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제48장 내가 그니라

조회 수 2537 추천 수 0 2012.07.12 07:38:04
마가복음 제 48 강(마가복음 14:43-72, 요절, 14:62)

내가 그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1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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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본능이 아닙니다. 믿음은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본문에 말씀을 따라 사시는 예수님과 본능을 쫓아 사는 베드로가 대조되어 나옵니다. 베드로는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부인합니다. 이것은 육체의 본능을 따라 사는 초라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아담이 한 말이고 하와가 한 말이기도 합니다. 아담은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불순종의 죄를 시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는 아니다”라고 부인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다. 이것은 기회주의적인 태도입니다. 비굴하고 타협적이고 계산적인 태도입니다. 이것은 자신 없이 살아가는, 하나님을 상실한 인간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하게 원수들 앞에서 “내가 그다(I am He)”라고 당당하게 밝히십니다. “내가 그니라.” 이것은 본능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시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굴복시키며 사시는 당당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시는 능동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사시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순간순간을 책임지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환경과 상황에 끌려가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시는 의연한 모습입니다.

우리 속에 부패한 본성이 숨겨져 있습니다. 죄를 범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에게는 악하고 약한 본성이 있습니다. 부패한 본성은 연약합니다. 부패한 본성은 교활합니다. 부패한 본성은 비굴합니다. 부패한 본성은 사악합니다. 부패한 본성은 쉽게 유혹에 넘어집니다. 부패한 본성은 사탄의 소리에 쉽게 현혹됩니다. 부패한 본성은 열등감과 자기 연만에 잘 빠집니다. 부패한 본성은 작은 소리에도 상처를 잘 입습니다. 부패한 본성은 영적이지 못하고 육신적입니다. 부패한 본성은 신앙적이기 보다 세속적입니다. 부패한 본성은 이기적입니다. 부패한 본성은 본능에 따라 반응합니다.

여러분은 본능을 따라 살아가는 베드로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말씀을 따라 살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까? 오늘 아침에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벗어나 말씀을 붙들고 사시는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성경을 이루시는 예수님(43-54)

43-46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곧 열 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공회에서 파송된 무장한 군인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왔습니다. 유다는 이미 약속한 신호대로 예수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입을 맞추는 것은 사랑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유다의 경우는 배반의 키스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했습니다. 유다가 어떻게 스승을 배반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마귀가 그 속에 들어가 마귀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요13:2).

이 때 곁에 있던 자 중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47). 요한 18장 10절을 보면 그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싸워야 할 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혈과 육과 싸움을 했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은 겉으로 볼 때에 용감하게 보이나 실상은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시달리게 되면 분별력을 상실하여 진즉 싸워야 할 적을 모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 검을 가진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토인비는 그의 역저 ‘역사의 연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력을 쓴 나라는 다 망하였지만 온유의 법칙을 쓴 나라만이 남았다. 성육신 하시어 십자가에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만이 인류의 진정한 구주이시다.” 무력을 사용하면 문제가 쉽게 해결은 되는 것 같지만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예수님께서 검을 사용하지 않으신 것은 검을 사용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열 두 영(12군단 72,000명)이나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 순식간에 무력을 제압하실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칼을 뽑았지만 예수님은 칼을 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당하시는 순간까지도 십자가의 잔을 마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러 온 자들에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48).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셨습니다. 4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생애는 한마디로 말씀을 이루시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도망가는 것이나, 자신의 체포당하시는 것이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 등, 모든 것을 성경을 기초로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53장 12절 말씀과 같이 우리의 죄 때문에 강도와 같은 흉악한 범죄자의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십자가의 모진 고통 가운데서도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최후로 “다 이루었다”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기초로 생각하고, 성경 말씀대로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을 말씀을 성취해나가시는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자기를 구원하는데 있지 않고 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환난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위기의 순간에 모두 다 도망갔습니다. 그들은 본능을 따라 살았습니다. 51,52절을 보면 한 청년이 나옵니다. 그는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 자신을 말합니다. 그는 자고 있다가 예수님이 체포당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일어나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러다가 무리에게 잡히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는 최초의 알몸 스트리킹을 하는 신기원을 이뤘습니다. 그는 연약한 자입니다. 그는 연약하기 때문에 두려워서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 신앙을 체험했을 때 마가복음을 기록할 만큼 영적인 장군이 되었습니다.

53,5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실 때 베드로는 멀찍이 좇아 따라갔습니다. 그가 멀찍이 따라간 것은 따르자니 두렵고, 안 따르자니 수제자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기에 불을 쬐고 있는 것입니다.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승리자의 모습이라면, 베드로는 패잔병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사단의 유혹에 말려들게 됩니다. 사단은 항상 엉거주춤한 사람을 공격합니다. 말씀을 확신 있게 믿고 분명하게 따르는 자는 감히 공격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는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지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멀찍이 따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는 가까이 따르면 모든 것을 다 잃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 거리를 두고 따릅니다. 그렇게 되면 사단의 시험에 들게 되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어정쩡한 자세로 예수님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분명하고 확신 있게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목숨을 내놓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둘째, 내가 그라고 하시는 예수님(55-65)

“니들이 게 맛을 알아?” 이런 광고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알아?” 묻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우리 각 사람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물음에, 분명한 답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있는 공회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공회는 백성을 두려워하여 야간 불법 집회를 열고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공회는 재판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해 뜬 후부터 해지기까지 여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짓 증거조차 서로 합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내세웠습니다.

58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그러나 그 증거조차도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2:19). 예수님이 성전을 헌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헌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성전 되신 예수님을 그들이 죽이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 증언이 일치될 리 없었습니다.

이런 중에도 예수님은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입을 열지 아니 하셨습니다. 이 침묵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직접 나서서 심문했습니다. 61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그러자 예수님은 이때는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 6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그리스도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사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장차 심판의 주로서 재림하실 것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 앞에 서면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벌벌 떱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문을 받고 있지만 오히려 이들에게 부활의 소망과 재림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심판주로서 당당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다((I am He)”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때가 이르면 영광의 재림의 주로 오십니다. 이 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심판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십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을 밝힐 때 불이익이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조금 전만 해도 놀라며 슬퍼하며 두려워하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담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결단하셨기 때문입니다(요17:1). 사람이 죽을 각오를 하면 세상에 어느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을 각오를 할 때에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초대교회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폴리갑입니다. 로마 총독이 그를 화형을 처하기 위해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거기에 올려 세워놓고 마지막 질문을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가이사 황제를 찬양하고, 그리스도를 욕하라. 한번만 욕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놓아 줄 테니 조용히 다른 곳에 가서 여생을 살아라.” 그러나 폴리갑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86년 동안 그리스도를 섬겨왔노라. 주님은 나를 한 번도 배신하지 않은 고로 오늘도 나는 주를 배반할 수가 없노라. 주를 위해 죽는 것이 나에게 최고의 영광이기에” 그 후에 그는 불태워져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시인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3절을 보면 버가모 교회에 안디바가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사단이 지배하는 도시에 세워졌습니다. 이런 도시에서 믿음의 중심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중에 안디바는 주님의 충성된 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증인’이란 헬라어로 “순교자”라는 뜻입니다. 안디바는 어떤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그리스도임을 증거했습니다. 이 때문에 로마 당국은 그를 놋쇠 가마 속에 집어넣어 서서히 구워서 죽이는 형벌을 가했습니다. 안디바는 순교하므로 예수의 주되심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증거한 충성된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문화 환경 속에 살고 있습니다. 현대에는 돈이 인간의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돈 때문에 우정을 버리고 돈, 때문에 주님을 버리고 배교합니다. 성경은 이런 위험성을 잘 아시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 했고, 또 부하고자 하는 자는 신앙이 침륜에 빠질 것이라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상이 점점 거리를 활보하고, 돈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이런 세대에, 주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christian identity를 지켜 나가도록 합시다. 돈이 주가 아니라, 쾌락이 주가 아니라, 주님이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63-65절을 보면 그들은 결국 옷을 찢으며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리고 얼굴에 침을 뱉고 손바닥으로 치며 조롱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옷을 찢은 것도 위법이었습니다(레21:10).

셋째,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66-72)

66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고 있을 때, 여종 하나가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에게 나가가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자, 베드로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쌔(68)” 베드로는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며 앞뜰로 나갔습니다.

다시 여종이 그를 보고 서있는 자들에게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고 외쳤습니다(69). 베드로는 또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만 갈릴리 사투리가 튀어나왔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저 봐라, 저 사람이 갈릴리 사투리를 쓰지 않느냐? 그는 분명 그 도당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답이 무엇입니까? 7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베드로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며 단호하게, 초지일관으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는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마26:69-75). 이처럼 베드로는 비천한 계집종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 때 곧 닭이 ‘꼬끼오! 꼬끼오!’ 울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대성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61절에 보면 이 때 예수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눈길은 사랑과 긍휼과 슬픔의 눈길이었습니다. 이 눈길은 네가 나를 부인하지만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는 말 없는 이해와 사랑의 눈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눈길과 마주치는 순간,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지, 주님을 위해 죽겠노라고 맹세까지 해놓고 주님을 부인하다니, 자신을 돌아보니 그의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새벽마다 닭이 울면 일어나 새벽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까? 이는 베드로가 자신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을 더 신뢰하고 의지했습니다. 그리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아시고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내가 그로라”고 분명히 시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성실을 믿고 의지할 때 반드시 실패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깨어서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신 말씀을 늘 기억하여야 합니다(고전10:12).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눅11:4b).

둘째는 그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엉거주춤한 상태로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든지, 아니면 그 자리를 피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엉거주춤한 상태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사단은 항상 어정쩡한 사람에게 접근합니다. 확신 있게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감히 접근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길에서 중간은 없습니다. 의의 종이 아니면 불의의 종이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은 없습니다. 희면 희고 검으면 검지, 회색 신앙은 없습니다.

셋째는 고난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고난 받는 것을 보자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막8:38). 그는 예수님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비밀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1:18,24). 십자가의 도는 쓸모없던 자를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하는 놀라운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6).”

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공의와 사랑을 조화시키시고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값없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의 극치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예수님께서 당당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신 것처럼 christian identity를 지켜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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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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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마을교회

                                    Tiananmen Square protests, China Democracy, 天安門 天安门 法輪功 李洪志 Free Tibet 劉曉波, 热比娅·卡德尔, 熱比婭·卡德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