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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제 31 강(말씀, 11:19-30, 13:1-3, 요절, 13:2)
안디옥 교회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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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는 다섯 가지의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의 기능입니다. 예배는 교회의 일차적 기능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으십니다(요4:23,24). 둘째는 전도, 선교의 기능입니다. 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한 선교의 전초 기지로서 이 세상 안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는 전도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지역 사회 뿐만 아니라 이문화권까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선교를 통해 교회가 세워집니다. 셋째는 교육의 기능이 있습니다. 교회는 성경을 교재로 하여 모든 것을 가르치는 교육의 기능을 가집니다. 넷째는 친교의 기능이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뜨겁게 역사하는 아름다운 주님의 사랑을 토대로 성도들 간의 아름다운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다섯째는 봉사의 기능입니다. 봉사는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기도로 헌신할 수 있고, 시간으로 헌신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로 헌신할 수 있고, 물질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부터 12장까지는 사도 베드로 중심의 유대인 사역이라면, 13장부터 28장까지는 바울 중심의 이방인 중심 사역입니다. 다시 말해 1장부터 12장 까지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에 일어난 역사라면, 13장부터는 사도 바울의 네 차례 걸친 전도 여행으로, 기독교가 세계화가 되는 사역입니다. 그 중심에 안디옥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안디옥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교회였습니까? 안디옥 교회는 위에 열거한 교회의 다섯 가지 기능을 갖춘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안디옥 교회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고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안디옥 교회는 무명의 평신도들이 세웠습니다(11:19-21).
스데반의 순교는 세계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먼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사울이 회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사방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로 인해 복음의 불길이 들불처럼 사방에 퍼져나갔습니다. 집사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사마리아가 복음화 되었습니다. 또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여 아프리카에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의 순교를 세계선교에 쓰셨습니다.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 성장의 씨앗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1장 19-21절을 보면 무명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핍박을 피해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정처 없는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장래가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부활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믿음으로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안디옥은 수리아의 수도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당시 3대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은 당시 ‘동방의 로마’, ‘동방의 여왕’이라고 불렸습니다.
핍박으로 흩어진 무명의 전도자들은 유다이즘을 뛰어넘어 믿음으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헬라인들이 복음을 영접하여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지성의 대명사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성인들은 자기 나름대로 형성된 가치관이 있어 복음에 대한 반응이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명의 전도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21절을 보면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하시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는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부활신앙을 가지고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유명인과 무명인을 차별하시지 않으십니다. 외적으로 보면 사도행전의 주역이 베드로와 바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주역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긴 무명의 전도자들입니다. 사도행전 13장의 1절을 보더라도 안디옥에는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름만 나오지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축복하여 안디옥 교회가 탄생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무명의 전도자들의 역사입니다. 우리 교회를 보더라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한 평신도들의 헌신의 역사입니다. 우리 교회 선교사들을 보면 신학교를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순수한 믿음을 쓰시어 러시아를 개척하고 헝가리와 루마니아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집사님들의 헌신과 기도로 새싹과 같은 젊은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없이 조용히 복음을 전하는 무명의 전도자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둘째, 안디옥 교회는 말씀을 사랑하였습니다(11:22-26).
11장 22-26절을 보면 안디옥에 하나님의 역사가 놀랍게 일어난다는 소문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즉시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했습니다.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심히 기뻐하고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바나바는 이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25,26a절을 보겠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바나바는 성경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소에 있는 사울을 초청하여 일 년 간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무리 중심이 아니라 제자 중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더 나아가 13장 1절을 보면 유능한 교사들의 생겨났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부흥의 비결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 교사들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은사 중심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 교사를 양성하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큰 교회였지만 문제만 일으키고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던 것은 은사를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안디옥 교회는 작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더불어 초대 교회의 양대 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나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십니다.
초대 한국 교회는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주역인 윌리엄 블레어 선교사는 그의 저서 ‘God in Korea’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50 여년이 넘도록 한국교회가 급격히 성장하고 지속적으로 부흥할 수 있었던 조건을 각자 나름대로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사경회라고 대답할 것이다.” 성경 공부는 사경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성경을 한 구절씩 공부하고 조직적으로 공부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성경공부는 성경에 대한 지식을 증가해주었고, 나태해진 신자들에게는 신앙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초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만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백낙준 박사는 기도회와 사경회는 한국 부흥의 기원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선배들이 성경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평양부흥회 때에 저 목포에서 성경과 먹을 것과 덮을 것을 들고 메고 이고 평양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처음 복음이 전파될 때부터 성경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 성도들을 Bible Lover, Bible Christian 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팔러 다니는 권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가가호호 방문하며 성경을 팔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로 인해 복음이 들어온 지 100 여년 밖에 안 되었지만 10,00만 성도, 인구의 25%가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별 볼 일 없습니다. 미국이나 서구 유럽 사람들과 비교할 때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거기다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지가 60년이 넘은 슬픈 민족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미국의 눈치를 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눈으로 보면 희망이 있습니다. 한국에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사랑하는 백성이 될 때 위대한 민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사랑했을 때 갈릴리 어부가 인류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D. L. Moody 목사님은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경을 사랑했을 때 영국을 변화시켰고 미국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미국이나 영국의 저명한 대학이 본래부터 유명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대학에 성경을 사랑하는 총장과 교수들과 성경을 사랑하는 소수의 학생들과의 만남을 통해 위대한 대학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사랑하여 성경교사가 될 때 여러분은 유명인이 되고, 여러분의 가정은 로열 family가 되고, 여러분이 다니는 대학은 명문대가 될 것입니다.
셋째, 안디옥 교회는 말씀을 듣고 행했습니다(11:26-30).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여 지식이 쌓이면 바리새인과 같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공부를 이론적으로 공부하지 아니하고 실제 삶 속에 적용하여 성경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랬을 때에 사람들은 그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불렀습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당시 사람들은 신자들, 제자들, 형제들, 또는 성도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신자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불림을 받게 된 것은 성경을 듣고 이론으로 끝나지 않고 행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중요하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면 행해야 합니다. 알고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교리적인 믿음, 지식적인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약2:17). 죽은 믿음은 냄새가 고약합니다. 제가 미션하우스의 지층의 베란다에 지렁이가 들어와 썩었는데 그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토할 것만 같았습니다. 이처럼 행함이 없고 말만 하는 믿음은 역겹습니다. 사람들에게 오히려 혐오감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 받기보다 짓밟힘을 당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있는 믿음은 산 믿음입니다. 산 믿음은 생명이 있어 따뜻합니다. 사랑스럽습니다. 자라고 역동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그들이 얼마나 성경 말씀대로 살았는지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힘에 지나도록 헌금하여 그들을 도왔습니다. 29,30절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개척기에 다른 곳을 도와준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구제 사업에 동참했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행20:35)”고 하신 말씀을 즉시 실천했습니다.
디모데후서 6장 말씀처럼 그들은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드리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위해 쓰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자기를 위해 쓰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 인색한 사람들은 반드시 신용불량자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과 이웃을 위해 드리는 분들은 절대로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산 믿음입니까? 아니면 죽은 믿음입니까?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소유한 크리스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쾌락과 물질주의로 병들어 가는 캠퍼스와 사회를 살리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배운 만큼 행하는 산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13:1-3).
13장 1절을 보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선지자와 교사로 그 기능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는 요즘 흔히 말하는 인간의 미래에 있을 생사화복을 말하는 무당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선지자는 헬라어로 프로페테스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계시를 받는 동시에 영감을 받아 외치는 사람입니다. 당시에는 성경이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이 있었지만 회당에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나 구약성경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다 기록되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격인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한 교회에 매이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지시하는 대로 오가야 합니다. 성령께 이끌리어 삽니다. 반면에 교사는 성경을 따라 가르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교사는 교회에 속합니다.
안디옥 교회를 보면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은 아프리카 흑인이었고, 마나엔은 헤롯의 젖먹이 동기 동창생으로 그의 친밀한 친구요, 궁중 고관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구성원을 보면 흑인도 있고, 백인도 있으며, 마나엔과 같은 귀족도 있었고, 천인도 있었습니다. 본토인도 있었고 바울과 바나바와 같이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신분이 천차만별하였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분열되기 쉬웠습니다. 하나가 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주님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와 다른 점입니다.
2절을 보면 “주를 섬겨 금식하고 있을 때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주를 섬겨”, 영어로 보면 예배, worship service입니다. 주를 섬겼다는 것은 주님을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주님께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뭣을 달라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섬기는 것입니다. 예배는 주님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주님 앞에서 경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경배하는 마음, 말씀을 듣는 자세, 뜻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예배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섬긴다고 하면 물질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은 마음을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다리는 것입니다. 보고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자하고 만지고자 하는 것은 인본주의 신앙입니다. 헬레니즘의 특징은 시각적, 촉각적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듣는 것, 청종하는 것,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예배하되 금식했습니다. 그들은 먹는 욕망을 끊고, 신령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님을 섬길 때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개인 명상이 아니고, 골방에서 기도하다가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라, 예배 중에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간구할 때 들은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을 때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우리는 예배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 중에 주님의 뜻을 찾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들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가라사대 내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불러 시키는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부르다는 소명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입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 내가 필요해서 시키는 것이니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사람, 사울과 바나바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히브리식이고 바울은 헬라식입니다. 주님의 역사는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시켜야 합니다. 주님께서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주님이 불러주셔야 합니다. 선교사는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사는 한국에서 취직을 못해 할 일 없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러서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 이런 사정을 들어 거절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개척 교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자리를 잡으면 선교사를 보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에 순종했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그들은 보냈습니다. sending church, 그들은 땅 끝 선교를 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이로 인해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를 처음으로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세계 선교의 중추적인 교회, 세계선교의 power station이 되었습니다.
선교 역사에는 sending group이 going group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파송하는 사람이나 파송 받는 사람이 모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파송하는 자가 없이 파송 받을 수 없고, 파송을 받는 자가 없이 파송할 수 없습니다. 파송을 한 사람들은 파송 받은 사람을 위해 물질과 기도와 편지로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파송을 받은 사람은 무조건 해외로 나간다고 선교사가 아니라 분명한 사명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루신, 이루고 계신 선교 사역을 보고해야 합니다.
우리가 안디옥 교회와 같이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실천하고, 세계선교하고 주고 섬기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안디옥 교회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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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는 다섯 가지의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의 기능입니다. 예배는 교회의 일차적 기능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으십니다(요4:23,24). 둘째는 전도, 선교의 기능입니다. 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한 선교의 전초 기지로서 이 세상 안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는 전도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지역 사회 뿐만 아니라 이문화권까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선교를 통해 교회가 세워집니다. 셋째는 교육의 기능이 있습니다. 교회는 성경을 교재로 하여 모든 것을 가르치는 교육의 기능을 가집니다. 넷째는 친교의 기능이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뜨겁게 역사하는 아름다운 주님의 사랑을 토대로 성도들 간의 아름다운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다섯째는 봉사의 기능입니다. 봉사는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기도로 헌신할 수 있고, 시간으로 헌신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로 헌신할 수 있고, 물질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부터 12장까지는 사도 베드로 중심의 유대인 사역이라면, 13장부터 28장까지는 바울 중심의 이방인 중심 사역입니다. 다시 말해 1장부터 12장 까지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에 일어난 역사라면, 13장부터는 사도 바울의 네 차례 걸친 전도 여행으로, 기독교가 세계화가 되는 사역입니다. 그 중심에 안디옥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안디옥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교회였습니까? 안디옥 교회는 위에 열거한 교회의 다섯 가지 기능을 갖춘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안디옥 교회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고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안디옥 교회는 무명의 평신도들이 세웠습니다(11:19-21).
스데반의 순교는 세계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먼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사울이 회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사방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로 인해 복음의 불길이 들불처럼 사방에 퍼져나갔습니다. 집사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사마리아가 복음화 되었습니다. 또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여 아프리카에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의 순교를 세계선교에 쓰셨습니다.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 성장의 씨앗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1장 19-21절을 보면 무명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핍박을 피해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정처 없는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장래가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부활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믿음으로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안디옥은 수리아의 수도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당시 3대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은 당시 ‘동방의 로마’, ‘동방의 여왕’이라고 불렸습니다.
핍박으로 흩어진 무명의 전도자들은 유다이즘을 뛰어넘어 믿음으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헬라인들이 복음을 영접하여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지성의 대명사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성인들은 자기 나름대로 형성된 가치관이 있어 복음에 대한 반응이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명의 전도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21절을 보면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하시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는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부활신앙을 가지고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유명인과 무명인을 차별하시지 않으십니다. 외적으로 보면 사도행전의 주역이 베드로와 바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주역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긴 무명의 전도자들입니다. 사도행전 13장의 1절을 보더라도 안디옥에는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름만 나오지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축복하여 안디옥 교회가 탄생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무명의 전도자들의 역사입니다. 우리 교회를 보더라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한 평신도들의 헌신의 역사입니다. 우리 교회 선교사들을 보면 신학교를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순수한 믿음을 쓰시어 러시아를 개척하고 헝가리와 루마니아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집사님들의 헌신과 기도로 새싹과 같은 젊은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없이 조용히 복음을 전하는 무명의 전도자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둘째, 안디옥 교회는 말씀을 사랑하였습니다(11:22-26).
11장 22-26절을 보면 안디옥에 하나님의 역사가 놀랍게 일어난다는 소문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즉시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했습니다.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심히 기뻐하고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바나바는 이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25,26a절을 보겠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바나바는 성경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소에 있는 사울을 초청하여 일 년 간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무리 중심이 아니라 제자 중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더 나아가 13장 1절을 보면 유능한 교사들의 생겨났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부흥의 비결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 교사들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은사 중심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 교사를 양성하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큰 교회였지만 문제만 일으키고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던 것은 은사를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안디옥 교회는 작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더불어 초대 교회의 양대 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나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십니다.
초대 한국 교회는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주역인 윌리엄 블레어 선교사는 그의 저서 ‘God in Korea’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50 여년이 넘도록 한국교회가 급격히 성장하고 지속적으로 부흥할 수 있었던 조건을 각자 나름대로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사경회라고 대답할 것이다.” 성경 공부는 사경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성경을 한 구절씩 공부하고 조직적으로 공부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성경공부는 성경에 대한 지식을 증가해주었고, 나태해진 신자들에게는 신앙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초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만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백낙준 박사는 기도회와 사경회는 한국 부흥의 기원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선배들이 성경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평양부흥회 때에 저 목포에서 성경과 먹을 것과 덮을 것을 들고 메고 이고 평양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처음 복음이 전파될 때부터 성경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 성도들을 Bible Lover, Bible Christian 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팔러 다니는 권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가가호호 방문하며 성경을 팔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로 인해 복음이 들어온 지 100 여년 밖에 안 되었지만 10,00만 성도, 인구의 25%가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별 볼 일 없습니다. 미국이나 서구 유럽 사람들과 비교할 때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거기다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지가 60년이 넘은 슬픈 민족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미국의 눈치를 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눈으로 보면 희망이 있습니다. 한국에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사랑하는 백성이 될 때 위대한 민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사랑했을 때 갈릴리 어부가 인류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D. L. Moody 목사님은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경을 사랑했을 때 영국을 변화시켰고 미국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미국이나 영국의 저명한 대학이 본래부터 유명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대학에 성경을 사랑하는 총장과 교수들과 성경을 사랑하는 소수의 학생들과의 만남을 통해 위대한 대학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사랑하여 성경교사가 될 때 여러분은 유명인이 되고, 여러분의 가정은 로열 family가 되고, 여러분이 다니는 대학은 명문대가 될 것입니다.
셋째, 안디옥 교회는 말씀을 듣고 행했습니다(11:26-30).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여 지식이 쌓이면 바리새인과 같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공부를 이론적으로 공부하지 아니하고 실제 삶 속에 적용하여 성경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랬을 때에 사람들은 그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불렀습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당시 사람들은 신자들, 제자들, 형제들, 또는 성도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신자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불림을 받게 된 것은 성경을 듣고 이론으로 끝나지 않고 행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중요하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면 행해야 합니다. 알고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교리적인 믿음, 지식적인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약2:17). 죽은 믿음은 냄새가 고약합니다. 제가 미션하우스의 지층의 베란다에 지렁이가 들어와 썩었는데 그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토할 것만 같았습니다. 이처럼 행함이 없고 말만 하는 믿음은 역겹습니다. 사람들에게 오히려 혐오감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 받기보다 짓밟힘을 당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있는 믿음은 산 믿음입니다. 산 믿음은 생명이 있어 따뜻합니다. 사랑스럽습니다. 자라고 역동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그들이 얼마나 성경 말씀대로 살았는지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힘에 지나도록 헌금하여 그들을 도왔습니다. 29,30절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개척기에 다른 곳을 도와준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구제 사업에 동참했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행20:35)”고 하신 말씀을 즉시 실천했습니다.
디모데후서 6장 말씀처럼 그들은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드리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위해 쓰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자기를 위해 쓰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 인색한 사람들은 반드시 신용불량자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과 이웃을 위해 드리는 분들은 절대로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산 믿음입니까? 아니면 죽은 믿음입니까?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소유한 크리스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쾌락과 물질주의로 병들어 가는 캠퍼스와 사회를 살리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배운 만큼 행하는 산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13:1-3).
13장 1절을 보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선지자와 교사로 그 기능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는 요즘 흔히 말하는 인간의 미래에 있을 생사화복을 말하는 무당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선지자는 헬라어로 프로페테스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계시를 받는 동시에 영감을 받아 외치는 사람입니다. 당시에는 성경이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이 있었지만 회당에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나 구약성경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다 기록되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격인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한 교회에 매이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지시하는 대로 오가야 합니다. 성령께 이끌리어 삽니다. 반면에 교사는 성경을 따라 가르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교사는 교회에 속합니다.
안디옥 교회를 보면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은 아프리카 흑인이었고, 마나엔은 헤롯의 젖먹이 동기 동창생으로 그의 친밀한 친구요, 궁중 고관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구성원을 보면 흑인도 있고, 백인도 있으며, 마나엔과 같은 귀족도 있었고, 천인도 있었습니다. 본토인도 있었고 바울과 바나바와 같이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신분이 천차만별하였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분열되기 쉬웠습니다. 하나가 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주님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와 다른 점입니다.
2절을 보면 “주를 섬겨 금식하고 있을 때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주를 섬겨”, 영어로 보면 예배, worship service입니다. 주를 섬겼다는 것은 주님을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주님께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뭣을 달라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섬기는 것입니다. 예배는 주님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주님 앞에서 경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경배하는 마음, 말씀을 듣는 자세, 뜻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예배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섬긴다고 하면 물질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은 마음을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다리는 것입니다. 보고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자하고 만지고자 하는 것은 인본주의 신앙입니다. 헬레니즘의 특징은 시각적, 촉각적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듣는 것, 청종하는 것,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예배하되 금식했습니다. 그들은 먹는 욕망을 끊고, 신령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님을 섬길 때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개인 명상이 아니고, 골방에서 기도하다가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라, 예배 중에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간구할 때 들은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을 때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우리는 예배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 중에 주님의 뜻을 찾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들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가라사대 내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불러 시키는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부르다는 소명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입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 내가 필요해서 시키는 것이니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사람, 사울과 바나바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히브리식이고 바울은 헬라식입니다. 주님의 역사는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시켜야 합니다. 주님께서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주님이 불러주셔야 합니다. 선교사는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사는 한국에서 취직을 못해 할 일 없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러서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 이런 사정을 들어 거절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개척 교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자리를 잡으면 선교사를 보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에 순종했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그들은 보냈습니다. sending church, 그들은 땅 끝 선교를 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이로 인해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를 처음으로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세계 선교의 중추적인 교회, 세계선교의 power station이 되었습니다.
선교 역사에는 sending group이 going group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파송하는 사람이나 파송 받는 사람이 모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파송하는 자가 없이 파송 받을 수 없고, 파송을 받는 자가 없이 파송할 수 없습니다. 파송을 한 사람들은 파송 받은 사람을 위해 물질과 기도와 편지로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파송을 받은 사람은 무조건 해외로 나간다고 선교사가 아니라 분명한 사명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루신, 이루고 계신 선교 사역을 보고해야 합니다.
우리가 안디옥 교회와 같이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실천하고, 세계선교하고 주고 섬기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