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제49장 네 말이 옳도다

조회 수 3679 추천 수 0 2012.07.12 07:38:18
마가복음 제 49 강(15:1-15)

네 말이 옳도다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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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인들은 500년대까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자기 이름과 함께 D.V.라는 대문자로 사인을 했습니다. 라틴어로 “Deo Valente”인데, Lord willing(주님이 원하시면)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모든 계획과 기도와 소망 위에 하나님의 뜻이 우선임을 천명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을 때 반드시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합니다. 첫째, 당신은 예수님을 구주(Savior)로 믿으십니까? 둘째, 당신은 예수님을 주님(Lord)으로 믿으십니까?

우리는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 참 좋으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한없는 축복을 우리게 주시는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그러나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주되심(Lordship)을 인정하며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따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Lordship을 가지고 사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주되심(Lordship)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생각을 따르게 되고 자기 의지대로 살게 됩니다. 신앙의 성숙이란 참 좋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되심(Lordship)을 인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신앙의 성숙도를 가늠합니다.

성경에 주란 뜻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구세주(saviour)란 의미와 주(Lord)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구제주란 뜻은 10%이고, 90%는 왕(Lord)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Lord! 주님은 우리를 통치하고 보호하며 인도해주시는 왕이란 뜻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나의 주인, 나의 왕으로 인정하며 살아갑니까? 아니면 입으로는 주님(Lord)! 주님(Lord)! 하면서도 주인은 나고, 주님은 종으로 여기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입으로 주님이라고 하며 “이거해 주세요. 저거해 주세요.” 하지 않습니까?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입니까?

여러분은 구세주(saviour)만 좋아해서 복 받고 은혜 받는 것만 좋아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주님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인정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무릎 꿇고 주님의 통치를 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주되심을 영접하고 무릎을 꿇을 때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주님의 통치를 받고 의에 이르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첫째,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1-5)

종교지도자들은 새벽에 불법공회를 열어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형 집행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로마법을 빌어 예수님을 죽이고자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 법정에 고소한 죄목은 세 가지 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미혹한다는 것, 둘째는 가이사에게 세금 내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 셋째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미혹한다는 것은 종교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빌라도에게는 관심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가이사에게 세금 내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공통적인 문제이고, 오히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 죄목 또한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에게 관심사항은 종교 지도자들이 고소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냐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정치적 왕이라면 유대인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빌라도의 정치 생명은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의 왕이냐?”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 시인할 경우 이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를 부인하든가 아니면 묵비권을 행사하셔야 옳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를 부인하거나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물음에 당당하게 답하셨습니다(2). “네 말이 옳도다(Yes, It is as you say).”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에 어떤 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종교적인 의도를 갖고 “네가 그리스도냐?”고 물을 때 예수님은 “가 그(I am He)”라고 답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질문하는 그에게 오히려 예수님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이 만왕의 왕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Yes, It is as you say.”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적인 왕이 아닙니다. 당시 로마는 힘이 곧 정의였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해도 힘이 없으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직 힘만이 최고였습니다.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세상 왕은 무력으로, 총칼로 다스립니다. 세상 왕은 권모술수로 다스립니다. 세상 왕은 거짓과 위선으로 다스립니다. 그래서 세상은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 왕은 권위로 다스립니다. 권위로 다스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겉으로는 굽실거리지만 뒤돌아서서는 맹박이, 쥐박이라고 욕합니다. 세상 왕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평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스리는 곳에는 진정한 평화가 임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와 공의로 다스리시는 공의의 왕이십니다. 이곳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투명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짓눌려 고통 하는 병든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왕이십니다. 이 왕은 지배하는 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왕이요, 겸손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심판하고 처형하는 왕이 아니라 사랑으로 용서하고 살리는 사랑의 왕이십니다. 파괴하고 분열시키고 억압하는 왕이 아니라 회복시키고 하나 되게 하고 자유를 주시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나를 사랑과 평강과 공의로 다스리시고 죄에서 구원하신 구원의 왕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나의 주되심으로 고백합니다. 나의 뜻보다 주님의 뜻이 먼저이고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뜻을 먼저 섬기고 주님의 통치를 받고자 무릎을 꿇습니다. 아멘.

지금 여러분을 통치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요즘 여러분을 다스리는 왕이 누구입니까? 요즘 세상을 지배하는 지배자는 돈신인 맘몬입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돈신보다 더 큰 지배자는 없습니다. 이 세대는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돈은 귀신도 부릴 수 있습니다. 돈은 하나님의 통치권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우상입니다. 그만큼 파괴력이 있습니다. 돈신이 합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접근할 때 돈신 앞에 굴복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요? 그러나 물질은 결코 우리의 지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왕이십니다. 돈신을 지배자로 삼고 사는 사람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돈을 못 번 사람은 못 벌어서 돌아버리고,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은 돈을 지키려고 하다가 밤에 단잠을 자지 못하고 끝내 돌아버립니다. 예수님만이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요즘 세상을 지배하는 지배자가 또 하나 있는 데 그것은 미의 여신 비너스, 정욕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8장 38절에서 이 세대를 가리켜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라고 하셨고, 누가복음 9장 41절에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대는 음란하고 죄 많은 시대입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이 추구하는 삶의 형태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요일2:16). 이 세상은 변화무쌍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세 축이 있는데, 그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태초 이래 마귀는 지금까지 이 세 축을 가지고 인간을 지배해 왔습니다. 이 세 축은 얼마나 강력한지 많은 사람들이 이 세 축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감각적인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을 추구하는 삶을 말합니다. 육신의 정욕의 지배를 받게 되면 모든 관심사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는 데 있습니다. 정욕을 채우기 위해 미친개처럼 길거리를 쏴 다니게 됩니다. 마귀가 첫 사람 아담을 유혹할 때도 육신의 정욕을 가지고 유혹했습니다. 아담은 평소 선악과를 볼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마귀의 유혹을 받고 나서는 육신의 정욕이 생겨 먹음직하게 보였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육신의 정욕이란 무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육신의 정욕으로 타락시킵니다. 사명보다 먹고 마시는 것에 열을 내게 합니다.요즘 서울 도시 한복판에 초등학교 성폭행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국가는 이를 화학적인 문제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해결이 될까요? 예수님이 주되심을 영접하고 주님께 복종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안목의 정욕’은 잘못된 가치관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안목의 정욕에 붙들리게 되면 내면보다 겉모습을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안목의 정욕은 육신을 병들게 할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병들게 합니다. 마태복음 5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안목의 정욕은 허영심을 가져다줍니다. 자신의 외모만을 위해 삽니다. 귀한 시간과 돈을 옷과 집과 가방과 자동차와 같은 보이는 것에 치장하는데 다 허비합니다. 이 안목의 정욕 또한 사단이 첫 사람 아담을 유혹할 때 사용했습니다.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본즉 보암직했습니다. 그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선악과를 따 먹고 싶은 충동이 생겨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이생의 자랑’은 자기 영광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데 시간과 물질과 젊음을 다 허비합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을 낙으로 삼습니다. 사람들은 출신에 대한 자랑, 가족에 대한 자랑, 혈통에 대한 자랑, 학교에 대한 자랑, 사회적인 명성과 지위에 대한 자랑, 자기 영향력에 대한 자랑,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에 대한 자랑, 부유함과 물질의 소유에 대한 자랑, 자기 두뇌를 자랑하게 합니다. 어떤 정치인은 세상 인기를 누리기 위해 깜짝 쇼를 하기도 합니다.

작년에 한바울은 여름 수양회 때에 선교사들과 2세들에게 특별히 티셔츠를 맞춰 입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티를 입지 않고 보스턴 칼리지 티를 입고 활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은근히 보스톤 칼리지를 자랑하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티를 벗고 라틴어로 된 주님은 사랑이다를 입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3학년 주니어가 되니 자기 자랑보다 주님을 자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3장 2-5절에 보면 말세에 사람들은 세 가지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기보다 더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기를 사랑합니다. 세상은 이런 방향으로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프랑스 소설가 프레데릭 베그브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서 18세가 될 때까지 평균 35만개의 광고에 노출된다. 호모 콘소마투스(소비의 인간)의 눈은 잠시도 쉬지 못한다.

그런데 이 모든 광고의 개념(concept)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러한 광고를 청년이 될 때까지 35만 번 이상을 보고 들으면서 이 세상의 생활양식이 자리를 잡게 되고, 그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형성된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신앙적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TV 보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요한복음 8장 44절을 보면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생명을 줄 것처럼 속삭이지만 결국은 우리를 죽입니다. 로마서 6장 20,21절을 보면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부끄러운 육체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마귀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술 취함과 방탕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 마지막은 사망을 가져다줍니다. 마귀는 실컷 우리를 부려먹고 후에는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집니다. 이처럼 마귀는 잔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을 선물로 줍니다. 로마서 6장 22절을 보면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영생은 죽은 후에 누리는 것만이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의 영생입니다. 사망과 영생, 얼마나 대조가 됩니까? 주님은 우리 안에 영생의 씨를 심으셨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 떨어진 영생의 씨가 싹이 터서 자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 곧 메시야이심을 분명하게 시인하셨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자기들의 각본대로 되어 가자 신이 나서 여러 가지 거짓 고소를 하였습니다(3). 그러자 빌라도는 예수님께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회를 이용해 종교지도자들의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고 예수님 자신의 무죄함을 밝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4,5). 예수님은 자기를 시인해야 할 때는 분명하게 시인하시고, 또 침묵해야 할 때는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법정에서 자신의 죄를 변호하기 위해 저명한 변호사들을 사서 세웁니다. 자신들의 죄를 정당화하고 변명합니다.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너무 억울해서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써서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조금도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들의 거짓 고소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맘몬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란 마귀에 지배를 받아 왔던 죄를 회개합시다. 이제 예수님의 주되심을 믿습니다. 주님의 지배를 받으며 성령의 거룩한 열매를 맺으며 살겠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주되심(Lordship)을 인정하고 주님께 무릎을 꿇고 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되심을 고백하고 주님의 말씀을 절대 순종하는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둘째, 그러면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6-15)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 아무 죄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이 시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넘겨준 줄 알았습니다(10). 당시에는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는데, 빌라도는 이 기회를 이용해 예수님을 석방코자 했습니다. 빌라도는 무리들이 지금까지 예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님을 놓아달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큰 오판이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 대신에 살인자인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제사장들이 돈을 주고 무리를 충동질했기 때문입니다(11). 빌라도는 당황하여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무리들은 피를 본 야수와 같이 외쳤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열렬히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했습니다(막11:9,10).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칩칩니다.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영적으로 무지하고, 진리에 기초한 절대적인 가치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리에 기초한 가치관이 없을 때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벌 나비처럼 감정과 군중 심리에 이리저리 이끌리게 됩니다.

빌라도는 이성을 잃은 무리들에게 반문했습니다.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러자 그들은 더 큰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잘 알았습니다. 빌라도는 그들과 타협을 시도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고자 정치적인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한 후 십자가에 못 박게 넘겨주었습니다(15).

마태복음 27장 24절을 보면 그는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해 나는 무죄하다고 했습니다. 손은 기도하는 손이 있고, 남을 위해 자선을 베푸는 손이 있고, 다른 사람의 재산이나 생명에 손상을 끼치는 손이 있습니다. 빌라도는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어주는 그런 손이 되었습니다.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24)’ 너희들이 잘못했으니 나는 책임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상당히 양심적인 행동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자리보전을 위해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야비한 자였습니다. 그는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창백한 지성인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자기 유익을 기초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도자로서 마땅히 진리를 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진리보다 실리를 좇아 총독 자리를 택했습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유지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얼마 후 파면되어 유배를 당했다가 결국 자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역사는 사도신경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였다고 준엄하게 심판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유다의 배반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심과 무리들의 영적인 무지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진리보다 실리를 택하는 빌라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었습니다. 지금 나의 모습이 돈을 사랑하는 유다와 같지는 않습니까? 지금 나의 모습이 절대적인 가치관이 없는 무리들과 같은 모습은 아닙니까? 지금 나의 모습이 시기심 많은 사람은 아닙니까? 아니면 지금 나의 모습이 현실의 유익을 좇는 빌라도와 같은 사람은 아닙니까? 우리는 이런 모습에서 돌이켜 예수님이 영원한 나의 왕이심을 영접하고 왕되신 예수님께 순종하여 거룩한 열매와 영생을 얻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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