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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제 29 강(말씀, 11:1-30,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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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보면 기독도와 믿음이라는 두 순례자가 천국을 향해 가는 중에 허영이라는 도시를 지나게 됩니다. 허영이라는 도시에는 ‘허영의 저자’라는 시장이 매일 열립니다. 기독도가 허영이라는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 시장 사람들이 술렁이며 법석을 떨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 중의 첫째는 그들이 입은 옷이 허영의 시장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의 말도 시장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들이 이곳 상품을 눈여겨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인들이 물건을 사라고 외치면 “내 눈을 열어 헛된 것을 보지 말게 하소서”라고 하며 위를 쳐다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장 상인이 “도대체 당신들은 무엇을 사기를 원하오?” 물으니 기독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사는 사람입니다.” 존 번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스타일, 곧 말하는 것이나, 옷 입는 것이나, 관심의 대상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셨을 때 최고의 지성인인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주의 손이 함께 했을 때 그들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삶의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헬라인들은 헬라 문화의 지배를 받습니다. 헬라 문화는 한 마디로 말한다면 신화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는 도시에는 신을 섬기는 신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주로 술의 신인 바커스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입니다. 그리고 아폴론의 사랑을 뿌리치고 월계수가 된 다프네입니다. 아폴론은 다프네를 못 잊어 자신을 사시사철 푸르게 하고 다녔습니다.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올림픽 마라톤에서 승리하면 월계수 잎으로 만든 관을 씁니다. 이런 안디옥에 복음이 전해지자 믿는 자들이 늘어나고, 그들의 삶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되었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렸습니다. 헛된 세속적 야망과 쾌락을 던져버렸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안디옥 교인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지금은 크리스천이라고 하면 영광스러운 이름이었지만 당시에는 조롱의 대명사였습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여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삶이 달라진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과 옷차림과 행동과 관심과 생각도 달라진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쟁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를 바랍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면 여러분은 거인이 될 것입니다. 아멘.
첫째, 차례로 설명하는 베드로(1-10)
1-10절은 사도행전 10장을 다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왜 두 번씩이나 같은 내용을 기록했을까요? 이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이방인들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은 천지가 진동할 사건 중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형제가 되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남녀의 장벽, 이념의 장벽, 인종의 장벽, 신분의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이 현실화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할례자들은 유대크리스천들을 말하고, 무할례자들은 이방인을 일컫습니다. 유대 크리스천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을 들었으면 크게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옳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베드로에게 힐난했습니다. ‘힐난하다’는 단순한 이의제기가 아닙니다.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단정하고, 더 나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 그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이는 기득권과 특권의식, 우월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특별한 종교문화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율법과 할례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다른 민족과 나누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선민이다. 택한 백성이다. 저들은 못 된 것들, 저것들은 개 같은 것들, 지옥에 땔감들이다”라고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저런 개 같은 것들과 자리를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싫었습니다. 그들은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나쁜 습관이 있는데, 그것은 남이 잘 되는 것에 대한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잘 되는 것이 배가 아팠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역사를 차례로 설명했습니다(4). 베드로는 매우 성질이 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차분하게 차례로 설명을 합니다. 그는 사실대로 설명합니다. 그는 논리나 철학적으로 말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가치관과 철학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하셨다, 나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다, 사건대로 그대로 설명합니다.
또 하나는 베드로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말합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셨고,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 하시기에 나는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내가 본 환상을 여러분도 보았다면, 고넬료가 내게 절하는 것을 보았다면, 고넬료가 말씀을 듣고 변화된 것을 보았다면, 여러분이 만일 나와 같았으면 당신들도 똑같이 나와 같이 행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정죄하는 마음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반박하기 위해 말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그들 편에서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위치를 바꿔놓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게 소통입니다. 사랑은 소통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기보다 자기 자신의 뜻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논쟁과 오해가 생기고 소통이 안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 입장에 서서, 위치를 바꿔놓고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사랑이 있는 그런 사람, 논쟁이 아닌 서로 소통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령이 내게 명하사(11-18)
11-18절은 베드로의 증거입니다. 그의 증거는 합리적인 이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체험에서 나온 확신이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한 확신이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도 베드로 혼자 경험했다면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를 포함한 6명의 증인을 내세웁니다. 히브리인들은 증인 두 명을 세우면 증거가 됩니다. 반면에 로마 사람들은 7명의 증인을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 증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베드로는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하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2장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님의 마음은 열방이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방인의 집에 못 들어갈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다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하면 안 된다는 식사 문화로 인해 복음이 막히면 안 됩니다. 복음은 문화보다 앞섭니다. 문화는 변하지만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규례도 변하고 윤리도 변하지만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남녀칠세부동석이었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초기 한국 교회에는 중앙에 휘장을 쳐서 남녀 구별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문화는 변하지만 구원의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죽고 사는 갈림길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 4-7절에서 예수님은 잃은 양에 대한 비유를 들어 죄인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얼마나 귀한가를 말씀합니다. 양 일백 마리를 가진 목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양 한 마리가 없어졌습니다. 목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고 있을 양을 생각하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맹수에게 쫓기고 있을 양을 생각하면 남아 있는 아흔 아홉 마리는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한 마리를 찾을 때 아흔 아홉 마리 남은 양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더 큰 손해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어떤 대가와 희생을 치르더라도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나섰습니다. 마침내 양을 찾았습니다. 이 때 목자의 기쁨이 어떠했을까요? 목자는 달려가 양을 부둥켜안고 얼굴을 비비며 기뻐하게 됩니다. 그리고 양을 번쩍 들어 어깨에 메고 단숨에 집으로 달려와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베풉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해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다면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어떤 희생, 어떤 것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각오가 돼 있어야 합니다. 이게 목자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성령의 역사를 말씀합니다. 12-15절을 보면 성령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성령의 역사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성령께서 아무 것도 의심하지 말고 사람들과 함께 가라고 하였음을 밝힙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가라고 하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에 절대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성령이 하라고 하면 어떤 희생도 각오를 하고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라고 하면 이방인의 집이던지 아니던지 상관하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16절을 보면 베드로는 ‘생각이 났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 직전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1:5)”고 하셨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생각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가 생각나는 순간, 그는 맞다, 용기 있게 말씀을 전했고,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때 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8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그들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잠잠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말입니다.
누가가 이 말씀을 결론으로 기록한 것은 우리의 사명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는 받은 복음을 다른 이방인에게 전해야 합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충만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헬라인에게도 말씀을 전하매(19-30)
복음이 로마 사람인 가이샤랴 고넬료의 집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복음이 이미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지정학적으로 로마에 전해졌습니다. 이제 이 복음이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헬라인에게 전해집니다.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와 구브로, 그리고 안디옥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안디옥은 2000년 전 당시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 3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안디옥 인구가 5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안디옥은 교통의 중심지요 동서 문화가 만나는 곳입니다.
헬라인은 지성의 상징입니다. 헬라인들은 지성을 최고의 덕성으로 삼고, 이성을 중시하며 논리적이고 정확한 지식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사고방법의 소유자들이었고, 당시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교만한 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유대는 로마제국의 동쪽 자락의 변방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초라하고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거기다가 그들이 전하는 내용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는 헬라인들에게 미련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명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유식한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헬라어가 신통치 않았습니다. 언변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명의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어떤 이변이 일어났습니까?
21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주의 손이 함께 하시매 그들이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한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명이냐 유명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명의 전도자들이 전한 복음이 유능한 헬라인들을 변화시킵니다. 주님의 손이 함께 하면 역사가 바꾸어지고 뒤집어집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자 이방세계에 최초의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교회는 앞으로 유명한 사도바울을 배출합니다. 이방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합니다. 세계 선교의 power station이 됩니다.
성경에서 주의 손은 전능하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시매 모세의 마른 막대기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양치는 지팡이 하나 밖에 없는 모세에게 애굽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는 과거 애굽의 왕자였기 때문에 애굽의 군사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모세에게 군인 한 명, 무기 하나 주시지 않고, 애굽으로 가서 고통당하는 백성을 해방시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겸손하게 순종하고 마른 막대기를 손에 들고 애굽으로 향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모세가 쥐고 그의 지팡이가 호칭이 달라집니다.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출4:20).”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로 불린 이후부터, 그 지팡이는 더 이상 마른 막대기가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그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을 때, 폭 32킬로미터의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모세가 그 지팡이로 광야의 반석을 내리쳤을 때 2백만 명 이상이 마시고도 남는 생수가 광야에서 강물처럼 흘러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마른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른 지팡이는, 모세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마른 지팡이처럼 광야에서 처갓집의 양이나 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힐 때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는 목자요 장군이요 이스라엘 역사상 위대한 거인이 되었습니다.
다윗 청년이 이스라엘 왕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 역시 다윗 개인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이 다윗과 일평생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손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 다윗은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을 의식하면서 그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시31:15).” 주의 손이 함께 하실 때 불가능이 없습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시면 여러분은 무명인이 유명 인사가 되고, 여러분은 역사상 위대한 거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시면 여러분이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직장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인하대와 인천대가 변합니다.
22절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문을 듣고 즉시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주께 굳게 붙어 있도록 권면했습니다. 그의 권면으로 인해 큰 무리가 주께 더했습니다(24). 안디옥 교회가 양적으로 불어날 때 수에 말려들어 붕붕 뜨기 쉽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초청하여 일 년간 말씀을 공부하고 제자들을 굳게 세웠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귀신문화를 버렸습니다. 술 귀신을 버렸습니다. 쾌락과 음란 문화를 버렸습니다. 헛된 세속적 야망과 쾌락을 던져버렸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삶의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26b절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람들은 안디옥 교인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당시 신자들은 제자들, 형제들, 또는 거룩한 무리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안디옥 신자들을 조롱하여 부른 별명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예수쟁이란 뜻입니다. 안디옥 교인들이 말씀 공부를 열심히 하고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니 예수님께 미친 자들이라는 뜻으로 불러준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이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지 않고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천이란 ‘a man in christ’, ‘imitation of Christ’의 준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당시 크리스천들은 이 이름 때문에 많은 핍박과 수모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크리스천으로서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하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주님의 손이 함께 하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주님의 손이 함께하면 내 삶이 변합니다. 주님의 손이 함께 하면 세속의 사람이 크리스천이란 영광스러운 이름이 붙여집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면 위대한 거인이 됩니다. 주님의 손이 함께 하면 여러분의 자녀와 가정과 직장과 캠퍼스가 변합니다. 아멘.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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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보면 기독도와 믿음이라는 두 순례자가 천국을 향해 가는 중에 허영이라는 도시를 지나게 됩니다. 허영이라는 도시에는 ‘허영의 저자’라는 시장이 매일 열립니다. 기독도가 허영이라는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 시장 사람들이 술렁이며 법석을 떨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 중의 첫째는 그들이 입은 옷이 허영의 시장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의 말도 시장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들이 이곳 상품을 눈여겨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인들이 물건을 사라고 외치면 “내 눈을 열어 헛된 것을 보지 말게 하소서”라고 하며 위를 쳐다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장 상인이 “도대체 당신들은 무엇을 사기를 원하오?” 물으니 기독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사는 사람입니다.” 존 번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스타일, 곧 말하는 것이나, 옷 입는 것이나, 관심의 대상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셨을 때 최고의 지성인인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주의 손이 함께 했을 때 그들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삶의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헬라인들은 헬라 문화의 지배를 받습니다. 헬라 문화는 한 마디로 말한다면 신화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는 도시에는 신을 섬기는 신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주로 술의 신인 바커스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입니다. 그리고 아폴론의 사랑을 뿌리치고 월계수가 된 다프네입니다. 아폴론은 다프네를 못 잊어 자신을 사시사철 푸르게 하고 다녔습니다.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올림픽 마라톤에서 승리하면 월계수 잎으로 만든 관을 씁니다. 이런 안디옥에 복음이 전해지자 믿는 자들이 늘어나고, 그들의 삶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되었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렸습니다. 헛된 세속적 야망과 쾌락을 던져버렸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안디옥 교인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지금은 크리스천이라고 하면 영광스러운 이름이었지만 당시에는 조롱의 대명사였습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여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삶이 달라진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과 옷차림과 행동과 관심과 생각도 달라진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쟁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를 바랍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면 여러분은 거인이 될 것입니다. 아멘.
첫째, 차례로 설명하는 베드로(1-10)
1-10절은 사도행전 10장을 다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왜 두 번씩이나 같은 내용을 기록했을까요? 이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이방인들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은 천지가 진동할 사건 중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형제가 되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남녀의 장벽, 이념의 장벽, 인종의 장벽, 신분의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이 현실화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할례자들은 유대크리스천들을 말하고, 무할례자들은 이방인을 일컫습니다. 유대 크리스천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을 들었으면 크게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옳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베드로에게 힐난했습니다. ‘힐난하다’는 단순한 이의제기가 아닙니다.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단정하고, 더 나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 그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이는 기득권과 특권의식, 우월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특별한 종교문화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율법과 할례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다른 민족과 나누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선민이다. 택한 백성이다. 저들은 못 된 것들, 저것들은 개 같은 것들, 지옥에 땔감들이다”라고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저런 개 같은 것들과 자리를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싫었습니다. 그들은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나쁜 습관이 있는데, 그것은 남이 잘 되는 것에 대한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잘 되는 것이 배가 아팠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역사를 차례로 설명했습니다(4). 베드로는 매우 성질이 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차분하게 차례로 설명을 합니다. 그는 사실대로 설명합니다. 그는 논리나 철학적으로 말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가치관과 철학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하셨다, 나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다, 사건대로 그대로 설명합니다.
또 하나는 베드로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말합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셨고,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 하시기에 나는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내가 본 환상을 여러분도 보았다면, 고넬료가 내게 절하는 것을 보았다면, 고넬료가 말씀을 듣고 변화된 것을 보았다면, 여러분이 만일 나와 같았으면 당신들도 똑같이 나와 같이 행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정죄하는 마음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반박하기 위해 말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그들 편에서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위치를 바꿔놓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게 소통입니다. 사랑은 소통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기보다 자기 자신의 뜻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논쟁과 오해가 생기고 소통이 안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 입장에 서서, 위치를 바꿔놓고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사랑이 있는 그런 사람, 논쟁이 아닌 서로 소통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령이 내게 명하사(11-18)
11-18절은 베드로의 증거입니다. 그의 증거는 합리적인 이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체험에서 나온 확신이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한 확신이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도 베드로 혼자 경험했다면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를 포함한 6명의 증인을 내세웁니다. 히브리인들은 증인 두 명을 세우면 증거가 됩니다. 반면에 로마 사람들은 7명의 증인을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 증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베드로는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하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2장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님의 마음은 열방이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방인의 집에 못 들어갈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다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하면 안 된다는 식사 문화로 인해 복음이 막히면 안 됩니다. 복음은 문화보다 앞섭니다. 문화는 변하지만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규례도 변하고 윤리도 변하지만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남녀칠세부동석이었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초기 한국 교회에는 중앙에 휘장을 쳐서 남녀 구별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문화는 변하지만 구원의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죽고 사는 갈림길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 4-7절에서 예수님은 잃은 양에 대한 비유를 들어 죄인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얼마나 귀한가를 말씀합니다. 양 일백 마리를 가진 목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양 한 마리가 없어졌습니다. 목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고 있을 양을 생각하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맹수에게 쫓기고 있을 양을 생각하면 남아 있는 아흔 아홉 마리는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한 마리를 찾을 때 아흔 아홉 마리 남은 양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더 큰 손해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어떤 대가와 희생을 치르더라도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나섰습니다. 마침내 양을 찾았습니다. 이 때 목자의 기쁨이 어떠했을까요? 목자는 달려가 양을 부둥켜안고 얼굴을 비비며 기뻐하게 됩니다. 그리고 양을 번쩍 들어 어깨에 메고 단숨에 집으로 달려와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베풉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해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다면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어떤 희생, 어떤 것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각오가 돼 있어야 합니다. 이게 목자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성령의 역사를 말씀합니다. 12-15절을 보면 성령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성령의 역사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성령께서 아무 것도 의심하지 말고 사람들과 함께 가라고 하였음을 밝힙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가라고 하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에 절대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성령이 하라고 하면 어떤 희생도 각오를 하고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라고 하면 이방인의 집이던지 아니던지 상관하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16절을 보면 베드로는 ‘생각이 났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 직전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1:5)”고 하셨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생각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가 생각나는 순간, 그는 맞다, 용기 있게 말씀을 전했고,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때 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8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그들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잠잠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말입니다.
누가가 이 말씀을 결론으로 기록한 것은 우리의 사명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는 받은 복음을 다른 이방인에게 전해야 합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충만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헬라인에게도 말씀을 전하매(19-30)
복음이 로마 사람인 가이샤랴 고넬료의 집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복음이 이미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지정학적으로 로마에 전해졌습니다. 이제 이 복음이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헬라인에게 전해집니다.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와 구브로, 그리고 안디옥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안디옥은 2000년 전 당시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 3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안디옥 인구가 5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안디옥은 교통의 중심지요 동서 문화가 만나는 곳입니다.
헬라인은 지성의 상징입니다. 헬라인들은 지성을 최고의 덕성으로 삼고, 이성을 중시하며 논리적이고 정확한 지식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사고방법의 소유자들이었고, 당시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교만한 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유대는 로마제국의 동쪽 자락의 변방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초라하고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거기다가 그들이 전하는 내용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는 헬라인들에게 미련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명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유식한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헬라어가 신통치 않았습니다. 언변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명의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어떤 이변이 일어났습니까?
21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주의 손이 함께 하시매 그들이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한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명이냐 유명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명의 전도자들이 전한 복음이 유능한 헬라인들을 변화시킵니다. 주님의 손이 함께 하면 역사가 바꾸어지고 뒤집어집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자 이방세계에 최초의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교회는 앞으로 유명한 사도바울을 배출합니다. 이방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합니다. 세계 선교의 power station이 됩니다.
성경에서 주의 손은 전능하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시매 모세의 마른 막대기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양치는 지팡이 하나 밖에 없는 모세에게 애굽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는 과거 애굽의 왕자였기 때문에 애굽의 군사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모세에게 군인 한 명, 무기 하나 주시지 않고, 애굽으로 가서 고통당하는 백성을 해방시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겸손하게 순종하고 마른 막대기를 손에 들고 애굽으로 향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모세가 쥐고 그의 지팡이가 호칭이 달라집니다.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출4:20).”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로 불린 이후부터, 그 지팡이는 더 이상 마른 막대기가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그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을 때, 폭 32킬로미터의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모세가 그 지팡이로 광야의 반석을 내리쳤을 때 2백만 명 이상이 마시고도 남는 생수가 광야에서 강물처럼 흘러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마른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른 지팡이는, 모세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마른 지팡이처럼 광야에서 처갓집의 양이나 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힐 때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는 목자요 장군이요 이스라엘 역사상 위대한 거인이 되었습니다.
다윗 청년이 이스라엘 왕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 역시 다윗 개인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이 다윗과 일평생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손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 다윗은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을 의식하면서 그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시31:15).” 주의 손이 함께 하실 때 불가능이 없습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시면 여러분은 무명인이 유명 인사가 되고, 여러분은 역사상 위대한 거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시면 여러분이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직장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인하대와 인천대가 변합니다.
22절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문을 듣고 즉시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주께 굳게 붙어 있도록 권면했습니다. 그의 권면으로 인해 큰 무리가 주께 더했습니다(24). 안디옥 교회가 양적으로 불어날 때 수에 말려들어 붕붕 뜨기 쉽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초청하여 일 년간 말씀을 공부하고 제자들을 굳게 세웠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귀신문화를 버렸습니다. 술 귀신을 버렸습니다. 쾌락과 음란 문화를 버렸습니다. 헛된 세속적 야망과 쾌락을 던져버렸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삶의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26b절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람들은 안디옥 교인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당시 신자들은 제자들, 형제들, 또는 거룩한 무리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안디옥 신자들을 조롱하여 부른 별명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예수쟁이란 뜻입니다. 안디옥 교인들이 말씀 공부를 열심히 하고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니 예수님께 미친 자들이라는 뜻으로 불러준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이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지 않고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천이란 ‘a man in christ’, ‘imitation of Christ’의 준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당시 크리스천들은 이 이름 때문에 많은 핍박과 수모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크리스천으로서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하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주님의 손이 함께 하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주님의 손이 함께하면 내 삶이 변합니다. 주님의 손이 함께 하면 세속의 사람이 크리스천이란 영광스러운 이름이 붙여집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면 위대한 거인이 됩니다. 주님의 손이 함께 하면 여러분의 자녀와 가정과 직장과 캠퍼스가 변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