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사순절 제 2 강, 고전15:4-11, 요절:15:4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신 예수님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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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스가 제작하고 감독한 ‘젊은이의 양지’란 영화가 있습니다. 원작인 ‘아메리카의 비극’을 각색한 영화입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시골 청년 ‘조지 이스트먼(크리프트)’은 벧엘 선교단체를 운영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조지가 벧엘 선교회에서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시로 나가 성공할 것을 꿈꾸어 오다가 숙부의 수영복 제조공장에 일자리를 얻고, 상류사회에 출입하게 됩니다. 거기서 조지는 ‘안젤라(테일러)’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한편, 그는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아리스’라는 여공과 친해져 육체적 관계까지 맺습니다. 그러나 조지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안젤라’였습니다. 그가 사랑에 도취되어 있을 무렵, ‘아리스’는 조지에게 3개월의 임신을 알립니다. ‘조지’는 고민 끝에 아리스를 죽일 것을 결심하고 ‘아리스’를 호수로 불러냅니다. 배 위에서 말다툼을 하다가 배가 뒤집혀 ‘아리스’는 익사합니다. ‘조지’에게는 살인범의 형이 선고됩니다.

사실과 다른 판정이 나지만 ‘조지’의 어머니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요한복음 14장과 11장이 자막으로 나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조지’는 명예와 권력과 사랑을 쫓아 살아왔지만 그에게 남는 것은 어느 하나 없었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안젤라’도 그 곁을 떠났습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 고정되어 있는 것,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구의 힘으로도 죽음을 변경하거나 연장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인류는 다 죽었습니다. 제왕도 죽었고, 영웅호걸도 죽었으며, 절세의 미인들도 다 죽었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아침 이슬을 받아먹었던 한 무제도 죽었고, 장을 비우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며 매일 강력한 설사약을 먹고 설사하던 루이 14세도 죽었습니다. 철학자 헤겔의 말대로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났고, 죽기 위해 살고 있으며, 죽음의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달 동안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일본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한순간에 쓰나미에 휩쓸려 죽었습니다. 날마다 죽음의 소식, 그리고 일본에서의 원전폭발로 인한 죽음의 두려움이 한반도에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죽음은 어디서 왔습니까? 성경은 죽음이 죄에서 왔다고 선포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a).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심판 후에는 제 2의 심판인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계21:8). 악한 일을 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타납니다(요5:29b). 죄는 변하지 않는 죽음의 법칙에다 사람들을 묶어놓았습니다. 죽음에 묶인 인간은 예외 없이 죽음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죽음은 인류의 최대 원수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망권세를 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요11:25.26).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어 나를 괴롭히는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역동적인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성경대로 살아나신 예수님(4)

세상은 불평등합니다.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에도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법아래 평등하다고 하지만 법이 모두에게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돈을 많이 주고 유명한 변호사를 사면 죽을 자도 삽니다. 그러나 세상에 인간을 평등하게 하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왕이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10대 독자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새신랑, 새 신부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라고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 죽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죽음을 경험했다면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죽음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죽음과 결부되면 기쁘다가도 슬퍼집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다스렸던 알렉산더 대제도 자기의 죽음을 생각하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의 절대 권력만큼이나 비례해서 그에게 죽음은 슬픈 사건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이 죽음이 지배하지 못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20세기 들어와서 과학의 발달로 인류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1,2차 대전을 겪으며 사람들은 깊은 좌절과 절망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now and here’, ‘이 순간이 중요하다’, ‘이 순간 행복이 중요하다’, ‘내가 존재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실존주의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와서 느낌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던이즘이 일어났습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의 명제는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입니다.

이런 사조가 교회에 들어와 과거의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활, 지옥, 하나님 나라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 무엇인가 강하게 느끼는 것만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다보니 은사주의가 판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혼자 느끼고 혼자 즐깁니다. 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가 자기 세계에 갇히는 자폐증 환자의 증가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그런 껍질 속에 갇혀있는 사람을 꺼내어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바로 보게 해 줍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 가운데 성경대로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신구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떠나서 부활을 말할 수 없고, 믿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3-35절을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처절한 모습을 목격하고 시골로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동행하시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때 마음이 뜨거워져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32)?” 우리가 산에 가서 묵상하고, 수도원에 가서 수도를 해도 부활을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말씀을 통해서만이 이해되고, 믿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주요, 그리스도이십니다(롬1:4).

로마서 1장 4절을 보겠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나의 죄가 용서함 받았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죽음으로 끝났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미완성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죄가 다 사함 받았다는 확실한 보증이 되는 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주’란 하나님, 통치자를 말합니다. 과거에는 죄가 우리를 다스렸습니다. 죄가 주인이 되어 우리를 이리저리로 끌고 다녔습니다. 죄가 슬픔과 절망을 심었습니다. 죄가 어둡게 살도록 했습니다. 죄가 운명적인 삶을 살게 했습니다. 죄가 나는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를 다스리고 지배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절망을 박차고 일어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어두움과 운명적인 생각, 부정적인 생각에서 밝고 희망이 넘치는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란 구원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사 죄와 사망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고전15:57).

둘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15:20).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었고, 주님이 부활하실 때 나도 함께 부활했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죄가 나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항상 살아있는 매개체를 통해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다시는 죄가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부활할 때 나 또한 부활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죄의 대가는 사망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의 대가로 모두 죽어야 했고, 언젠가 모두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첫 열매는 매우 중요합니다. 첫 열매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음 열매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첫 열매가 사과이면 다음에도 반드시 사과가 열립니다. 첫 열매가 감이면 그 다음의 열매 또한 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나 또한 부활의 열매로 맺게 됩니다. 예수님 부활은 나의 부활입니다. 다 같이 따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해같이 빛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광스럽고 찬란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둠과 절망을 조금도 없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슬픔과 근심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요 소망이요 빛입니다.

우리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순간 소망과 생명과 빛과 생명이 찬란하게 됩니다. 우리는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고전15:42-44).

셋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십니다(벧전1:3,4)

인간은 소망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뭔가의 소망을 붙들고 삽니다. 70년대 한국의 소망은 GDP 2만 달러였습니다. GDP 2만 달러만 넘으면 행복의 여신이 찾아오리라 했습니다. 지금 한국은 GDP 2만 달러, 주택보급률 110%, 대학 진학률이 80%가 넘어섰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이 행복한 나라입니까? OECD 국가 중에 행복지수가 26위입니다. 긍정지수는 27%밖에 되지 않습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허쉬의 ‘성장의 사회적 한계 이론’에서 성장 초반에는 만족감이 있지만 성장이 진전될수록 불만이 증대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소망 없는 절망적인 존재로 태어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 보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 1-3절을 보면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 3,4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산 소망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작게는 내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요, 크게는 장차 우리가 가야할 본향입니다. 내 마음에 잔잔히 흐르는 평화와 화평, 이 기쁨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값지고 보배로운 것입니다. 산 소망은 재림하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천사장의 호위를 받으며 만유의 주요, 영광과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십니다. 이때 불신자들은 영원한 심판을 받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갑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상급이 되사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이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 소망은 우리의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이 소망은 우리를 순수하게 하고, 진실 되게 하고, 확신에 넘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둘째, 부활의 증인들(5-11)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더 확실하게 증명하기 위해 부활의 증인들을 소개합니다. 부활은 의학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경험입니다. “내가 봤다!”,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은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는 계집종 앞에서도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할 만큼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원수들 앞에서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님,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 두 제자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떡과 생선을 잡수셨습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동시에 보이셨습니다. 그 당시, 그 중에 250명 이상의 증인들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동생 야고보에게도 보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까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세상에서 출세하도록 종용했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기도했던지 그의 무릎은 낙타 무릎같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울을 변화시키셨습니다. 부활이 아니고서는 바울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성도를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을 섰습니다. 그는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해 성도들을 죽이기 위해 원정을 떠났습니다. 그가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찬란한 빛에 그는 그만 꼬꾸라졌습니다. 이 때 바울에게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9:4,5).”

예수님은 교회를 박해하고 주님을 박해하던 바울을 불러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은혜가 너무나 놀라워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8).” 전에는 바울 자신이 최고인 줄로 알았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이 얼마나 덜 된 자인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9-11).”

요즈음 두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가 오면 빗물 속에 방사능이 섞여 있지 않는가, 황사가 오면 방사능 물질이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두렵습니다. 그래서 요즘 방독면이 없어서 못 판다고 합니다. 신입생들은 대학 생활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재학생들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조금만 아파도 혹시나 하는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심리적인 현상으로 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죽음이 가져다주는 실체입니다. 죽음은 두려움이란 무기로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두려움에 더 이상 시달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박살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두려움과 절망을 박살내셨습니다. 이제 두려움과 슬픔과 절망과 죽음이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이 변호사 시절에 주 의회 의원에 출마했다가 낙방하고, 하원의원에 출마했다가 낙방했습니다. 이러기를 몇 차례 거듭하자, 그는 좌절과 절망에 빠졌습습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은 그를 염려했습니다. “저러다 링컨이 자살하는 건 아니야?” 친구들은 링컨이 목숨이라도 끊을까봐 자기들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링컨은 친구들의 염려대로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다. 어떠한 개선이나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있다”라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이런 링컨이 어떻게 재기하여 미국의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습니까? 그는 말하기를 “나는 성경을 읽고 그 속에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에게 용기가 되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공화당에 입당하였고,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절망에서 희망을 보여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비겁한 자에게 용기를 부어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운명적인 자가 필연적인 삶을 살도록 하시고, 인생역전이 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전화위복이 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부정적인 시각에서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남을 보는 시각을 바꾸어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적이는 행동을 역동적인 삶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좁은 시야를 넓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캠퍼스를 품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민족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더 나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방을 향하게 하시고, 열방을 품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위대한 일을 시도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위대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역사를 창조해나가는 역사의 주역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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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말씀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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