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믿음과 산 믿음

조회 수 2808 추천 수 0 2012.07.14 06:29:57
야고보서 2:1-26(요절 2:26)

죽은 믿음과 산 믿음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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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로마의 카타콤을 들어본 적이 있지만 터키에 카타콤이 있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터키의 갑바도기야에 로마의 카타콤보다 더 크고 더 긴 카타콤이 있습니다. 그곳 이름은 데린구유로, 이곳은 지하 120m까지 내려가는 거대한 지하 도시입니다. 이곳은 초대 교회 당시 교황숭배 사상과 유대인들의 조직적인 핍박을 피해 성도들이 땅속의 지하도시를 만들고 숨어서 예배를 드린 곳입니다.

이곳은 1960년대에 발견되었고 최대 3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현재 개방되는 면적은 전체의 10% 정도에 불과하며 지하 55미터인 8층까지만 관광객들에게 개방되고 있습니다. 내부에는 교회, 감옥, 무덤, 식당, 마구간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지하 8층에는 성찬식을 가졌던 곳도 있습니다. 초대 성도들은 약 400여 년 동안 이곳에 숨어 지내며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당대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자자손손 이곳에 거하며 믿음의 순결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터 위에 무엇이 세워져있는지 아십니까? 모슬렘의 사원이 그 지하 교회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약 100m 떨어진 곳에 짓다가 만 폐허와 같은 교회가 흉물스럽게 서있습니다. 저는 이를 보며 왜 이렇게 됐을까?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초대 성도들이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킨 이곳, 그 수많은 믿음의 성도들이 피를 뿌린 이곳, 핍박을 피해 흩어진 거룩한 나그네들이 있었던 거룩한 이 곳, 이곳이 왜 이렇게 됐을까?

이런 고민을 하다가 야고보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이유는 A.D.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 된 이후 신앙이 화석화 되어 생명력을 잃기 시작하다가 신앙이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죽은 신앙은 원리만 있지 행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죽은 신앙은 악취를 품깁니다. 죽은 신앙은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지금 원리만 남아 있는 죽은 신앙은 아닌가? 나의 신앙은 정말 살아 있는 신앙인가? 나는 정말 아는 만큼, 믿은 만큼 행함이 있는가? 수없는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결론은 제가 바로 죽은 신앙, 아는 만큼, 믿는 만큼 행함이 없는 죽은 신앙임을 고백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아있는 생명의 신앙, 화석화 되지 않은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1-13)

1절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당시 일부 성도들이 믿는 형제들을 영광의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형제들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빈부귀천에 따라 차별대우했습니다. 2-4절을 보면 그들은 손가락에 금가락지를 낀 사람에게는 허리를 굽히며 좋은 자리에 앉도록 했습니다.

반면에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저기 뒤쪽에 가서 서 있으라고 하든지 아니면 내 발등상에 앉으라며 푸대접했습니다. 손에 금가락지를 끼었다는 것은 단지 부의 상징만이 아니라 지위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그들은 사람을 차별대우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이렇게 사람들을 차별대우했으니 일반 사회에서는 어떠했겠습니까? 돈이 많이 있는 사람, 옷을 잘 입고 다니는 사람,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대우받고, 돈 없고 백이 없는 사람들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자 하고, 신분 상승을 위해 물불가리지 않았으며, 할 수만 있으면 비싼 옷을 사 입고, 할 수만 있으면 큰 차를 타고, 할 수만 있으면 넓은 아파트에서 살고자 했습니다.

이는 그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판단합니다. 물론 다른 나라도 이런 문제들을 안고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심하지는 않습니다. 오죽 심하면 고소영, 영포라인이라는 이름이 회자되겠습니까? 한국 사람들은 외모로 사람들을 취하기 때문에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대형 승용차들이 거리를 누비고 다닙니다. 세계의 패션의 도시, 돈이 많기로 이름난 밀라노를 가보니 자동차가 거의가 소형 자동차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외모로 사람들을 취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넓은 아파트에서 삽니다. 외모를 보고 취하기 때문에 허영에 들뜬 여인들이 몇 억짜리 누이 똥인지 뉘 집 똥인지 가방을 들고 다닙니다. 교회 내의 직분도 계급으로 생각하여 한기총 대표가 되기 위해 수십억의 돈을 썼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 섬김의 직분입니다. 그리고 목사만 성직자고, 일반 성도는 평범한 평신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성직자들입니다. 다만 목사는 full time 성직자이고, 장로나 권사나 집사, 그리고 성도는 self-support 성직자일 뿐입니다. 목사의 길만이 성직의 길이고, 성도의 길은 평직의 길이 아니라 모두가 성직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직장을 천직으로 여기고 성직자의 마음가짐으로 직장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욱더 성실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보고 선택하십니다(삼상16:7, 요7:24, 행10:34, 롬2:11, 엡6:9, 골3:25).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사건이 나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맏아들 엘리압을 보는 순간 기름을 붓고자 했습니다. 아마 그는 키도 크고 용모도 빼어났고 흠 잡을 데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삼상16:7). 하나님은 엘리압을 취하지 않고 들에서 양똥이나 치던 이새의 말째인 다윗을 취하여 기름을 부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학식이 얼마나 많은가, 돈이 얼마나 많은가, 외모가 얼마나 예쁜가를 보지 않고 믿음만을 보십니다. 따라서 세상의 보이는 것보다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평가할 때 현재의 모습을 보고 평가하지 않고 가능성을 보고 취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보실 때 그는 무식한 어부였습니다. 그는 모래알처럼 의지가 약했습니다. 그는 큰 소리를 잘 치는 big mouth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반석다운 면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보는 순간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셨습니다(요1:42).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던 그 때까지도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할 만큼 반석다운 내면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 반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죄인, 창기와 더불어 3대 죄인 중의 하나인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에 전혀 도움이 되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취하였습니다. 그 후 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산상수훈을 기록한 성 마태가 되었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십니다. 이는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도록 함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사야서 53장 2절을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외모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내면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과 존귀함과 신성이 충만하십니다.
제가 일곱 교회를 돌아보면서 초대 교회를 보니 교회의 겉은 초라하지만 내부는 대리석으로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지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수님의 신성의 영광이 얼마나 거룩하고 영화롭고 존귀한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6,7절을 보면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부자인 것 같았지만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훼방되었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부자는 누구입니까? 디모데전서 6장 17-19절을 보면 진정한 부자는 가난한 자를 괄시하지 않습니다. 오직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많이 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불쌍한 자를 동정합니다.

야고보서 1장 10,11절을 보면 ‘부자는 풀의 꽃 같이 지나가고,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이 없어지는 것처럼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이 쇠잔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현재 어리석은 사람들은 물질적인 축복이 진정한 축복인 줄 알고 물질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축복도 축복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는 진정한 축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들을 얻기 위하여 신앙생활하지 마십시오. 이런 신앙생활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부자는 택하지 않고 가난한 자만 택하십니까? 부자는 구원 못 받고 가난한 자들만 구원을 받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두루 섭렵한 석학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대 석학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택하여 1세기의 위대한 스승이요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안디옥 교회 구성원을 보면 흑인도 있고 또 헤롯의 젖동생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부자를 귀히 여기거나, 그렇다고 부자를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부와 가난함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믿음에 부요한가에 있습니다. 믿음에 부요한 자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 남을 섬기고 보듬고 사랑하는 삶을 말합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낮은 사람들을 섬기는 삶입니다. 다시 말하여 자기 자신에 대해 인색하고, 이웃에 대해 풍성한 삶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이웃을 위해 자기 자신의 신분보다 한 단계 낮춰서 사는 삶이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입니다.

8,9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우리가 아무리 계명을 잘 지켜도 사람을 차별대우하면 범법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도록 힘쓰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물어 보시겠습니까? “너 돈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너 명예와 권세가 얼마나 있느냐?” 묻지 않습니다. “너 믿음에 부요한 자냐?” 물으십니다.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0,11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십계명 중 한 계명이라도 어기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됩니다. 비록 간음하지 아니했다 할지라도 살인하면 율법을 어기게 된 것입니다. 살인은 사랑하지 않음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최고의 법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보통 사랑하면 감정, 황홀, 떨리는 감격 등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순종입니다. 원수를 감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감정으로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의 결단입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사람은 세상의 기준에 따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의 율법, 즉 복음에 기초해서 말하고 행동해야 하고 긍휼로 대해야 합니다(13).

둘째,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14-26)

첫째로 죽은 믿음(14-20)

14절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믿음은 중요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에 이릅니다. 이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행해야 합니다. 배고픈 형제에게는 밥을 주어야 하고, 헐벗은 사람에게는 옷을 주어야 합니다(15-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나옵니다. 강도를 만나 신음하고 있으면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살려 놓고 봐야 합니다(눅10:25-37). 실제적으로 돕는 것이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3장 17,18절을 보면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말과 혀로만 하는 신앙생활은 입만 살아서 움직이는 입구자(口) 구(口) 신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나중에 입만 구원 받는 기형적인 사람이 됩니다.

18-20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하나님을 알고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교리적인 믿음, 원리적인 믿음, 지식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귀신도 잘 압니다. 마가복음 5장 1-11절을 보면 귀신 들린 젊은 청년이 나옵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귀신같이 잘 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귀신은 말씀에 순종치 않습니다. 귀신은 늘 말씀에 반발합니다. 이런 믿음은 귀신의 믿음, 허탄한 사람, 헛된 믿음, 죽은 믿음입니다.

지금 북한 동포가 여러 해 잘 먹지 못해 키가 남한 젊은이들보다 20cm나 작아졌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정부는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민간 구호조차도 막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한반도에 재앙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구제역이 지나간 곳은 향후 2년간 축산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북한에 식량문제를 돕지 않으면 2년이 아니라 20년, 아니 50, 100년 동안 한반도에 신체 지체아, 정신박약아들로 인한 고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지불해야 할 돈은 천문학적인 숫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이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북한 동포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이게 믿는 사람들이 행해야 할 삶입니다. 우리는 아는 만큼, 믿는 만큼 행함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산 믿음(21-24)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를 들어 말씀합니다. 21-24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온전케 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고 나서 이삭을 하나님께 받쳤을 때입니다. 또 기생 라합도 여리고에 있으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드러난 것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준 후에 다른 길로 보낸 사실에 있습니다. 이처럼 온전한 믿음은 행함에 있습니다(25).

26절을 보겠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은 악취가 납니다. 죽은 믿음은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 받기보다 짓밟힘을 당합니다.

그러나 산 믿음은 생명이 약동합니다. 산 믿음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산 믿음은 생명을 살리고 성장하게 됩니다. 산 믿음은 죽은 사람을 일으켜 세웁니다. 산 믿음은 환경을 바꾸고 역사를 바꿉니다. 산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가 납니다. 이로 인해 가정이 살고 캠퍼스가 살고 민족의 아픔이 치유되고 위기가 극복됩니다.

믿음에는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이 있습니다. 죽은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산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산 믿음은 성장하고 번성합니다. 여러분은 죽은 믿음입니까? 여러분은 산 산 믿음입니까? 여러분이 믿음의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소유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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