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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제 33 강(말씀, 13:14-23, 요절 13:22)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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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장에 베드로의 메시지가 있고, 7장에는 스데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3장 14절에서 52절까지는 바울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본문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한 메시지 전반부입니다. 본문의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17절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요약입니다. 18절은 민수기 요약입니다. 민수기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40년간 이스라엘의 소행을 참으시고 징계하시고 연단하시는 내용입니다. 19절은 여호수아서의 요약입니다. 여호수아서는 가나안 입성 과정과 정착을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20절은 사사기의 요약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선지자 사무엘이 등장할 때까지 하나님은 사사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지켜주셨습니다.
21,22절은 사무엘서의 요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변의 열방들처럼 인간 왕을 달라고 하나님께 청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왕으로 세워서 4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후에 이를 폐하시고 다윗 왕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특별한 언약을 하셨는데,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삼상13:14, 시89:20). 하나님은 다윗과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행13:22, 삼하7:12-16. 8:15, 사9:5,6, 11:1-9). 23절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다윗의 씨에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약속의 성취를 이루시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이스라엘의 역사, 아브라함 때부터 역사를 길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기독교가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어떤 한 사람이 깊은 산중의 보리수나무 밑에서 기도하다가 터득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막에서 몇 년간 고행을 하다가 깨달은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어떤 환상을 통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머리 좋은 사람이 만들어낸 철학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도덕과 생활규범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역사에 근거합니다. 역사란 다른 말로 말하면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관념과 허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도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랜 역사 속에 십자가 사건을 위하여 역사를 이끌어 오시고, 예언하시고, 예표를 들어 말씀하시고, 그림자로 말씀하시고, 그리고 마침내 실제의 사건으로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역사(사역)하셨는가를 길게 설명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주님 역사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모세 5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 역사(17,18)
바울과 바나바는 성공적으로 구브로에서 전도여행을 마치고 배를 타고 밤빌리아의 버가에 도착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가기 위해서는 타우루스 높은 산을 넘는 160Km의 험난한 길입니다. 바울 일행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갔습니다. 회당과 안식일은 교회 설립을 위해 예비 된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하나님의 교회 설립을 위해 예비 된 회당을 최대한 이용했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니 회당장이 율법과 선지서를 읽었습니다. 그런 후에 바울 일행에게 한 마디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했습니다. 먼저 17절을 보면 그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설명했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유대 사람들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암송합니다.
그런데 그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상기시킵니다. 이는 그들이 읽고 암송하지만 그것에 대한 의미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읽고 암송하고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도 성경에 흐르는 의미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의 문제 또한 성경을 자기 임의로,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역사의 의미, 핵심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장차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실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갈4:4, 사7:14).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다’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가리킵니다. ‘네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부활의 권세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채찍에 맞으시고 창에 찔리시고, 나의 죄 때문에 무서운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사탄의 머리를 박살 내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입고 있던 죄의 옷을 벗기시고, 짐승의 피를 흘려 만드신 의의 옷, 믿음의 옷, 사랑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여기에 희생이 보입니다. 희생을 통한 구원, 십자가를 통한 일류의 구원이 시작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의 씨에서 메시아가 탄생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창22:17,18).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영생을 누리고, 불순종하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행위의 언약입니다. 이제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죄와 죽음 문제, 그리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행위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은혜의 언약은 신․구약 66권 전체에 흐르는 주제입니다(이사야7:14, 마1:16, 갈4:4).
출애굽기에서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 보니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법도까지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노예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렸는데, 그 중에서 가장 무서운 재앙이 10번째 재앙인 장자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장자란 모든 자녀를 대표하는 것으로, 장자가 죽는다는 것은 모든 자녀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무서운 재앙 중에도 예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린 양을 잡아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는 집은 죽음의 재앙이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닌 잡족들도 이 약속을 믿고 피를 발랐을 때 죽음의 재앙이 넘어갔습니다. 어린양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사람이 무엇을 소유했느냐, 얼마나 선한 생활을 했느냐, 과거 얼마나 의로웠느냐, 악했느냐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문설주에 피를 발랐느냐, 바르지 않았느냐에 있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들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린양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어린양은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실 사건의 예표입니다(고전5:7b). 어린양은 장차 낙원의 회복의 예표입니다(계19:7).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요1:29)”고 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를 보면 출애굽 한지 14일에 지나자 물이 없다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1년도 아닌 열나흘 만에 원망했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그래도 1년은 가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감격과 은혜가 14일 밖에 안 갔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얼마나 괘심하셨겠습니까? 사람이 참기 힘든 것은 은혜를 모르고 배반하는 것입니다. 노예에서 해방을 시켜주니까 원망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것들이 사람인가, 심판하여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8절을 보면 하나님은 “40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그들을 그대로 내려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배은망덕한 그들의 소행을 오래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행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식은 죽 먹듯, 커피 마시듯 배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소행을 참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행을 보시고 심판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참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인내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둘째, 다윗에게 언약하신 하나님(19-23)
19절은 여호수아서의 요약입니다. 여호수아서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워서 7족속을 몰아내어 차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호수아서를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사백 오십 년간)” 이스라엘이 뺏은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용맹하여 가나안을 뺏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20절은 사사기의 요약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성이 강한가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자기 소신대로 행했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17:6, 18:1, 19:1,21,25). 이렇게 사람마다 자기 판단과 생각대로 행하게 되면 질서와 조화가 깨집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국가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인간은 각자 풀잎을 뜯어먹는 메뚜기가 아니기 때문에 왕이 필요합니다. 인간에게 왕이 없을 때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왕이 있을 때 왕의 명령에 따라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들의 왕이 되셔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그런데 21a절을 보겠습니다.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 왕을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왕을 달라고 하는 그들에게 왕이 왜 필요하냐? 하나님이 주신 율법대로 살면 되는 데 왜 왕이 필요하냐?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웃 나라들이 왕을 세우고 만세를 부르는 것과 같이 눈에 보이는 왕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왕을 달라는 그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사울을 왕으로 주셨습니다. 21b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그런데 사울 왕이 교만해져 폐하셨습니다. 본래 사울이 교만했던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상 9장을 보면 순종의 사람이었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위하여 잃은 암나귀 한 마리를 사흘 동안 찾을 만큼 효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귀를 찾지 못하자 이제 아버지가 나를 걱정할 것을 생각하여 집으로 돌아갈 만큼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인간 기초가 되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경건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왕이 될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작은 베냐민 지파요 가장 미약하다며 사양할 수 있을 만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왕이 되자 교만해졌습니다. 그는 선지자 외에는 드릴 수 없는 제사를 스스로 대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했습니다. 그는 분수를 모르고 월권행위를 했습니다. 그는 영적 질서를 깨뜨렸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왜 제사를 드렸느냐고 하니 부득이 번제를 드릴 수밖에 없다고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는 회개보다 변명을 하였습니다. ‘부득이’, 그는 상황윤리에 빠져 있었습니다. ‘상황윤리’란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보다는 그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계명을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득이 사람들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득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황윤리는 죄를 합리화하고, 죄를 변명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상대화시킵니다. 그러나 진리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죄는 합리화하거나 변명할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급하고 부득이하다 할지라도 말씀대로,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불순종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을 쳐서 진멸하되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남녀와 소아와 젖 먹이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를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기름진 것들,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가격이 나가지 않는 것만 진멸하였습니다. 이는 탐심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약1:15).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또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자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웠습니다(삼상15:12). 그뿐만 아니라 그는 순종보다 제사를 즐겼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보다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22a절을 보겠습니다.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구약성경에 보면 다윗이라는 이름이 무려 800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종 다윗, 다윗, 다윗 하십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의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서를 보면 다윗은 허물과 실수가 많았습니다. 그는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간음한 것을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최전선에 보내어 죽게 했습니다. 그는 6-10계명을 어긴 중죄인이었습니다. 그는 간음했고, 그는 살인 했고, 그는 남의 아내를 도둑질했고, 그는 거짓말 했고, 그는 탐심을 범함으로 가중처벌을 받아야 할 중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자기 자신의 죄를 변명하거나 합리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는 회개할 뿐만 아니라 남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밧세바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진실했습니다. 성경은 이런 다윗을 정직한 사람, 정직한 다윗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중심이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다윗은 충성되었습니다. 다윗은 겸손했습니다. 다윗은 온유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살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개했습니다. 다윗은 겸손했습니다. 그의 겸손은 그가 매사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잘 나타납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그 자체가 교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무엇을 하든지 구체적으로 시간과 방법까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기뻐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고자 약속하셨습니다. 22b절을 보겠습니다.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가 온전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명문세도가문 출신이어서도 아닙니다. 그는 시골 목동 출신입니다. 목동은 당시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까? 이는 그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일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었는가는 시편에 잘 나와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찼습니다. 다윗은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사랑했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도 시간을 사모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된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 말을 안 해도 눈빛만 봐도 마음이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과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았습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그 시대와 나라와 백성들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훈련과 징계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보시고 마음에 기뻐하여 다윗에게 자신의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은 분열된 이스라엘을 통일하여 메시아 왕국의 모형이 될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강과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메시아 왕국을 세우는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왕국의 기초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놓고 후손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성서 이스라엘을 이루는 것입니다. 다윗은 일생동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전 생애를 드렸습니다. 그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시대를 섬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다윗은 장차 오실 메시아,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가문에서 메시아가 태어났습니다. 로마서 1장 3절을 보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자들을 찾으십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이런 자를 만나면 기뻐하시고 그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섬길 수 있기들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은 가정과 캠퍼스와 직장, 더 나아가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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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장에 베드로의 메시지가 있고, 7장에는 스데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3장 14절에서 52절까지는 바울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본문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한 메시지 전반부입니다. 본문의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17절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요약입니다. 18절은 민수기 요약입니다. 민수기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40년간 이스라엘의 소행을 참으시고 징계하시고 연단하시는 내용입니다. 19절은 여호수아서의 요약입니다. 여호수아서는 가나안 입성 과정과 정착을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20절은 사사기의 요약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선지자 사무엘이 등장할 때까지 하나님은 사사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지켜주셨습니다.
21,22절은 사무엘서의 요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변의 열방들처럼 인간 왕을 달라고 하나님께 청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왕으로 세워서 4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후에 이를 폐하시고 다윗 왕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특별한 언약을 하셨는데,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삼상13:14, 시89:20). 하나님은 다윗과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행13:22, 삼하7:12-16. 8:15, 사9:5,6, 11:1-9). 23절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다윗의 씨에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약속의 성취를 이루시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이스라엘의 역사, 아브라함 때부터 역사를 길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기독교가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어떤 한 사람이 깊은 산중의 보리수나무 밑에서 기도하다가 터득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막에서 몇 년간 고행을 하다가 깨달은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어떤 환상을 통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머리 좋은 사람이 만들어낸 철학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도덕과 생활규범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역사에 근거합니다. 역사란 다른 말로 말하면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관념과 허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도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랜 역사 속에 십자가 사건을 위하여 역사를 이끌어 오시고, 예언하시고, 예표를 들어 말씀하시고, 그림자로 말씀하시고, 그리고 마침내 실제의 사건으로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역사(사역)하셨는가를 길게 설명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주님 역사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모세 5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 역사(17,18)
바울과 바나바는 성공적으로 구브로에서 전도여행을 마치고 배를 타고 밤빌리아의 버가에 도착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가기 위해서는 타우루스 높은 산을 넘는 160Km의 험난한 길입니다. 바울 일행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갔습니다. 회당과 안식일은 교회 설립을 위해 예비 된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하나님의 교회 설립을 위해 예비 된 회당을 최대한 이용했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니 회당장이 율법과 선지서를 읽었습니다. 그런 후에 바울 일행에게 한 마디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했습니다. 먼저 17절을 보면 그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설명했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유대 사람들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암송합니다.
그런데 그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상기시킵니다. 이는 그들이 읽고 암송하지만 그것에 대한 의미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읽고 암송하고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도 성경에 흐르는 의미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의 문제 또한 성경을 자기 임의로,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역사의 의미, 핵심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장차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실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갈4:4, 사7:14).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다’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가리킵니다. ‘네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부활의 권세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채찍에 맞으시고 창에 찔리시고, 나의 죄 때문에 무서운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사탄의 머리를 박살 내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입고 있던 죄의 옷을 벗기시고, 짐승의 피를 흘려 만드신 의의 옷, 믿음의 옷, 사랑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여기에 희생이 보입니다. 희생을 통한 구원, 십자가를 통한 일류의 구원이 시작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의 씨에서 메시아가 탄생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창22:17,18).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영생을 누리고, 불순종하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행위의 언약입니다. 이제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죄와 죽음 문제, 그리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행위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은혜의 언약은 신․구약 66권 전체에 흐르는 주제입니다(이사야7:14, 마1:16, 갈4:4).
출애굽기에서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 보니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법도까지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노예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렸는데, 그 중에서 가장 무서운 재앙이 10번째 재앙인 장자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장자란 모든 자녀를 대표하는 것으로, 장자가 죽는다는 것은 모든 자녀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무서운 재앙 중에도 예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린 양을 잡아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는 집은 죽음의 재앙이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닌 잡족들도 이 약속을 믿고 피를 발랐을 때 죽음의 재앙이 넘어갔습니다. 어린양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사람이 무엇을 소유했느냐, 얼마나 선한 생활을 했느냐, 과거 얼마나 의로웠느냐, 악했느냐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문설주에 피를 발랐느냐, 바르지 않았느냐에 있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들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린양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어린양은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실 사건의 예표입니다(고전5:7b). 어린양은 장차 낙원의 회복의 예표입니다(계19:7).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요1:29)”고 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를 보면 출애굽 한지 14일에 지나자 물이 없다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1년도 아닌 열나흘 만에 원망했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그래도 1년은 가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감격과 은혜가 14일 밖에 안 갔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얼마나 괘심하셨겠습니까? 사람이 참기 힘든 것은 은혜를 모르고 배반하는 것입니다. 노예에서 해방을 시켜주니까 원망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것들이 사람인가, 심판하여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8절을 보면 하나님은 “40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그들을 그대로 내려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배은망덕한 그들의 소행을 오래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행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식은 죽 먹듯, 커피 마시듯 배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소행을 참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행을 보시고 심판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참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인내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둘째, 다윗에게 언약하신 하나님(19-23)
19절은 여호수아서의 요약입니다. 여호수아서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워서 7족속을 몰아내어 차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호수아서를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사백 오십 년간)” 이스라엘이 뺏은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용맹하여 가나안을 뺏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20절은 사사기의 요약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성이 강한가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자기 소신대로 행했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17:6, 18:1, 19:1,21,25). 이렇게 사람마다 자기 판단과 생각대로 행하게 되면 질서와 조화가 깨집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국가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인간은 각자 풀잎을 뜯어먹는 메뚜기가 아니기 때문에 왕이 필요합니다. 인간에게 왕이 없을 때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왕이 있을 때 왕의 명령에 따라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들의 왕이 되셔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그런데 21a절을 보겠습니다.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 왕을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왕을 달라고 하는 그들에게 왕이 왜 필요하냐? 하나님이 주신 율법대로 살면 되는 데 왜 왕이 필요하냐?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웃 나라들이 왕을 세우고 만세를 부르는 것과 같이 눈에 보이는 왕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왕을 달라는 그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사울을 왕으로 주셨습니다. 21b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그런데 사울 왕이 교만해져 폐하셨습니다. 본래 사울이 교만했던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상 9장을 보면 순종의 사람이었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위하여 잃은 암나귀 한 마리를 사흘 동안 찾을 만큼 효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귀를 찾지 못하자 이제 아버지가 나를 걱정할 것을 생각하여 집으로 돌아갈 만큼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인간 기초가 되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경건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왕이 될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작은 베냐민 지파요 가장 미약하다며 사양할 수 있을 만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왕이 되자 교만해졌습니다. 그는 선지자 외에는 드릴 수 없는 제사를 스스로 대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했습니다. 그는 분수를 모르고 월권행위를 했습니다. 그는 영적 질서를 깨뜨렸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왜 제사를 드렸느냐고 하니 부득이 번제를 드릴 수밖에 없다고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는 회개보다 변명을 하였습니다. ‘부득이’, 그는 상황윤리에 빠져 있었습니다. ‘상황윤리’란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보다는 그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계명을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득이 사람들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득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황윤리는 죄를 합리화하고, 죄를 변명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상대화시킵니다. 그러나 진리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죄는 합리화하거나 변명할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급하고 부득이하다 할지라도 말씀대로,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불순종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을 쳐서 진멸하되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남녀와 소아와 젖 먹이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를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기름진 것들,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가격이 나가지 않는 것만 진멸하였습니다. 이는 탐심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약1:15).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또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자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웠습니다(삼상15:12). 그뿐만 아니라 그는 순종보다 제사를 즐겼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보다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22a절을 보겠습니다.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구약성경에 보면 다윗이라는 이름이 무려 800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종 다윗, 다윗, 다윗 하십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의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서를 보면 다윗은 허물과 실수가 많았습니다. 그는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간음한 것을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최전선에 보내어 죽게 했습니다. 그는 6-10계명을 어긴 중죄인이었습니다. 그는 간음했고, 그는 살인 했고, 그는 남의 아내를 도둑질했고, 그는 거짓말 했고, 그는 탐심을 범함으로 가중처벌을 받아야 할 중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자기 자신의 죄를 변명하거나 합리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는 회개할 뿐만 아니라 남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밧세바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진실했습니다. 성경은 이런 다윗을 정직한 사람, 정직한 다윗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중심이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다윗은 충성되었습니다. 다윗은 겸손했습니다. 다윗은 온유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살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개했습니다. 다윗은 겸손했습니다. 그의 겸손은 그가 매사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잘 나타납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그 자체가 교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무엇을 하든지 구체적으로 시간과 방법까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기뻐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고자 약속하셨습니다. 22b절을 보겠습니다.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가 온전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명문세도가문 출신이어서도 아닙니다. 그는 시골 목동 출신입니다. 목동은 당시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까? 이는 그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일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었는가는 시편에 잘 나와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찼습니다. 다윗은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사랑했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도 시간을 사모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된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 말을 안 해도 눈빛만 봐도 마음이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과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았습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그 시대와 나라와 백성들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훈련과 징계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보시고 마음에 기뻐하여 다윗에게 자신의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은 분열된 이스라엘을 통일하여 메시아 왕국의 모형이 될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강과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메시아 왕국을 세우는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왕국의 기초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놓고 후손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성서 이스라엘을 이루는 것입니다. 다윗은 일생동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전 생애를 드렸습니다. 그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시대를 섬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다윗은 장차 오실 메시아,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가문에서 메시아가 태어났습니다. 로마서 1장 3절을 보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자들을 찾으십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이런 자를 만나면 기뻐하시고 그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섬길 수 있기들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은 가정과 캠퍼스와 직장, 더 나아가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