니다. 그들의 철학은 ‘닥치면 어떻게 되겠지, 지금까지도 해왔는데’ 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기름을 준비하려면 시간과 물질을 투자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고, 헌신을 싫어하고, 안일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재림의 날에 심판과 멸망을 받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자들은 마음을 다하여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슬기롭다’는 것은 생각이 깊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고, 주와 복음을 위해 투자하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실 예수님을 사모했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준비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마치시고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아무도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또한 세상을 떠날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그 날이 임하더라도 주님을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영어 속담에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Opportunity comes to those who are ready.)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기회가 와도 기회를 잡을 수 없습니다. 문이 열려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버스가 지나간 후에야 손을 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준비된 분은 기회가 오고 문이 열리면 즉시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케일이 크고 웅장합니다. 현재 손익계산을 따지지 않습니다. 먼 장래를 바라보고 과감하게 시간을 투자하고 물질을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 쓰임 받고 열매를 맺는 분들을 보면 모두 이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근시안적인 삶을 살 것이 아닙니다. 10년, 20년을 내다보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준비하여 장차 오실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만일 우리가 영적 안일에 빠져 있을 때 주님이 재림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면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주님께서 오신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는 그 때 주 예수여, 오서서 아멘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광스러운 인자의 재림을 소망하며 준비하고 깨어서 주님께서 맡기신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깨어 있으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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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크게 여섯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이는 교만과 자만이 아닌 낮아지심과 겸손입니다. 둘째는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아픔과 외로움과 고통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화해, 이웃과의 화해입니다. 셋째는 부활의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의 역사가 아닌 살아나는 부활의 역사요 생명의 역사입니다. 넷째는 승천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만왕의 왕으로서의 선포입니다. 다섯째는 오순절의 성령강림입니다. 이는 교회의 탄생으로, 기적과 복음의 증인된 삶, 그리고 세계선교와 부흥의 역사입니다. 여섯째는 재림입니다. 이는 마지막 승리로, 미래의 승리와 영광스러운 환희입니다.
성경 곳곳에 재림에 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본문은 재림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오셨을 때에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모습으로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가난하고 슬픈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종의 형상을 입고 오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배척당하시고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영광과 큰 능력으로 심판주로서 오십니다. 그 때에는 가시 면류관 대신 금 면류관을 쓰시고, 홍포 대신에 가슴에는 금띠를 띤 빛난 옷을 입고 오십니다. 그 손에는 심판하실 홀을 들고 오십니다. 그 때에는 조용히 오시는 것이 아니라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수많은 천군 천사들의 우렁찬 나팔소리가 사방에 퍼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어느 때 오실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다만 우리는 여러 징조를 통해 재림의 임박함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종말의 징조와 종말의 때에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깨어서 재림을 준비하는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종말의 징조(14-27절)
우리는 주님의 재림 때를 알 수 없지만 여러 징조를 통해서 재림의 때가 임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말의 때에 나타나는 징조가 무엇입니까? 14절은 로마 군대로부터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있을 대환난의 그림자인 동시에 영적인 타락상에 대한 예고이기도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을 보면 종말의 때에 나타나는 영적인 타락상이 나옵니다. 종말의 때에는 가치관이 전도되어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다가 자긍하며 교만하게 됩니다. 훼방하여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질서가 무너져 가정이 해체됩니다. 감사하며 거룩한 생활보다 사납고 거칠고 배반하고 조급하며 한을 품고 삽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합니다.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어 이웃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모습이 아닙니까?
19-25절을 보면 종말의 때에 대 환난이 일어나는데 이 환난은 전무후무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날을 감하지 않으시면 구원받을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중에도 택하신 백성들을 위하여 그 날을 감하여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20b). 그리고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하여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택함 받은 백성들 미혹합니다. 이단들의 특징은 믿는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구원파가 그러하고 큰 믿음교회가 그러하고 신천지가 그러하고 안상홍의 하나님의 교회가 그러합니다. 그리고 우주 천체에 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때는 해가 어두워져 빛을 내지 않게 됩니다. 해가 한 순간이라도 비추이지 않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온도가 마이너스 몇 백도로 급강하 하여 모든 생물이 동사하는 끔찍한 사건이 순식간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날에는 해가 어두워지고 자연히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낙엽 떨어지듯이 우수수 떨어지게 되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게 되는 엄청난 이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때에 주님이 재림하십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그 때에 주님이 구름을 타고 천군천사들의 우렁찬 나팔소리와 함께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게 됩니다. 주님이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27절을 보겠습니다. “또 그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그날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읍니다.
이 날은 주와 복음을 위하여 산 자들에게는 영광의 날입니다. 이 날에 예수님은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21장 1-4절에서 마지막 날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한 것과 같습니다. 그 곳에서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하십니다. 그 때 주님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많은 눈물을 흘린 주님의 자녀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주님은 모든 고통과 슬픔을 없애 주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머리에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됩니다. 반면에 이 날은 세상과 죄악의 욕망을 좇아 살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보다 세상 욕심을 사랑했던 자들에게는 울며 이를 갈고 통곡하는 날이 됩니다. 이 날은 복음을 믿지 않은 자들에게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과 유황불 못에 던져 버림을 받는 날이 되기도 합니다(계21:8).
이상에서 볼 때 인류 역사의 시작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로 시작되었지만, 인류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이 심판주로서 인류 역사의 중심이 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희망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사람은 희망이 없으면 살아 갈 수 없습니다. 희망은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희망을 붙들고 살았는데 그 희망이 거짓된 희망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인생은 그야말로 가장 비참하고 가장 절망적인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참된 희망을 붙들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희망을 두고 삽니다. 많은 사람들이 권력이나 세상 영광에 희망을 두고 삽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벧전1:24절).
우리의 진정한 희망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온 세상을 그 뜻대로 통치하시고 장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러 오실 우리 주 예수님뿐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예수님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재림하실 주님을 붙들고 살아야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둘째, 우리의 삶의 자세(28-37)
첫째는 세상 것들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14-20).
14절을 보면 이런 징조가 보이면 신자들은 속히 산으로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침공을 받았을 때 예루살렘 성전이 안전할 줄로 알고 성전에 있다가 최후의 멸망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기억하고 요단 계곡인 펠라로 피난 간 사람들은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그날에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바로 도망을 가야 됩니다(15,16). 집에 무엇을 가지러 가서는 안 됩니다. 또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를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야 됩니다. 겉옷은 유대인들의 생활필수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것까지도 가지러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환난이 급박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들에 매이게 되면 환난의 날을 피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하나님의 천사는 롯의 아내에게 소돔과 고모라가 불과 유황불에 탈 때에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녀가 평소에 물질에 가치관을 두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가치관은 갑자기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훈련을 통해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세상과 물질에 미련을 버리고 삶의 무게를 줄이며 가볍게 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사람들과 젖을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게 됩니다. 도망을 가지 못하기 때문에 화를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환난의 날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18). 겨울에는 환난 중에 피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징조를 보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29-30).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28.29) 무화과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격동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징조를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이 시대가 지나가기 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현재적인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30).
셋째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31-37).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실 지 아무도 모릅니다(32). 천사도 예수님 자신도 모릅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만 아십니다. 재림의 때는 오직 아버지의 주권에 속한 일이기 때문에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올 지 알 수 없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처럼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35). 본문에는 ‘깨어 있으라’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33-35,37). 깨어 있으란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영적 긴장 상태를 풀지 말고 종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종말 신앙을 가지고 살라는 것은 현실을 도피하여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고 또 후회함이 없이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살 때 인생 전체가 후회함이 없는 삶이 됩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종말 신앙을 가지고 사는 자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주님께 유익을 남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모두에게 사명과 은사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아낌없이 사용해야 합니다. 겨우 믿음의 중심만 지키는 소극적인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적극적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인생이 긴 것 같지만 그렇게 길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생을 75년 정도를 산다고 할 때 그 75년을 어떻게 사용하며 사는지 설명했습니다. 20년은 잠자는 데, 20년은 일하는데, 7년은 노는데, 6년은 먹는데, 5년은 텔레비전 보는데, 5년은 내가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고민하며 옷을 사는 등 쇼핑에 시간을 보내고, 3년은 누군가를 만나고 기다리는 일에 소모하고, 2년 반은 화장실에서, 2년 반은 잡념과 잡생각을, 그리고 2년은 차를 마시는 일에, 그리고 1년은 전화 받는 일 등에 75년의 시간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사용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속도로 계산하여 10대는 10km로 달리고, 20대는 20km, 30대는 30km로 달리다가 50대, 60대가 되면 가속도가 붙어서 70 내지 140km로 달리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인생 후반부에 가서는 세월이 훨씬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화살처럼 빨리 날아가는 이 짧은 인생에서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가장 힘써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주님께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까? 내 일만 하다가 주님의 일을 할 시간이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을까요? 그때는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방황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가 일생 감당해야 할 분명한 사명을 찾아야 합니다. 사명을 찾았으면 혼신의 힘을 다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 뿐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짧은 생애 동안 엄청나고 극적인 성취를 이룬 모델을 든다면 요한 웨슬리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웨슬리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10시간 후에 오셔서 우리 생애의 종말이 된다면 그 동안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이때 웨슬리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평소처럼 내가 계획한 대로 살 것입니다.” 이 짧은 대답을 통해 그의 삶이 얼마나 철저하게 기도와 계획 속에 주어진 일을 충성스럽게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됩니다.
셋째로 준비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 지라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13절은 재림에 대비한 삶을 열 처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마25:2-4)” 기름을 준비하는 여하에 따라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로 나누어졌습니다. 당시 등불은 신랑의 안내와 환영의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습니다. 특히 당시에는 교통 사정이 좋지 않아 신랑이 늦게 오는 경우가 있어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등만 준비했습니다. 반면에 슬기 있는 다섯 처녀들은 기름까지 준비했습니다. 때가 되어 열 처녀들은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신랑이 예정 시간보다 훨씬 늦었는데도 오지 않았습니다. 밤은 점점 깊어 갔습니다. 열 처녀들은 신랑을 기다리다가 지쳐 졸다가 그만 자 버렸습니다. 한밤중이 되었습니다. 그 때 소리가 났습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열 처녀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 등불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다섯 처녀들의 등불은 기름이 없어 가물거렸습니다. 결국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신랑이 오는 시간을 자기 나름대로 생각했습니다. 등에 기름이 없어지기 전에 신랑이 올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 때 기름통을 들고 있는 친구들을 보고 “무겁게 기름통은 왜 들고 있니? 얘, 우리가 부담스럽다” 하며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신랑은 그들이 계산한 시간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생각이 깊지 못하고 근시안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생각이 깊지 못해 더디 올 것까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생각이 깊지 못해 먼 장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의 현실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미련한 사람들은 현실만을 바라보고 먼 장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비전이 없고 저 높은 곳으로 향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랑이 더디 온다 할지라도 기름을 빌려 쓰고자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어떻게 해결하여 나갔습니다. 그들의 철학은 ‘닥치면 어떻게 되겠지, 지금까지도 해왔는데’ 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기름을 준비하려면 시간과 물질을 투자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고, 헌신을 싫어하고, 안일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재림의 날에 심판과 멸망을 받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자들은 마음을 다하여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슬기롭다’는 것은 생각이 깊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고, 주와 복음을 위해 투자하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실 예수님을 사모했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준비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마치시고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아무도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또한 세상을 떠날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그 날이 임하더라도 주님을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영어 속담에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Opportunity comes to those who are ready.)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기회가 와도 기회를 잡을 수 없습니다. 문이 열려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버스가 지나간 후에야 손을 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준비된 분은 기회가 오고 문이 열리면 즉시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케일이 크고 웅장합니다. 현재 손익계산을 따지지 않습니다. 먼 장래를 바라보고 과감하게 시간을 투자하고 물질을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 쓰임 받고 열매를 맺는 분들을 보면 모두 이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근시안적인 삶을 살 것이 아닙니다. 10년, 20년을 내다보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준비하여 장차 오실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만일 우리가 영적 안일에 빠져 있을 때 주님이 재림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면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주님께서 오신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는 그 때 주 예수여, 오서서 아멘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광스러운 인자의 재림을 소망하며 준비하고 깨어서 주님께서 맡기신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