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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제 37 강(말씀, 14:19-28, 요절, 14:22)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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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을 베면 은은한 향기로움을 풍깁니다. 이는 상처에서 향기가 나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실패, 좌절, 시련, 고난에 밟혀 쓰러지면 고통이 됩니다. 그러나 시련은 사람을 빛나게 할 뿐만 아니라 향기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다이아몬드가 귀한 것은 갈고 닦는 혹독한 시련을 거쳐 찬란한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원석 자체로는 가치가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DNA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혹독하게 깎고 갈아내지 않으면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고난의 과정을 통해 인내하게 되고, 인내를 통해 연단이 되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5장 3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18절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4장 17,18절에서는 현재의 고난과 영광을 무게와 시간으로 비교하며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현재 당하는 환난은 영원한 영광에 비해 경한 것이요, 보이는 환난은 보이지 않는 영광에 비해 잠간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양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찬송입니다. 함께 부르면서 우리 앞에 있는 영광의 나라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본문은 1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결산입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에서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는 환난 중에도 하나님 나라를 사모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환난 중에도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다시 성에 들어가는 바울(19,20)
바울 일행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여 경건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그 성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내쫓았습니다. 쫓겨난 바울 일행은 이고니온으로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13:50). 그러자 유대와 헬라 사람들의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를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무리를 선동하여 바울 일행에게 악감을 품도록 하여 핍박했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주를 힘입어 은혜의 말씀을 전하여 많은 복음의 열매를 맺었습니다(14:1-5). 그러자 그들은 관원을 동원하여 돌로 치려하여 루스드라로 쫓겨 갔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로 인해 루스드라 도시가 바나바를 제우스, 바울을 헤르메스라고 하며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려고 했습니다. 그만큼 루스드라에 큰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 다른 사건이 전개됩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루스드라에까지 와서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안디옥에서 루스드라까지의 거리가 150Km, 400리(안디옥→이고니온 120Km, 이고니온→루스드라 30Km)입니다. 몇 명이 왔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선동하니 간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지라 금방 제사를 지내려고 하던 바나바와 바울을 향하여 얼마나 돌을 던졌는지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내다버렸습니다.
이고니온과 안디옥에서 바울 일행을 핍박했으면 되었지 그 먼 거리까지 와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까지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죄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가져 온다고 했습니다(약1:15). 사람이 한번 죄를 짓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 살인원정까지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를 보면서 무엇이 생각이 납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예수 믿는 사람을 잡기 위해 가는 그 모습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의 거리는 240Km입니다.
바울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하던 그들이 왜 이렇게 돌변하여 바울을 돌로 쳐서 초죽음에 이르게 했을까요? 이는 군중심리 때문입니다. 군중심리란 사회심리 현상의 하나로 여러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였을 때 일상적인 사고와 다르거나 혹은 같더라도 그 범위를 뛰어넘어 행동을 하는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군중심리는 남이 하면 자기도 하고 싶어지게 됩니다. 명절에 용감무쌍한 한 사람이 고속도로의 갓길을 가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따라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평소에 얌전하던 사람도 주변사람들이 흥분하면 자기도 모르게 흥분 되어 과격한 행동을 합니다. 군중심리는 군중 속에 일체화되어 자기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동인과 반응의 상승작용으로 격앙되었기 때문에 책임성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유대인들의 군중시리에 의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호산나를 부르며 주님을 열열이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사장의 사주를 받아 갑자기 십자가에 못 박으라,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보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지한 군중들은 군중심리에 이끌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벌 떼같이 아우성을 쳤습니다.
아마 그들은 돌을 던져 바울을 죽이려고 까지는 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기절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총독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누구도 사람을 죽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겁이 나서 바울을 성 밖으로 내던져 살인을 은폐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20a절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바로 바울이 정신을 차리고 곧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옷의 먼지를 툭툭 털고 다시 그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기를 돌로 쳐서 초죽음 상태로 이르게 한 그 도시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불사조와 같습니다. 그는 오뚝이와 같습니다. 그는 오뚝이와 같이 넘어뜨리면 또 일어나고, 넘어뜨리면 또 일어났습니다. 세상이 이런 바울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잠언 24장 16절에 보면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려 진다고 하였습니다.
오뚝이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그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뚝이에게는 중심추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중심 추는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면 넘어졌다가도 다시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삶의 중심이 되면 넘어지면 좀처럼 다시 일어서지 못합니다. 심지어 목숨을 끊습니다. 특히 사람들의 입에 자주 내리는 스타들이 쉽게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그것은 금방 없어질 인기가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금방 없어질 돈과 명예가 삶의 중심추가 되기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중심추일 때 어떤 환난을 만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다시 칠전팔기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추가 주님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환난 중에도 다시 오뚝이와 같이 일어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제자들을 굳게 세우는 바울(21-25)
20b,21절을 보겠습니다.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더베는 루스드라에서 약 25Km 동북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그는 아무리 핍박이 있고 환난이 닥쳐도 복음 전하는 사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 다음날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를 핍박하고 죽이려고 했던 1차 전도여행을 했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을 돌아 제자들을 굳게 세웠습니다.
22a절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바울은 그들에게 굳은 마음을 가져라, 흔들리지 말라, 이 믿음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계속적으로 믿음에 살라는 말씀입니다. 흔들리지 말고 믿음 안에 계속적으로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그러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22b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세상에서 잘 살고 세상에서 출세하고 세상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서 잘 살고, 잘 되고, 병 낫고, 성공하고, 이런 2차원적이고 3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는 언제가 쇠하고 부패하고 사라집니다. 이명박 정권도 이제 2년 남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도 공짜가 없습니다. 그 대가가 무엇입니까? 그 대가는 환난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겪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환난은 헬라어로 ‘들립시스’인데 이는 외부에서 오는 고통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에서 오는 경제적 고통,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통을 말합니다. 내적인 고민이 아닙니다. 내적인 고민은 헬라어로 ‘파메마’입니다. 이는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등입니다. 근심, 초조, 두려움, 염려는 하나님 나라에 백해무익합니다. 근심, 염려, 불안, 초조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회개해야 할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 것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합니다. 염려, 근심, 초조는 정신 건강뿐만 아니라 육체적 건강, 영적 건강의 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마6:33).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겪는다’는 말은 ‘환난을 통하여’라는 말입니다. 외적인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외적인 고통, 손해를 많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승진의 손해도 좀 봐야 합니다. 예수님 믿고 물질의 손해도 좀 봐야 합니다. 예수님 믿고 욕도 좀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 믿고 칭찬만을 듣는다면 그 사람은 가짜 신자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고자 하면 환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세상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충돌이 없다는 것은 세상과 타협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양다리 걸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진실하게 살고, 주님을 위해 열심히 살면 핍박이 있습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 핍박은 당위 조건입니다.
많은 외적 고난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분을 위해 고생하는 것이 고생입니까? 이런 고난은 소망 있는 고생입니다. 확실한 약속이 기다리고 있는 소망입니다. 요즈음 고 3들이 대학입시로 고생을 많이 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밤에 도시락 둘을 싸 가지고 가서 별을 보고 집에 옵니다. 어떤 때에는 불쌍하기도 합니다. 곤히 잠드는 자녀를 깨워서 밥을 먹여 보내려면 안쓰럽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동정하지 않고 깨워서 학교에 보냅니다. 왜 그렇게 공부합니까? 이런 고난을 통과하여야 미래를 약속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가 요즈음 해병이 되기 위해 고된 훈련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해병대가 자랑하는 빨강 명찰과 8각모는 저절로 이루어지 않습니다. 땀과 피를 통해 빨강 명찰을 달고 8각모를 쓰게 됩니다. 특히 해병대 장교 훈련 받을 때 긴 6각형으로 되어 있는 계급장을 달고 훈련을 받습니다. 이는 그 계급장이 피와 땀으로 채워져야 다이아몬드, 소위 계급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일생동안 해야 할 일의 총량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일의 총량을 채우지 못하면 늙어서 고생을 한다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공부를 하지 않고 일을 하지 않으면 늙어서 고생을 합니다. 우리가 젊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으면 늙어서 고난에 동참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젊었을 때에 제 멋 대로 산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여러분이 젊었을 때 주님의 십자가를 많이 지십시오. 젊었을 때에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왜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로마서 5장 3∼5절을 보겠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세상에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은 인간의 모습을 잘 그린 말씀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고통이 오면 즐겁지 않습니다. 고통이 오면 슬프고 서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고난을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에서 얻어지는 부가가치, 프리미엄(premium)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부가가치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 인내는 단순히 참고 억지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적극적인 인내를 말합니다. 도망갈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지만 피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인내는 연단을 가져다줍니다. 연단은 헬라어 도키메(δοκιμή)로, 금속공학의 용어입니다. 강도 높은 쇠가 되려면 불속에 여러 번 들어가야 하고 수없이 해머로 맞아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되면 분자의 밀도가 높아져 강도가 높아집니다. 그러므로 많이 맞은 쇠가 단단합니다. 이와 같이 많이 맞은 사람, 많은 역경을 겪은 사람이 단단합니다. 역경을 통해 좋은 품성으로 빚어집니다. 기독교에서 최고의 품성은 겸손입니다. 이 겸손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에서 비롯되고, 인내는 환난에서 옵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하나님의 소망을 이룰 수 없습니다. 좋은 품성이 되어야 소망을 이룰 수 있습니다. 좋은 품성은 환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욕망은 내 스스로 버릴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환난을 통해서 세상 욕망이 깨지고 부서집니다. 환난을 통해서 자기애를 부인하게 됩니다. 환난을 통해서 연약한 자가 강해집니다.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환난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삶이 변하고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환난을 통해 교만한 마음이 깨지고 겸손해집니다. 세상이 고칠 수 없고,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은 고치십니다. 그 방법이 바로 환난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은 은혜의 학교, 하나님의 큰 선물입니다.
23, 26절을 보겠습니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주께 부탁하고,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노력을 하고, 수고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주님 친히 인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께 부탁합니다. 우리가 지금 자녀를 키웁니다. 가르치고, 정성을 다하고, 기도합니다. 마지막에는 “주여, 이 자녀를 돌보아주세요” 주님께 위탁해야 합니다. 매사가 다 그러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지만 궁극적으로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결혼도 주님께 위탁하고, 직장도 주님께 위탁하고, 입시도 주님께 위탁하고, 아기를 갖는 갓도 주님께 위탁해야 합니다. 바울은 장로들을 주님께 위탁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후에 저들, 디모데가 에베소교회를 잘 섬기게 됩니다.
에델바이스는 고산 지대의 작은 꽃입니다. 그러나 이른 봄 아직 눈이 덮여 있는 추위 속에 꽃봉오리가 맺습니다. 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따뜻한 곳에서는 꽃이 피지 않습니다. 약간 추워야 아름다운 꽃이 핍니다. 고귀한 꽃일수록 역경을 온상으로 삼습니다. 바울에게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가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가시를 통해 겸손해졌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근본이 뒤집히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환난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환난을 당하기까지 복음을 전하여 전도 축제에 많은 불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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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을 베면 은은한 향기로움을 풍깁니다. 이는 상처에서 향기가 나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실패, 좌절, 시련, 고난에 밟혀 쓰러지면 고통이 됩니다. 그러나 시련은 사람을 빛나게 할 뿐만 아니라 향기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다이아몬드가 귀한 것은 갈고 닦는 혹독한 시련을 거쳐 찬란한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원석 자체로는 가치가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DNA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혹독하게 깎고 갈아내지 않으면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고난의 과정을 통해 인내하게 되고, 인내를 통해 연단이 되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5장 3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18절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4장 17,18절에서는 현재의 고난과 영광을 무게와 시간으로 비교하며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현재 당하는 환난은 영원한 영광에 비해 경한 것이요, 보이는 환난은 보이지 않는 영광에 비해 잠간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양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찬송입니다. 함께 부르면서 우리 앞에 있는 영광의 나라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본문은 1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결산입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에서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는 환난 중에도 하나님 나라를 사모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환난 중에도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다시 성에 들어가는 바울(19,20)
바울 일행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여 경건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그 성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내쫓았습니다. 쫓겨난 바울 일행은 이고니온으로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13:50). 그러자 유대와 헬라 사람들의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를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무리를 선동하여 바울 일행에게 악감을 품도록 하여 핍박했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주를 힘입어 은혜의 말씀을 전하여 많은 복음의 열매를 맺었습니다(14:1-5). 그러자 그들은 관원을 동원하여 돌로 치려하여 루스드라로 쫓겨 갔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로 인해 루스드라 도시가 바나바를 제우스, 바울을 헤르메스라고 하며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려고 했습니다. 그만큼 루스드라에 큰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 다른 사건이 전개됩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루스드라에까지 와서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안디옥에서 루스드라까지의 거리가 150Km, 400리(안디옥→이고니온 120Km, 이고니온→루스드라 30Km)입니다. 몇 명이 왔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선동하니 간사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지라 금방 제사를 지내려고 하던 바나바와 바울을 향하여 얼마나 돌을 던졌는지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내다버렸습니다.
이고니온과 안디옥에서 바울 일행을 핍박했으면 되었지 그 먼 거리까지 와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까지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죄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가져 온다고 했습니다(약1:15). 사람이 한번 죄를 짓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 살인원정까지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를 보면서 무엇이 생각이 납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예수 믿는 사람을 잡기 위해 가는 그 모습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의 거리는 240Km입니다.
바울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하던 그들이 왜 이렇게 돌변하여 바울을 돌로 쳐서 초죽음에 이르게 했을까요? 이는 군중심리 때문입니다. 군중심리란 사회심리 현상의 하나로 여러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였을 때 일상적인 사고와 다르거나 혹은 같더라도 그 범위를 뛰어넘어 행동을 하는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군중심리는 남이 하면 자기도 하고 싶어지게 됩니다. 명절에 용감무쌍한 한 사람이 고속도로의 갓길을 가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따라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평소에 얌전하던 사람도 주변사람들이 흥분하면 자기도 모르게 흥분 되어 과격한 행동을 합니다. 군중심리는 군중 속에 일체화되어 자기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동인과 반응의 상승작용으로 격앙되었기 때문에 책임성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유대인들의 군중시리에 의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호산나를 부르며 주님을 열열이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사장의 사주를 받아 갑자기 십자가에 못 박으라,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보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지한 군중들은 군중심리에 이끌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벌 떼같이 아우성을 쳤습니다.
아마 그들은 돌을 던져 바울을 죽이려고 까지는 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기절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총독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누구도 사람을 죽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겁이 나서 바울을 성 밖으로 내던져 살인을 은폐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20a절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바로 바울이 정신을 차리고 곧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옷의 먼지를 툭툭 털고 다시 그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기를 돌로 쳐서 초죽음 상태로 이르게 한 그 도시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불사조와 같습니다. 그는 오뚝이와 같습니다. 그는 오뚝이와 같이 넘어뜨리면 또 일어나고, 넘어뜨리면 또 일어났습니다. 세상이 이런 바울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잠언 24장 16절에 보면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려 진다고 하였습니다.
오뚝이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그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뚝이에게는 중심추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중심 추는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면 넘어졌다가도 다시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삶의 중심이 되면 넘어지면 좀처럼 다시 일어서지 못합니다. 심지어 목숨을 끊습니다. 특히 사람들의 입에 자주 내리는 스타들이 쉽게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그것은 금방 없어질 인기가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금방 없어질 돈과 명예가 삶의 중심추가 되기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중심추일 때 어떤 환난을 만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다시 칠전팔기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추가 주님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환난 중에도 다시 오뚝이와 같이 일어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제자들을 굳게 세우는 바울(21-25)
20b,21절을 보겠습니다.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더베는 루스드라에서 약 25Km 동북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그는 아무리 핍박이 있고 환난이 닥쳐도 복음 전하는 사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 다음날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를 핍박하고 죽이려고 했던 1차 전도여행을 했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을 돌아 제자들을 굳게 세웠습니다.
22a절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바울은 그들에게 굳은 마음을 가져라, 흔들리지 말라, 이 믿음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계속적으로 믿음에 살라는 말씀입니다. 흔들리지 말고 믿음 안에 계속적으로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그러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22b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세상에서 잘 살고 세상에서 출세하고 세상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서 잘 살고, 잘 되고, 병 낫고, 성공하고, 이런 2차원적이고 3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는 언제가 쇠하고 부패하고 사라집니다. 이명박 정권도 이제 2년 남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도 공짜가 없습니다. 그 대가가 무엇입니까? 그 대가는 환난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겪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환난은 헬라어로 ‘들립시스’인데 이는 외부에서 오는 고통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에서 오는 경제적 고통,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통을 말합니다. 내적인 고민이 아닙니다. 내적인 고민은 헬라어로 ‘파메마’입니다. 이는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등입니다. 근심, 초조, 두려움, 염려는 하나님 나라에 백해무익합니다. 근심, 염려, 불안, 초조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회개해야 할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 것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합니다. 염려, 근심, 초조는 정신 건강뿐만 아니라 육체적 건강, 영적 건강의 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마6:33).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겪는다’는 말은 ‘환난을 통하여’라는 말입니다. 외적인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외적인 고통, 손해를 많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승진의 손해도 좀 봐야 합니다. 예수님 믿고 물질의 손해도 좀 봐야 합니다. 예수님 믿고 욕도 좀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 믿고 칭찬만을 듣는다면 그 사람은 가짜 신자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고자 하면 환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세상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충돌이 없다는 것은 세상과 타협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양다리 걸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진실하게 살고, 주님을 위해 열심히 살면 핍박이 있습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 핍박은 당위 조건입니다.
많은 외적 고난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분을 위해 고생하는 것이 고생입니까? 이런 고난은 소망 있는 고생입니다. 확실한 약속이 기다리고 있는 소망입니다. 요즈음 고 3들이 대학입시로 고생을 많이 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밤에 도시락 둘을 싸 가지고 가서 별을 보고 집에 옵니다. 어떤 때에는 불쌍하기도 합니다. 곤히 잠드는 자녀를 깨워서 밥을 먹여 보내려면 안쓰럽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동정하지 않고 깨워서 학교에 보냅니다. 왜 그렇게 공부합니까? 이런 고난을 통과하여야 미래를 약속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가 요즈음 해병이 되기 위해 고된 훈련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해병대가 자랑하는 빨강 명찰과 8각모는 저절로 이루어지 않습니다. 땀과 피를 통해 빨강 명찰을 달고 8각모를 쓰게 됩니다. 특히 해병대 장교 훈련 받을 때 긴 6각형으로 되어 있는 계급장을 달고 훈련을 받습니다. 이는 그 계급장이 피와 땀으로 채워져야 다이아몬드, 소위 계급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일생동안 해야 할 일의 총량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일의 총량을 채우지 못하면 늙어서 고생을 한다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공부를 하지 않고 일을 하지 않으면 늙어서 고생을 합니다. 우리가 젊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으면 늙어서 고난에 동참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젊었을 때에 제 멋 대로 산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여러분이 젊었을 때 주님의 십자가를 많이 지십시오. 젊었을 때에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왜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로마서 5장 3∼5절을 보겠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세상에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은 인간의 모습을 잘 그린 말씀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고통이 오면 즐겁지 않습니다. 고통이 오면 슬프고 서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고난을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에서 얻어지는 부가가치, 프리미엄(premium)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부가가치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 인내는 단순히 참고 억지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적극적인 인내를 말합니다. 도망갈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지만 피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인내는 연단을 가져다줍니다. 연단은 헬라어 도키메(δοκιμή)로, 금속공학의 용어입니다. 강도 높은 쇠가 되려면 불속에 여러 번 들어가야 하고 수없이 해머로 맞아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되면 분자의 밀도가 높아져 강도가 높아집니다. 그러므로 많이 맞은 쇠가 단단합니다. 이와 같이 많이 맞은 사람, 많은 역경을 겪은 사람이 단단합니다. 역경을 통해 좋은 품성으로 빚어집니다. 기독교에서 최고의 품성은 겸손입니다. 이 겸손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에서 비롯되고, 인내는 환난에서 옵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하나님의 소망을 이룰 수 없습니다. 좋은 품성이 되어야 소망을 이룰 수 있습니다. 좋은 품성은 환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욕망은 내 스스로 버릴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환난을 통해서 세상 욕망이 깨지고 부서집니다. 환난을 통해서 자기애를 부인하게 됩니다. 환난을 통해서 연약한 자가 강해집니다.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환난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삶이 변하고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환난을 통해 교만한 마음이 깨지고 겸손해집니다. 세상이 고칠 수 없고,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은 고치십니다. 그 방법이 바로 환난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은 은혜의 학교, 하나님의 큰 선물입니다.
23, 26절을 보겠습니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주께 부탁하고,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노력을 하고, 수고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주님 친히 인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께 부탁합니다. 우리가 지금 자녀를 키웁니다. 가르치고, 정성을 다하고, 기도합니다. 마지막에는 “주여, 이 자녀를 돌보아주세요” 주님께 위탁해야 합니다. 매사가 다 그러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지만 궁극적으로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결혼도 주님께 위탁하고, 직장도 주님께 위탁하고, 입시도 주님께 위탁하고, 아기를 갖는 갓도 주님께 위탁해야 합니다. 바울은 장로들을 주님께 위탁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후에 저들, 디모데가 에베소교회를 잘 섬기게 됩니다.
에델바이스는 고산 지대의 작은 꽃입니다. 그러나 이른 봄 아직 눈이 덮여 있는 추위 속에 꽃봉오리가 맺습니다. 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따뜻한 곳에서는 꽃이 피지 않습니다. 약간 추워야 아름다운 꽃이 핍니다. 고귀한 꽃일수록 역경을 온상으로 삼습니다. 바울에게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가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가시를 통해 겸손해졌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근본이 뒤집히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환난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환난을 당하기까지 복음을 전하여 전도 축제에 많은 불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