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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제 27 강(말씀, 10:9-23, 10:13)
베드로의 환상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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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 대학교 심리학교수를 역임한 리처드 니스벳이 쓴 ‘생각의 지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동양 출신의 한 학생과 함께 인간의 사고방법에 대해 연구를 하던 중 얼마 되지 않아 동양학생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님, 교수님과 저의 차이점이라면, 저는 세상을 ‘원’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교수님은 세상을 ‘직선’으로 생각하신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동양과 서양은 각기 다른 사고과정과 사고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도 각기 나라마다 각기 독특한 사고과정과 사고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문화입니다.
우리 민족은 다른 문화의 사고과정과 사고내용에 대해 배타적입니다. 타문화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자기 것이 아니면 무조건 배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단일민족이란 점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요즘 다문화 가정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문화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자기 문화를 사랑하는 만큼 다른 나라 문화도 사랑해야 합니다. 특히 열방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우리에게는 자기 문화와 풍속, 그리고 자기 경험에 대한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가 있고, 비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이 있습니다. text와 context가 있습니다. 형식적인 것과 내용적인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형식은 변하고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 문화는 변하고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상황은 변하지만 text는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문화에 대해서는 너그러웠지만 신앙의 문제에서만큼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본질적인 것을 붙들었습니다.
리처드 칼슨은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는 책에서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딱 구별할 수 없지만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여 절대적인 것은 양보하고, 그리 중요하지 않는 사소한 것, 비본질적인 것에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실패합니다. 우리는 기가 만든 잣대, 고정관렴, 편견, 편협한 생각, 자기 경험을 가지고 남을 판단합니다. 그러다보니 여유가 없고 여유가 없으니 자연히 충돌하게 되고 충돌하다 보니 남을 정죄하게 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곁가지를 붙들지 말고 복음을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을 넓혀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잡아먹으라(9-13)
하나님은 먼저 고넬료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라는 환상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이튿날에 세 사람에게 욥바 성에 있는 베드로를 모시고 오라고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에게만 환상을 보여 주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9,10절을 보면 베드로가 정오인 6시에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붕이 삼각형입니다. 그래서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유대의 지붕은 평평합니다. 그래서 올라가서 쉬기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베드로는 때가 때인지라 배가 고파 먹을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 마침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집안에서 맛있는 양고기 요리 냄새가 베드로의 코를 진동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자신도 모르게 비몽사몽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베드로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는 점입니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면 베드로는 아주 능력이 많은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한 번에 말씀으로 3,000명을 회개시켰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베드로는 죽은 도르가를 살렸습니다. 그 능력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그 비밀은 기도였습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그는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는 뜨거운 6시, 12시에 지붕 위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를 원한다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과 일하십니다. 반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 일하지 않으십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의 많은 전도 열매는 기도의 열매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카 교회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시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엡6:18).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쉬지 않고 기도했다는 자신의 간증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기도에 달려있습니다. 얼마나 기도하느냐가 성공과 실패를 가늠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계시를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을 쫓아다니시며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런데 베드로는 환상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고넬료도 또한 환상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막힌 담을 헐기 위해 오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벽을 헐기 위해 오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담’은 구별을 말합니다. 당시 성전에는 이방인 뜰과 성전 뜰 사이에 담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 접근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팻말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절대로 성전 뜰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성전 뜰과 성소 사이에 담이 있어 성소를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담이 있어서 대제사장 외에는 누구도 지성소를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담들을 허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담을 허셔서 차별이 없게 하셨습니다. 성소의 휘장을 찢으심으로 성소와 지성소의 담을 허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이루시기 위해 이방인의 대표인 경건한 고넬료를 택하시고, 유대인을 대표해서 사도 베드로를 택하여 이 두 사람에게 환상을 보여 주시고, 두 사람이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할 때 주님은 여러분에게 계시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490(542)장을 다 같이 부르겠습니다.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뵈었으니 그 꿈 이루어 주옵소서 밤과 아침에 계시로 보여주사 항상 은혜를 주옵소서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을 뵈오리라.♬
11절을 보겠습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베드로는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를 매어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갖가지 짐승들과 하늘에 나는 새들과 땅에 기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구약 성경에 먹지 말라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레위기 11장을 보면 먹지 말아야 할 음식과 먹어야 할 음식이 나옵니다. 짐승에 대해서는 굽이 갈라진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이어야 먹을 수 있습니다. 돼지는 굽은 갈라졌는데 새김질을 아니하므로 못 먹습니다. 물고기 중에서는 비늘이 없고 지느러미가 없는 것은 먹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까다롭게 음식문화를 만들어 놓았을까요? 왜 굽이 갈라진 소고기는 먹고, 굽이 갈라졌지만 되새김질 못하는 돼지는 먹지 말라고 했을까요? 우리는 돼지 삼겹살을 얼마나 좋아합니까? 사람들은 비늘이 없는 뱀장어를 보양식품으로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몇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짐승은 대체로 온순한 짐승입니다.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평화로운 짐승입니다. 소나 양이 사람을 죽이고 물어뜯는 것을 보았습니까? 푸른 초원에 누워있는 소나 푸른 초장에서 풀을 뜯는 양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러나 돼지는 쪽발이기는 하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돼지는 주로 썩고 더러운 것과 찌꺼기를 좋아합니다. 소는 누울 때 자기가 누운 똥을 피해 깨끗한 곳을 찾아 눕습니다. 반면에 돼지는 우리를 깨끗하게 치워주면 금시 똥을 싸고 그 자리에 눕고 뒹굽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더럽고 추한 삶을 싫어하십니다. 돼지가 쪽발이지만 왜 이렇게 더러운 삶을 사는 것입니까? 제가 볼 때 되새김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여 우리도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하지 않으면 돼지처럼 지저분한 삶을 살게 됩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성경을 읽고 묵상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주일날 먼지 묻은 성경을 털고 오는 사람은 돼지처럼 지저분한 삶을 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성경을 묵상하고 일용할양식으로 QT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여러분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는 산청어나 연어와 같이 맑은 물에서 삽니다. 일급수가 아니면 자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특징은 민첩합니다. 반면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낙지, 오징어, 문어, 뱀장어 등은 주로 시궁창이나 뻘에서 퍼져 삽니다. 그들의 행동은 퍼져 있고 보기에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어항에 키우는 물고기들을 보면 모두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것들이지,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낙지, 문어, 뱀장어를 키우는 사람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지느러미가 있는 물고기는 탁류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반면에 지느러미가 없는 물고기는 더러운 환경에 그대로 적응하여 살아갑니다.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물고기는 수면 위에서 삽니다. 반면에 비늘이 없고 지느러미가 없는 물고기는 수면 밑바닥에서 삽니다. 우리는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물고기처럼 탁류와 같은 세속적인 삶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불의한 세상과 싸우는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는 바닥에서 기는 삶이 아니라 저 높은 곳을 향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한 새는 말씀하지 않고 부정한 새를 20종을 들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납고 죽은 고기를 뜯어 먹고, 주로 밤에 활동합니다. 독수리는 공격적이고 약탈적입니다. 피를 흘리는 잔인함이 있습니다. 까마귀는 음울합니다. 올빼미나 박쥐 등은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부엉이는 고독한 날짐승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온유하고 온순해야 합니다. 사람이 사납고 공격적이고 어두움을 좋아하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칙칙하고 소도둑놈처럼 음울한 삶을 살면 되지 않습니다. 성도는 맑고 밝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약자의 것을 빼앗는 강포한 사람이 되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요즘 장관 후보자가 쪽방촌을 대상으로 노후를 위해 부동산 투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강포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고독한 방에서 혼자 고독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함께 어울려 더불어서 살아야 합니다.
음식은 하나의 문화입니다. 문화는 사람이 만들어 갑니다. 문화는 변합니다. 문화는 다양합니다. 나이든 사람들은 김치와 된장찌개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김치와 된장을 좋아하지 않고 햄버거와 치킨을 좋아합니다. 외국 사람들은 김치나 마늘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교사님들은 토요일과 주일에는 절대로 김치를 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일에 김치냄새를 풍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소고기를 좋아하지만 인도 사람들, 람은 소고기 국물도 먹지 않습니다. 이처럼 문화는 다양합니다. 음식문화는 신앙이 아니라 문화내지는 종교 문화입니다. 종교 문화도 사람이 만들어가기 때문에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옷 입는 것도 일종의 문화입니다. 우리가 그래도 점잖은 사람, 그리고 첫선을 보라 갈 때에는 그래도 깨끗한 옷을 입고 갑니다. 물론 요즘은 청바지 차림으로 만난다고 하던데, 그러나 이것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요즘에 예를 아는 사람은 청바지 차림으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들을 때 고리타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래도 교회에 올 때에는 예를 갖춰서 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에 마지막 남은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야 아무렇게 입고 다녔다 할지라도 주일날, 세상의 마지막 거룩한 장소인 교회에 오실 때만큼은, 일주일에 한번만이라도 그렇게 했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사람이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삶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예비군복을 입으면 점잖던 사람도 아무데서나 방료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생각대로 하십시오. 바울이와 영신이가 말하듯이 공해를 입고와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입니다. 복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큼은 꼭 붙들고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에게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이는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14).” 그도 그럴 것이 부정한 짐승은 먹기는 고사하고 부정한 짐승을 만지기만 해도 깨끗케 되는 과정이 복잡합니다. 옷도 빨아야 하고 손을 씻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먹으라고 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타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부정한 짐승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거룩한 음식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먹을 수 없다고 거절한 베드로에게 다시 말씀합니다.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15).”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깨끗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네가 못 먹겠다고 하느냐?” 하나님은 16절에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 번 똑같은 말씀을 하심으로 확고한 의지를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천명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선민이란 강한 유다이즘이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 더욱더 이 사상이 굳어졌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 이방인들보다 도덕적으로 비교적 깨끗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 돼지와 같은 짐승으로 생각하고 멸시했고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의 교제 자체를 불법으로 여겼습니다(행10:28). 이런 선민사상, 유다이즘은 자기중심적입니다. 좁고 편협하고 폐쇄적입니다. 베드로의 DNA도 유다이즘이고 피도 유다이즘이 흐르고 그의 뇌 속에도 유다이즘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든지 부정한 음식들은 절대로 먹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비몽사몽 중에서도 헛소리를 하지 않고 유대인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이유는 자신들만 구원받도록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그들을 택하여 세상 만민을 구원코자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열방을 향한 목자의 심정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교만하고 배타적이 되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가정교사인데 오히려 율법을 가지고 선민사상을 고착화했습니다. 율법으로 형성된 자기 ‘의’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를 배척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 ‘의’로 인해 복음을 영접치 못하고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편협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폐쇄적이지 않습니다. 복음은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복음은 보편적입니다. 복음은 개방적입니다. 복음은 범세계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12: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28:19).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롬1:16). 복음의 범위와 성격이 이와 같다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자세도 열려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족속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유다이즘의 좁은 세계에 갇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환상을 보여 주심으로 유다이즘을 깨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베드로와 같은 유다이즘적인 요소가 없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이라는 자긍심 때문에 타민족을 잘 영접하지 못하는 배타성이 있습니다. 국제 결혼하는 것을 체질적으로 꺼리는 nationalism이 있습니다. 성경 속에 흐르는 사상은 nationalism을 배격합니다. 우리 속에 nationalism이 있다면 깨야 합니다. 민족애 대한 자긍심은 있어야 하지만 국수주의로 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의 뼈아픈 것은 조선왕조 말기에 국수 정책으로 인한 비극입니다. 우리는 nationalism라는 좁은 마음을 깨고 internationalism을 가져야 합니다. internationalism이 nationalism을 담을 수 있습니다. 바다가 강물을 담습니다. 바다는 대륙에서 쏟아내는 모든 오물을 다 받아 정화시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폐쇄적인 nationalism을 깨고 열방을 향해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유교 사상의 체면문화, 유불선의 영향으로 인한 은둔과 도피, 소극적인 모습, 사주 팔자타령을 하는 운명주의, 양반과 상민, 적자와 서자라는 차별의식 등의 편견과 담을 깰 때 열방을 품고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편견의 벽을 깨고 어떤 종류의 사람, 어떤 나라의 사람에게도 복음 전하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멘.
둘째, 일어나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17-23)
베드로는 이 환상이 무슨 뜻인지 의아했습니다. 그 때 마침 고넬료의 종들이 베드로가 머문 집의 대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얼마나 절묘한 성령의 역사입니까? 정확한 시간에 찾아와서 노크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베드로에게 성령의 음성이 강타합니다. 19,20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21,22절을 보면 고넬료의 종들은 자초지종을 말합니다. 그들은 절대로 주인의 말에 순종합니다.
문화는 변합니다. 문화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복음만이 영원하고 절대적입니다. 세상이 변한다 할지라도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유다이즘적인 편견을 깨고 복음으로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서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의 환상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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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 대학교 심리학교수를 역임한 리처드 니스벳이 쓴 ‘생각의 지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동양 출신의 한 학생과 함께 인간의 사고방법에 대해 연구를 하던 중 얼마 되지 않아 동양학생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님, 교수님과 저의 차이점이라면, 저는 세상을 ‘원’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교수님은 세상을 ‘직선’으로 생각하신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동양과 서양은 각기 다른 사고과정과 사고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도 각기 나라마다 각기 독특한 사고과정과 사고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문화입니다.
우리 민족은 다른 문화의 사고과정과 사고내용에 대해 배타적입니다. 타문화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자기 것이 아니면 무조건 배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단일민족이란 점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요즘 다문화 가정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문화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자기 문화를 사랑하는 만큼 다른 나라 문화도 사랑해야 합니다. 특히 열방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우리에게는 자기 문화와 풍속, 그리고 자기 경험에 대한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가 있고, 비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이 있습니다. text와 context가 있습니다. 형식적인 것과 내용적인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형식은 변하고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 문화는 변하고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상황은 변하지만 text는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문화에 대해서는 너그러웠지만 신앙의 문제에서만큼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본질적인 것을 붙들었습니다.
리처드 칼슨은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는 책에서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딱 구별할 수 없지만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여 절대적인 것은 양보하고, 그리 중요하지 않는 사소한 것, 비본질적인 것에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실패합니다. 우리는 기가 만든 잣대, 고정관렴, 편견, 편협한 생각, 자기 경험을 가지고 남을 판단합니다. 그러다보니 여유가 없고 여유가 없으니 자연히 충돌하게 되고 충돌하다 보니 남을 정죄하게 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곁가지를 붙들지 말고 복음을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을 넓혀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잡아먹으라(9-13)
하나님은 먼저 고넬료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라는 환상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이튿날에 세 사람에게 욥바 성에 있는 베드로를 모시고 오라고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에게만 환상을 보여 주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9,10절을 보면 베드로가 정오인 6시에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붕이 삼각형입니다. 그래서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유대의 지붕은 평평합니다. 그래서 올라가서 쉬기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베드로는 때가 때인지라 배가 고파 먹을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 마침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집안에서 맛있는 양고기 요리 냄새가 베드로의 코를 진동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자신도 모르게 비몽사몽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베드로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는 점입니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면 베드로는 아주 능력이 많은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한 번에 말씀으로 3,000명을 회개시켰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베드로는 죽은 도르가를 살렸습니다. 그 능력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그 비밀은 기도였습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그는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는 뜨거운 6시, 12시에 지붕 위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를 원한다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과 일하십니다. 반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 일하지 않으십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의 많은 전도 열매는 기도의 열매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카 교회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시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엡6:18).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쉬지 않고 기도했다는 자신의 간증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기도에 달려있습니다. 얼마나 기도하느냐가 성공과 실패를 가늠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계시를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을 쫓아다니시며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런데 베드로는 환상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고넬료도 또한 환상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막힌 담을 헐기 위해 오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벽을 헐기 위해 오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담’은 구별을 말합니다. 당시 성전에는 이방인 뜰과 성전 뜰 사이에 담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 접근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팻말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절대로 성전 뜰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성전 뜰과 성소 사이에 담이 있어 성소를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담이 있어서 대제사장 외에는 누구도 지성소를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담들을 허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담을 허셔서 차별이 없게 하셨습니다. 성소의 휘장을 찢으심으로 성소와 지성소의 담을 허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이루시기 위해 이방인의 대표인 경건한 고넬료를 택하시고, 유대인을 대표해서 사도 베드로를 택하여 이 두 사람에게 환상을 보여 주시고, 두 사람이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할 때 주님은 여러분에게 계시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490(542)장을 다 같이 부르겠습니다.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뵈었으니 그 꿈 이루어 주옵소서 밤과 아침에 계시로 보여주사 항상 은혜를 주옵소서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을 뵈오리라.♬
11절을 보겠습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베드로는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를 매어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갖가지 짐승들과 하늘에 나는 새들과 땅에 기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구약 성경에 먹지 말라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레위기 11장을 보면 먹지 말아야 할 음식과 먹어야 할 음식이 나옵니다. 짐승에 대해서는 굽이 갈라진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이어야 먹을 수 있습니다. 돼지는 굽은 갈라졌는데 새김질을 아니하므로 못 먹습니다. 물고기 중에서는 비늘이 없고 지느러미가 없는 것은 먹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까다롭게 음식문화를 만들어 놓았을까요? 왜 굽이 갈라진 소고기는 먹고, 굽이 갈라졌지만 되새김질 못하는 돼지는 먹지 말라고 했을까요? 우리는 돼지 삼겹살을 얼마나 좋아합니까? 사람들은 비늘이 없는 뱀장어를 보양식품으로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몇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짐승은 대체로 온순한 짐승입니다.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평화로운 짐승입니다. 소나 양이 사람을 죽이고 물어뜯는 것을 보았습니까? 푸른 초원에 누워있는 소나 푸른 초장에서 풀을 뜯는 양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러나 돼지는 쪽발이기는 하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돼지는 주로 썩고 더러운 것과 찌꺼기를 좋아합니다. 소는 누울 때 자기가 누운 똥을 피해 깨끗한 곳을 찾아 눕습니다. 반면에 돼지는 우리를 깨끗하게 치워주면 금시 똥을 싸고 그 자리에 눕고 뒹굽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더럽고 추한 삶을 싫어하십니다. 돼지가 쪽발이지만 왜 이렇게 더러운 삶을 사는 것입니까? 제가 볼 때 되새김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여 우리도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하지 않으면 돼지처럼 지저분한 삶을 살게 됩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성경을 읽고 묵상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주일날 먼지 묻은 성경을 털고 오는 사람은 돼지처럼 지저분한 삶을 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성경을 묵상하고 일용할양식으로 QT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여러분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는 산청어나 연어와 같이 맑은 물에서 삽니다. 일급수가 아니면 자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특징은 민첩합니다. 반면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낙지, 오징어, 문어, 뱀장어 등은 주로 시궁창이나 뻘에서 퍼져 삽니다. 그들의 행동은 퍼져 있고 보기에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어항에 키우는 물고기들을 보면 모두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것들이지,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낙지, 문어, 뱀장어를 키우는 사람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지느러미가 있는 물고기는 탁류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반면에 지느러미가 없는 물고기는 더러운 환경에 그대로 적응하여 살아갑니다.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물고기는 수면 위에서 삽니다. 반면에 비늘이 없고 지느러미가 없는 물고기는 수면 밑바닥에서 삽니다. 우리는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물고기처럼 탁류와 같은 세속적인 삶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불의한 세상과 싸우는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는 바닥에서 기는 삶이 아니라 저 높은 곳을 향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한 새는 말씀하지 않고 부정한 새를 20종을 들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납고 죽은 고기를 뜯어 먹고, 주로 밤에 활동합니다. 독수리는 공격적이고 약탈적입니다. 피를 흘리는 잔인함이 있습니다. 까마귀는 음울합니다. 올빼미나 박쥐 등은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부엉이는 고독한 날짐승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온유하고 온순해야 합니다. 사람이 사납고 공격적이고 어두움을 좋아하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칙칙하고 소도둑놈처럼 음울한 삶을 살면 되지 않습니다. 성도는 맑고 밝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약자의 것을 빼앗는 강포한 사람이 되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요즘 장관 후보자가 쪽방촌을 대상으로 노후를 위해 부동산 투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강포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고독한 방에서 혼자 고독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함께 어울려 더불어서 살아야 합니다.
음식은 하나의 문화입니다. 문화는 사람이 만들어 갑니다. 문화는 변합니다. 문화는 다양합니다. 나이든 사람들은 김치와 된장찌개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김치와 된장을 좋아하지 않고 햄버거와 치킨을 좋아합니다. 외국 사람들은 김치나 마늘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교사님들은 토요일과 주일에는 절대로 김치를 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일에 김치냄새를 풍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소고기를 좋아하지만 인도 사람들, 람은 소고기 국물도 먹지 않습니다. 이처럼 문화는 다양합니다. 음식문화는 신앙이 아니라 문화내지는 종교 문화입니다. 종교 문화도 사람이 만들어가기 때문에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옷 입는 것도 일종의 문화입니다. 우리가 그래도 점잖은 사람, 그리고 첫선을 보라 갈 때에는 그래도 깨끗한 옷을 입고 갑니다. 물론 요즘은 청바지 차림으로 만난다고 하던데, 그러나 이것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요즘에 예를 아는 사람은 청바지 차림으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들을 때 고리타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래도 교회에 올 때에는 예를 갖춰서 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에 마지막 남은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야 아무렇게 입고 다녔다 할지라도 주일날, 세상의 마지막 거룩한 장소인 교회에 오실 때만큼은, 일주일에 한번만이라도 그렇게 했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사람이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삶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예비군복을 입으면 점잖던 사람도 아무데서나 방료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생각대로 하십시오. 바울이와 영신이가 말하듯이 공해를 입고와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입니다. 복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큼은 꼭 붙들고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에게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이는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14).” 그도 그럴 것이 부정한 짐승은 먹기는 고사하고 부정한 짐승을 만지기만 해도 깨끗케 되는 과정이 복잡합니다. 옷도 빨아야 하고 손을 씻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먹으라고 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타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부정한 짐승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거룩한 음식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먹을 수 없다고 거절한 베드로에게 다시 말씀합니다.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15).”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깨끗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네가 못 먹겠다고 하느냐?” 하나님은 16절에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 번 똑같은 말씀을 하심으로 확고한 의지를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천명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선민이란 강한 유다이즘이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 더욱더 이 사상이 굳어졌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 이방인들보다 도덕적으로 비교적 깨끗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 돼지와 같은 짐승으로 생각하고 멸시했고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의 교제 자체를 불법으로 여겼습니다(행10:28). 이런 선민사상, 유다이즘은 자기중심적입니다. 좁고 편협하고 폐쇄적입니다. 베드로의 DNA도 유다이즘이고 피도 유다이즘이 흐르고 그의 뇌 속에도 유다이즘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든지 부정한 음식들은 절대로 먹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비몽사몽 중에서도 헛소리를 하지 않고 유대인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이유는 자신들만 구원받도록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그들을 택하여 세상 만민을 구원코자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열방을 향한 목자의 심정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교만하고 배타적이 되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가정교사인데 오히려 율법을 가지고 선민사상을 고착화했습니다. 율법으로 형성된 자기 ‘의’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를 배척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 ‘의’로 인해 복음을 영접치 못하고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편협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폐쇄적이지 않습니다. 복음은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복음은 보편적입니다. 복음은 개방적입니다. 복음은 범세계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12: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28:19).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롬1:16). 복음의 범위와 성격이 이와 같다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자세도 열려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족속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유다이즘의 좁은 세계에 갇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환상을 보여 주심으로 유다이즘을 깨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베드로와 같은 유다이즘적인 요소가 없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이라는 자긍심 때문에 타민족을 잘 영접하지 못하는 배타성이 있습니다. 국제 결혼하는 것을 체질적으로 꺼리는 nationalism이 있습니다. 성경 속에 흐르는 사상은 nationalism을 배격합니다. 우리 속에 nationalism이 있다면 깨야 합니다. 민족애 대한 자긍심은 있어야 하지만 국수주의로 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의 뼈아픈 것은 조선왕조 말기에 국수 정책으로 인한 비극입니다. 우리는 nationalism라는 좁은 마음을 깨고 internationalism을 가져야 합니다. internationalism이 nationalism을 담을 수 있습니다. 바다가 강물을 담습니다. 바다는 대륙에서 쏟아내는 모든 오물을 다 받아 정화시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폐쇄적인 nationalism을 깨고 열방을 향해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유교 사상의 체면문화, 유불선의 영향으로 인한 은둔과 도피, 소극적인 모습, 사주 팔자타령을 하는 운명주의, 양반과 상민, 적자와 서자라는 차별의식 등의 편견과 담을 깰 때 열방을 품고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편견의 벽을 깨고 어떤 종류의 사람, 어떤 나라의 사람에게도 복음 전하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멘.
둘째, 일어나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17-23)
베드로는 이 환상이 무슨 뜻인지 의아했습니다. 그 때 마침 고넬료의 종들이 베드로가 머문 집의 대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얼마나 절묘한 성령의 역사입니까? 정확한 시간에 찾아와서 노크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베드로에게 성령의 음성이 강타합니다. 19,20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21,22절을 보면 고넬료의 종들은 자초지종을 말합니다. 그들은 절대로 주인의 말에 순종합니다.
문화는 변합니다. 문화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복음만이 영원하고 절대적입니다. 세상이 변한다 할지라도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유다이즘적인 편견을 깨고 복음으로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서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