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말씀, 전도서 4:4-16
가진 자의 슬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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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경제 연구소는 신세대 직장인을 일컬어 BRAVO 세대라고 정의했습니다. [Broad Network & Spec(넓은 인간관계와 스펙 추구), Reward-Sensitive(평가와 보상에 민감), Adaptable(새로운 것에 대한 강한 적응력), Voice(감정과 생각의 솔직한 표현), Oriented to myself(회사보다 개인생활의 중시)]
신세대 직장인들은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합니다. 요즘 대학생을 보면 자기 관리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모릅니다. 친구도 자기 관리 측면에서 사귑니다. 토익은 900점 이상, 자격증은 5개 이상, 그리고 외국 어학연수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여깁니다.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다 보니 진실한 친구가 없습니다. 진실한 친구가 없으니 정서가 메마릅니다. 정서가 메마르니 삶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의 영역은 좌 뇌가 아니고 우뇌입니다. 이성이 아니고 감성입니다.
셀리그만의 행복 공식을 보면 행복은 스펙에 있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스펙이 우리에게 주는 행복 지수는 10%에 불과합니다. 50%는 모두가 먹고 들어갑니다. 나머지 40%는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미국이 40년대에는 지금처럼 사회 기반 시설과 복지 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행복지수는 오히려 떨어져 있습니다. 40년대 행복 지수 7.5인데 지금은 7.2입니다. 행복은 스펙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요인 중에 성취감, 인간관계, 영성, 그리고 나눔이 있습니다. 그중에 인간관계는 행복의 요인 중의 요인입니다. 학교에서 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따돌림을 당하게 되고, 직장에서 관계가 불편하게 되면 이직하게 되고, 부부가 관계가 힘들어지면 별거 이혼을 하게 됩니다. 친구 관계가 깨지면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됩니다. 그래서 카네기는 그의 저서 인간 관계학에서 15%는 자기 실력, 85%는 인간관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콜롬비아 MBA에서는 95%가 인간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친구의 소중함, 친교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려울 때 함께 할 수 있는 친구, 기쁠 때 그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있을 때 행복합니다. 기쁨을 함께 나누면 그 기쁨이 배가되고, 슬픔을 함께 나누면 그 슬픔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위로가 필요할 때 위로해 줄 수 있는 그런 친구, 기쁠 때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친구, 슬플 때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친구, 신앙의 침체 속으로 빠져들 때 바로 잡아주는 그런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친교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이 없어서 슬퍼하는 사람들은 있기만 하면 모든 슬픔이 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악착같이 취하고 소유하고 얻고자 합니다. 이제 그는 목표를 정해 놓고 그것에 몰입하여 부도 얻고, 권세도 얻고, 학위도 얻고, 사랑도 얻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없어 학대 받던 시절이 가니 행복의 천사가 찾아오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4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모든 것을 소유하자 주위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기 시작합니다. 없어서 고통을 당했는데, 이제는 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합니다. 그때 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6절을 보겠습니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리라.” 한 손에 가득하여 평온한 것이 두 손에 가득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가진 자는 시기와 질투로 오는 고통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사귐이 없기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없을 때에 친했던 친구와 관계가 멀어집니다. 7,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라.” 많은 것을 가졌지만 낙을 함께 누릴 친구가 없습니다. 그 때 그는 내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유보다 더 많은 친구가 필요하다는 소중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터져 나오는 고백이 9-12절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들은 고급 저택에서 살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청와대에서 살면 행복하리라 생각도 해봅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는 절간이다”라고 고백했듯이, 절간 같은 청와대에서 사는 것보다 평범한 사람들과 서로 어울려 사는 삶, 시장과 지하철에서 비벼대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이웃끼리 부딪치며 사는 우리네의 삶이 행복한 것입니다.
이런 말이 일이 있습니다. 퇴직한 사람들에게 4대 필수 요소가 있는데 첫째는 친구입니다. 저녁을 먹고 슬립퍼를 끌고 양파 먹어 입에서 양파 냄새가 진동하고, 천국장을 끓여 먹어 옷에는 천국장 냄새로 진동한 채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소일할 일, 사명, 셋째는 건강, 넷째는 돈이라고 합니다. 적어도 친구와 삼겹살 정도는 함께 먹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중에 무엇보도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없는 삶은 고독합니다. 그러나 친구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함께 길을 가며 서로 격려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같이 눈물을 나누고, 같이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저는 친구하면 함석헌 선생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의 시”가 생각납니다.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멀리 집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는,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양보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여러분 이런 친구가 있습니까?
사무엘상 20장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의 아름다운 사랑이 나옵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인간적으로 보면 왕권을 놓고 경쟁하는 경쟁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을 처음 만난 그 순간 이후 변함없이 사랑했습니다. 다윗의 승리가 곧 자기의 승리요, 다윗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또 다윗의 시련과 고통이 자기 고통이 되어 다윗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습니다. 그의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보다 승한 기이한 사랑이었습니다.
다윗은 시련의 날 하나님과 사람을 원망하여 못쓰게 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변치 않는 사랑이 다윗을 붙들어 주었습니다. 다윗에게 위로를 주고 희망을 주며 힘을 주었습니다. 세상이 다 다윗을 버릴지라도 다윗에게 요나단이 있기 때문에 그는 행복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사랑의 꽃이 피어나게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사람 요나단에게서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죄인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해 주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 증거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나니(요15:13)”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귀한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예수님을 친구 삼아 예수님과 동행하며 거룩한 순례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다윗과 요나단과 같이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우정을 나눔으로 구속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요나단과 같이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진실한 신앙 안에서 친구를 사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윗과 요나단 같은 친구가 있는 자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말씀의 교제를 갖는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비전을 공유하여 그 비전을 위해 서로 기도해 주는 사귐은 행복한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성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진실한 친구를 만나 서로 격려하며 감싸 안고 보듬으며 살아가는 그것입니다. 교회란 가르칠 ‘敎’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사귈‘交’자로서의 의미도 있습니다. 헬라어도 교회란 “코이노니아”인데 이는 사귐이란 뜻입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현실 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녹이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13-16절은 잊혀지는 슬픔에 대한 말씀입니다. 가난한 자, 옥에 갇힌 자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 왕은 인기가 있어서 여론 조사를 하면 인기가 99%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때 그 누구도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의 슬픔, 무대에 섰을 때의 우레 같은 박수소리, 그러나 무대 뒤로 사라졌을 때 그 누구도 그를 알아주지 않는 슬픔, 저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의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16).” 해 아래 가진 자나 갖지 못한 자나 모두 헛되고 헛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주님의 친구가 되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좋은 친구 사귐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가진 자의 슬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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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경제 연구소는 신세대 직장인을 일컬어 BRAVO 세대라고 정의했습니다. [Broad Network & Spec(넓은 인간관계와 스펙 추구), Reward-Sensitive(평가와 보상에 민감), Adaptable(새로운 것에 대한 강한 적응력), Voice(감정과 생각의 솔직한 표현), Oriented to myself(회사보다 개인생활의 중시)]
신세대 직장인들은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합니다. 요즘 대학생을 보면 자기 관리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모릅니다. 친구도 자기 관리 측면에서 사귑니다. 토익은 900점 이상, 자격증은 5개 이상, 그리고 외국 어학연수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여깁니다.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다 보니 진실한 친구가 없습니다. 진실한 친구가 없으니 정서가 메마릅니다. 정서가 메마르니 삶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의 영역은 좌 뇌가 아니고 우뇌입니다. 이성이 아니고 감성입니다.
셀리그만의 행복 공식을 보면 행복은 스펙에 있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스펙이 우리에게 주는 행복 지수는 10%에 불과합니다. 50%는 모두가 먹고 들어갑니다. 나머지 40%는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미국이 40년대에는 지금처럼 사회 기반 시설과 복지 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행복지수는 오히려 떨어져 있습니다. 40년대 행복 지수 7.5인데 지금은 7.2입니다. 행복은 스펙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요인 중에 성취감, 인간관계, 영성, 그리고 나눔이 있습니다. 그중에 인간관계는 행복의 요인 중의 요인입니다. 학교에서 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따돌림을 당하게 되고, 직장에서 관계가 불편하게 되면 이직하게 되고, 부부가 관계가 힘들어지면 별거 이혼을 하게 됩니다. 친구 관계가 깨지면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됩니다. 그래서 카네기는 그의 저서 인간 관계학에서 15%는 자기 실력, 85%는 인간관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콜롬비아 MBA에서는 95%가 인간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친구의 소중함, 친교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려울 때 함께 할 수 있는 친구, 기쁠 때 그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있을 때 행복합니다. 기쁨을 함께 나누면 그 기쁨이 배가되고, 슬픔을 함께 나누면 그 슬픔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위로가 필요할 때 위로해 줄 수 있는 그런 친구, 기쁠 때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친구, 슬플 때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친구, 신앙의 침체 속으로 빠져들 때 바로 잡아주는 그런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친교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이 없어서 슬퍼하는 사람들은 있기만 하면 모든 슬픔이 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악착같이 취하고 소유하고 얻고자 합니다. 이제 그는 목표를 정해 놓고 그것에 몰입하여 부도 얻고, 권세도 얻고, 학위도 얻고, 사랑도 얻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없어 학대 받던 시절이 가니 행복의 천사가 찾아오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4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모든 것을 소유하자 주위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기 시작합니다. 없어서 고통을 당했는데, 이제는 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합니다. 그때 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6절을 보겠습니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리라.” 한 손에 가득하여 평온한 것이 두 손에 가득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가진 자는 시기와 질투로 오는 고통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사귐이 없기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없을 때에 친했던 친구와 관계가 멀어집니다. 7,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또 다시 해 아래에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라.” 많은 것을 가졌지만 낙을 함께 누릴 친구가 없습니다. 그 때 그는 내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유보다 더 많은 친구가 필요하다는 소중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터져 나오는 고백이 9-12절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들은 고급 저택에서 살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청와대에서 살면 행복하리라 생각도 해봅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는 절간이다”라고 고백했듯이, 절간 같은 청와대에서 사는 것보다 평범한 사람들과 서로 어울려 사는 삶, 시장과 지하철에서 비벼대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이웃끼리 부딪치며 사는 우리네의 삶이 행복한 것입니다.
이런 말이 일이 있습니다. 퇴직한 사람들에게 4대 필수 요소가 있는데 첫째는 친구입니다. 저녁을 먹고 슬립퍼를 끌고 양파 먹어 입에서 양파 냄새가 진동하고, 천국장을 끓여 먹어 옷에는 천국장 냄새로 진동한 채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소일할 일, 사명, 셋째는 건강, 넷째는 돈이라고 합니다. 적어도 친구와 삼겹살 정도는 함께 먹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중에 무엇보도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없는 삶은 고독합니다. 그러나 친구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함께 길을 가며 서로 격려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같이 눈물을 나누고, 같이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저는 친구하면 함석헌 선생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의 시”가 생각납니다.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멀리 집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는,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양보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여러분 이런 친구가 있습니까?
사무엘상 20장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의 아름다운 사랑이 나옵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인간적으로 보면 왕권을 놓고 경쟁하는 경쟁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을 처음 만난 그 순간 이후 변함없이 사랑했습니다. 다윗의 승리가 곧 자기의 승리요, 다윗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또 다윗의 시련과 고통이 자기 고통이 되어 다윗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습니다. 그의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보다 승한 기이한 사랑이었습니다.
다윗은 시련의 날 하나님과 사람을 원망하여 못쓰게 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변치 않는 사랑이 다윗을 붙들어 주었습니다. 다윗에게 위로를 주고 희망을 주며 힘을 주었습니다. 세상이 다 다윗을 버릴지라도 다윗에게 요나단이 있기 때문에 그는 행복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사랑의 꽃이 피어나게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사람 요나단에게서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죄인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해 주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 증거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나니(요15:13)”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귀한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예수님을 친구 삼아 예수님과 동행하며 거룩한 순례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다윗과 요나단과 같이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우정을 나눔으로 구속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요나단과 같이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진실한 신앙 안에서 친구를 사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윗과 요나단 같은 친구가 있는 자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말씀의 교제를 갖는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비전을 공유하여 그 비전을 위해 서로 기도해 주는 사귐은 행복한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성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진실한 친구를 만나 서로 격려하며 감싸 안고 보듬으며 살아가는 그것입니다. 교회란 가르칠 ‘敎’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사귈‘交’자로서의 의미도 있습니다. 헬라어도 교회란 “코이노니아”인데 이는 사귐이란 뜻입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현실 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녹이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13-16절은 잊혀지는 슬픔에 대한 말씀입니다. 가난한 자, 옥에 갇힌 자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 왕은 인기가 있어서 여론 조사를 하면 인기가 99%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때 그 누구도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의 슬픔, 무대에 섰을 때의 우레 같은 박수소리, 그러나 무대 뒤로 사라졌을 때 그 누구도 그를 알아주지 않는 슬픔, 저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의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16).” 해 아래 가진 자나 갖지 못한 자나 모두 헛되고 헛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주님의 친구가 되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좋은 친구 사귐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