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전도서 4:1-3
없는 자의 슬픔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린도전서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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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학대란 단어가 그렇게 많이 쓰일 때도 없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학대받는 아동, 학대받는 외국인 노동자, 학대받는 남편, 학대받은 아내, 학대받는 노부모 등 학대가 하나의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초, 중생들의 왕따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왕따도 은따, 전따, 반따, 뚱따 등 다양합니다.
본문에 보면 학대받는 사람이 나옵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 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누가 학대를 받습니까? 학대받는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학대받는 사람은 권력이 없습니다. 학대받는 사람은 세상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학대받는 사람은 가난합니다. 학대 받는 사람은 힘도 없고, 권력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이것 자체만으로도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학대까지 당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원통하고,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혹시 학생 시절에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습니까? 아마 선교사님들은 알게 모르게 자국민들로부터 무시 받고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로부터 당할 때의 무력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한 때 한국의 노동자들, 특히 여공들이 자본가로부터 많은 노동착취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노동자 천국이 되었지만 20년 전만해도 노동자들은 입도 뻥끗하지 못했습니다.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해 전태일씨는 분신자살까지 했습니다. 아마 그 때의 노동자들의 슬픔은 지금 외국 근로자들이 학대받은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학대받는 사람은 위로자를 만나지 못해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1b-3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위로 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살아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고, 죽는 것보다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위로자가 있어 위로를 받으면 고통과 슬픔, 그리고 역경을 견딜 수 있습니다. 위로자가 있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위로자만 있으면 앞을 향해 전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위로자가 없는 것입니다. 전태일 평전에 “만일 내게 대학 친구 하나만 있으면”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위로자가 한 명만 있어도 살 힘이 생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로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 위로자가 없을까요?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나를 버리지 않는 한 분이 계십니다. 부모님도 자식을 버리는 것이 오늘의 어두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나를 버리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위로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위로자가 되시기 때문에 오늘의 고통과 역경과 그리고 슬픔과 아픔을 디디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40장 1절을 보겠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위로의 하나님이심을 전하도록 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 말씀은 유명한 헨델의 메시야의 서곡에 나타납니다. 헨델은 이 말씀을 통해 큰 은혜를 받고 절망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는 재능이 뛰어났지만 세상은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 음악회를 열었지만 누구 하나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빚을 졌고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56세가 되어서는 한쪽에 마비 증상까지 왔습니다. 빚쟁이들이 찾아와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는 삶의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절망에 빠져 낙심하고 있을 때 친구 찰스 제닌스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이었고 부자였습니다. 그는 헨델에게 책 한 권을 선물하면서 “이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작곡해 보게, 이 말씀의 주인이 자네를 다시 일으켜 줄 것일세,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너무 빠르지 않은가?” 그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 책은 성경이었습니다. 그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놀라우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주제로 24일간 침식을 잊은 채 작곡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곡이 헨델의 “메시아” 입니다. 메시아의 첫 부분의 “너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은 절망 중에 빠져 있던 헨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이 위로를 통해 불멸의 명작 헨델의 메시아가 탄생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후서 1장 3,4절을 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하나님은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위로하면 단순히 마음을 기쁘게 하는 감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위로하다’는 뜻은 현재 분사형으로, 역동적이고 계속적인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환난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시고, 낙심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시고,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로하시며, 근심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시며, 죄악 중에 고민하는 자를 위로하시며, 고독한 자를 위로하시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를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은 역동적으로 고난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인내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어려운 문제 중에 개입하셔서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요, 모든 위로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는 언젠나 위로의 하나님 앞에 나아가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과중한 격무에 시달리고 학업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위로자가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이 때 여러분은 누구를 찾아 나섭니까? 한국 사람들은 대개 방을 찾습니다. 노래방, 찜찔방, 소주방 등을 찾습니다. 그런 곳에서 술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풀고자 합니다. 그러나 바바라 톰슨이 쓴 “한 잔의 술로 죽어간다”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술이 80%의 방화와 익사 사건, 60%의 폭력, 30%의 자살을 불러일으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소주방에 가서 술로 위로를 받지 마세요.
어떤 목사님이 성도들로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집에 와서 맥주 한잔씩 마셨다고 합니다. 홀짝 홀짝 마신 술이 말년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통해 위로를 받지 마세요. 어떤 목사님은 아내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더 이상 위로를 받을 수 없게 되자 우울증에 빠져 고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를 위로하여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하나님은 슬픔과 고통과 아픔이 있는 우리에게 쉼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되 넘치도록 위로하여 주십니다. 그 때 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넘어서서 오히려 환난 받는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없는 자의 슬픔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린도전서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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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학대란 단어가 그렇게 많이 쓰일 때도 없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학대받는 아동, 학대받는 외국인 노동자, 학대받는 남편, 학대받은 아내, 학대받는 노부모 등 학대가 하나의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초, 중생들의 왕따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왕따도 은따, 전따, 반따, 뚱따 등 다양합니다.
본문에 보면 학대받는 사람이 나옵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 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누가 학대를 받습니까? 학대받는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학대받는 사람은 권력이 없습니다. 학대받는 사람은 세상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학대받는 사람은 가난합니다. 학대 받는 사람은 힘도 없고, 권력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이것 자체만으로도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학대까지 당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원통하고,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혹시 학생 시절에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습니까? 아마 선교사님들은 알게 모르게 자국민들로부터 무시 받고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로부터 당할 때의 무력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한 때 한국의 노동자들, 특히 여공들이 자본가로부터 많은 노동착취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노동자 천국이 되었지만 20년 전만해도 노동자들은 입도 뻥끗하지 못했습니다.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해 전태일씨는 분신자살까지 했습니다. 아마 그 때의 노동자들의 슬픔은 지금 외국 근로자들이 학대받은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학대받는 사람은 위로자를 만나지 못해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1b-3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위로 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살아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고, 죽는 것보다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위로자가 있어 위로를 받으면 고통과 슬픔, 그리고 역경을 견딜 수 있습니다. 위로자가 있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위로자만 있으면 앞을 향해 전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위로자가 없는 것입니다. 전태일 평전에 “만일 내게 대학 친구 하나만 있으면”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위로자가 한 명만 있어도 살 힘이 생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로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 위로자가 없을까요?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나를 버리지 않는 한 분이 계십니다. 부모님도 자식을 버리는 것이 오늘의 어두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나를 버리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위로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위로자가 되시기 때문에 오늘의 고통과 역경과 그리고 슬픔과 아픔을 디디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40장 1절을 보겠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위로의 하나님이심을 전하도록 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 말씀은 유명한 헨델의 메시야의 서곡에 나타납니다. 헨델은 이 말씀을 통해 큰 은혜를 받고 절망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는 재능이 뛰어났지만 세상은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 음악회를 열었지만 누구 하나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빚을 졌고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56세가 되어서는 한쪽에 마비 증상까지 왔습니다. 빚쟁이들이 찾아와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는 삶의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절망에 빠져 낙심하고 있을 때 친구 찰스 제닌스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이었고 부자였습니다. 그는 헨델에게 책 한 권을 선물하면서 “이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작곡해 보게, 이 말씀의 주인이 자네를 다시 일으켜 줄 것일세,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너무 빠르지 않은가?” 그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 책은 성경이었습니다. 그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놀라우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주제로 24일간 침식을 잊은 채 작곡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곡이 헨델의 “메시아” 입니다. 메시아의 첫 부분의 “너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은 절망 중에 빠져 있던 헨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이 위로를 통해 불멸의 명작 헨델의 메시아가 탄생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후서 1장 3,4절을 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하나님은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위로하면 단순히 마음을 기쁘게 하는 감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위로하다’는 뜻은 현재 분사형으로, 역동적이고 계속적인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환난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시고, 낙심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시고,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로하시며, 근심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시며, 죄악 중에 고민하는 자를 위로하시며, 고독한 자를 위로하시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를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은 역동적으로 고난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인내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어려운 문제 중에 개입하셔서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요, 모든 위로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는 언젠나 위로의 하나님 앞에 나아가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과중한 격무에 시달리고 학업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위로자가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이 때 여러분은 누구를 찾아 나섭니까? 한국 사람들은 대개 방을 찾습니다. 노래방, 찜찔방, 소주방 등을 찾습니다. 그런 곳에서 술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풀고자 합니다. 그러나 바바라 톰슨이 쓴 “한 잔의 술로 죽어간다”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술이 80%의 방화와 익사 사건, 60%의 폭력, 30%의 자살을 불러일으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소주방에 가서 술로 위로를 받지 마세요.
어떤 목사님이 성도들로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집에 와서 맥주 한잔씩 마셨다고 합니다. 홀짝 홀짝 마신 술이 말년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통해 위로를 받지 마세요. 어떤 목사님은 아내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더 이상 위로를 받을 수 없게 되자 우울증에 빠져 고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를 위로하여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하나님은 슬픔과 고통과 아픔이 있는 우리에게 쉼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되 넘치도록 위로하여 주십니다. 그 때 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넘어서서 오히려 환난 받는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