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사도행전 제 25 강(말씀, 9:32-43, 요절, 9:40)
다비다야 일어나라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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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머레이가 쓴 ‘기도 응답의 축복’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기도에 대한 것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기도의 능력을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입니다. 1860년에 그는 폭포수와 같은 기도와 더불어 성령이 온 회중에게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면 할수록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영국의 기도운동으로 점화되어 마침내 1904년 웨일즈 부흥의 모판이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대 사람인 찰스 피니가 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는 50만 명의 불신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그 비결은 기도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19세기에 러시아의 한 무명 그리스도인이 쓴 ‘예수의 기도’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저자 자신이 경험한 영적 체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0대 후반의 한 젊은이가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중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말씀을 듣고 의문에 빠져듭니다. “사람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쉬지 말고 기도를 할 수 있는가?” 그러던 중 한 수도원의 원장을 만나 기도를 하게 됩니다. 수도원 원장님은 하루에 3000번씩 보름 동안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보름 동안 하루에 3000번 씩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기도했습니다. 그가 보름 후에 원장님을 찾아가니 이번에는 보름동안 하루에 6000번씩 같은 내용인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되풀이 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대로 기도 드린 후 다시 원장님을 찾아가니 이제는 하루에 12,000번을 같은 내용인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기도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가 순종하여 기도를 드리는 순간 온 몸에 뜨거운 은혜가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후에 그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의 진의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받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인간으로서 도저히 불가능한 일도 가능한 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그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시며,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사도행전의 전반부는 베드로를 중심한 사역에서, 13장부터는 바울을 중심한 사역으로 이동합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특징은 사도들이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 충만하였고, 성령 충만했을 때 말씀을 기탄없이 전했고, 기탄없이 말씀을 전했을 때에 말씀을 듣는 이들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을 받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적과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이적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기적의 본질은 하나님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적을 통해 하나님을 계시하신다. 가장 큰 이적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이고, 셋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도들의 이적을 통해 말씀의 권세를 확증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그들은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삶이 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즉시 생활로 옮겼습니다.
본문에는 베드로의 두 가지 이적이 나옵니다. 이 이적은 베드로가 행한 이적 중에 가장 큰 이적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본문을 통해 기도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신다는 베드로(32-35)
베드로가 사방 곳곳에 복음을 전하다가 해안가 욥바에서 동남쪽 약 18km 지점에 떨어진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 갔습니다(32). 여기에서 성도란 말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성도란 사도행전 9장 13절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리고 9장 41절에 성도란 단어가 다시 나옵니다. 복음서에는 성도란 단어가 없습니다. 성도란 제자와 같은 단어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통칭으로,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거룩하다는 ‘구별되었다’, ‘다르다’는 말입니다. 세속에서 구별되고, 하나님 편으로 구별된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룩하다는 것은 제물을 일컫습니다. 수많은 양들이나 소들 중에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제물이 되는데, 그 제물이 바로 거룩한 것입니다.
성도란 소속이 바뀌고, 본질이 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소속이 변했고, 본질이 변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는 뭔가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관대로 삽니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삽니다. 세상의 유행을 따라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 생각, 가치관이 성도란 단어와 함께 항상 있어야 합니다. 말도 달라야 하고, 행동도 달라야 하, 가치관도 달라야 하고, 삶도 달라야 하고, 옷 입는 것도 달라야 하고, 먹고 마시는 것도 달라야 합니다.
베드로는 룻다에서 8년간 중풍으로 누워있는 애니아라는 성도를 만났습니다. 그의 나이가 몇인지 알 수 없지만 대개 중풍은 어린이보다 나이가 좀 든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이로 보건대 그는 좀 나이가 든 것 같습니다. 중풍 걸린 사람은 마음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8년간 중풍으로 누워 있습니다. 요즘 같이 더운 날씨에 침상에 누워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거기다가 욕창이라도 나 보세요. 이것은 정말 힘든 생활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을 보자 곧 이렇게 말합니다. 34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베드로가 그를 낫게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낫게 하신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으로 일어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단지 주님의 도구, 주님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이름을 거들먹거리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신다.” “일어나라.” 베드로는 주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높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이를 일컬어 깨끗한 경건이라고 합니다.
과거 베드로는 자신의 명예와 권세만을 추구하였습니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데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는 첫째가 되고자 뼈를 깎는 투쟁을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가시면 좌우의정을 시켜달라고 그의 어머니를 통해 청탁을 했습니다. 이를 들은 10 제자들은 분노했습니다(막10:41). 아마 10 제자 중 베드로가 더 분노했을 것입니다. 이런 그가 180도 변해서 자기를 피알하지 않고 주님의 이름만을 드러내는 삶을 삽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족속이요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심이라(벧전2:9).” 그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합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을 보면 바울의 삶의 목적이 나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바울은 본래 이름이 사울, 스스로 높은 자란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가 변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지금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 그의 간절한 소망은 그리스도가 자기의 몸에서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소망은 죽고 사는 문제를 떠나서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소망은 성공과 실패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소망은 명예, 불명예가 아니라 그의 몸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소망은 가난하고 부하게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이 찬양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소망은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데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광을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자기의 피알을 위하여, 피할 것을 피하고 알릴 것을 알리기 위해 고심하고 또 고심합니다. 그리고 부흥회 전단지를 보면 마치 자기가 성령을 주고, 능력을 주고, 방언을 하게하는 것처럼 선전합니다. 이것은 교만이요 사이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 실의에 빠지고 좌절합니까? 나는 ∼이기 때문에 뭣이 되어야 하는데 뭣이 되지 않을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사느냐, 무엇을 위하여 그것을 하느냐,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가 더 중요합니다(The important thing is not what you become, the purpose of being one.). 여러분이 삶의 목적이 분명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이 분명할 때 감옥이나 궁궐이나 초막이나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쁘게 찬송할 수 있습니다.
둘째,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베드로(36-43)
욥바에 여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다비다야, 이를 번역하면 도르가였습니다. 그녀는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하였습니다(36). 그리고 39절을 보면 그녀는 과부들의 속옷과 겉옷을 손수 지어 과부들을 위해 봉사하고 수고했습니다. 당시 과부는 가장 불쌍한 사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과부를 돌보는 것이 가장 큰 덕목 중의 하나였습니다.
룻다에서 욥바까지는 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장례식을 보류하고 사람 둘을 세 시간 걸리는 룻다로 보내어 베드로를 청했습니다. 그들이 다비다가 죽었는데 왜 베드로를 청했을까요? 우리는 그들이 베드로를 청한 것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음을 알고 불렀는지, 아니면 너무나도 원통하고 서글퍼서 베드로로 하여금 위로를 받고 싶어서 그런지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베드로를 초청했습니다. 베드로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욥바에 도착했습니다. 베드로가 도착해 보니 모든 과부들이 모여 다비다가 과부들을 위해 손수 지었던 속옷과 겉옷을 내보이며 ‘이 분이 나를 위해 이렇게 수고했는데’, ‘이 분이 나를 위해 저렇게 수고했는데’, ‘이분이 나를 위해 이렇게 좋은 일을 했는데’. ‘이분이 나를 위해 이렇게 선행을 베풀어서 내 아들이 대학에 가고 이렇게 잘 됐는데’ 하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그 사람이 평가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그 사람 잘 죽었어, 그런 사람은 진즉 죽어야 하는데 오래도 살았지”, 한편 “그 사람 정말 안 됐어, 좀 더 살아야 하는데, 좀 더 오래 살아서 더 좋은 일을 했어야 하는데” 합니다. 여러분, 죽었을 때 어떤 평가를 받고 싶습니까? 그 사람 돈 밖에 모르고 자기 밖에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잘 죽었지, 이런 소리 들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평소에 선행과 구제에 힘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봉사를 많이 하기를 바랍니다. 도움을 받고 사랑을 받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섬기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은혜만 받으려고 하지 말고 받은바 은혜와 사랑을 빚을 갚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값진 삶을 사십시오. 성경은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은 그 이름이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난다고 했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40a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베드로는 다비다의 선한 그 행동을 듣고 감동이 되어 주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감동될 때 더 기도하게 됩니다. 중보 기도하려고 하니 섭섭한 생각만 듭니다. 그러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위해 선을 베풀어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것은 주님께 절대 복종과 동시에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했음을 말해 줍니다. 무릎을 꿇는 기도는 겸손과 간절함과 뜨거운 기도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마6:31-33, 요16:23,24).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북군의 승리는 기도의 승리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군의 로버트리장군 같은 명장이 없었음이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본래 기도의 종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서에 베드로를 생각하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이 인기절정에 이르셨을 때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이 하셨습니다. “내가 이를 위해 왔다. 나는 전도를 위해 왔다.” 예수님은 순간의 인기 영합을 위한 길을 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본래의 목적, 사명을 붙드셨습니다. 한편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은 베드로는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외칩니다. “지금 원근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예수님 지금 뭐하고 계세요. 기도 그만하시고 저들을 고쳐주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 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시는데, 베드로는 옆에서 쿨쿨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보다 말과 발이 앞섰습니다. 그때 그는 대제사장의 비자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나약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며 넘어지는 나약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과거 자기 능력과 경험을 의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번번이 실패하고 무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는 어떠합니까? 그는 기도의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평소 기도하시던 그 모습대로 기도하는 기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과 같이 습관을 따라 기도했습니다(행3:1).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면 내 세계가 건설되고, 사탄의 뜻이 이루어지면 지옥이 건설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천국이 건설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가 주님의 기도를 배웠을 때 비자 앞에서도 벌벌 떨던 데서 이스라엘 최고의 권력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외치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
베드로가 기도를 통해 영적인 힘을 공급 받았을 때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 능력을 행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가 기도를 통해 영적인 힘을 공급 받았을 때 주님의 도구로 삼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기도를 통해 예수님 권세가 내 권세가 된 것을 확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주님의 도구로 삼아 예수님의 권세,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심을 확신했습니다. 그때 그는 명령했습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40b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주님의 부활의 권세, 부활의 능력이 베드로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베드로는 온전히 100% 주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되 100%를 믿는 믿음, 내가 주님의 도구로 100% 쓰임 받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 내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권세가 하나로 묶여질 때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여러분의 인생 문제가 있습니까?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인디언 기우제라는 얘기를 들어 보셨나요? 인디언이 기우제를 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디언들은 한번 기우제를 하면 비가 올 때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임할 때까지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5장 14,1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이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우리가 믿음의 기도를 드리면 병든 자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십니다. 계속해서 야고보서 5장 17,18절을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엘리야와 우리와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점은 기도의 내용과 기도의 자세입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야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했을 때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주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했을 때 비가 내렸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기도가 절실하고, 그 기도가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절박하고 순수하고 간절히 기도할 때 죄인들이 미혹의 길에서 돌아서게 되며 사망에서 구원 받게 됩니다(약5:19,20).
베드로는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예수님만을 목적으로 삼고 절박하게 기도했습니다. 그 때 애니야가 일어나고 죽은 다비다가 살아났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놀라운 믿음의 역사, 기적의 역사,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간절한 기도는 주님의 권세가 내 권세가 됩니다. 순수한 기도는 나를 온전한 그릇으로 사용하여 주님의 권세와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아멘.
다비다야 일어나라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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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머레이가 쓴 ‘기도 응답의 축복’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기도에 대한 것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기도의 능력을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입니다. 1860년에 그는 폭포수와 같은 기도와 더불어 성령이 온 회중에게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면 할수록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영국의 기도운동으로 점화되어 마침내 1904년 웨일즈 부흥의 모판이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대 사람인 찰스 피니가 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는 50만 명의 불신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그 비결은 기도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19세기에 러시아의 한 무명 그리스도인이 쓴 ‘예수의 기도’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저자 자신이 경험한 영적 체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0대 후반의 한 젊은이가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중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말씀을 듣고 의문에 빠져듭니다. “사람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쉬지 말고 기도를 할 수 있는가?” 그러던 중 한 수도원의 원장을 만나 기도를 하게 됩니다. 수도원 원장님은 하루에 3000번씩 보름 동안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보름 동안 하루에 3000번 씩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기도했습니다. 그가 보름 후에 원장님을 찾아가니 이번에는 보름동안 하루에 6000번씩 같은 내용인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되풀이 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대로 기도 드린 후 다시 원장님을 찾아가니 이제는 하루에 12,000번을 같은 내용인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기도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가 순종하여 기도를 드리는 순간 온 몸에 뜨거운 은혜가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후에 그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의 진의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받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인간으로서 도저히 불가능한 일도 가능한 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그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시며,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사도행전의 전반부는 베드로를 중심한 사역에서, 13장부터는 바울을 중심한 사역으로 이동합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특징은 사도들이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 충만하였고, 성령 충만했을 때 말씀을 기탄없이 전했고, 기탄없이 말씀을 전했을 때에 말씀을 듣는 이들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을 받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적과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이적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기적의 본질은 하나님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적을 통해 하나님을 계시하신다. 가장 큰 이적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이고, 셋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도들의 이적을 통해 말씀의 권세를 확증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그들은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삶이 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즉시 생활로 옮겼습니다.
본문에는 베드로의 두 가지 이적이 나옵니다. 이 이적은 베드로가 행한 이적 중에 가장 큰 이적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본문을 통해 기도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신다는 베드로(32-35)
베드로가 사방 곳곳에 복음을 전하다가 해안가 욥바에서 동남쪽 약 18km 지점에 떨어진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 갔습니다(32). 여기에서 성도란 말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성도란 사도행전 9장 13절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리고 9장 41절에 성도란 단어가 다시 나옵니다. 복음서에는 성도란 단어가 없습니다. 성도란 제자와 같은 단어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통칭으로,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거룩하다는 ‘구별되었다’, ‘다르다’는 말입니다. 세속에서 구별되고, 하나님 편으로 구별된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룩하다는 것은 제물을 일컫습니다. 수많은 양들이나 소들 중에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제물이 되는데, 그 제물이 바로 거룩한 것입니다.
성도란 소속이 바뀌고, 본질이 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소속이 변했고, 본질이 변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는 뭔가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관대로 삽니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삽니다. 세상의 유행을 따라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 생각, 가치관이 성도란 단어와 함께 항상 있어야 합니다. 말도 달라야 하고, 행동도 달라야 하, 가치관도 달라야 하고, 삶도 달라야 하고, 옷 입는 것도 달라야 하고, 먹고 마시는 것도 달라야 합니다.
베드로는 룻다에서 8년간 중풍으로 누워있는 애니아라는 성도를 만났습니다. 그의 나이가 몇인지 알 수 없지만 대개 중풍은 어린이보다 나이가 좀 든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이로 보건대 그는 좀 나이가 든 것 같습니다. 중풍 걸린 사람은 마음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8년간 중풍으로 누워 있습니다. 요즘 같이 더운 날씨에 침상에 누워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거기다가 욕창이라도 나 보세요. 이것은 정말 힘든 생활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을 보자 곧 이렇게 말합니다. 34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베드로가 그를 낫게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낫게 하신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으로 일어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단지 주님의 도구, 주님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이름을 거들먹거리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신다.” “일어나라.” 베드로는 주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높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이를 일컬어 깨끗한 경건이라고 합니다.
과거 베드로는 자신의 명예와 권세만을 추구하였습니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데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는 첫째가 되고자 뼈를 깎는 투쟁을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가시면 좌우의정을 시켜달라고 그의 어머니를 통해 청탁을 했습니다. 이를 들은 10 제자들은 분노했습니다(막10:41). 아마 10 제자 중 베드로가 더 분노했을 것입니다. 이런 그가 180도 변해서 자기를 피알하지 않고 주님의 이름만을 드러내는 삶을 삽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족속이요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심이라(벧전2:9).” 그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합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을 보면 바울의 삶의 목적이 나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바울은 본래 이름이 사울, 스스로 높은 자란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가 변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지금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 그의 간절한 소망은 그리스도가 자기의 몸에서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소망은 죽고 사는 문제를 떠나서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소망은 성공과 실패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소망은 명예, 불명예가 아니라 그의 몸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소망은 가난하고 부하게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이 찬양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소망은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데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광을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자기의 피알을 위하여, 피할 것을 피하고 알릴 것을 알리기 위해 고심하고 또 고심합니다. 그리고 부흥회 전단지를 보면 마치 자기가 성령을 주고, 능력을 주고, 방언을 하게하는 것처럼 선전합니다. 이것은 교만이요 사이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 실의에 빠지고 좌절합니까? 나는 ∼이기 때문에 뭣이 되어야 하는데 뭣이 되지 않을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사느냐, 무엇을 위하여 그것을 하느냐,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가 더 중요합니다(The important thing is not what you become, the purpose of being one.). 여러분이 삶의 목적이 분명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이 분명할 때 감옥이나 궁궐이나 초막이나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쁘게 찬송할 수 있습니다.
둘째,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베드로(36-43)
욥바에 여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다비다야, 이를 번역하면 도르가였습니다. 그녀는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하였습니다(36). 그리고 39절을 보면 그녀는 과부들의 속옷과 겉옷을 손수 지어 과부들을 위해 봉사하고 수고했습니다. 당시 과부는 가장 불쌍한 사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과부를 돌보는 것이 가장 큰 덕목 중의 하나였습니다.
룻다에서 욥바까지는 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장례식을 보류하고 사람 둘을 세 시간 걸리는 룻다로 보내어 베드로를 청했습니다. 그들이 다비다가 죽었는데 왜 베드로를 청했을까요? 우리는 그들이 베드로를 청한 것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음을 알고 불렀는지, 아니면 너무나도 원통하고 서글퍼서 베드로로 하여금 위로를 받고 싶어서 그런지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베드로를 초청했습니다. 베드로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욥바에 도착했습니다. 베드로가 도착해 보니 모든 과부들이 모여 다비다가 과부들을 위해 손수 지었던 속옷과 겉옷을 내보이며 ‘이 분이 나를 위해 이렇게 수고했는데’, ‘이 분이 나를 위해 저렇게 수고했는데’, ‘이분이 나를 위해 이렇게 좋은 일을 했는데’. ‘이분이 나를 위해 이렇게 선행을 베풀어서 내 아들이 대학에 가고 이렇게 잘 됐는데’ 하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그 사람이 평가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그 사람 잘 죽었어, 그런 사람은 진즉 죽어야 하는데 오래도 살았지”, 한편 “그 사람 정말 안 됐어, 좀 더 살아야 하는데, 좀 더 오래 살아서 더 좋은 일을 했어야 하는데” 합니다. 여러분, 죽었을 때 어떤 평가를 받고 싶습니까? 그 사람 돈 밖에 모르고 자기 밖에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잘 죽었지, 이런 소리 들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평소에 선행과 구제에 힘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봉사를 많이 하기를 바랍니다. 도움을 받고 사랑을 받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섬기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은혜만 받으려고 하지 말고 받은바 은혜와 사랑을 빚을 갚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값진 삶을 사십시오. 성경은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은 그 이름이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난다고 했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40a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베드로는 다비다의 선한 그 행동을 듣고 감동이 되어 주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감동될 때 더 기도하게 됩니다. 중보 기도하려고 하니 섭섭한 생각만 듭니다. 그러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위해 선을 베풀어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것은 주님께 절대 복종과 동시에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했음을 말해 줍니다. 무릎을 꿇는 기도는 겸손과 간절함과 뜨거운 기도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마6:31-33, 요16:23,24).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북군의 승리는 기도의 승리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군의 로버트리장군 같은 명장이 없었음이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본래 기도의 종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서에 베드로를 생각하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이 인기절정에 이르셨을 때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이 하셨습니다. “내가 이를 위해 왔다. 나는 전도를 위해 왔다.” 예수님은 순간의 인기 영합을 위한 길을 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본래의 목적, 사명을 붙드셨습니다. 한편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은 베드로는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외칩니다. “지금 원근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예수님 지금 뭐하고 계세요. 기도 그만하시고 저들을 고쳐주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 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시는데, 베드로는 옆에서 쿨쿨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보다 말과 발이 앞섰습니다. 그때 그는 대제사장의 비자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나약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며 넘어지는 나약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과거 자기 능력과 경험을 의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번번이 실패하고 무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는 어떠합니까? 그는 기도의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평소 기도하시던 그 모습대로 기도하는 기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과 같이 습관을 따라 기도했습니다(행3:1).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면 내 세계가 건설되고, 사탄의 뜻이 이루어지면 지옥이 건설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천국이 건설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가 주님의 기도를 배웠을 때 비자 앞에서도 벌벌 떨던 데서 이스라엘 최고의 권력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외치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
베드로가 기도를 통해 영적인 힘을 공급 받았을 때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 능력을 행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가 기도를 통해 영적인 힘을 공급 받았을 때 주님의 도구로 삼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기도를 통해 예수님 권세가 내 권세가 된 것을 확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주님의 도구로 삼아 예수님의 권세,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심을 확신했습니다. 그때 그는 명령했습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40b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주님의 부활의 권세, 부활의 능력이 베드로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베드로는 온전히 100% 주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되 100%를 믿는 믿음, 내가 주님의 도구로 100% 쓰임 받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 내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권세가 하나로 묶여질 때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여러분의 인생 문제가 있습니까?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인디언 기우제라는 얘기를 들어 보셨나요? 인디언이 기우제를 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디언들은 한번 기우제를 하면 비가 올 때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임할 때까지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5장 14,1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이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우리가 믿음의 기도를 드리면 병든 자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십니다. 계속해서 야고보서 5장 17,18절을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엘리야와 우리와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점은 기도의 내용과 기도의 자세입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야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했을 때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주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했을 때 비가 내렸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기도가 절실하고, 그 기도가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절박하고 순수하고 간절히 기도할 때 죄인들이 미혹의 길에서 돌아서게 되며 사망에서 구원 받게 됩니다(약5:19,20).
베드로는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예수님만을 목적으로 삼고 절박하게 기도했습니다. 그 때 애니야가 일어나고 죽은 다비다가 살아났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놀라운 믿음의 역사, 기적의 역사,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간절한 기도는 주님의 권세가 내 권세가 됩니다. 순수한 기도는 나를 온전한 그릇으로 사용하여 주님의 권세와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