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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예배 빌립보서 4:4-9, 요절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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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경의 본문을 잘 이해하려면 본문에 나타난 동사들을 찾아보면 됩니다. 4-9절의 동사들을 찾아보면 4절에서 “기뻐하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어디서 기뻐하고 언제 기뻐해야 합니까? 성경은 “주안에서 기뻐하고”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5절에 “알게 하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성경은 너희의 관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관용은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6절에 “염려하지 말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성경에 염려하지 말라와 근심하지 말라는 단어가 365번 나옵니다. 왜 365번이 나올까요? 1년이 365일이기에 1년 내내, 매일 매일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또 매일 우리에게는 염려와 근심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아뢰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아뢰다’는 간구와 기도로, 감사함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8절에 “생각하라”는 동사입니다. 언제나 참된 것을 생각하고, 언제나 경건한 것을 생각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기준에서 옳은 것을 생각하고, 언제나 정결하고, 언제나 사랑할만하고, 언제나 칭찬할만하고, 무슨 덕이 있던지, 무슨 칭찬(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9절에 “행하라”는 동사입니다. 내게 배우고, 듣고, 받고, 본바 대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이론이 아니라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축은 ‘주 안’에서의 삶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쁘게 살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의지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기쁘게 사는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기쁨의 길을 알지 못한데 데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기쁜 삶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주 안에서 기뻐하라(4).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의 얼굴에서 기쁨을 찾지 못했다. 만일 크리스천의 얼굴에서 기쁜 모습을 보면 크리스천이 되겠다.” 슈바이처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리스천의 얼굴에서 기쁨이 없다는 것은 풀 한 포기 없는 사막과 같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얼굴을 시커멓게 하고 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에 기쁨이란 단어가 18번이나 나옵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은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보면 사도 바울은 기뻐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옥에 갇혀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빌립보 교회로부터 들려 온 소식 중 두 자매들이 화합하지 못한다는 소식은 그를 안타깝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형편을 넘어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조건과 형편이 어떠하든지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기쁜 소식보다 슬픈 소식이 더 많습니다. 지난 화요일에 북한이 연평도로 포를 쏘아 해병 2명과 민간이 2명이나 죽는 슬픈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서해안에서 한미 군사 훈련으로 인해 남북이 일촉즉발 위기에 놓여 있다는 슬픈 소식이 들립니다. 이처럼 기쁜 소식보다 슬픈 소식이 더 많이 들립니다. 슬픈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세상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Rejoice in the Lord always. I will say it again : Rejoice!)”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에서는 “항상 기뻐하라 ……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형편과 상황을 넘어서서 항상 기뻐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는 주님의 명령이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뻐하고자 마음먹고 기쁨의 근거와 이유들을 찾아보면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죄로 인해 죽은 자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 것을 잃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the Best이신 예수님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얻은 것은 다 얻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 있기 때문입니다(골2:3). 예수님 안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영광스런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 산 소망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성숙도는 얼마나 기뻐하느냐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기뻐하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으로 기뻐하십니까? 우리는 하는 일이 계획대로 잘 되면 기쁩니다. 장학금을 타면 기쁩니다. 원하는 회사에 취업을 하면 기쁩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지혜롭고 총명하게 잘 자라면 기쁩니다. 목자들은 양들이 잘 자라면 기쁩니다. 결혼정년기에 이른 형제자매들이 결혼할 때 기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홈즈와 라헤의 스트레스 조사 보고를 보면 배우자 사망을 100점으로 볼 때 결혼이 50점이고 새로운 직장은 36점이고 입학과 졸업도 26점이나 됩니다. 이처럼 세상에서의 기쁨은 잠시 뿐이고, 그리고 그 기쁨 또한 상대적이며, 환경과 처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얼마 안가 기쁨은 사라지고 우울해집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쁨은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만이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도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많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을 합니까? 이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양다리 걸친 신앙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연애도 양다리 걸친 연애가 유행한다고 합니다. 여차하면 신발 거꾸로 신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매사가 능동적이기 보다 수동적입니다. 자신은 기쁨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고 기쁘다고 목청을 높여 외쳐 보지만 그 말이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은 쉽게 지치고 피곤해집니다. 그러고는 체질이 어떻고, 은사가 어떻다고 체질과 은사를 내세웁니다. 프로그램이 잘못되었고,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남을 탓하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해결하려하지 않고 문제를 다른 데서 찾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쁨이 없는 삶이 연속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열심히 앞뒤를 두리번거려 보지만 장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신앙성장이 없고 내면은 여전히 천박합니다. 소망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시들고 메마른 신앙에서 기쁨이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주님 안에 있다.” 눈에 보이는 것에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구약 성경 하박국 선지자의 예는 우리에게 좋은 예가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살던 시대는 어둡고 절망적이었습니다. 불의가 득세하고 공의가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즉 바벨론의 침략이 머지않았습니다. 이를 안 하박국 선지자는 두려웠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럴지라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장:17,18).” 이 말씀은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통해 구원을 받고자 피나는 투쟁을 했습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했습니다. 종교생활은 좌 뇌의 영역으로 이성입니다. 이성은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이성은 얼음장처럼 차갑습니다. 기쁨의 영역은 우뇌, 감성의 영역입니다. 감성은 따뜻합니다.
바울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금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수염도 깎지 않고 덥수룩하게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 그의 내면에 기쁨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런 그가 종교적인 열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때 그의 기쁨은 새장에 갇혀 있던 새가 새장에서 나와서 훨훨 공중을 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하나가 되라, 주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쁨의 원인과 기쁨의 source는 주 안에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만으로 항상 기뻐할 만한 충분한 조건이 됩니다. 주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사죄의 기쁨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기쁨의 조건을 다 갖추었다 할지라도 양심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결코 기뻐할 수 없습니다. 화려한 생활로 죄책감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죄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죄는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할 부채입니다. 이사야서 57장 20,21절은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죄 사함의 은총이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 대신 영생의 기쁨이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인생길을 홀로 걷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하루를 살아갑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천국을 향하여 걷습니다. 예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으므로 악한 자들이 넘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누가 기뻐합니까? 주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144::15).”
F. J. Crosby여사는 어렸을 때에 오빠의 실수로 실명을 했습니다. 그는 생후 6개월 만에 이 세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원통하고 슬픈 일입니까? 무슨 기쁨이 있고 낙이 있겠습니까? 그는 한 없이 자신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빠를 원망하고 의사를 원망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찬미와 찬양이 흘러 넘쳤습니다. 그의 심령에서 감사와 찬양과 기쁨이 넘쳤기 때문에 그의 생애 가운데 6,000곡의 찬송가를 작시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얼굴에서 생명의 광채가 나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주 안에서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라(5).
5절을 보십시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이란 넓은 마음, 넓은 도량을 말합니다. 관용이 있는 사람은 모두 용서할 수 있고 용납할 수 있습니다. 관용이 없으면 속이 밴댕이 뱃속처럼 좁아서 남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신경질만 부리게 됩니다. 쉽게 분을 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지 못합니다. 관용이 없는 사람은 작은 시내처럼 소리가 많이 나고 시끄럽습니다. 오수를 그대로 흘려보냅니다. 말에 filtering이 없습니다.
그러나 관용이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품고 섬기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관용이 있는 사람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포용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듣습니다. 관용이 있는 사람은 큰 강과 같아서 좀처럼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오수와 오염된 물을 다 정화시키듯이 모든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원망과 불평을 다 들어줍니다. 이런 사람은 많은 양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얻은 목자들을 보면 가시 같은 사람보다 넓은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분들입니다. 관용을 베푸는 넓은 마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셋째, 모든 일에 기도하고 간구하라(6).
6절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세상에는 염려할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염려’란 헬라어 원어로 ‘마음이 쪼개진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쪼개지니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됩니다. 염려는 현재의 일이 아니라 장차 일어날 일들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염려는 더욱 커집니다. 그런데 염려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염려한다고 키가 한 자라도 커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염려는 백해무익합니다. 잠언 17장 22절을 보면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각종 신경성 질환은 염려에서 기인됩니다.
이 염려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지 못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렇다고 염려를 하지 말라 했으니 근거 없이 여유를 부리고 천하 태평하게 가만히 있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오직 모든 일에 기도하고 간구하여야 합니다. 염려가 세상을 향하는 것이라면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어떤 자세로 해야 합니까? ‘감사함으로’ 해야 합니다. 감사 없는 기도는 자기 신세한탄과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되기 쉽습니다.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은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2:22).”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도 소멸하리로다(시146:3,4).” 지금 우리나라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미국이나 중국을 쳐다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눈치를 봐서는 안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기도해야 됩니다.
넷째, 하나님 자녀답게 생각하고 배우고 행하라(8,9).
8절을 보십시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 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사도 바울은 행하라고 하지 않고 먼저 생각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생각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생각은 사람의 인격을 형성합니다. 생각은 안경과 같아서 검은 안경을 쓰고 보면 검게 보이듯이, 밝은 생각을 하면 밝게 보입니다. 진실 되게 생각하면 진실 되게 보입니다. 그런데 생각은 절로 이루어지지 않고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생각은 자유라고 하여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6가지의 덕목을 말할 때마다 ‘무엇에든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에 6가지 덕목은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만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반드시 지켜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과 형편 가운데서도 참되고 경건하며 정결하며 사랑하고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생각을 하여야 됩니다. 40대에 가서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추한 생각을 하여 추한 사람처럼 보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생각하여 얼굴에서 아름다움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또 말씀을 공부할 때에도 깊이 생각하여 말씀의 깊이와 그 뜻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생각만 하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9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우리가 아름답고 좋은 것을 생각만 하고 그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멋있게 말만 하고 그친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말씀을 배웠으면 행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으면 본대로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는 1장 22-2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우리는 부도덕한 행실을 권장하고 선전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영화나 소설이나 잡지, TV 드라마 할 것 없이 불건전한 인간관계를 미화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정상적인 이야기는 유치하게 여깁니다. 지금 초중고 학생들은 성윤리보다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불경건한 삶은 당장에는 감미롭게 보이지만 그 속에는 독이 들어 있습니다. 결국 사람을 파멸시킵니다. 그리고 사회는 세속화되어 있어서 성도들이 자칫 방심하면 세속에 물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어서 정결한 말을 사용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3,4절을 보겠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몸소 실천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말하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좋은 인상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을 순종할 때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주 안에 있을 때 참 된 기쁨이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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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경의 본문을 잘 이해하려면 본문에 나타난 동사들을 찾아보면 됩니다. 4-9절의 동사들을 찾아보면 4절에서 “기뻐하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어디서 기뻐하고 언제 기뻐해야 합니까? 성경은 “주안에서 기뻐하고”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5절에 “알게 하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성경은 너희의 관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관용은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6절에 “염려하지 말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성경에 염려하지 말라와 근심하지 말라는 단어가 365번 나옵니다. 왜 365번이 나올까요? 1년이 365일이기에 1년 내내, 매일 매일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또 매일 우리에게는 염려와 근심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아뢰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아뢰다’는 간구와 기도로, 감사함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8절에 “생각하라”는 동사입니다. 언제나 참된 것을 생각하고, 언제나 경건한 것을 생각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기준에서 옳은 것을 생각하고, 언제나 정결하고, 언제나 사랑할만하고, 언제나 칭찬할만하고, 무슨 덕이 있던지, 무슨 칭찬(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9절에 “행하라”는 동사입니다. 내게 배우고, 듣고, 받고, 본바 대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이론이 아니라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축은 ‘주 안’에서의 삶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쁘게 살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의지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기쁘게 사는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기쁨의 길을 알지 못한데 데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기쁜 삶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주 안에서 기뻐하라(4).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의 얼굴에서 기쁨을 찾지 못했다. 만일 크리스천의 얼굴에서 기쁜 모습을 보면 크리스천이 되겠다.” 슈바이처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리스천의 얼굴에서 기쁨이 없다는 것은 풀 한 포기 없는 사막과 같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얼굴을 시커멓게 하고 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에 기쁨이란 단어가 18번이나 나옵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은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보면 사도 바울은 기뻐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옥에 갇혀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빌립보 교회로부터 들려 온 소식 중 두 자매들이 화합하지 못한다는 소식은 그를 안타깝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형편을 넘어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조건과 형편이 어떠하든지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기쁜 소식보다 슬픈 소식이 더 많습니다. 지난 화요일에 북한이 연평도로 포를 쏘아 해병 2명과 민간이 2명이나 죽는 슬픈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서해안에서 한미 군사 훈련으로 인해 남북이 일촉즉발 위기에 놓여 있다는 슬픈 소식이 들립니다. 이처럼 기쁜 소식보다 슬픈 소식이 더 많이 들립니다. 슬픈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세상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Rejoice in the Lord always. I will say it again : Rejoice!)”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에서는 “항상 기뻐하라 ……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형편과 상황을 넘어서서 항상 기뻐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는 주님의 명령이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뻐하고자 마음먹고 기쁨의 근거와 이유들을 찾아보면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죄로 인해 죽은 자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 것을 잃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the Best이신 예수님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얻은 것은 다 얻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 있기 때문입니다(골2:3). 예수님 안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영광스런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 산 소망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성숙도는 얼마나 기뻐하느냐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기뻐하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으로 기뻐하십니까? 우리는 하는 일이 계획대로 잘 되면 기쁩니다. 장학금을 타면 기쁩니다. 원하는 회사에 취업을 하면 기쁩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지혜롭고 총명하게 잘 자라면 기쁩니다. 목자들은 양들이 잘 자라면 기쁩니다. 결혼정년기에 이른 형제자매들이 결혼할 때 기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홈즈와 라헤의 스트레스 조사 보고를 보면 배우자 사망을 100점으로 볼 때 결혼이 50점이고 새로운 직장은 36점이고 입학과 졸업도 26점이나 됩니다. 이처럼 세상에서의 기쁨은 잠시 뿐이고, 그리고 그 기쁨 또한 상대적이며, 환경과 처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얼마 안가 기쁨은 사라지고 우울해집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쁨은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만이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도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많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을 합니까? 이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양다리 걸친 신앙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연애도 양다리 걸친 연애가 유행한다고 합니다. 여차하면 신발 거꾸로 신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매사가 능동적이기 보다 수동적입니다. 자신은 기쁨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고 기쁘다고 목청을 높여 외쳐 보지만 그 말이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은 쉽게 지치고 피곤해집니다. 그러고는 체질이 어떻고, 은사가 어떻다고 체질과 은사를 내세웁니다. 프로그램이 잘못되었고,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남을 탓하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해결하려하지 않고 문제를 다른 데서 찾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쁨이 없는 삶이 연속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열심히 앞뒤를 두리번거려 보지만 장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신앙성장이 없고 내면은 여전히 천박합니다. 소망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시들고 메마른 신앙에서 기쁨이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주님 안에 있다.” 눈에 보이는 것에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구약 성경 하박국 선지자의 예는 우리에게 좋은 예가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살던 시대는 어둡고 절망적이었습니다. 불의가 득세하고 공의가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즉 바벨론의 침략이 머지않았습니다. 이를 안 하박국 선지자는 두려웠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럴지라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장:17,18).” 이 말씀은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통해 구원을 받고자 피나는 투쟁을 했습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했습니다. 종교생활은 좌 뇌의 영역으로 이성입니다. 이성은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이성은 얼음장처럼 차갑습니다. 기쁨의 영역은 우뇌, 감성의 영역입니다. 감성은 따뜻합니다.
바울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금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수염도 깎지 않고 덥수룩하게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 그의 내면에 기쁨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런 그가 종교적인 열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때 그의 기쁨은 새장에 갇혀 있던 새가 새장에서 나와서 훨훨 공중을 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하나가 되라, 주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쁨의 원인과 기쁨의 source는 주 안에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만으로 항상 기뻐할 만한 충분한 조건이 됩니다. 주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사죄의 기쁨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기쁨의 조건을 다 갖추었다 할지라도 양심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결코 기뻐할 수 없습니다. 화려한 생활로 죄책감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죄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죄는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할 부채입니다. 이사야서 57장 20,21절은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죄 사함의 은총이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 대신 영생의 기쁨이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인생길을 홀로 걷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하루를 살아갑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천국을 향하여 걷습니다. 예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으므로 악한 자들이 넘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누가 기뻐합니까? 주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144::15).”
F. J. Crosby여사는 어렸을 때에 오빠의 실수로 실명을 했습니다. 그는 생후 6개월 만에 이 세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원통하고 슬픈 일입니까? 무슨 기쁨이 있고 낙이 있겠습니까? 그는 한 없이 자신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빠를 원망하고 의사를 원망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찬미와 찬양이 흘러 넘쳤습니다. 그의 심령에서 감사와 찬양과 기쁨이 넘쳤기 때문에 그의 생애 가운데 6,000곡의 찬송가를 작시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얼굴에서 생명의 광채가 나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주 안에서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라(5).
5절을 보십시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이란 넓은 마음, 넓은 도량을 말합니다. 관용이 있는 사람은 모두 용서할 수 있고 용납할 수 있습니다. 관용이 없으면 속이 밴댕이 뱃속처럼 좁아서 남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신경질만 부리게 됩니다. 쉽게 분을 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지 못합니다. 관용이 없는 사람은 작은 시내처럼 소리가 많이 나고 시끄럽습니다. 오수를 그대로 흘려보냅니다. 말에 filtering이 없습니다.
그러나 관용이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품고 섬기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관용이 있는 사람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포용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듣습니다. 관용이 있는 사람은 큰 강과 같아서 좀처럼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오수와 오염된 물을 다 정화시키듯이 모든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원망과 불평을 다 들어줍니다. 이런 사람은 많은 양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얻은 목자들을 보면 가시 같은 사람보다 넓은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분들입니다. 관용을 베푸는 넓은 마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셋째, 모든 일에 기도하고 간구하라(6).
6절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세상에는 염려할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염려’란 헬라어 원어로 ‘마음이 쪼개진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쪼개지니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됩니다. 염려는 현재의 일이 아니라 장차 일어날 일들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염려는 더욱 커집니다. 그런데 염려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염려한다고 키가 한 자라도 커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염려는 백해무익합니다. 잠언 17장 22절을 보면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각종 신경성 질환은 염려에서 기인됩니다.
이 염려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지 못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렇다고 염려를 하지 말라 했으니 근거 없이 여유를 부리고 천하 태평하게 가만히 있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오직 모든 일에 기도하고 간구하여야 합니다. 염려가 세상을 향하는 것이라면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어떤 자세로 해야 합니까? ‘감사함으로’ 해야 합니다. 감사 없는 기도는 자기 신세한탄과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되기 쉽습니다.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은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2:22).”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도 소멸하리로다(시146:3,4).” 지금 우리나라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미국이나 중국을 쳐다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눈치를 봐서는 안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기도해야 됩니다.
넷째, 하나님 자녀답게 생각하고 배우고 행하라(8,9).
8절을 보십시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 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사도 바울은 행하라고 하지 않고 먼저 생각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생각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생각은 사람의 인격을 형성합니다. 생각은 안경과 같아서 검은 안경을 쓰고 보면 검게 보이듯이, 밝은 생각을 하면 밝게 보입니다. 진실 되게 생각하면 진실 되게 보입니다. 그런데 생각은 절로 이루어지지 않고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생각은 자유라고 하여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6가지의 덕목을 말할 때마다 ‘무엇에든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에 6가지 덕목은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만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반드시 지켜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과 형편 가운데서도 참되고 경건하며 정결하며 사랑하고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생각을 하여야 됩니다. 40대에 가서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추한 생각을 하여 추한 사람처럼 보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생각하여 얼굴에서 아름다움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또 말씀을 공부할 때에도 깊이 생각하여 말씀의 깊이와 그 뜻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생각만 하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9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우리가 아름답고 좋은 것을 생각만 하고 그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멋있게 말만 하고 그친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말씀을 배웠으면 행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으면 본대로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는 1장 22-2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우리는 부도덕한 행실을 권장하고 선전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영화나 소설이나 잡지, TV 드라마 할 것 없이 불건전한 인간관계를 미화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정상적인 이야기는 유치하게 여깁니다. 지금 초중고 학생들은 성윤리보다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불경건한 삶은 당장에는 감미롭게 보이지만 그 속에는 독이 들어 있습니다. 결국 사람을 파멸시킵니다. 그리고 사회는 세속화되어 있어서 성도들이 자칫 방심하면 세속에 물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어서 정결한 말을 사용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3,4절을 보겠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몸소 실천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말하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좋은 인상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을 순종할 때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주 안에 있을 때 참 된 기쁨이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