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말씀, 요한복음 19:28-30
삶의 우선순위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니라(3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인간은 기쁨을 추구하는 동시에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즐겁지만 의미와 목적이 없는 삶은 공허합니다. 이런 사람 행복할리 없습니다. 그렇다고 의미와 목적이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의미와 목적은 행복의 필수 요건입니다.
현대 사회는 물질문화가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정신적 가치관에 있어서는 관심이 감소되고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가치관들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의미 없는 삶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남부러울 것이 없지만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해 허전하고 우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버나드 쇼의 묘비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이는 의미와 목적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사람이 의미와 목적 없는 삶이 계속되면 방향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우울증은 자살에 이르게 합니다. 따라서 인생은 기쁨만 좇아 살 존재가 아닙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 여하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의미와 목적에는 낮은 수준과 높은 수준의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낮은 의미와 목적을 갖게 되면 작은 고난과 역경에 쉽게 좌절합니다. 낮은 의미와 목적을 가진 사람의 가치관은 이러합니다. “나는 좋은 직장을 잡기 위해 공부 한다. 나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직장에 다닌다. 나는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산다.” 반면에 높은 의미와 목적을 갖게 되면 어떤 역경에도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1장 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의 나이는 60살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는 죽도록 주님과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위해 충성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늙은 나이에 어둠침침하고 음울하고 쾨쾨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쯤 되면 주님께 “주님, 힘듭니다. 저를 감옥에서 내 보내 주세요.” 한 마디 쯤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도리어’ 자기 자신이 감옥에 갇힘으로 복음 전파가 더 활발해지고 있음에 주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도리어’란 단어는 의외의 결과를 말합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역경이 앞에 있으면 오히려 역경을 뚫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끌려가는 인생, 쫓기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환경을 극복했습니다. 똑같은 길이라도 가는 길은 멀고, 오는 길은 가깝습니다. 가는 길은 미지의 길이고, 오는 길은 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현실 자체는 차이가 없지만 똑같은 길이라도 체감이 다릅니다.
무엇이 바울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이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0,21).”
그의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자기의 몸에서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자신이 살고 흥하고 부하고 출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죽든지 살든지 자기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 받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힘들고 괴로워하고 낙심합니까?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할 때일 것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장래는 장미 빛처럼 아름답게 피어나야 된다.” 그러나 내가 무엇이 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느냐? 내가 무엇을 위해 하느냐? 내가 무엇을 위해 공부하느냐? 내가 무엇을 위해 직장에 다니느냐? 내가 무엇을 위해 결혼하느냐? 내가 무엇을 위해 교회에 다니느냐? 나의 삶의 목적이 중요합니다. 크리스천은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고, 나를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나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고, 나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리문답 제 1 문에서 인생의 근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요,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나아가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이것이 자기의 유익보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를 분별하고 결정했습니다.
바울의 삶의 목적은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어가 아니라 ‘주님’이 주어가 되었습니다.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주님이 목적어가 되었습니다. 이 때 감옥이나 궁궐이나 초막이나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요즘 봄 학기가 되어 신입생들이 생기발랄하게 캠퍼스를 활보합니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장래문제와 취업문제에 짓눌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다닙니다. 직장인들은 석고상 같이 굳은 모습으로 출퇴근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부하고, 어쩔 수 없이 학교와 직장을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부하고, 직장에 다니는 분명한 차원 높은 목적을 갖는다면 우리의 상황은 달라집니다. 차원 높은 목적은 바로 사명, mission입니다. 사명이란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에게 넘치는 에너지와 능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삶에 흥미를 갖도록 합니다. 그 일에 열정을 쏟도록 합니다. 그 일에 몰입하고 집중하게 합니다. 그러니 삶이 지루하지 않고, 행복하고, 삶이 행복하니 공부도 잘 되고, 직장 다니는 것이 재미가 있으니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33년, 짧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최후의 한 마디가 무엇입니까? 3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니라.” 사람이 죽으면서 남기는 유언 한 마디는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결산입니다.
나폴레옹의 죽으면서 남긴 한 마디는 ‘나는 불행했다! 프랑스, 군대, 조세핀’ 이었습니다. 그는 불행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조국 프랑스와 군대와 그의 아내인 조세핀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베토벤이 남긴 한 마디는 ‘친구여 박수를, 비극은 끝났다’ 입니다. 그의 인생은 한 마디로 비극이었습니다. 미국이 낳은 마크 트웨인이 남긴 한 마디는 ‘내가 다시 한 번 인생을 산다면’ 이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헛살았습니다.
괴테는 ‘나에게 빛을’ 외치며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어두운 삶을 살았습니다. 불신자였던 볼테르는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소! 만일 6개월만 더 살게 해 준다면 내가 소유한 절반이라도 주겠소’ 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회의론자 홉스는 ‘나는 이제 어둠 속으로 떨어져 들어가려 한다’고 했습니다. 성철 스님은 ‘내가 뭇 선남선녀를 속였으니 내 죄가 수미산만큼 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신 최후의 말씀은 “다 이루었다!” 였습니다. 주님은 짧은 33 세로 끝나셨지만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주제는 메시아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입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 그리스도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범죄 한 인간을 하나님의 공의대로 심판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과 공의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눈감아 두실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을 심판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고 또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흘리심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죄의 대가를 다 지불하셨습니다(갈3:13).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셋째,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배피를 흘리심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히9:12).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의 십자가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넷째,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100% 다 갚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다 갚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율법과 행위가 개입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요일1:9).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은 그 누구도 나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다섯째,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완전한 승리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패배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십자가형은 가장 치욕스럽고 가장 잔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사랑과 믿음과 소망입니다. 십자가는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하나님의 용서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전제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짧은 생에 어떻게 이런 모든 주님의 사역을 다 이룰 수 있었습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분명한 우선순위를 두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삶의 우선순위는 그 사람의 수준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물질적인 유형입니다. 오직 먹고 사는 것에만 신경을 쓰며 살아갑니다. 둘째는 지적인 유형입니다. 이 사람은 지식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셋째는 가치 추구 유형입니다. 어떤 것이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하고 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육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먹고 살아야 합니다. 매슬로우는 첫 단계가 생리적 욕구라고 했습니다. 이 욕구가 채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을 가진 영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욕구가 채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인생이 끝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긴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12장 1절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이로 볼 때에 짧은 삶에 삶의 우선순위(priority)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 곳곳에서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몰입한 제자들에게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최선의 것은 최선의 자리에 놓아야 하고, 차선의 것은 차선의 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서 실패합니다. 최선의 자리에 놓아야 할 것을 차선의 것을 놓고, 차선의 자리에 최선을 놓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약해서 실패하는 것보다 우선순위가 잘못되어서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긴급한 일이라고 해서 다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하고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
성경학자 앤드류 보나의 생활원칙을 보면 “첫째는 예수님께 먼저 말씀 드리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둘째는 무릎을 꿇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셋째는 성경을 읽기 전에는 어떤 책도 읽지 않는다”입니다. 먼저 해야 할 것을 해야 아름다운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범인과 비범한 사람이 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습니다. 아기와 자기에게 우선순위를 두면 아기와 자기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우선순위를 두면 하나님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다 우선순위를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최고 가치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대로 살았으면 단번에 당대 최고의 인기 스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주위에는 약 1만 명이 따라다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빵 문제, 경제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힘들어도 사명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사명을 붙드셨습니다. 그 사명은 회개의 복음,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은 실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사람이 실패하는 것은 중도에서 사명을 포기하고, 중도에 방향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본래의 사명을 끝까지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을 보면 바울은 ‘오직 한 일(one thing, one point) 집중했습니다. 바울은 목적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쏟아 부었습니다. 바울은 샘물이 나오기까지 한 가지 일에 집중했습니다.
유능한 사냥꾼은 두 마리의 토끼를 좇지 않는다고 합니다. 서울대 교수 이면우 박사는 송곳이론으로 이를 정립했습니다. 한 가지 일(one point)에 몰두하고 집중하면 반드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신 목적, 사명에 집중하십시오.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십시오. 이러할 때에 우리의 삶을 결산할 그 날에 우리의 목표 그 이상의 배가의 역사로 결산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땀방울이 피 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기쁨으로 십자가를 선택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셨습니다. 이 길은 외롭고 힘이 드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이 비록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그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때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 생명의 십자가, 구속의 십자가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이 시간 기도합니다. 우리가 최고 가치에 우선순위, 최선의 자리에 최선의 것을 놓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우선순위를 두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주신 부르심, 부르심의 목적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가정 복음화, 직장 복음화, 캠퍼스 복음화, 더 나아가 세계 복음화를 위해 자신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삶의 우선순위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니라(3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인간은 기쁨을 추구하는 동시에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즐겁지만 의미와 목적이 없는 삶은 공허합니다. 이런 사람 행복할리 없습니다. 그렇다고 의미와 목적이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의미와 목적은 행복의 필수 요건입니다.
현대 사회는 물질문화가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정신적 가치관에 있어서는 관심이 감소되고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가치관들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의미 없는 삶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남부러울 것이 없지만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해 허전하고 우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버나드 쇼의 묘비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이는 의미와 목적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사람이 의미와 목적 없는 삶이 계속되면 방향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우울증은 자살에 이르게 합니다. 따라서 인생은 기쁨만 좇아 살 존재가 아닙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 여하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의미와 목적에는 낮은 수준과 높은 수준의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낮은 의미와 목적을 갖게 되면 작은 고난과 역경에 쉽게 좌절합니다. 낮은 의미와 목적을 가진 사람의 가치관은 이러합니다. “나는 좋은 직장을 잡기 위해 공부 한다. 나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직장에 다닌다. 나는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산다.” 반면에 높은 의미와 목적을 갖게 되면 어떤 역경에도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1장 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의 나이는 60살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는 죽도록 주님과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위해 충성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늙은 나이에 어둠침침하고 음울하고 쾨쾨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쯤 되면 주님께 “주님, 힘듭니다. 저를 감옥에서 내 보내 주세요.” 한 마디 쯤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도리어’ 자기 자신이 감옥에 갇힘으로 복음 전파가 더 활발해지고 있음에 주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도리어’란 단어는 의외의 결과를 말합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역경이 앞에 있으면 오히려 역경을 뚫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끌려가는 인생, 쫓기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환경을 극복했습니다. 똑같은 길이라도 가는 길은 멀고, 오는 길은 가깝습니다. 가는 길은 미지의 길이고, 오는 길은 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현실 자체는 차이가 없지만 똑같은 길이라도 체감이 다릅니다.
무엇이 바울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이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0,21).”
그의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자기의 몸에서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자신이 살고 흥하고 부하고 출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죽든지 살든지 자기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 받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힘들고 괴로워하고 낙심합니까?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할 때일 것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장래는 장미 빛처럼 아름답게 피어나야 된다.” 그러나 내가 무엇이 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느냐? 내가 무엇을 위해 하느냐? 내가 무엇을 위해 공부하느냐? 내가 무엇을 위해 직장에 다니느냐? 내가 무엇을 위해 결혼하느냐? 내가 무엇을 위해 교회에 다니느냐? 나의 삶의 목적이 중요합니다. 크리스천은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고, 나를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나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고, 나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리문답 제 1 문에서 인생의 근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요,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나아가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이것이 자기의 유익보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를 분별하고 결정했습니다.
바울의 삶의 목적은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어가 아니라 ‘주님’이 주어가 되었습니다.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주님이 목적어가 되었습니다. 이 때 감옥이나 궁궐이나 초막이나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요즘 봄 학기가 되어 신입생들이 생기발랄하게 캠퍼스를 활보합니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장래문제와 취업문제에 짓눌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다닙니다. 직장인들은 석고상 같이 굳은 모습으로 출퇴근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부하고, 어쩔 수 없이 학교와 직장을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부하고, 직장에 다니는 분명한 차원 높은 목적을 갖는다면 우리의 상황은 달라집니다. 차원 높은 목적은 바로 사명, mission입니다. 사명이란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에게 넘치는 에너지와 능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삶에 흥미를 갖도록 합니다. 그 일에 열정을 쏟도록 합니다. 그 일에 몰입하고 집중하게 합니다. 그러니 삶이 지루하지 않고, 행복하고, 삶이 행복하니 공부도 잘 되고, 직장 다니는 것이 재미가 있으니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33년, 짧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최후의 한 마디가 무엇입니까? 3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니라.” 사람이 죽으면서 남기는 유언 한 마디는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결산입니다.
나폴레옹의 죽으면서 남긴 한 마디는 ‘나는 불행했다! 프랑스, 군대, 조세핀’ 이었습니다. 그는 불행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조국 프랑스와 군대와 그의 아내인 조세핀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베토벤이 남긴 한 마디는 ‘친구여 박수를, 비극은 끝났다’ 입니다. 그의 인생은 한 마디로 비극이었습니다. 미국이 낳은 마크 트웨인이 남긴 한 마디는 ‘내가 다시 한 번 인생을 산다면’ 이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헛살았습니다.
괴테는 ‘나에게 빛을’ 외치며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어두운 삶을 살았습니다. 불신자였던 볼테르는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소! 만일 6개월만 더 살게 해 준다면 내가 소유한 절반이라도 주겠소’ 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회의론자 홉스는 ‘나는 이제 어둠 속으로 떨어져 들어가려 한다’고 했습니다. 성철 스님은 ‘내가 뭇 선남선녀를 속였으니 내 죄가 수미산만큼 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신 최후의 말씀은 “다 이루었다!” 였습니다. 주님은 짧은 33 세로 끝나셨지만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주제는 메시아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입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 그리스도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범죄 한 인간을 하나님의 공의대로 심판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과 공의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눈감아 두실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을 심판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고 또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흘리심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죄의 대가를 다 지불하셨습니다(갈3:13).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셋째,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배피를 흘리심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히9:12).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의 십자가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넷째,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100% 다 갚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다 갚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율법과 행위가 개입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요일1:9).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은 그 누구도 나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다섯째,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완전한 승리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패배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십자가형은 가장 치욕스럽고 가장 잔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사랑과 믿음과 소망입니다. 십자가는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하나님의 용서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전제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짧은 생에 어떻게 이런 모든 주님의 사역을 다 이룰 수 있었습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분명한 우선순위를 두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삶의 우선순위는 그 사람의 수준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물질적인 유형입니다. 오직 먹고 사는 것에만 신경을 쓰며 살아갑니다. 둘째는 지적인 유형입니다. 이 사람은 지식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셋째는 가치 추구 유형입니다. 어떤 것이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하고 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육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먹고 살아야 합니다. 매슬로우는 첫 단계가 생리적 욕구라고 했습니다. 이 욕구가 채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을 가진 영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욕구가 채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인생이 끝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긴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12장 1절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이로 볼 때에 짧은 삶에 삶의 우선순위(priority)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 곳곳에서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몰입한 제자들에게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최선의 것은 최선의 자리에 놓아야 하고, 차선의 것은 차선의 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서 실패합니다. 최선의 자리에 놓아야 할 것을 차선의 것을 놓고, 차선의 자리에 최선을 놓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약해서 실패하는 것보다 우선순위가 잘못되어서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긴급한 일이라고 해서 다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하고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
성경학자 앤드류 보나의 생활원칙을 보면 “첫째는 예수님께 먼저 말씀 드리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둘째는 무릎을 꿇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셋째는 성경을 읽기 전에는 어떤 책도 읽지 않는다”입니다. 먼저 해야 할 것을 해야 아름다운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범인과 비범한 사람이 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습니다. 아기와 자기에게 우선순위를 두면 아기와 자기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우선순위를 두면 하나님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다 우선순위를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최고 가치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대로 살았으면 단번에 당대 최고의 인기 스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주위에는 약 1만 명이 따라다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빵 문제, 경제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힘들어도 사명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사명을 붙드셨습니다. 그 사명은 회개의 복음,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은 실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사람이 실패하는 것은 중도에서 사명을 포기하고, 중도에 방향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본래의 사명을 끝까지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을 보면 바울은 ‘오직 한 일(one thing, one point) 집중했습니다. 바울은 목적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쏟아 부었습니다. 바울은 샘물이 나오기까지 한 가지 일에 집중했습니다.
유능한 사냥꾼은 두 마리의 토끼를 좇지 않는다고 합니다. 서울대 교수 이면우 박사는 송곳이론으로 이를 정립했습니다. 한 가지 일(one point)에 몰두하고 집중하면 반드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신 목적, 사명에 집중하십시오.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십시오. 이러할 때에 우리의 삶을 결산할 그 날에 우리의 목표 그 이상의 배가의 역사로 결산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땀방울이 피 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기쁨으로 십자가를 선택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셨습니다. 이 길은 외롭고 힘이 드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이 비록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그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때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 생명의 십자가, 구속의 십자가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이 시간 기도합니다. 우리가 최고 가치에 우선순위, 최선의 자리에 최선의 것을 놓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우선순위를 두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주신 부르심, 부르심의 목적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가정 복음화, 직장 복음화, 캠퍼스 복음화, 더 나아가 세계 복음화를 위해 자신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