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마가복음 제 47 강(14:27-42)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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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언제 속상해하고 괴로워하지요? 그것은 나의 뜻을 관철시키고 내 뜻대로 살고자 할 때입니다. 내 뜻대로 모든 것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뜻이 관철되고 이루어지기보다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바로 그 때 사람들은 좌절감을 느끼고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는데 방해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무관심했던 사람을 원망합니다. 그러다보면 대인관계가 어렵게 됩니다. 그런데 나의 뜻보다 상대방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고, 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대방과 마찰을 일으키기보다 상대방의 뜻을 존중해주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좋은 대인관계가 형성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름답게 형성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을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집니다.
헬무트 틸리케는 사람이 어떻게 기도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영적인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아기의 기도를 하고, 어떤 사람은 유아기의 기도를 하고, 어떤 사람은 청년기의 기도를 하고, 어떤 사람은 장년기의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영아기는 똥을 싸도 울고 젖을 주어도 웁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늘 징징거리는 기도,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습니다. 유아기는 똥오줌을 가리지만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떼쓰고 자기 갖고 싶은 것 있으면 사달라고 조릅니다. 이런 시기의 신앙은 늘 달라는 기도만 합니다. 청년기는 철이 들어 사리를 분별할 수 있지만 수많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런 시기는 자기 뜻을 꺾지 않고 하나님과 늘 충돌합니다. 반면에 장년기는 성숙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일을 처리합니다. 이런 시기의 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압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위해 자기 뜻을 포기합니다.
세상에는 성숙한 장년에 이른 사람도 있지만 미성숙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본문은 성숙한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주십니다. 본문을 통해 성숙한 기도, 성숙한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배워 자기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네가 세 번 부인하리라(27-31).
27,28절을 읽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것을 아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들을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가랴 13장 7절을 통해 큰 위로를 얻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들에게 부활의 믿음도 가르쳤습니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은 그들이 연약하여 실족할지라도 말씀을 붙들고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29).”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지라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오늘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큰 소리를 치지만 그가 얼마나 연약한가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아시고 그가 부인할 횟수까지 정확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힘 있게 대답했습니다.
3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는 순교할 각오까지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호언장담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큰 소리를 잘 치는 것이 믿음이 좋은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큰 소리를 잘 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진정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것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연약하다고 하시면 연약한 것으로, 죄인이라고 하시면 죄인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반발심은 자신의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베드로는 이상만 생각했지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인정해야 합니다. 앙드레 지드는 좁은 문에서 “바른 선택을 하려면 선택하게 될 한 가지만 보지 말고 선택에서 제외되는 것까지 모두 생각한 후 결정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렇다고 인정하십시오. 말씀이 그렇다면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음은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고 말씀했을 때, 그것을 인정한 후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인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었어야 했습니다. 묻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묻는 마음은 배우는 마음입니다. 배우는 마음은 성장하게 합니다. 사무엘상하를 보면 다윗은 세심하게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전쟁을 해도 됩니까?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그게 언제입니까? 지금입니까? 아니면 내일입니까? 아주 세밀하게 묻고 질문합니다. 그랬을 때 그가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시편 78편 72절을 보겠습니다.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성실과 기술, 즉 integrity of heart와 skillful hand를 동시에 가질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큰소리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기도하고 기도를 통해 힘을 얻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베드로와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찬송하며 기도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와서 담대하게 또 복음을 전합니다. 그가 이처럼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된 것은 연약함을 인정하고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깨어 기도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일어나라 함께 가자(32-42)
예수님은 드디어 겟세마네에 이르셨습니다. 겟세마네는 올리브를 으깨어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자신의 피와 땀을 으깨어서 기름을 짜듯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이곳에서 기다리라 하시고, 세 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면서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시며 세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34).”
예수님은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이런 연약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파도와 광풍 앞에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막4:40)?” 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예수님은 놀라시고 슬퍼하시고 고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원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십자가의 죽음을 자원하는 사람은 더욱 더 없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의 배반을 생각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겟세마네에서의 애통과 고민은 이것들만이 아닙니다. 이 고민과 슬픔과 아픔은 세상 죄를 홀로 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의 고민과 슬픔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만민의 비방의 표적이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체포와 조롱과 멸시와 침 뱉음, 저주,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잠시나마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우리는 작은 십자가 앞에서도 끙끙거리기를 잘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고민만 하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비록 어리지만 동역자로 영접하고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겸손한 자만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만이 옵니다. 사람들은 교만하여 자신의 약점과 연약함을 좀처럼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아시고 겸손히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35절을 보면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서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절대 복종코자 함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는 자세로 기도하셨습니다. 또 이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할 때 다리를 꼬거나 코를 후미며 기도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땀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은 예수님의 기도를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피땀의 기도였습니다.
35b,36절을 보겠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때’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때를 말합니다. ‘잔’이란 십자가의 고통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신뢰를 의심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간으로서의 소원과 자신의 고통과 번민을 진실하게 아뢰었습니다.
39절을 보면 예수님은 다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인간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비록 십자가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아무래도 할 수 없으니 부득이 그렇게 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체념으로 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이 기도는 십자가의 잔이 쓰지만 이것을 아버지의 뜻으로 믿고, 또 현재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나 하나님의 선한 뜻임을 전적으로 믿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인간 문제, 가정 문제, 학교 문제, 결혼 문제 등 수 없이 생깁니다. 큰 슬픔을 당할 때도 있고, 실패의 잔을 마실 때도 있습니다. 이런 때 세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할 수 있나, 그저 모든 것이 다 운명이고 팔자소관이지’하는 절망의 태도입니다. 체념하고 드러눕습니다. 또 하나는 ‘하필이면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이때 남편이나 아내의 속을 박박 긁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 없는 자녀들을 구박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하다가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땅을 원망하고, 하늘을 원망하며,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다른 하나는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깊은 경륜 가운데서 오는 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우리의 뜻과 소원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크고 높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우리는 자신의 이성을 의지해서, 자신의 경험을 의지해서, 자신의 감정을 의지해서 결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위의 체면을 보고 결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을 비교해 볼 때에 비교할 가치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데라의 후손으로 조상들의 우상을 섬기며 소박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그는 부르심을 받은 후에도 현실 문제에 부딪칠 때 한 아빠로 살고자 하는 유혹에 빠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믿음의 길로 갔습니다. 이는 그가 떠나온 고향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세우신 하나님 나라를 비교해보니 이는 비교할 대상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히11:15,16). 그는 어떤 상황에 처할 때마다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스케일은 크고 웅장하고 장엄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계획과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았습니다. 그때 그는 복의 샘터, 복의 통로, 열국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꿈은 갈릴리 바다의 얕은 물가에서 피래미나 잡으며 아기와 자기와 함께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돕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삶은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비췰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꿈꾸는 삶과 주님의 원하시는 삶이 비교가 되지 않음을 알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즉시 그물과 배를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 때 그는 주님의 수제자요 인류의 스승이요 목자가 되었습니다.
김이삭 목자의 꿈은 결혼하여 아기와 자기와 함께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꿈은 썰렁했습니다. 이것은 이 목자의 꿈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그가 박레베카 선교사와 성경을 공부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두신 뜻과 소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꿈과 소원은 그 분야의 전문가 되어 향락과 물질과 거짓된 사상으로 춤을 추는 캠퍼스를 살리고 이 시대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소원을 영접하고 대학시절에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열매가 임채용 선교사입니다.
그리고 일본 유학생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가정을 오픈하고 하우스 처치를 했습니다. 주일이면 김복음 목자는 말씀과 음식으로 나고야 학생들과 임채용 선교사와 김요나단 선교사 가정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김이삭 목자는 6년간 주일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나고야대학에서 의학박사를 받고 미국에서 1년간 박사 후 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인하의대 연구교수로 후배들을 가르치며 교회에서는 마을 목자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아내와 세 자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누구나 자신의 좁은 생각과 계획을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두신 소원을 영접할 때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일시적인 손해와 아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 사이에서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선태하고 순종할 때 언젠가는 반드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41,42절을 보면 예수님은 동일한 기도를 세 번이나 반복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승리하시고 결연하게 일어나셨습니다. 이 모습은 승리자의 모습이요, 영적인 장군으로서의 모습입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리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도다.” 예수님은 기도로 두려움과 연약함을 이기시고 십자가를 감당하고자 결단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마음에는 모든 어려움과 슬픔이 사라지고 기쁨과 평강이 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 사람 앞에 바로 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와 보니 그들은 침을 흘리며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43절을 보면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심각한 말씀을 듣고 보니 머리가 아파서 잠을 잤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그들은 누르는 눈꺼풀을 도저히 들어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잠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깨어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38).” 그러나 제자들은 기도부탁을 받고도 깨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했을 때 그들은 위기의 때 시험에 들어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우리가 깨어서 기도할 때 사방을 살필 수 있고, 원수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인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깨어 있는 눈, 기도하는 눈,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시점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믿음생활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생활이란 자기의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소원도 많고 자기 계획도 많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 각자에게 두신 소원과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원대로 살고 싶습니다. 자기 멋대로, 자기 style대로, 자기 계획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믿음생활이란 자기 뜻에는 No!, 하나님의 뜻에는 Yes!입니다. 자기 멋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멋대로 멋진 삶을 삽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를 기쁘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의 생애는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본성대로 살면 멸망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영생을 얻습니다.
둘째로 믿음생활이란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고난의 잔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믿음생활하면서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는 것은 불신자들보다 못한 자들입니다. 쉽게 살고자(easy going)하는 마음은 불신자들보다 못한 삶입니다. 불신자들도 자기를 위해 쉽게 살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물며 믿는 사람들이 쉽게 살고자 하면 되겠습니까? 믿음생활이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이란 easy going이 아니라 hard working 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이란 No Cross! No Crown!입니다.
신앙생활의 principle은 자기를 부인하고 사명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막8:34).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로써 인류 구원역사가 완성하셨고 우리의 주요 왕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자기의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기도합시다. 십자가의 잔, 고난의 잔을 마시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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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언제 속상해하고 괴로워하지요? 그것은 나의 뜻을 관철시키고 내 뜻대로 살고자 할 때입니다. 내 뜻대로 모든 것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뜻이 관철되고 이루어지기보다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바로 그 때 사람들은 좌절감을 느끼고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는데 방해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무관심했던 사람을 원망합니다. 그러다보면 대인관계가 어렵게 됩니다. 그런데 나의 뜻보다 상대방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고, 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대방과 마찰을 일으키기보다 상대방의 뜻을 존중해주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좋은 대인관계가 형성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름답게 형성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을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집니다.
헬무트 틸리케는 사람이 어떻게 기도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영적인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아기의 기도를 하고, 어떤 사람은 유아기의 기도를 하고, 어떤 사람은 청년기의 기도를 하고, 어떤 사람은 장년기의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영아기는 똥을 싸도 울고 젖을 주어도 웁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늘 징징거리는 기도,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습니다. 유아기는 똥오줌을 가리지만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떼쓰고 자기 갖고 싶은 것 있으면 사달라고 조릅니다. 이런 시기의 신앙은 늘 달라는 기도만 합니다. 청년기는 철이 들어 사리를 분별할 수 있지만 수많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런 시기는 자기 뜻을 꺾지 않고 하나님과 늘 충돌합니다. 반면에 장년기는 성숙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일을 처리합니다. 이런 시기의 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압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위해 자기 뜻을 포기합니다.
세상에는 성숙한 장년에 이른 사람도 있지만 미성숙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본문은 성숙한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주십니다. 본문을 통해 성숙한 기도, 성숙한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배워 자기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네가 세 번 부인하리라(27-31).
27,28절을 읽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것을 아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들을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가랴 13장 7절을 통해 큰 위로를 얻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들에게 부활의 믿음도 가르쳤습니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은 그들이 연약하여 실족할지라도 말씀을 붙들고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29).”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지라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오늘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큰 소리를 치지만 그가 얼마나 연약한가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아시고 그가 부인할 횟수까지 정확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힘 있게 대답했습니다.
3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는 순교할 각오까지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호언장담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큰 소리를 잘 치는 것이 믿음이 좋은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큰 소리를 잘 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진정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것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연약하다고 하시면 연약한 것으로, 죄인이라고 하시면 죄인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반발심은 자신의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베드로는 이상만 생각했지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인정해야 합니다. 앙드레 지드는 좁은 문에서 “바른 선택을 하려면 선택하게 될 한 가지만 보지 말고 선택에서 제외되는 것까지 모두 생각한 후 결정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렇다고 인정하십시오. 말씀이 그렇다면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음은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고 말씀했을 때, 그것을 인정한 후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인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었어야 했습니다. 묻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묻는 마음은 배우는 마음입니다. 배우는 마음은 성장하게 합니다. 사무엘상하를 보면 다윗은 세심하게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전쟁을 해도 됩니까?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그게 언제입니까? 지금입니까? 아니면 내일입니까? 아주 세밀하게 묻고 질문합니다. 그랬을 때 그가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시편 78편 72절을 보겠습니다.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성실과 기술, 즉 integrity of heart와 skillful hand를 동시에 가질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큰소리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기도하고 기도를 통해 힘을 얻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베드로와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찬송하며 기도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와서 담대하게 또 복음을 전합니다. 그가 이처럼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된 것은 연약함을 인정하고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깨어 기도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일어나라 함께 가자(32-42)
예수님은 드디어 겟세마네에 이르셨습니다. 겟세마네는 올리브를 으깨어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자신의 피와 땀을 으깨어서 기름을 짜듯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이곳에서 기다리라 하시고, 세 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면서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시며 세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34).”
예수님은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이런 연약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파도와 광풍 앞에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막4:40)?” 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예수님은 놀라시고 슬퍼하시고 고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원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십자가의 죽음을 자원하는 사람은 더욱 더 없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의 배반을 생각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겟세마네에서의 애통과 고민은 이것들만이 아닙니다. 이 고민과 슬픔과 아픔은 세상 죄를 홀로 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의 고민과 슬픔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만민의 비방의 표적이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체포와 조롱과 멸시와 침 뱉음, 저주,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잠시나마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우리는 작은 십자가 앞에서도 끙끙거리기를 잘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고민만 하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비록 어리지만 동역자로 영접하고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겸손한 자만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만이 옵니다. 사람들은 교만하여 자신의 약점과 연약함을 좀처럼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아시고 겸손히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35절을 보면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서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절대 복종코자 함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는 자세로 기도하셨습니다. 또 이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할 때 다리를 꼬거나 코를 후미며 기도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땀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은 예수님의 기도를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피땀의 기도였습니다.
35b,36절을 보겠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때’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때를 말합니다. ‘잔’이란 십자가의 고통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신뢰를 의심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간으로서의 소원과 자신의 고통과 번민을 진실하게 아뢰었습니다.
39절을 보면 예수님은 다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인간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비록 십자가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아무래도 할 수 없으니 부득이 그렇게 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체념으로 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이 기도는 십자가의 잔이 쓰지만 이것을 아버지의 뜻으로 믿고, 또 현재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나 하나님의 선한 뜻임을 전적으로 믿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인간 문제, 가정 문제, 학교 문제, 결혼 문제 등 수 없이 생깁니다. 큰 슬픔을 당할 때도 있고, 실패의 잔을 마실 때도 있습니다. 이런 때 세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할 수 있나, 그저 모든 것이 다 운명이고 팔자소관이지’하는 절망의 태도입니다. 체념하고 드러눕습니다. 또 하나는 ‘하필이면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이때 남편이나 아내의 속을 박박 긁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 없는 자녀들을 구박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하다가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땅을 원망하고, 하늘을 원망하며,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다른 하나는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깊은 경륜 가운데서 오는 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우리의 뜻과 소원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크고 높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우리는 자신의 이성을 의지해서, 자신의 경험을 의지해서, 자신의 감정을 의지해서 결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위의 체면을 보고 결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을 비교해 볼 때에 비교할 가치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데라의 후손으로 조상들의 우상을 섬기며 소박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그는 부르심을 받은 후에도 현실 문제에 부딪칠 때 한 아빠로 살고자 하는 유혹에 빠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믿음의 길로 갔습니다. 이는 그가 떠나온 고향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세우신 하나님 나라를 비교해보니 이는 비교할 대상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히11:15,16). 그는 어떤 상황에 처할 때마다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스케일은 크고 웅장하고 장엄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계획과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았습니다. 그때 그는 복의 샘터, 복의 통로, 열국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꿈은 갈릴리 바다의 얕은 물가에서 피래미나 잡으며 아기와 자기와 함께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돕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삶은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비췰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꿈꾸는 삶과 주님의 원하시는 삶이 비교가 되지 않음을 알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즉시 그물과 배를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 때 그는 주님의 수제자요 인류의 스승이요 목자가 되었습니다.
김이삭 목자의 꿈은 결혼하여 아기와 자기와 함께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꿈은 썰렁했습니다. 이것은 이 목자의 꿈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그가 박레베카 선교사와 성경을 공부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두신 뜻과 소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꿈과 소원은 그 분야의 전문가 되어 향락과 물질과 거짓된 사상으로 춤을 추는 캠퍼스를 살리고 이 시대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소원을 영접하고 대학시절에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열매가 임채용 선교사입니다.
그리고 일본 유학생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가정을 오픈하고 하우스 처치를 했습니다. 주일이면 김복음 목자는 말씀과 음식으로 나고야 학생들과 임채용 선교사와 김요나단 선교사 가정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김이삭 목자는 6년간 주일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나고야대학에서 의학박사를 받고 미국에서 1년간 박사 후 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인하의대 연구교수로 후배들을 가르치며 교회에서는 마을 목자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아내와 세 자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누구나 자신의 좁은 생각과 계획을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두신 소원을 영접할 때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일시적인 손해와 아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 사이에서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선태하고 순종할 때 언젠가는 반드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41,42절을 보면 예수님은 동일한 기도를 세 번이나 반복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승리하시고 결연하게 일어나셨습니다. 이 모습은 승리자의 모습이요, 영적인 장군으로서의 모습입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리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도다.” 예수님은 기도로 두려움과 연약함을 이기시고 십자가를 감당하고자 결단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마음에는 모든 어려움과 슬픔이 사라지고 기쁨과 평강이 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 사람 앞에 바로 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와 보니 그들은 침을 흘리며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43절을 보면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심각한 말씀을 듣고 보니 머리가 아파서 잠을 잤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그들은 누르는 눈꺼풀을 도저히 들어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잠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깨어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38).” 그러나 제자들은 기도부탁을 받고도 깨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했을 때 그들은 위기의 때 시험에 들어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우리가 깨어서 기도할 때 사방을 살필 수 있고, 원수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인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깨어 있는 눈, 기도하는 눈,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시점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믿음생활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생활이란 자기의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소원도 많고 자기 계획도 많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 각자에게 두신 소원과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원대로 살고 싶습니다. 자기 멋대로, 자기 style대로, 자기 계획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믿음생활이란 자기 뜻에는 No!, 하나님의 뜻에는 Yes!입니다. 자기 멋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멋대로 멋진 삶을 삽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를 기쁘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의 생애는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본성대로 살면 멸망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영생을 얻습니다.
둘째로 믿음생활이란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고난의 잔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믿음생활하면서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는 것은 불신자들보다 못한 자들입니다. 쉽게 살고자(easy going)하는 마음은 불신자들보다 못한 삶입니다. 불신자들도 자기를 위해 쉽게 살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물며 믿는 사람들이 쉽게 살고자 하면 되겠습니까? 믿음생활이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이란 easy going이 아니라 hard working 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이란 No Cross! No Crown!입니다.
신앙생활의 principle은 자기를 부인하고 사명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막8:34).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로써 인류 구원역사가 완성하셨고 우리의 주요 왕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자기의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기도합시다. 십자가의 잔, 고난의 잔을 마시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