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제36강 루스드라 선교

조회 수 2704 추천 수 0 2012.07.12 07:41:23
사도행전 제 36 강(말씀, 14:8-18, 요절, 14:9)

루스드라 선교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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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높은 산에 오르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산 밑에서 출발에 앞서 제각기 돌 하나씩 들고 오르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의아했습니다. 베드로는 의아해하는 제자들에게 “가지고 가라면 가는 것이지 왜 그리 말이 많아” 하며 큼직한 돌을 들고 올라갔습니다. 도마는 가지고 가라고 하는 데 안 가지고 갈 수도 없어 조금만한 돌을 하나 주워 주머니에 넣고 올라갔습니다. 빌립은 산꼭대기에 돌이 많을 터인데 꼭 여기서부터 힘들게 가지고 갈 것이 뭐가 있는가 하며 정말 돌이 필요하면 거기서 주우면 되지 하고 빈손으로 올라갔습니다. 올라간 다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무거운 돌을 들고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 많았다. 땀도 흘리고 배도 고플 터인데 어서들 앉아라.”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간구하십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들 손에 들려 있는 돌이 변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소서!” 누구의 떡덩이가 제일 컸을까요? 당연히 베드로의 떡덩이가 컸겠지요? 주님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역사합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의 루스드라 선교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의 루스드라 선교는 외적으로도 큰 역사를 이루었지만 이보다 더 큰 역사는 디모데가 루스드라 출신이라는 점입니다(행16:1). 디모데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어 신실한 주님의 제자, 바울의 제자가 되어 초대 교회를 개척하고 세우는데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루스드라는 이고니온(현재 꼰야)에서 남쪽으로 30Km에 위치한 도시로 ‘양의 무리’란 뜻입니다. 루스드라는 당시 로마로 연결되는 군용도로가 있었던 군사 도시입니다. 루스드라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회당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을 듣는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구원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고 말씀으로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받을만한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
첫째, 말씀을 들을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8-10).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의 핍박을 피해 루스드라에 도착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말씀을 전할 때였습니다. 회중 가운데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있었습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적이 없는지라.” 이 사람은 발을 쓰지 못합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입니다. 그러니 한 번도 발로 걷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본인 자신도 일어나 걸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말씀을 듣기 위해 무리들 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가 말씀을 듣는 자세가 어떠합니까?

9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그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들었을 텐데 성경은 유독 그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듣는다(listen)’는 헬라어로 ‘아쿠오’입니다. 이 말은 내가 누구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일반적인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관심을 갖고 집중하여 듣는다, 마음으로 듣는다, 순종하는 자세로 경청한다, 지속적으로 듣는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종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는 바울이 전하는 한 마디만 들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계속해서 열심히 들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주목했습니다. 주목했다는 것은 관심을 갖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많은 사람들 중에 이 사람을 주목한 것은 열심히 집중해서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다 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이 눈에 띕니다. 어떤 사람은 메시지 제목을 말하자마자 조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 시간에 계속 딴 짓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몸을 긁적거리고 귀를 후비고 코를 후빕니다. 어떤 사람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립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말씀에 다 집중할 수는 없습니다. 가네의 완전 학습이론에도 85%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저는 딴 짓하는 사람을 쳐다보면 맥 빠져서 말씀을 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몇 사람이라도 말씀에 집중하는 사람을 보고 전합니다. 말씀을 메모하고, 또 웃을 때 함께 웃고, 말씀을 읽을 때 함께 읽고, 찬양할 때 함께 찬양하는 진지하게 집중하게 듣는 사람을 보고 말씀을 전합니다. 지금도 말씀에 집중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몸은 예배당에 있지만 마음은 콩밭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말씀을 듣는 그 사람을 향하여 말씀을 전했습니다. 앉은뱅이 또한 바울의 얼굴을 뚫어지라고 바라보며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바울의 눈과 말씀을 듣는 그 사람의 눈이 마주 쳤습니다. 그는 말씀을 듣는 정도가 아니라 말씀을 받아먹었습니다. 이는 마치 제비 새끼가 어미가 잡아온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는 그런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이 정도로 말씀을 받아먹으면 그런 사람에게 능력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7장 11,12절을 보겠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니”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은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을 보면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에 그들은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이로 인해 8일 만에 데살로니가 도시가 복음으로 뒤집어졌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그들보다 말씀 받는 자세가 더 좋았습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받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은 영적인 눈이 열리고 보배로운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영혼이 맑아지고, 생각이 건강해지고, 감정이 부드럽고 온유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이 구원받고 새 사람이 됩니다. 마침내 육신의 질병까지 치유됩니다. 아멘.

바울이 그를 주목하며 말씀을 전할 때 바울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9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은 그가 구원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은 반드시 들음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께 대한 믿과 순종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마른 스펀지에 물이 쫙 빨려들듯이 말씀이 내 안으로 빨려들게 됩니다.

마가복음 4장 20절을 보겠습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30배와 60배와 100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말씀을 듣고 받으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습니다. 누가복음 8장 15절 을 보면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앉은뱅이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받았습니다. 그는 말씀을 지키었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holding하고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그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고 선포합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은 뛰어서 걸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듣는 사람이 앉은뱅이 한 사람뿐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말씀의 역사는 말씀을 듣는 그 앉은뱅이에게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고 했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이적과 기사들은 예수님을 믿고 순종했을 때에 일어났습니다.

18년간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만졌을 때에 혈루증으로부터 나음을 받았습니다(마9:22). 여리고에 살던 소경 거지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믿고 소원을 아뢰었을 때에 그의 눈이 떠졌습니다(눅18:42).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뽕나무에까지 올라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주님을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집중하여 자기에게 적용하여 겸손히 듣고 받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대학마을교회 가족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우상을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11-18).

앉은뱅이가 걷는 것을 본 루스드라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자신들의 방언으로 소리 질렀습니다. “무리가 바울의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11)” 그들은 당시 공용어인 헬라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바울도 헬라어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태어나면서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것을 보고 놀라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자신들의 방언으로 소리를 쳤습니다. 그들은 바나바를 쓰스, 바울은 허메라고 부르면서 쓰스 신당의 제사장들이 소와 꽃다발을 들고 와서 제사하려고 했습니다. 쓰스는 제우스로, 헬라의 주신입니다. 로마는 주피터라고 합니다. 허메는 헤르메스를 말합니다. 헤르메스는 제우스를 비롯한 신들의 의사를 전달하는 사자역할을 하는 신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인간은 종교적 존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그 본성이 종교적입니다. 인간이 산 흔적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제사를 드린 제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좀 이상하게 보이면 그 앞에 절합니다. 바위가 이상하게 생겼으면 저 바위는 보통바위가 아니야 하며 절합니다. 나무도 이상하게 생겼으면 아, 저 나무는 몇 천 년 되었으니까 특별한 영험이 있을 것이라고 절합니다. 그밖에 불을 섬기고, 해를 섬기고, 보름달이 둥그렇게 떠오르면 아들을 낳게 해줄 것이라며 그것을 향하여 빕니다.

사람들은 신비한 것은 다 섬깁니다. 사람들이 무신론자라고 자처하지만 실상은 무신론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평소 큰소리치는 사람도 막상 무슨 일이 생기면 의지할 것을 찾습니다. 우리나라에 직업적인 점쟁이나 무당을 제외하고도 사주팔자, 궁합을 봐주며 먹고 사는 사람이 약 10만 명이 있다고 합니다. 처녀 보살, 삼각산 보살, 방금 내린 아기 보살 등이 불황을 타지 않고 영업을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림으로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나 우준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롬1:23).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이성과 합리성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사람이 두렵게 되면 반사적으로 우상을 찾습니다. 둘째는 자기가 이루지 못하는 소원 때입니다. 소원은 멀리 있고, 또한 인간의 힘으로써는 이 소원을 도저히 이룰 수가 없다 싶을 때, 어떤 것이라도 붙들고 빌어 소원을 이루려고 함에 있습니다. 셋째는 쾌락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자기 죄를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도덕적인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죄 많은 사람일수록 우상을 섬깁니다. 어떤 잘못을 범했을 경우 일단 형벌을 모면하고자 우상을 찾습니다. 무당이 정신없이 춤을 추는데, 그 춤추는 것을 바라보면 자신의 혼이 다 빠져나갑니다. 이를 통해 스스로 위안을 갖습니다.

욥은 고난 중에도 우상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욥기 31장 26~28절을 보겠습니다. “언제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 맞추었던가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 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 “태양이 떠오를 때 신기롭고, 달이 해맑은 빛을 내리비칠 때에 신비롭지만, 그 앞에 내가 합장하고 절하는 일은 없다. 만일 그러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큰 죄다.” 사람은 물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다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그 뒤에 계시어 그것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처음에는 그들이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말했기 때문에 잘 알아듣지 못하다가 점점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들은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창세기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나나 당신들이나 다 같은 사람이다, 허물도 있고 죄도 있는 똑같은 인간이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이 헛된 신을 버리고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함이다.” 바울은 자기를 경배하면서 신으로 우상으로 섬기겠다는 것을 절대로 못하게 했습니다. 사람은 두 가지 경우에 자기 위치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는 억울하게 누명을 썼을 때, 못된 소리를 들었을 때에 분하고 괴로워서 제정신을 잃고 위치를 놓치기 쉽습니다. 다른 하나는 칭찬을 들을 때입니다.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데 남이 자기를 보고 유식하다고 하면 그런 줄 알고 자기 위치를 상실하기 쉽습니다. 지나친 존경을 받으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죄입니다. 아닌 것은 아니고, 모르는 것은 모르다고 해야 합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나입니다. 남이 잘났다고 해서 내가 잘난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것은 거짓된 것이고, 무식한 것은 무식한 것입니다. 그래야 잠도 잘 오고, 입맛도 좋고, 건강도 좋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늘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다. 결코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당신들도 믿으면 할 수 있다. 나를 통해 역사 하신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통해 역사 하실 것이다. 절대로 우리 일행을 특별한 사람으로 보지 말라.”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 사람들이 자기를 존경하여 모여들 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 베드로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그 사람을 낫게 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 고넬료와 그의 친척들이 자기를 보고 엎드려 절할 때에 그들을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존경을 받더라도 자기 위치만은 꼭 지켜야 됩니다. 교만과 허세에 빠지면 안 됩니다.

16,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였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자연 계시를 말씀합니다. 로마서1장 20절을 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만물을 통하여 하나님 계심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충분히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자연 계시는 우상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예수님의 피로 깨끗해진 사람만이 자연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경고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로 멸망할 인생들을 위해 예수님을 허락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진정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목적도 헛된 우상을 섬기다가 망할 사람들을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으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겸손히 듣고 받을 때 하나님의 놀라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헛된 우상에 빠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하여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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