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이사야서 40:27-31
누가 새 힘을 얻을 수 있는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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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다가 보면 삶의 여정에서 때론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하고, 놀랄 일을 만나기도 하고, 두려운 일이 생기기도 하고, 위협을 느끼는 일이 있을 수 있고,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만나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 맬 때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있는 분이 옆에 있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가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들은 70년간 포로 생활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움직일 힘조차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새 힘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새 힘을 얻게 되면 독수리가 날개 치며 창공을 오르는 힘찬 삶을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달음박질해도 곤비치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걸어가도 피곤치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여호와를 앙망할하면 새 힘을 얻게 되고, 새 힘을 얻으면 이런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좇는 육의 눈이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영의 눈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눈은 영의 눈입니다. 우리가 영의 눈이 밝아 여호와를 앙망하여 새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27,28)
하나님은 때가 이르게 되면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벗어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로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 그들을 위로하실 하나님은 대적들을 파멸시킬 수 있는 강한 분이십니다(10). 그들을 위로하실 하나님은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목자이십니다(11). 그들을 위로하실 하나님은 세상을 주관하시는 섭리자시요 심판주이십니다(12-14). 그들을 위로하실 하나님은 어떤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15-26). 이제 그들은 위로자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그들은 하나님께서 고통을 돌아보지도 않으시고, 원통한 일을 당해도 무관심하신다고 원망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듣지도 못하느냐(28a)?” 그들은 눈이 있어도 영의 눈이 뜨이지 않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총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귀가 있어도 영적인 귀가 멀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다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치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만물과 모든 생명이 있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행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계가 있기 전부터 계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이 없어진 후에도 영원히 계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시작이요, 모든 만물의 기원이시고, 모든 것의 마침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가 되시고 종말의 주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시작한 것은 반드시 매듭을 지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면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일을 성취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조급하시거나 다급해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마냥 늦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편에서 보면 늦는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기가 막히게 절묘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리했습니다. 그는 자기 때에 자식을 주시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데모했습니다(창15:1-3). 특히 빨리 빨리를 좋아하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응답이 늦는 것 같고 지체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한 때에 정확하게 그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한 때에 주시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의심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무능하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피곤치 않고 곤비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명철은 한이 없습니다. 그의 지혜와 그의 지식은 무궁하며 그의 분별력과 통찰력은 완벽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는 유한합니다. 인생이 길면 90년입니다. 모든 인생은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들풀과 같습니다. 또한 한 결 같이 죄악과 죽음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허무하게 빨리 지나가 버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무궁하십니다. 하나님께는 천 년이 밤의 한순간과도 같습니다. 짧고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을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해야 합니다.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 너무 많은 관심을 두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십니다(29)
29절을 보겠습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능력을 더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시고, 병든 자에게 건강을 주시고, 길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은 죽은 자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십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가 강하다고 생각하는 자와는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롭다고 하는 자와는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피곤하고 무능한 자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에게 함께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을 보면 바울은 자기 몸속에 있는 병을 위해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No’ 하셨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집니다. 사람은 실패와 고통, 질병, 슬픔, 고독, 환난 같은 것들로 인해 약해집니다.
이때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57:15).” 이는 마치 쇠가 달구어졌을 때에 대장장이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성이 강하고 내면이 딱딱하고 교만한 자에게는 능력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슬픔이나 고통자체가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저자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극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어려운 일을 당한 때에도 족한 은혜를 주시고, 극히 고단할지라도 족한 은혜를 주십니다.
영국의 청교도 존 번연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활동적인 분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음성을 세 번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에게 족한 은혜를 주심을 깨닫고 낙망과 슬픔과 고독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옥중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2년의 옥중에서 신령한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와 만나는 가운데 천로역정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베토벤은 귀가 먹어 아무 것도 듣지 못했을 때에 유명한 합창을 작곡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약하고 고독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좋은 환경에서 온전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악조건 속에서 나타납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모양의 인생문제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난한 것이 인생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인간 조건이 인생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대학 원치 않는 과에 왔다는 것이 인생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 낙심하고 원망하기 쉽습니다. 슬퍼하고 낙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조개 속으로 모래가 들어가 만들어집니다. 조개 속으로 모래가 들어가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이 때 조개는 즙을 짜서 모래알을 감싸고 감싸 1년, 2년, 4년, 5년이 지나면 마지막에 진주가 됩니다. 이처럼 고통의 가시를 통해 진주와 같은 믿음과 은혜, 보배로운 인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할 때에 강하게 하시고,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시고(사35:3),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 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앙망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30,31)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새 힘을 주십니까? 여호와를 앙망하면 새 힘을 주십니다. 30,31절을 보겠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오직’은 다른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앙망하라’는 우러러 바라본다, 사모한다, 믿고, 의지하고 기다린다, 영로는 hope로 소망, 그리고 고정하라는 뜻입니다. 한번 슬쩍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집요하게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어떤 폭풍이 치고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새 힘을 얻는다’는 것은 모든 에너지, 힘의 근원,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힘이요, 신령한 힘이며, 하늘에서 부은바 된 힘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가지고 삽니다. 사람은 누구나 믿고 의지하고 기다림이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희망이 없으면 방황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앙망합니까? 여러분이 간절히 희망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갈망하면 갈망할수록 더욱더 갈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퍼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게 되면 더 갈증이 나 결국 목이 타서 죽게 됩니다. 미국이 낳은 소설가 헤밍웨이가 왜 권총으로 자살했습니까? 마릴린 몬로 같은 그 돈 많은 세계적인 여배우가 왜 약물을 복용하여 자살했습니까?
사람이 돈을 앙망하면 돌게 되고, 권력을 앙망하면 권불10년이라고 청문회에 서거나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됩니다. 명예도 너무 집착하면 명예가 불명예가 됩니다. 사람을 믿고 신뢰하면 신뢰하는 만큼 실망합니다. 우리 속담에 믿는 도끼에 발 찍힌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면 새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은 세 가지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여호와를 앙망하면 독수리 같은 힘찬 삶을 삽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믿고 의지하고 소망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독수리처럼 하늘을 나는 힘찬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 참새와 독수리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참새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날개를 접고 나무 가지 아래나 집 처마 밑에 숨습니다. 그리고 참새는 날아봐야 고작 창공 몇 십 미터 정도입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얼마나 힘이 강한지 폭풍우 속을 돌진합니다. 어떤 비바람도 헤치고 날 수 있는 새는 오직 독수리뿐입니다. 독수리는 올라가고 또 올라가 태양을 향해 돌진하는 힘이 있습니다. 독수리는 지칠 줄 모르는 힘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독수리는 천리안을 갖고 있습니다. 독수리는 참새와 달리 보는 시야가 다르고 각도가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삶은 유대라는 좁은 세계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삶은 세계를 품는 세계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최고의 가치요 소망을 두었을 때 그 잘난 세상의 것들을 분토처럼 다 버리고 주를 위해 온전히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성격 말씀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을 때 독수리처럼 솟구치는 힘찬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모든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주님을 위해 당당하고 멋지게 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열정이 더하면 더할수록 점점 더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할 때 무한한 가능성에 도전하고 비상하게 됩니다. 결코 실패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상황을 탓하지 않고 어떤 일이든지 도전하여 끝내 해결해 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앙망하여 새 힘을 얻어 슬픔과 절망을 이기며 벅찬 감격으로 하루하루를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눈을 높이 들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여 믿음의 거장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10,000m, 아니 1,000m, 아니 100m만 뛰어도 지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하면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나를 인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사방에서 우겨 쌈을 당해도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삶속에 승리가 있습니다.
셋째로 걸어가도 피곤치 않습니다.
여기에서 걸어간다는 말은 매일 매일 반복되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에 미션이 없고 비전이 없으면 하루하루의 삶이 무미건조합니다. 직장인들의 삶은 뻔합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아침 몇 술을 뜨고 졸린 눈으로 출근합니다. 그리고 밤늦게 피곤한 모습으로 퇴근합니다. 삶이 다람쥐 체 바퀴 돌리듯,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같은 반복된 삶의 연속입니다. 삶이 무미건조합니다. 삶이 짜증이 납니다. 그리고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죄를 저지릅니다. 죄 짓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무미건조한 데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앙망하여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루실 비전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a mission이 아닌 the mission을 소유해 보십시오. 언제 무미건조하고, 언제 따분하고, 언제 딴 생각이 나고, 언제 짜증이 납니까? 옛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것이 날마다 이루어지는 데 무슨 무미건조하고 따분하고 헛생각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앙망하면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까지 나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앙망하고 소망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소망할 때 의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무디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밖에 못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설교를 하고 나면 부인들이 “저 선생님을 위하여 기도 많이 하겠습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가장 기분 좋을 때는 말씀을 전하고 나서 은혜 많이 받았다는 소리를 들을 때입니다. 무디가 한 두 번 도 아니고 계속 그러니 그 말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인들이 “당신의 설교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말에 자극을 받고 “하나님, 나에게 성령을 주시옵소서. 불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앙망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께 앙망하고 사모하였습니다.
그런 기도를 하던 중 하루는 뉴욕거리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기도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는 친구 집에 들어가 엎드려 기도하는데 마침내 강한 불이 임하는데 어찌나 뜨겁고 강한지 이젠 너무 뜨거워서 타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그만 주시옵소서. 그만, 그만…” 그리하여 아직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무식한 무디를 따라갈 전도자가 없습니다. 그의 설교는 어법이 틀리고 목소리는 코맹맹이 소리가 나고 키는 작아 볼품이 없었지만 하나님을 간절히 앙망할 때 세계적인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옥스퍼드 캠브리지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자 할 때 옥스퍼드, 캠브리지 대학생들이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주제에 감이 옥스퍼드, 캠브리지에 와서 말씀을 전해, 말도 안 된다며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무디의 강력한 메시지는 그들의 심령을 쪼개어 회개의 불을 지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모하고 간절히 앙망하고 소망하면 성령의 충만함으로 새 힘을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모하고 간절히 앙망하고 소망하면 성령의 충만함으로 새 힘을 주십니다. 아멘.
새 힘은 먹는데 있지 않습니다. 새 힘은 육신의 쉼에 있지 않습니다. 새 힘은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고, 기대하며, 소망하는데서 옵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앙망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마치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가장 좋은 길로 인도될 것입니다. 새 길을 열게 될 것입니다. 새 비전이 보일 것입니다. 새 방법이 찾아질 것입니다. 새로운 일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앙망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누가 새 힘을 얻을 수 있는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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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다가 보면 삶의 여정에서 때론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하고, 놀랄 일을 만나기도 하고, 두려운 일이 생기기도 하고, 위협을 느끼는 일이 있을 수 있고,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만나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 맬 때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있는 분이 옆에 있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가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들은 70년간 포로 생활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움직일 힘조차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새 힘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새 힘을 얻게 되면 독수리가 날개 치며 창공을 오르는 힘찬 삶을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달음박질해도 곤비치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걸어가도 피곤치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여호와를 앙망할하면 새 힘을 얻게 되고, 새 힘을 얻으면 이런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좇는 육의 눈이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영의 눈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눈은 영의 눈입니다. 우리가 영의 눈이 밝아 여호와를 앙망하여 새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27,28)
하나님은 때가 이르게 되면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벗어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로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 그들을 위로하실 하나님은 대적들을 파멸시킬 수 있는 강한 분이십니다(10). 그들을 위로하실 하나님은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목자이십니다(11). 그들을 위로하실 하나님은 세상을 주관하시는 섭리자시요 심판주이십니다(12-14). 그들을 위로하실 하나님은 어떤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15-26). 이제 그들은 위로자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그들은 하나님께서 고통을 돌아보지도 않으시고, 원통한 일을 당해도 무관심하신다고 원망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듣지도 못하느냐(28a)?” 그들은 눈이 있어도 영의 눈이 뜨이지 않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총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귀가 있어도 영적인 귀가 멀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다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치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만물과 모든 생명이 있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행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계가 있기 전부터 계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이 없어진 후에도 영원히 계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시작이요, 모든 만물의 기원이시고, 모든 것의 마침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가 되시고 종말의 주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시작한 것은 반드시 매듭을 지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면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일을 성취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조급하시거나 다급해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마냥 늦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편에서 보면 늦는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기가 막히게 절묘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리했습니다. 그는 자기 때에 자식을 주시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데모했습니다(창15:1-3). 특히 빨리 빨리를 좋아하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응답이 늦는 것 같고 지체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한 때에 정확하게 그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한 때에 주시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의심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무능하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피곤치 않고 곤비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명철은 한이 없습니다. 그의 지혜와 그의 지식은 무궁하며 그의 분별력과 통찰력은 완벽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는 유한합니다. 인생이 길면 90년입니다. 모든 인생은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들풀과 같습니다. 또한 한 결 같이 죄악과 죽음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허무하게 빨리 지나가 버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무궁하십니다. 하나님께는 천 년이 밤의 한순간과도 같습니다. 짧고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을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해야 합니다.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 너무 많은 관심을 두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십니다(29)
29절을 보겠습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능력을 더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시고, 병든 자에게 건강을 주시고, 길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은 죽은 자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십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가 강하다고 생각하는 자와는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롭다고 하는 자와는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피곤하고 무능한 자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에게 함께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을 보면 바울은 자기 몸속에 있는 병을 위해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No’ 하셨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집니다. 사람은 실패와 고통, 질병, 슬픔, 고독, 환난 같은 것들로 인해 약해집니다.
이때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57:15).” 이는 마치 쇠가 달구어졌을 때에 대장장이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성이 강하고 내면이 딱딱하고 교만한 자에게는 능력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슬픔이나 고통자체가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저자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극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어려운 일을 당한 때에도 족한 은혜를 주시고, 극히 고단할지라도 족한 은혜를 주십니다.
영국의 청교도 존 번연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활동적인 분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음성을 세 번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에게 족한 은혜를 주심을 깨닫고 낙망과 슬픔과 고독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옥중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2년의 옥중에서 신령한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와 만나는 가운데 천로역정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베토벤은 귀가 먹어 아무 것도 듣지 못했을 때에 유명한 합창을 작곡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약하고 고독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좋은 환경에서 온전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악조건 속에서 나타납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모양의 인생문제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난한 것이 인생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인간 조건이 인생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대학 원치 않는 과에 왔다는 것이 인생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 낙심하고 원망하기 쉽습니다. 슬퍼하고 낙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조개 속으로 모래가 들어가 만들어집니다. 조개 속으로 모래가 들어가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이 때 조개는 즙을 짜서 모래알을 감싸고 감싸 1년, 2년, 4년, 5년이 지나면 마지막에 진주가 됩니다. 이처럼 고통의 가시를 통해 진주와 같은 믿음과 은혜, 보배로운 인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할 때에 강하게 하시고,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시고(사35:3),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 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앙망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30,31)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새 힘을 주십니까? 여호와를 앙망하면 새 힘을 주십니다. 30,31절을 보겠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오직’은 다른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앙망하라’는 우러러 바라본다, 사모한다, 믿고, 의지하고 기다린다, 영로는 hope로 소망, 그리고 고정하라는 뜻입니다. 한번 슬쩍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집요하게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어떤 폭풍이 치고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새 힘을 얻는다’는 것은 모든 에너지, 힘의 근원,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힘이요, 신령한 힘이며, 하늘에서 부은바 된 힘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가지고 삽니다. 사람은 누구나 믿고 의지하고 기다림이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희망이 없으면 방황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앙망합니까? 여러분이 간절히 희망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갈망하면 갈망할수록 더욱더 갈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퍼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게 되면 더 갈증이 나 결국 목이 타서 죽게 됩니다. 미국이 낳은 소설가 헤밍웨이가 왜 권총으로 자살했습니까? 마릴린 몬로 같은 그 돈 많은 세계적인 여배우가 왜 약물을 복용하여 자살했습니까?
사람이 돈을 앙망하면 돌게 되고, 권력을 앙망하면 권불10년이라고 청문회에 서거나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됩니다. 명예도 너무 집착하면 명예가 불명예가 됩니다. 사람을 믿고 신뢰하면 신뢰하는 만큼 실망합니다. 우리 속담에 믿는 도끼에 발 찍힌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면 새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은 세 가지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여호와를 앙망하면 독수리 같은 힘찬 삶을 삽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믿고 의지하고 소망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독수리처럼 하늘을 나는 힘찬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 참새와 독수리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참새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날개를 접고 나무 가지 아래나 집 처마 밑에 숨습니다. 그리고 참새는 날아봐야 고작 창공 몇 십 미터 정도입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얼마나 힘이 강한지 폭풍우 속을 돌진합니다. 어떤 비바람도 헤치고 날 수 있는 새는 오직 독수리뿐입니다. 독수리는 올라가고 또 올라가 태양을 향해 돌진하는 힘이 있습니다. 독수리는 지칠 줄 모르는 힘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독수리는 천리안을 갖고 있습니다. 독수리는 참새와 달리 보는 시야가 다르고 각도가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삶은 유대라는 좁은 세계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삶은 세계를 품는 세계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최고의 가치요 소망을 두었을 때 그 잘난 세상의 것들을 분토처럼 다 버리고 주를 위해 온전히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성격 말씀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을 때 독수리처럼 솟구치는 힘찬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모든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주님을 위해 당당하고 멋지게 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열정이 더하면 더할수록 점점 더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할 때 무한한 가능성에 도전하고 비상하게 됩니다. 결코 실패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상황을 탓하지 않고 어떤 일이든지 도전하여 끝내 해결해 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앙망하여 새 힘을 얻어 슬픔과 절망을 이기며 벅찬 감격으로 하루하루를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눈을 높이 들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여 믿음의 거장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10,000m, 아니 1,000m, 아니 100m만 뛰어도 지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하면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나를 인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사방에서 우겨 쌈을 당해도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삶속에 승리가 있습니다.
셋째로 걸어가도 피곤치 않습니다.
여기에서 걸어간다는 말은 매일 매일 반복되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에 미션이 없고 비전이 없으면 하루하루의 삶이 무미건조합니다. 직장인들의 삶은 뻔합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아침 몇 술을 뜨고 졸린 눈으로 출근합니다. 그리고 밤늦게 피곤한 모습으로 퇴근합니다. 삶이 다람쥐 체 바퀴 돌리듯,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같은 반복된 삶의 연속입니다. 삶이 무미건조합니다. 삶이 짜증이 납니다. 그리고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죄를 저지릅니다. 죄 짓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무미건조한 데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앙망하여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루실 비전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a mission이 아닌 the mission을 소유해 보십시오. 언제 무미건조하고, 언제 따분하고, 언제 딴 생각이 나고, 언제 짜증이 납니까? 옛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것이 날마다 이루어지는 데 무슨 무미건조하고 따분하고 헛생각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앙망하면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까지 나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앙망하고 소망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소망할 때 의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무디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밖에 못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설교를 하고 나면 부인들이 “저 선생님을 위하여 기도 많이 하겠습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가장 기분 좋을 때는 말씀을 전하고 나서 은혜 많이 받았다는 소리를 들을 때입니다. 무디가 한 두 번 도 아니고 계속 그러니 그 말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인들이 “당신의 설교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말에 자극을 받고 “하나님, 나에게 성령을 주시옵소서. 불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앙망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께 앙망하고 사모하였습니다.
그런 기도를 하던 중 하루는 뉴욕거리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기도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는 친구 집에 들어가 엎드려 기도하는데 마침내 강한 불이 임하는데 어찌나 뜨겁고 강한지 이젠 너무 뜨거워서 타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그만 주시옵소서. 그만, 그만…” 그리하여 아직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무식한 무디를 따라갈 전도자가 없습니다. 그의 설교는 어법이 틀리고 목소리는 코맹맹이 소리가 나고 키는 작아 볼품이 없었지만 하나님을 간절히 앙망할 때 세계적인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옥스퍼드 캠브리지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자 할 때 옥스퍼드, 캠브리지 대학생들이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주제에 감이 옥스퍼드, 캠브리지에 와서 말씀을 전해, 말도 안 된다며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무디의 강력한 메시지는 그들의 심령을 쪼개어 회개의 불을 지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모하고 간절히 앙망하고 소망하면 성령의 충만함으로 새 힘을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모하고 간절히 앙망하고 소망하면 성령의 충만함으로 새 힘을 주십니다. 아멘.
새 힘은 먹는데 있지 않습니다. 새 힘은 육신의 쉼에 있지 않습니다. 새 힘은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고, 기대하며, 소망하는데서 옵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앙망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마치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가장 좋은 길로 인도될 것입니다. 새 길을 열게 될 것입니다. 새 비전이 보일 것입니다. 새 방법이 찾아질 것입니다. 새로운 일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앙망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