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사도행전 제 28 강(말씀, 10:24-48, 10:36)
고넬료에게 전한 베드로의 메시지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드에게 보내신 말씀(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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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부버는 인간관계를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만남을 ‘나-너’와 ‘나-그것’으로 보았습니다. ‘나-너’의 만남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고, ‘나-그것’은 비인격과의 만남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과의 만남이 사람이기 때문에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떠하기 때문에 만난다는 것입니다. 결혼의 대상을 만날 때에도 인격체로서의 만남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떠하기 때문에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인격체와의 만남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 또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믿고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하기 때문에 만난다면 그것은 비인격전인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복주머니로 믿고 만난다면 그것은 ‘나-너’의 만남이 아니라, ‘나-그것’과의 만남이 됩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나-너’의 만남이 아니라, ‘나-그것’과의 만남으로 인해 싹트게 되고, 인간의 존재가치가 파괴된다고 봅니다. ‘나-너’와의 만남은 참된 삶을 창조해 나가지만, ‘나-그것’과의 만남은 불행을 가져다줍니다.
본문은 고넬료와 베드로의 역사적인 만남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와 만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통해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죽음에서 부활을, 심판과 저주에서 용서를, 허무에서 의미있는 삶을, 절망에서 희망을, 멸망에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뿌리 깊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불신의 벽이 무너졌고, 하나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를 일명 베드로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이해하고, 믿고, 전하고 있는 복음이 여기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진수, 복음 중의 복음, 성경 중의 성경, 복음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의 진수를 깨닫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23-33)
베드로는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의심이 깨뜨려졌습니다. 편견이 깨졌습니다. 좁은 nationalism, 유다이즘이 깨졌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더 이상 고개를 쳐들지 않고,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쓰시고, 이런 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과 함께 가이샤라에 갔습니다(24). 그의 집에는 고넬료 일가와 친척들이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집에 들어가자 고넬료는 발아래 엎드려 절했습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아래 엎드리어 절하니” ‘발아래 엎드려 절했다’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세쿠네센, 발에 입 맞춘다는 뜻입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는 정도가 아니라 무릎을 꿇고 발에다가 입을 맞췄습니다. 그래서 절하다가 아니라 경배했다는 뜻입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경배했다는 것도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입니다. 그리고 점령군 사령부의 백부장입니다. 그가 입은 로마군인의 제복이 얼마나 위용이 있었겠습니까? 그의 제복에는 계급장과 훈장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지체가 높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시골 촌 어부 출신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고넬료와 베드로는 비교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고넬료가 갈릴리 촌 어부 베드로를 보는 순간 발아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가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육신의 눈으로 베드로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베드로의 외모를 보지 않았습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의 눈으로 베드로를 보았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하나님이 보낸 사자로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자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구체화된 것이 베드로를 사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다(마10:40).”
베드로는 고넬료의 극진한 대접에 송구스러워서 이렇게 말합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나도 사람이라.’ 도대체 얼마나 영접을 했으면 이렇게 말하였습니까? 한편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을 보게 됩니다. 그는 자기 위치를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두 가지 경우 자기를 위치를 상실하기 쉽습니다. 하나는 너무나 무시를 받으면 자기 위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너 그럴 수 있어” 인간관계가 파괴됩니다. 자기 위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지나친 칭찬과 대우를 받을 경우 자기 자신의 위치를 상실하고 자기 우상화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큰 시험입니다.
우리가 높임을 받고 존경을 받을수록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종이요 주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겸손한 마음, 본래의 자기 위치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끝까지 자기 위치를 잊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3장 12절에서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하자 사람들이 베드로를 주목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본래 사람 앞에서 우쭐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겸손했습니다.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 위치를 알았습니다. 자기 분수와 위치를 알지 못하고 날뛰면 자기 도 망하고, 그로 인해 세상에 끼치는 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쓰신 사람은 모두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 위치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사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은혜를 잊고 뭣이 된 양 목을 꼿꼿하게 들고 다녔습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악신에 들려 고통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시골에서 양 치던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스라엘의 왕이요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고 겸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7:18)”
사도 바울은 자랑 할만도 합니다. 그런데 그는 겸손했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겸손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그는 자신을 구원하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딤전1:15).”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고 존경을 받을 때 늘 주님의 도구요, 주님의 종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벧전5:5). 겸손이 가장 큰 미덕입니다.
28,29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의 집에 와서 식사를 하는 것이 위법인 줄로 알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사양치 않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통념보다 말씀을 앞세웠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묻습니다.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그러자 고넬료가 그간 있었던 사건을 육하원칙으로 얘기하였습니다. “나흘 전에 9시에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구제를 기억하였다, 욥바에 가서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시기에 말씀에 순종하여 종을 보내어 당신을 초청하였습니다.”
이어서 고넬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33절을 보겠습니다. “오셨으니 잘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고넬료의 목전에 누가 있습니까? 베드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 앞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보면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 ‘여기에 있다’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말씀하실 바야 직통으로 말씀하실 것이지, 왜 베드로를 통해 들으라고 하시지? 아니면 천사를 통해 직접 들려주시던지? 그런데 고넬료는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을 통해 듣고자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 베드로를 상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카리스마, 권위를 존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종을 통해 듣는 자세, 이게 바른 자세입니다. 복음을 듣는 자와 전하는 자가 함께 할 때 말씀이 역사합니다.
둘째, 베드로가 일어나 입을 열어 가로되(34-48)
고넬료는 어떤 말씀도 다 받아들일 자세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입을 엽니다. 34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전권적인 역사에 감탄하였습니다. 자신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고넬료에게 계시를 보여 주시어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렇게 역사는 시작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베드로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끌고 가는, 자기는 끌려간다,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구원하시고, 그를 통해 온 가족을 구원하고자 하시고, 더 나아가 로마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깊은 섭리, 이것이 하나님이 땅 끝까지 구원하고자 하시는 깊은 뜻임을 보고 감격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외모를 보고 선택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감격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외모를 보고 취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은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얼굴을 보고 택하지 않습니다. 인종, 피부색이나 신장이나 미모나 재산이나 지식 등을 보고 사람을 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진실을 보고 취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중심을 본다고 하셨습니다(삼상16:12). 하나님은 언제나 중심, 내면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경건을 보십니다. 행위가 있는 경건입니다. 바리새인이 말하는 경건이 아닌 행위를 동반한 경건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복음이 임합니다.
그가 전한 복음의 진수,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예수님은 화평케 하십니다. 36절을 보겠습니다.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복음은 이스라엘이냐 이방인이냐 또 계급이 무엇이냐에 상관없이 화평을 이루십니다. 특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을 이루십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 화평의 복음을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복음은 모든 ‘담’은 헙니다. 복음은 이방인 뜰과 성전 뜰 사이의 담을 헙니다. 복음은 성전 뜰과 성소 사이에 담을 헙니다. 복음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담을 헙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많은 담들이 있습니다. 과거 우리 조상에서는 양반과 상민이라는 차별, 적자와 서자라는 높은 담이 있었습니다. 조상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양반과 상민의 담을 헐지 못해 안동교회와 경동교회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모든 벽이 사라졌습니다. 지금 영호남의 담, 남북의 담이 높습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벽이 있습니다. 인종의 벽,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의 벽이 있습니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벽이 있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벽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담을 허셔서 하나로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 중에 담이 있습니까? 담이 있다면 십자가에서 모든 담을 허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주님은 화평이십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착한 일을 하셨습니다. 37,38절을 보겠습니다.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후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다니시며 아름다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착한 일을 하시고 마귀의 권세에 눌려 신음하는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치유하셨고, 귀신을 내쫓았고,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 모든 착한 일들, 이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39절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십자가는 복음의 진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공의를 알고, 십자가를 통해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장래도 알고, 기도하면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은 하나님께서 무엇인들 못 들어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속에 모든 복음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연극 중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부요한 사람에게 죽음이 친절한 손님으로 가장하고 찾아왔습니다. 그 부자는 친절하게 대접하다가, 그 사람의 신분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는 놀랍니다. 그 부자는 죽음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다가, 결국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그것은 하루만이라도 시간을 주어, 동행자를 불러 같이 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그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는 서둘러서 죽마고우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친구,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왔네.’ ‘그래 이야기 해봐. 우리 둘 사이에 못 들어 줄 것이 뭐 있겠나?’ ‘친구, 지금 내가 여행을 갈려고 하는데 동행해 줄 수 있겠나?’ ‘어떤 여행인데?’ ‘이 여행은 한번가면 다시 되돌아 올 수 없는 여행이라네.’ 무슨 여행인데 말해봐. 백리면 어떻고 천리면 같이 못 가겠어?‘ ’친구, 그건 죽음의 여행이야.‘ ’그러자 순간 친구는 당황하면서 안색이 변하며 미안하네. 그것만은 어쩔 수 없네.‘
그는 일가친척을 찾아다니며 말해봤지만 모두가 거절했습니다. 이제 그는 죽음의 사자와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다 거절하여도 아내만은 동행해 줄줄 알았습니다. 아내에게 사실대로 얘기하자 아내는 여보, 나는 아직 세상에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으니 같이 갈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배신감에 울고 있는 그에게 그가 평소에 그렇게 싫어하고 미워하였던 ‘은혜’란 이가 나타났습니다. 은혜는 그에게 죄를 지적해 주고 해결책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회개’라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회개를 만나 자신의 모든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회개는 ‘용서’라는 친구를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은혜, 회개, 용서’라는 세 친구와 즐겁게 죽음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회개와 용서와 은혜가 있습니다.
넷째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미리 택하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배우고 들은 것이 아니라 본 것입니다. 체험한 것입니다. 이론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엄연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택하셨고, 전도를 명하셨고,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다섯째는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심판주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43절을 보겠습니다.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을 믿는 목적은 죄를 용서 받는데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기복신앙이 자리 잡고 있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타종교에도 병 고침이 있고, 물질의 축복도 준다고 하고, 삶에 도움이 되는 교훈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는 절대로 줄 수 없는 것이 ‘죄 사함’입니다. 죄 사함은 기독교, 복음만이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 사함은 ‘예수님의 피’로써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님만이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고,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믿으면’ 입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증거를 믿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믿으면 됩니다. 믿지 않으면 역사적인 사실일 뿐입니다.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으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십자가를 믿고 부활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44-48절은 이방인에게 임한 오순절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에게는 주로 예수님의 부활과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고넬료에게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생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심판, 죄 사함의 은혜, 곧 복음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는 놀라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와의 만남,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그 경건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심판주로 다시 오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 받습니다.
고넬료에게 전한 베드로의 메시지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드에게 보내신 말씀(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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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부버는 인간관계를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만남을 ‘나-너’와 ‘나-그것’으로 보았습니다. ‘나-너’의 만남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고, ‘나-그것’은 비인격과의 만남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과의 만남이 사람이기 때문에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떠하기 때문에 만난다는 것입니다. 결혼의 대상을 만날 때에도 인격체로서의 만남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떠하기 때문에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인격체와의 만남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 또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믿고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하기 때문에 만난다면 그것은 비인격전인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복주머니로 믿고 만난다면 그것은 ‘나-너’의 만남이 아니라, ‘나-그것’과의 만남이 됩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나-너’의 만남이 아니라, ‘나-그것’과의 만남으로 인해 싹트게 되고, 인간의 존재가치가 파괴된다고 봅니다. ‘나-너’와의 만남은 참된 삶을 창조해 나가지만, ‘나-그것’과의 만남은 불행을 가져다줍니다.
본문은 고넬료와 베드로의 역사적인 만남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와 만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통해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죽음에서 부활을, 심판과 저주에서 용서를, 허무에서 의미있는 삶을, 절망에서 희망을, 멸망에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뿌리 깊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불신의 벽이 무너졌고, 하나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를 일명 베드로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이해하고, 믿고, 전하고 있는 복음이 여기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진수, 복음 중의 복음, 성경 중의 성경, 복음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의 진수를 깨닫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23-33)
베드로는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의심이 깨뜨려졌습니다. 편견이 깨졌습니다. 좁은 nationalism, 유다이즘이 깨졌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더 이상 고개를 쳐들지 않고,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쓰시고, 이런 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과 함께 가이샤라에 갔습니다(24). 그의 집에는 고넬료 일가와 친척들이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집에 들어가자 고넬료는 발아래 엎드려 절했습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아래 엎드리어 절하니” ‘발아래 엎드려 절했다’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세쿠네센, 발에 입 맞춘다는 뜻입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는 정도가 아니라 무릎을 꿇고 발에다가 입을 맞췄습니다. 그래서 절하다가 아니라 경배했다는 뜻입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경배했다는 것도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입니다. 그리고 점령군 사령부의 백부장입니다. 그가 입은 로마군인의 제복이 얼마나 위용이 있었겠습니까? 그의 제복에는 계급장과 훈장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지체가 높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시골 촌 어부 출신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고넬료와 베드로는 비교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고넬료가 갈릴리 촌 어부 베드로를 보는 순간 발아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가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육신의 눈으로 베드로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베드로의 외모를 보지 않았습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의 눈으로 베드로를 보았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하나님이 보낸 사자로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자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구체화된 것이 베드로를 사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다(마10:40).”
베드로는 고넬료의 극진한 대접에 송구스러워서 이렇게 말합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나도 사람이라.’ 도대체 얼마나 영접을 했으면 이렇게 말하였습니까? 한편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을 보게 됩니다. 그는 자기 위치를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두 가지 경우 자기를 위치를 상실하기 쉽습니다. 하나는 너무나 무시를 받으면 자기 위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너 그럴 수 있어” 인간관계가 파괴됩니다. 자기 위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지나친 칭찬과 대우를 받을 경우 자기 자신의 위치를 상실하고 자기 우상화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큰 시험입니다.
우리가 높임을 받고 존경을 받을수록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종이요 주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겸손한 마음, 본래의 자기 위치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끝까지 자기 위치를 잊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3장 12절에서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하자 사람들이 베드로를 주목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본래 사람 앞에서 우쭐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겸손했습니다.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 위치를 알았습니다. 자기 분수와 위치를 알지 못하고 날뛰면 자기 도 망하고, 그로 인해 세상에 끼치는 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쓰신 사람은 모두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 위치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사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은혜를 잊고 뭣이 된 양 목을 꼿꼿하게 들고 다녔습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악신에 들려 고통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시골에서 양 치던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스라엘의 왕이요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고 겸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7:18)”
사도 바울은 자랑 할만도 합니다. 그런데 그는 겸손했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겸손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그는 자신을 구원하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딤전1:15).”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고 존경을 받을 때 늘 주님의 도구요, 주님의 종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벧전5:5). 겸손이 가장 큰 미덕입니다.
28,29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의 집에 와서 식사를 하는 것이 위법인 줄로 알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사양치 않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통념보다 말씀을 앞세웠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묻습니다.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그러자 고넬료가 그간 있었던 사건을 육하원칙으로 얘기하였습니다. “나흘 전에 9시에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구제를 기억하였다, 욥바에 가서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시기에 말씀에 순종하여 종을 보내어 당신을 초청하였습니다.”
이어서 고넬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33절을 보겠습니다. “오셨으니 잘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고넬료의 목전에 누가 있습니까? 베드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 앞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보면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 ‘여기에 있다’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말씀하실 바야 직통으로 말씀하실 것이지, 왜 베드로를 통해 들으라고 하시지? 아니면 천사를 통해 직접 들려주시던지? 그런데 고넬료는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을 통해 듣고자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 베드로를 상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카리스마, 권위를 존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종을 통해 듣는 자세, 이게 바른 자세입니다. 복음을 듣는 자와 전하는 자가 함께 할 때 말씀이 역사합니다.
둘째, 베드로가 일어나 입을 열어 가로되(34-48)
고넬료는 어떤 말씀도 다 받아들일 자세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입을 엽니다. 34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전권적인 역사에 감탄하였습니다. 자신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고넬료에게 계시를 보여 주시어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렇게 역사는 시작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베드로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끌고 가는, 자기는 끌려간다,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구원하시고, 그를 통해 온 가족을 구원하고자 하시고, 더 나아가 로마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깊은 섭리, 이것이 하나님이 땅 끝까지 구원하고자 하시는 깊은 뜻임을 보고 감격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외모를 보고 선택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감격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외모를 보고 취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은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얼굴을 보고 택하지 않습니다. 인종, 피부색이나 신장이나 미모나 재산이나 지식 등을 보고 사람을 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진실을 보고 취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중심을 본다고 하셨습니다(삼상16:12). 하나님은 언제나 중심, 내면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경건을 보십니다. 행위가 있는 경건입니다. 바리새인이 말하는 경건이 아닌 행위를 동반한 경건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복음이 임합니다.
그가 전한 복음의 진수,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예수님은 화평케 하십니다. 36절을 보겠습니다.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복음은 이스라엘이냐 이방인이냐 또 계급이 무엇이냐에 상관없이 화평을 이루십니다. 특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을 이루십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 화평의 복음을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복음은 모든 ‘담’은 헙니다. 복음은 이방인 뜰과 성전 뜰 사이의 담을 헙니다. 복음은 성전 뜰과 성소 사이에 담을 헙니다. 복음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담을 헙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많은 담들이 있습니다. 과거 우리 조상에서는 양반과 상민이라는 차별, 적자와 서자라는 높은 담이 있었습니다. 조상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양반과 상민의 담을 헐지 못해 안동교회와 경동교회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모든 벽이 사라졌습니다. 지금 영호남의 담, 남북의 담이 높습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벽이 있습니다. 인종의 벽,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의 벽이 있습니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벽이 있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벽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담을 허셔서 하나로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 중에 담이 있습니까? 담이 있다면 십자가에서 모든 담을 허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주님은 화평이십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착한 일을 하셨습니다. 37,38절을 보겠습니다.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후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다니시며 아름다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착한 일을 하시고 마귀의 권세에 눌려 신음하는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치유하셨고, 귀신을 내쫓았고,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 모든 착한 일들, 이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39절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십자가는 복음의 진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공의를 알고, 십자가를 통해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장래도 알고, 기도하면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은 하나님께서 무엇인들 못 들어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속에 모든 복음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연극 중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부요한 사람에게 죽음이 친절한 손님으로 가장하고 찾아왔습니다. 그 부자는 친절하게 대접하다가, 그 사람의 신분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는 놀랍니다. 그 부자는 죽음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다가, 결국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그것은 하루만이라도 시간을 주어, 동행자를 불러 같이 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그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는 서둘러서 죽마고우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친구,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왔네.’ ‘그래 이야기 해봐. 우리 둘 사이에 못 들어 줄 것이 뭐 있겠나?’ ‘친구, 지금 내가 여행을 갈려고 하는데 동행해 줄 수 있겠나?’ ‘어떤 여행인데?’ ‘이 여행은 한번가면 다시 되돌아 올 수 없는 여행이라네.’ 무슨 여행인데 말해봐. 백리면 어떻고 천리면 같이 못 가겠어?‘ ’친구, 그건 죽음의 여행이야.‘ ’그러자 순간 친구는 당황하면서 안색이 변하며 미안하네. 그것만은 어쩔 수 없네.‘
그는 일가친척을 찾아다니며 말해봤지만 모두가 거절했습니다. 이제 그는 죽음의 사자와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다 거절하여도 아내만은 동행해 줄줄 알았습니다. 아내에게 사실대로 얘기하자 아내는 여보, 나는 아직 세상에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으니 같이 갈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배신감에 울고 있는 그에게 그가 평소에 그렇게 싫어하고 미워하였던 ‘은혜’란 이가 나타났습니다. 은혜는 그에게 죄를 지적해 주고 해결책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회개’라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회개를 만나 자신의 모든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회개는 ‘용서’라는 친구를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은혜, 회개, 용서’라는 세 친구와 즐겁게 죽음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회개와 용서와 은혜가 있습니다.
넷째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미리 택하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배우고 들은 것이 아니라 본 것입니다. 체험한 것입니다. 이론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엄연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택하셨고, 전도를 명하셨고,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다섯째는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심판주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43절을 보겠습니다.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을 믿는 목적은 죄를 용서 받는데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기복신앙이 자리 잡고 있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타종교에도 병 고침이 있고, 물질의 축복도 준다고 하고, 삶에 도움이 되는 교훈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는 절대로 줄 수 없는 것이 ‘죄 사함’입니다. 죄 사함은 기독교, 복음만이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 사함은 ‘예수님의 피’로써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님만이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고,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믿으면’ 입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증거를 믿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믿으면 됩니다. 믿지 않으면 역사적인 사실일 뿐입니다.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으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십자가를 믿고 부활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44-48절은 이방인에게 임한 오순절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에게는 주로 예수님의 부활과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고넬료에게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생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심판, 죄 사함의 은혜, 곧 복음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는 놀라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와의 만남,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그 경건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심판주로 다시 오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