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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신년 특강(다니엘서 1:1-21, 요절 1:8)
새 해를 출발하면서 뜻을 정하자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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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은 신묘년, 토끼띠 해입니다. 토끼하면 어렸을 때 불렀던 동요가 생각납니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토끼는 후각이 발달하여 자기 새끼와 남의 새끼를 냄새로 구별합니다. 그리고 토끼는 초식동물로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배설은 항상 같은 곳에서만 합니다. 금년 한 해 토끼와 같이 시대를 잘 분별하고 청결하고 순결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사람들의 행동 기준을 보면 넷으로 나눕니다. 첫째는 유행을 따라 결정합니다. 우리 말에 남이 장에 가니 자기도 무릎에 망건을 쓰고 장에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둘째는 집단의식에 이끌려 내 그룹에 속했는가, 안 하였는가로 결정합니다. 상대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내 편이 아니면 다 틀린 것입니다. 진보와 보수는 새의 양날개, 기차 레일과 같이 상극의 대상이 아닌 공존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서로가 상극의 정도가 아니라 타도의 대상으로 여겨 서로가 서로에게 좌경 빨갱이, 보수 꼴통이라고 매도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서로가 인정하지 않습니다. 셋째는 자신의 이익을 따라 결정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냐 손해냐 그것이 판단의 기준입니다. 교회 봉사도 자기 이익을 따라 하고, 친구도 자기 이익을 따라 사귑니다. 손해 볼 것 같으면 하지 않습니다. 넷째는 선과 악을 따라 결정합니다. 眞善美聖을 따라 결정합니다. 남들이 다 틀렸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眞이고 善이고 美이고 聖이면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행동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의 행동 기준은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에 두어야 합니다. 때로는 손해가 되어도 하나님의 뜻이면 따라야 합니다. 내 모든 가족, 주위 친구들이 반대해도 하나님의 뜻이면 나 혼자라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을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누가 저런 주장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에 다니엘과 세 친구가 나옵니다. 그들이 태어난 시기는 주전 7C, 유다의 18대 왕 여호야김이 친 애굽 정책을 펴던 시기였습니다. 유다는 애굽에 줄을 섰다가 신흥 세력인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왕족과 귀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때에 다니엘과 세친구들도 끌려갔습니다.
시간이 흘러 느부갓네살은 새로운 포용정책을 씁니다. 새로운 포용정책은 어떤 특정 지역이나 세력, 영포라인이나 고소영의 인사가 아니라 지역과 민족을 초월하여 인재를 뽑아 교육을 잘 시킨 후 나라 발전에 공헌하게 하고 또 왕의 지근거리에서 섬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정책으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인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선발되어 3년간 국비장학생으로 교육을 받는 특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3년간 교육을 마친 다니엘과 세 친구는 고급 관료로 선발되어 국사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다니엘은 용모가 아름답고 준수하고 실력이 뛰어나 왕의 지근거리에서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니엘은 처음부터 뜻을 정했습니다. 그것은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주님의 자녀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니엘을 바벨론과 페르시아 양조에 걸쳐 4 왕조에서 고관직을 지혜롭고 용기있게 섬기도록 도우셨습니다. 성경은 뜻을 정하고 사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8절을 보면 뜻을 정하지 않은 사람은 정함이 없는 자로서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새 해를 출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고 출발하여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궁중 장학생으로 선발된 다니엘과 세 친구들(1-7)
1,2절은 다니엘이 바벨론에 끌려가던 시대 상황에 대한 말씀입니다. 3-5절을 보겠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유대인들의 왕족 중에 흠이 없고 아름답고 모든 재주가 통달하고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한 청년들을 뽑아 왕궁에 거하여 왕궁의 진미와 포도주를 마시며 갈대아 학문과 언어를 3년 간 가르쳐 왕을 보좌하도록 하는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전쟁을 좋아하는 정복자이지만 지모가 있었습니다. 대가 정복자들은 미모의 여인을 뽑아 자기 정욕을 채웁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몽골의 징기스칸과 일본의 풍신수길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여인들이 많은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젊은 청년들을 뽑아 엘리트로 양성하여 바벨론 왕국에 봉사하고 충성하도록 했습니다. 여기에 뽑힌다는 것은 미래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6,7절을 보면 그들 중에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쳐 뽑혔습니다. 환관장은 이들의 이름을 바벨론 식으로 창씨개명부터 했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성을 바꾼다는 것은 同祖同根, 뿌리가 같고 조상이 같다는 사상을 심는 것입니다. 다니엘이란 “하나님은 나의 재판장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벨드사살, ‘벨이 보호한다’는 뜻으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냐는 “하나님은 자비하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드락, ‘태양의 영감’으로 바꾸었습니다. 미사엘은 “하나님 같은 분이 없다”는 뜻인데 메삭, ‘아쿠신 같은 분이 어디 있느냐’로 바꾸었습니다. 아사랴는 “하나님은 도와주신다”는 뜻인데 ‘아벳느고’, ’느고의 종’,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관련된 이름을 자기 나라의 신과 관련된 이름으로 모두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민족의 혼과 정신을 빼어 바벨론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왔지만 다른 포로들과 달리 채찍을 맞으며 중노동을 하거나 차별대우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왕궁에서 주는 산해진미를 먹으며 값진 포도주를 마시며 마음껏 선진국 학문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왕궁에서 왕의 비서관으로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노예 백성에게는 특권 중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 권세와 명예, 그리고 부, 예쁜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는 세상 사람들이면 누구나 한번 해보고 싶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회이자 위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민백성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바벨론에서 우상을 섬기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 처하면 현실과 타협하는 기회주의자가 됩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생 때에 믿음의 중심을 지키다가 취직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상실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믿음의 중심보다는 세상과 타협하며 세속에 물들어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자신의 향락과 일신의 부귀영화를 누리는데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오히려 이 특권을 통해서 바벨론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절망의 때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심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시대가 어두울 때에 하나님이 구원의 여명을 열어 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위기가 기회가 되고 절망이 희망이 됨을 보여 주었습니다.
지금 한국은 100년 전 열강들이 한반도를 놓고 서로 지배하려고 하던 구한말 시대와 흡사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의 틈새에 끼어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남북분단의 비극이 있습니다. 내적으로는 풍요의 역설로 인해 곳곳에 갈등이 분출되고 있습니다. 1인당 GDP 2만 달러로 인해 물질적 풍요를 누리지만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최고이고(11.2-28.4명), 90% 근접한 대학 진학률을 자랑하지만 대학입시경쟁과 사교육비는 살인적이어서 그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영업이익이 20조나 되지만 그들만의 잔치가 되어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고용이 증대하여 이것이 오히려 사회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주택보급률은 110%이지만 내 집 마련에 걸리는 시간은 더 길어져만 갑니다. 2004년 이혼율이 좀 둔화되다 싶더니 요즘 증가 추세로 가정이 무너지는 소리가 납니다. 특히나 음란물은 어린 자녀들에게 무방비 상태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은 꿈과 비전이 없이 눈에 보이는 물질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의 때에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비전과 희망을 보아야 합니다. 어둡고 답답하여 희망이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의 희망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어둡고 답답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위기의 때에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셨습니다(출14:13,14).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절망의 때에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펴시는 놀라운 소망을 바라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때 여러분의 생애에 희망의 꽃이 피고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둘째, 다니엘의 결단과 용기(8)
8절을 읽겠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은 더러운 우상 제물로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내 인생의 가치관과 인생의 목적을 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분명한 뜻과 목적이 없으면 삶을 낭비하고 허비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49장 4절을 보면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가야 할 분명한 방향과 목적이 있으면 세상에 곁눈질하지 않습니다.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으니 방황하지 않게 됩니다. 그가 뜻을 정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는 신앙의 순결입니다.
당시 고기는 우상의 제단에 바쳐진 음식이었고, 포도주는 우상에 드려진 제주였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음식 중에는 성경에 금하는 음식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먹어야할 음식 중에는 피채 먹는 고기도 있었을 것입니다(신12:2324). 부정한 고기도 있었을 것입니다(레11:10-12). 그래서 다니엘은 율법의 규례(레11:2-8)를 지키기 위하여 왕의 명령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결단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율법을 공부하고 율법을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그런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신앙 양심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실의 유익보다 신앙양심을 지켰습니다.
요즘 신앙의 순결이란 단어가 생소하게 들립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신앙의 순결은 생명보다 더 귀합니다. 바다 고기는 짠물에 살지만 바닷물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연은 시궁창에서 자라지만 환경을 넘어서서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우리가 신앙의 순결을 지켜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향해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입니다.
다니엘은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워서 타협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바벨론에 왔으면 바벨론 풍속을 따라야 한다며 살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바벨론에서 선교를 하려면 바벨론화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화나 사람 앞에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사람에 앞에 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 앞에 삽니까? 사람 앞에서 삽니까? 하나님 앞에서 삽니까? 칼뱅의 생애의 2대 목표는 하나님 앞에서(In the sight of God),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For the glory of God)이었습니다. 우리가 새 해를 출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는 처음부터 뜻을 정했습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할 때 분위기를 보고, 얼마 지나서 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처음부터 뜻을 정하고 출발했습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박은주 목자가 처음부터 뜻을 정하고 출발하여 믿음의 승리를 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뜻을 정하고 출발하면 처음에는 힘들지만 나중에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신뢰하게 됩니다. 다니엘의 이 믿음의 결단은 참으로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생각하다보면 모세를 생각나게 합니다. 사도행전 7장 22절을 보면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 궁중에서 선진국의 최고 학문과 첨단학문을 다 배웠습니다. 그리고 궁중 교육과 무예를 익혔습니다. 그는 애굽을 다스릴 수 있는 왕도를 익혔습니다. 모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섬김과 영광과 사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이미 영광스러운 장래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믿음으로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였습니다(히11:24). 물론 그는 타협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애굽의 제 1인자가 되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색인간으로 살기에는 그의 신앙이 용서치 않았습니다.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살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것인가?” 결단의 순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결단했습니다. “세상 영광이냐?” “하나님 영광이냐?”의 결단의 순간에 그는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과 특권을 포기하고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우리는 신년을 출발하면서 분명한 뜻을 정하고 출발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 것인가?” “세상 영광을 좇아 살 것인가?” “꿈이 없이 살 것인가?” “큰 꿈을 꾸며 살 것인가?” “a mission으로 머물 것인가?” “the mission을 가지고 살 것인가?” “명분보다 물질을 귀히 여기며 살 것인가?” “물질보다 명분을 더 귀히 여기고 살 것인가?” “현실의 유익을 따라 살 것인가” “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살 것인가?” “과거지향적이냐” “미래 지향적이냐” 분명한 뜻을 정하고 출발하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이것저것 다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잘라낼 것은 잘라내고, 취할 것은 취하는 것입니다. 이를 선택과 집중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취하고 줄다리기를 합니다. 한 번도 자기를 깨고 버리지 못하여 마치 롯과 같이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갈등의 연속이요, 신앙생활의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믿음의 길을 가고자 하면 내면에 기쁨이 샘솟듯 흘러넘칩니다. 어떤 어려움도 이길 내적인 힘이 생기게 됩니다.
셋째, 다니엘을 도우시는 하나님(9-21)
다니엘이 믿음으로 결단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았을 때 그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그가 실패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환관장의 마음을 부드럽게 했습니다. 오히려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만일 너와 세 친구들이 얼굴이 초췌하여 다른 소년들보다 못한 것을 왕이 알게 되면 자기 머리가 위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 다니엘은 열흘 동안 채식을 죽어먹게 한 후에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 마음대로 하라고 제안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그를 도와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사람들보다 나아 보였습니다(15).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얼굴이 윤택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없으면 오히려 돼지처럼 비개살이 찌어 못쓰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음으로 살게 되면 비록 산해진미를 먹지는 못할지라도 성령이 충만하여 얼굴이 빛나게 됩니다. 잠언 3장 8절에 여호와를 경외하고 믿음으로 살면 이것이 몸에 양약이 되어 골수로 윤택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절제하여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면 그 심령에 기쁨과 감사와 찬양과 찬미가 흘러 넘쳐 그들의 얼굴에 빛이 났고 윤이 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와 명철과 비전을 주셨습니다(17). 하나님은 이 네 소년들에게 세상 학문에서도 뛰어날 수 있도록 지식과 명철을 주셨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신령한 영적 세계를 알 수 있는, 비전을 볼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비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3년 동안의 교육을 받고 났을 때 그들은 어떤 사람들보다 지혜와 총명이 뛰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지혜와 총명과 비전을 주십니다.
다니엘이 처음부터 뜻을 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을 때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높이셨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바벨론의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물질과 육신의 쾌락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믿음의 순결을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니엘과 같이 새 해를 출발하며 뜻을 정하여 모든 교회(whole church)가 온전한 복음((whole gospel)을 전 세계((whole world)에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애에 놀라운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새 해를 출발하면서 뜻을 정하자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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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은 신묘년, 토끼띠 해입니다. 토끼하면 어렸을 때 불렀던 동요가 생각납니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토끼는 후각이 발달하여 자기 새끼와 남의 새끼를 냄새로 구별합니다. 그리고 토끼는 초식동물로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배설은 항상 같은 곳에서만 합니다. 금년 한 해 토끼와 같이 시대를 잘 분별하고 청결하고 순결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사람들의 행동 기준을 보면 넷으로 나눕니다. 첫째는 유행을 따라 결정합니다. 우리 말에 남이 장에 가니 자기도 무릎에 망건을 쓰고 장에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둘째는 집단의식에 이끌려 내 그룹에 속했는가, 안 하였는가로 결정합니다. 상대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내 편이 아니면 다 틀린 것입니다. 진보와 보수는 새의 양날개, 기차 레일과 같이 상극의 대상이 아닌 공존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서로가 상극의 정도가 아니라 타도의 대상으로 여겨 서로가 서로에게 좌경 빨갱이, 보수 꼴통이라고 매도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서로가 인정하지 않습니다. 셋째는 자신의 이익을 따라 결정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냐 손해냐 그것이 판단의 기준입니다. 교회 봉사도 자기 이익을 따라 하고, 친구도 자기 이익을 따라 사귑니다. 손해 볼 것 같으면 하지 않습니다. 넷째는 선과 악을 따라 결정합니다. 眞善美聖을 따라 결정합니다. 남들이 다 틀렸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眞이고 善이고 美이고 聖이면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행동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의 행동 기준은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에 두어야 합니다. 때로는 손해가 되어도 하나님의 뜻이면 따라야 합니다. 내 모든 가족, 주위 친구들이 반대해도 하나님의 뜻이면 나 혼자라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을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누가 저런 주장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에 다니엘과 세 친구가 나옵니다. 그들이 태어난 시기는 주전 7C, 유다의 18대 왕 여호야김이 친 애굽 정책을 펴던 시기였습니다. 유다는 애굽에 줄을 섰다가 신흥 세력인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왕족과 귀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때에 다니엘과 세친구들도 끌려갔습니다.
시간이 흘러 느부갓네살은 새로운 포용정책을 씁니다. 새로운 포용정책은 어떤 특정 지역이나 세력, 영포라인이나 고소영의 인사가 아니라 지역과 민족을 초월하여 인재를 뽑아 교육을 잘 시킨 후 나라 발전에 공헌하게 하고 또 왕의 지근거리에서 섬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정책으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인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선발되어 3년간 국비장학생으로 교육을 받는 특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3년간 교육을 마친 다니엘과 세 친구는 고급 관료로 선발되어 국사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다니엘은 용모가 아름답고 준수하고 실력이 뛰어나 왕의 지근거리에서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니엘은 처음부터 뜻을 정했습니다. 그것은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주님의 자녀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니엘을 바벨론과 페르시아 양조에 걸쳐 4 왕조에서 고관직을 지혜롭고 용기있게 섬기도록 도우셨습니다. 성경은 뜻을 정하고 사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8절을 보면 뜻을 정하지 않은 사람은 정함이 없는 자로서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새 해를 출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고 출발하여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궁중 장학생으로 선발된 다니엘과 세 친구들(1-7)
1,2절은 다니엘이 바벨론에 끌려가던 시대 상황에 대한 말씀입니다. 3-5절을 보겠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유대인들의 왕족 중에 흠이 없고 아름답고 모든 재주가 통달하고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한 청년들을 뽑아 왕궁에 거하여 왕궁의 진미와 포도주를 마시며 갈대아 학문과 언어를 3년 간 가르쳐 왕을 보좌하도록 하는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전쟁을 좋아하는 정복자이지만 지모가 있었습니다. 대가 정복자들은 미모의 여인을 뽑아 자기 정욕을 채웁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몽골의 징기스칸과 일본의 풍신수길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여인들이 많은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젊은 청년들을 뽑아 엘리트로 양성하여 바벨론 왕국에 봉사하고 충성하도록 했습니다. 여기에 뽑힌다는 것은 미래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6,7절을 보면 그들 중에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쳐 뽑혔습니다. 환관장은 이들의 이름을 바벨론 식으로 창씨개명부터 했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성을 바꾼다는 것은 同祖同根, 뿌리가 같고 조상이 같다는 사상을 심는 것입니다. 다니엘이란 “하나님은 나의 재판장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벨드사살, ‘벨이 보호한다’는 뜻으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냐는 “하나님은 자비하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드락, ‘태양의 영감’으로 바꾸었습니다. 미사엘은 “하나님 같은 분이 없다”는 뜻인데 메삭, ‘아쿠신 같은 분이 어디 있느냐’로 바꾸었습니다. 아사랴는 “하나님은 도와주신다”는 뜻인데 ‘아벳느고’, ’느고의 종’,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관련된 이름을 자기 나라의 신과 관련된 이름으로 모두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민족의 혼과 정신을 빼어 바벨론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왔지만 다른 포로들과 달리 채찍을 맞으며 중노동을 하거나 차별대우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왕궁에서 주는 산해진미를 먹으며 값진 포도주를 마시며 마음껏 선진국 학문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왕궁에서 왕의 비서관으로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노예 백성에게는 특권 중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 권세와 명예, 그리고 부, 예쁜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는 세상 사람들이면 누구나 한번 해보고 싶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회이자 위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민백성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바벨론에서 우상을 섬기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 처하면 현실과 타협하는 기회주의자가 됩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생 때에 믿음의 중심을 지키다가 취직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상실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믿음의 중심보다는 세상과 타협하며 세속에 물들어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자신의 향락과 일신의 부귀영화를 누리는데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오히려 이 특권을 통해서 바벨론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절망의 때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심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시대가 어두울 때에 하나님이 구원의 여명을 열어 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위기가 기회가 되고 절망이 희망이 됨을 보여 주었습니다.
지금 한국은 100년 전 열강들이 한반도를 놓고 서로 지배하려고 하던 구한말 시대와 흡사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의 틈새에 끼어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남북분단의 비극이 있습니다. 내적으로는 풍요의 역설로 인해 곳곳에 갈등이 분출되고 있습니다. 1인당 GDP 2만 달러로 인해 물질적 풍요를 누리지만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최고이고(11.2-28.4명), 90% 근접한 대학 진학률을 자랑하지만 대학입시경쟁과 사교육비는 살인적이어서 그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영업이익이 20조나 되지만 그들만의 잔치가 되어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고용이 증대하여 이것이 오히려 사회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주택보급률은 110%이지만 내 집 마련에 걸리는 시간은 더 길어져만 갑니다. 2004년 이혼율이 좀 둔화되다 싶더니 요즘 증가 추세로 가정이 무너지는 소리가 납니다. 특히나 음란물은 어린 자녀들에게 무방비 상태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은 꿈과 비전이 없이 눈에 보이는 물질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의 때에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비전과 희망을 보아야 합니다. 어둡고 답답하여 희망이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의 희망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어둡고 답답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위기의 때에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셨습니다(출14:13,14).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절망의 때에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펴시는 놀라운 소망을 바라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때 여러분의 생애에 희망의 꽃이 피고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둘째, 다니엘의 결단과 용기(8)
8절을 읽겠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은 더러운 우상 제물로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내 인생의 가치관과 인생의 목적을 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분명한 뜻과 목적이 없으면 삶을 낭비하고 허비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49장 4절을 보면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가야 할 분명한 방향과 목적이 있으면 세상에 곁눈질하지 않습니다.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으니 방황하지 않게 됩니다. 그가 뜻을 정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는 신앙의 순결입니다.
당시 고기는 우상의 제단에 바쳐진 음식이었고, 포도주는 우상에 드려진 제주였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음식 중에는 성경에 금하는 음식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먹어야할 음식 중에는 피채 먹는 고기도 있었을 것입니다(신12:2324). 부정한 고기도 있었을 것입니다(레11:10-12). 그래서 다니엘은 율법의 규례(레11:2-8)를 지키기 위하여 왕의 명령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결단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율법을 공부하고 율법을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그런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신앙 양심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실의 유익보다 신앙양심을 지켰습니다.
요즘 신앙의 순결이란 단어가 생소하게 들립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신앙의 순결은 생명보다 더 귀합니다. 바다 고기는 짠물에 살지만 바닷물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연은 시궁창에서 자라지만 환경을 넘어서서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우리가 신앙의 순결을 지켜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향해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입니다.
다니엘은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워서 타협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바벨론에 왔으면 바벨론 풍속을 따라야 한다며 살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바벨론에서 선교를 하려면 바벨론화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화나 사람 앞에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사람에 앞에 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 앞에 삽니까? 사람 앞에서 삽니까? 하나님 앞에서 삽니까? 칼뱅의 생애의 2대 목표는 하나님 앞에서(In the sight of God),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For the glory of God)이었습니다. 우리가 새 해를 출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는 처음부터 뜻을 정했습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할 때 분위기를 보고, 얼마 지나서 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처음부터 뜻을 정하고 출발했습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박은주 목자가 처음부터 뜻을 정하고 출발하여 믿음의 승리를 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뜻을 정하고 출발하면 처음에는 힘들지만 나중에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신뢰하게 됩니다. 다니엘의 이 믿음의 결단은 참으로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생각하다보면 모세를 생각나게 합니다. 사도행전 7장 22절을 보면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 궁중에서 선진국의 최고 학문과 첨단학문을 다 배웠습니다. 그리고 궁중 교육과 무예를 익혔습니다. 그는 애굽을 다스릴 수 있는 왕도를 익혔습니다. 모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섬김과 영광과 사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이미 영광스러운 장래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믿음으로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였습니다(히11:24). 물론 그는 타협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애굽의 제 1인자가 되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색인간으로 살기에는 그의 신앙이 용서치 않았습니다.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살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것인가?” 결단의 순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결단했습니다. “세상 영광이냐?” “하나님 영광이냐?”의 결단의 순간에 그는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과 특권을 포기하고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우리는 신년을 출발하면서 분명한 뜻을 정하고 출발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 것인가?” “세상 영광을 좇아 살 것인가?” “꿈이 없이 살 것인가?” “큰 꿈을 꾸며 살 것인가?” “a mission으로 머물 것인가?” “the mission을 가지고 살 것인가?” “명분보다 물질을 귀히 여기며 살 것인가?” “물질보다 명분을 더 귀히 여기고 살 것인가?” “현실의 유익을 따라 살 것인가” “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살 것인가?” “과거지향적이냐” “미래 지향적이냐” 분명한 뜻을 정하고 출발하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이것저것 다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잘라낼 것은 잘라내고, 취할 것은 취하는 것입니다. 이를 선택과 집중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취하고 줄다리기를 합니다. 한 번도 자기를 깨고 버리지 못하여 마치 롯과 같이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갈등의 연속이요, 신앙생활의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믿음의 길을 가고자 하면 내면에 기쁨이 샘솟듯 흘러넘칩니다. 어떤 어려움도 이길 내적인 힘이 생기게 됩니다.
셋째, 다니엘을 도우시는 하나님(9-21)
다니엘이 믿음으로 결단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았을 때 그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그가 실패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환관장의 마음을 부드럽게 했습니다. 오히려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만일 너와 세 친구들이 얼굴이 초췌하여 다른 소년들보다 못한 것을 왕이 알게 되면 자기 머리가 위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 다니엘은 열흘 동안 채식을 죽어먹게 한 후에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 마음대로 하라고 제안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그를 도와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사람들보다 나아 보였습니다(15).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얼굴이 윤택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없으면 오히려 돼지처럼 비개살이 찌어 못쓰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음으로 살게 되면 비록 산해진미를 먹지는 못할지라도 성령이 충만하여 얼굴이 빛나게 됩니다. 잠언 3장 8절에 여호와를 경외하고 믿음으로 살면 이것이 몸에 양약이 되어 골수로 윤택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절제하여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면 그 심령에 기쁨과 감사와 찬양과 찬미가 흘러 넘쳐 그들의 얼굴에 빛이 났고 윤이 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와 명철과 비전을 주셨습니다(17). 하나님은 이 네 소년들에게 세상 학문에서도 뛰어날 수 있도록 지식과 명철을 주셨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신령한 영적 세계를 알 수 있는, 비전을 볼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비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3년 동안의 교육을 받고 났을 때 그들은 어떤 사람들보다 지혜와 총명이 뛰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지혜와 총명과 비전을 주십니다.
다니엘이 처음부터 뜻을 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을 때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높이셨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바벨론의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물질과 육신의 쾌락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믿음의 순결을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니엘과 같이 새 해를 출발하며 뜻을 정하여 모든 교회(whole church)가 온전한 복음((whole gospel)을 전 세계((whole world)에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애에 놀라운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