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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4) 고린도전서 15:35-49, 요절, 15:45)
부활의 영광
“기록 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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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자신과 별개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임을 길게 설명했습니다. 이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 제가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런데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그래요, 질문해 보세요.’ 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바울 사도님, 첫째는 죽은 몸이 어떻게 다시 살고, 둘째는 어떤 몸으로 다시 살게 되며,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초대 교회에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가 몸의 부활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육체와 영의 부활에 참예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어서 땅에 묻힌 사람의 육체는 어떻게 부활하게 되느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부활을 힌두교나 불교의 환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혹 있을 수 있습니다. 환생의 이론 중에 축귀환생이 있습니다. ‘축귀환생’이란 사람이 가축이나 짐승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위에 있는 짐승 중에는 전생에 우리들의 가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을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생의 이론 중에 전생에 죄로 인해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징그럽게 싸우는 부부가 있다고 합시다. 그 부부는 전생에 한 마을에 원수지간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연을 맺어 원수처럼 싸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생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선행을 베풀면 언제가 좋은 모습으로 다음 세대에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종교든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을 말합니다. 만일 사후의 새로운 삶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고 철학이요 도덕이요 사상입니다. 제가 지난 주 설교에서 철학은 오늘을, 사상은 내일의 삶을 말하고, 종교는 미래의 삶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불교는 환생과 윤회를 믿고, 헬라 사람들은 영혼불멸을 믿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부활은 힌두교나 불교의 환생이나 윤회와 다릅니다. 헬라의 영혼 불멸설과도 다릅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여 영광의 부활로 나타납니다.
본문은 우리 몸이 어떻게 부활하고, 어떤 모습으로 다시 사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을 통해 부활의 비밀을 깊이 영접하여 썩어질 육체를 위해 살지 않고 장차 부활의 몸을 위해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사는가(35-41)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힙니다. 그리고 육신이 썩게 됩니다. 나중에는 뼈와 해골만 남습니다. 또 최근에는 화장이 유행합니다. 국토는 좁고, 죽는 사람들은 계속 생겨나기 때문에 그 대안이 화장입니다. 사람이 화장을 하면 한 줌의 유골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은 자들이 부활할 수 있는가? 의문이 갑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부활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바울은 이런 그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첫째는, 바울은 씨앗의 비유를 듭니다.
36절을 보겠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바울은 어리석다고 책망합니다. 바울의 책망은 부활을 믿지 못함에 대한 책망이 아닙니다. 바울의 책망은 지금 우리 육체가 완성된 몸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씨, 종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우리의 몸은 완성된 몸이 아닙니다. 우리 몸이 완성된 몸이라면 왜 죽습니까? 우리의 몸이 완성된 몸이라면 왜 아픕니까? 왜 나이가 들면 주름살이 생기고 허리가 굽어집니까? 우리 몸은 완전한 몸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은 연약하고 불안전합니다.
우리는 씨앗에 불과합니다. 씨앗은 반드시 죽어야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씨는 땅에 떨어져 묻히고 죽어야 살아납니다. 99% 죽어서도 안 되고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껍질이 다 벗겨지고 완전히 분해되어야 살아납니다. 다시 말하여 죽어야 생명이 탄생됩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요 원리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우리 육신이 죽고 썩어야 됩니다. 사람이 부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씨앗에 불과한 몸을 완전한 몸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몸은 씨에 불과합니다. 종자에 불과합니다. 우리 몸은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는 씨앗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썩어 분해되고 없어질 씨앗이 자신의 진 모습인 줄로 알고 살아갑니다. 썩어질 씨앗을 위해 발버둥 칩니다. 썩어져 없어질 씨앗에 목숨을 걸고,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썩어질 씨를 가꾸고 자랑합니다. 이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따라서 썩어질 씨앗에 목숨을 걸지 마십시오. 썩어질 씨앗에 물질과 시간을 과도하게 투자하지 마십시오. 썩어질 외모와 외적 것들에 마음 뺏기지 마십시오. 장차 부활의 영광으로 나타날 부활에 목숨을 거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을 투자하십시오.
둘째는, 바울은 씨를 뿌릴 때의 비유를 듭니다.
우리가 씨를 뿌릴 때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알맹이를 뿌립니다. 우리가 알맹이를 뿌리면 각기 형체로 나타납니다. 37,38절을 보겠습니다. “또 내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우리가 해바라기 씨를 뿌리면 그 씨와는 전혀 다른, 반 고흐가 즐겨 그렸던 강렬한 생명력을 가진 아름다운 해바라기로 태어납니다. 반 고흐가 그렸던 그 강렬한 해바라기를 심은 것이 아닙니다. 해바라기 씨를 심으니 그런 아름다운 해바라기가 된 것입니다. 토마토 씨를 심으니 토마토가 열리는 토마토가 됩니다. 해바라기 씨는 해바라기로 나타나고, 토마토 씨는 토마토로 나타나지 나팔꽃이나 백일홍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개성 자체가 바꿔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몸도 마찬 가지입니다.
나란 존재는 부활한 후에도 ‘나’이지 결코 다른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것으로 환생하지 않습니다. 동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물고기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결코 다른 어떤 존재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나는 나로 태어납니다.
셋째는, 바울은 육체의 여러 종류가 있음을 비유로 듭니다.
우리가 자연계를 보더라도 같은 몸이 아닌 것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몸은 각기 완전히 다른 구조와 다른 체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9절을 보겠습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 육체라.” 사람의 육체, 짐승의 육체, 새의 육체, 물고기 육체가 각기 다릅니다.
짐승은 땅에서 다닐 수 있도록 네 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축 중에는 두 발로 다니는 동물도 있습니다. 그리고 온 몸이 털로 덮여 있습니다. 새는 공중에 잘 날 수 있도록 날개와 가벼운 깃털로 덮여 있습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 수 있도록 지느러미와 아가미가 있습니다. 곤충은 머리 가슴 배 세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직립, 머리를 위로 하고 걸어 다니도록 되어 있고, 두 팔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유추를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새로운 제 4의 몸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중에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했습니다. 어느 곳에 일곱 형제가 있는데 맏이가 어떤 여자와 결혼했는데 아이를 낳지 못하고 맏이가 죽었습니다. 유대 법에 따라 여자는 둘째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없이 둘째가 또 죽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곱 동생에 이르기까지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부활 후에 그 여자는 누구의 남편이 되느냐 입니다. 그들은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지만 부활의 모순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한다면 지금과 똑같은 몸으로 부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아기는 아기의 모습으로, 할머니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부활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 29,30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능력으로 완전히 새로운 몸을 주십니다. 그것은 지금과 같은 전혀 다른 몸입니다. 지금 보다 말할 수 없는 새로운 영광의 모습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넷째는, 바울은 각기 영광이 다르다는 비유를 듭니다.
부활 시에 영광이 각기 다릅니다. 40,41절을 보겠습니다. “하늘에 속한 육체도 있고, 땅에 속한 육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또 별 중의 별들도 영광이 다 다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부활의 영광도 각기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부활했는데 해같이 빛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달빛처럼 희미한 영광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에도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영광 면에서 차별이 있습니다. 그러면 부활 시에도 비교가 되어 문제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시에는 각기 사람들이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르다는 것을 불평하지 않는 것처럼, 영광의 차이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만족해하고, 그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가장 큰 영광으로 나타날까요? 그것은 예수님께 가까운 순서일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다른 영혼을 위하여 많은 것을 버리고,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이 가장 영광스럽게 나타납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을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했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은 해같이 빛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리 희미한 영광으로 부활한다 할지라도 모두가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좇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지 않은 사람은 거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에 참예한 사람들은 모두가 무엇인가 주님을 위해 버린 사람들입니다. 가장 많은 것을 버린 사람은 가장 큰 영광으로 나타납니다. 그 한번 입은 영광은 영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가장 많이 헌신해야 됩니다.
둘째, 우리 몸은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는가(42-44)
첫째는, 썩지 아니할 몸으로 부활합니다.
42절을 보겠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고 썩어지고 쇠해집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좀 덜 변하고, 좀 덜 썩는 것을 귀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썩거나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썩을 몸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활의 몸은 이러한 신비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늙지 않고 병들지 않습니다. 우리 몸은 고통과 아픔이 없습니다. 과학이나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둘째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43a절을 보겠습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지음 바 된 인간의 형체를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저는 온유를 보면서 눈썹과 속눈썹, 눈, 코, 귀, 입, 두 손과 두 다리, 그리고 신체의 각 조직과 기능을 보면서 그 신비함에 놀랐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139:13,14).”
흙으로 빚어진 존재도 이럴진대 우리가 장차 변화될 부활의 몸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몸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신비스럽고 영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첫 열매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몸으로 영화롭게 되는 순간이 우리에게 가장 행복합니다.
셋째는, 강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43b절을 보겠습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인간의 몸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처럼 연약합니다. 인간은 몸속에 숨어있는 작은 질병 하나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능력 면에서도 연약합니다. 그러나 장차 부활하게 될 몸은 강합니다. 어떤 질병도 넘보지 못합니다.
넷째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44절을 보겠습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우리에게 두 종류의 몸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의 몸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몸입니다. 이 몸은 여러 차가 있습니다. 현빈 처럼 잘 생긴 남자가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김태희 같이 예쁜 여자가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재능 면에서도 그러합니다. 각기 차가 있습니다. 이 몸은 아담 안에 있는 몸입니다. 몸은 죄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원치 않게 죄를 짓고, 끊임없이 죄의 소욕에 시달립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이러한 육신의 몸이 어떻게 변화됩니까?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였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때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원하는 곳에 얼마든지 갈 수 있습니다. 신령한 몸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신령한 몸은 예수님처럼 구름을 타고 승천할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 몸이 어떻게 이같이 될 수 있는가(45-49)
이는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45절을 보겠습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지금 우리 몸은 최초의 사람 아담의 몸입니다. 지금 몸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령을 불어넣은 몸입니다. 생령을 불어놓은 몸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 몸은 스스로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살려주시는 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을 살려주는 영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은 누구도 스스로 살아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살려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로 죽은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이기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살려주시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마귀와 죄는 죽인 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살리는 영(a life giving spirit)입니다.
처음에 인간은 육있는 존재로 태어났지만 그 다음에 신령한 자가 됩니다(46절). 첫 사람은 땅에서 났기 때문에 흙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둘째 사람 예수님은 하늘에서 나셨습니다(47절). 첫 사람 아담은 흙에서 났고, 우리도 그 후손으로 땅에서 났습니다. 우리는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약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몸입니다. 우리는 흙에서 나서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려주는 영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됩니다(49). 이 형상은 하늘에 속한 자 예수그리스의 완전한 형상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신령한 형상을 덧입고 영원토록 주와 함께 살게 됩니다. 그때는 모든 불완전한 것은 다 사라지고, 또 부분적으로 알던 것도 사라지고,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온전히 주를 알게 됩니다. 부활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럽습니다. 우리는 이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장차 나타날 새로운 몸으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겠습니까? 이 땅에 속한 몸에 지나친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다. 썩어질 씨에 투자하지 않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썩어질 육체에 시간과 물질을 투자할 때 잠시는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지만 쓸 데 없는 투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의 죄와 쾌락을 즐기고, 썩어질 씨에 투자하게 되면 하나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광을 쫓지 말고, 앞으로 영광의 몸으로 부활을 사모하며 아름답고 지혜롭고 아름답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영광
“기록 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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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자신과 별개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임을 길게 설명했습니다. 이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 제가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런데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그래요, 질문해 보세요.’ 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바울 사도님, 첫째는 죽은 몸이 어떻게 다시 살고, 둘째는 어떤 몸으로 다시 살게 되며,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초대 교회에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가 몸의 부활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육체와 영의 부활에 참예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어서 땅에 묻힌 사람의 육체는 어떻게 부활하게 되느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부활을 힌두교나 불교의 환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혹 있을 수 있습니다. 환생의 이론 중에 축귀환생이 있습니다. ‘축귀환생’이란 사람이 가축이나 짐승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위에 있는 짐승 중에는 전생에 우리들의 가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을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생의 이론 중에 전생에 죄로 인해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징그럽게 싸우는 부부가 있다고 합시다. 그 부부는 전생에 한 마을에 원수지간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연을 맺어 원수처럼 싸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생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선행을 베풀면 언제가 좋은 모습으로 다음 세대에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종교든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을 말합니다. 만일 사후의 새로운 삶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고 철학이요 도덕이요 사상입니다. 제가 지난 주 설교에서 철학은 오늘을, 사상은 내일의 삶을 말하고, 종교는 미래의 삶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불교는 환생과 윤회를 믿고, 헬라 사람들은 영혼불멸을 믿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부활은 힌두교나 불교의 환생이나 윤회와 다릅니다. 헬라의 영혼 불멸설과도 다릅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여 영광의 부활로 나타납니다.
본문은 우리 몸이 어떻게 부활하고, 어떤 모습으로 다시 사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을 통해 부활의 비밀을 깊이 영접하여 썩어질 육체를 위해 살지 않고 장차 부활의 몸을 위해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사는가(35-41)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힙니다. 그리고 육신이 썩게 됩니다. 나중에는 뼈와 해골만 남습니다. 또 최근에는 화장이 유행합니다. 국토는 좁고, 죽는 사람들은 계속 생겨나기 때문에 그 대안이 화장입니다. 사람이 화장을 하면 한 줌의 유골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은 자들이 부활할 수 있는가? 의문이 갑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부활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바울은 이런 그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첫째는, 바울은 씨앗의 비유를 듭니다.
36절을 보겠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바울은 어리석다고 책망합니다. 바울의 책망은 부활을 믿지 못함에 대한 책망이 아닙니다. 바울의 책망은 지금 우리 육체가 완성된 몸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씨, 종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우리의 몸은 완성된 몸이 아닙니다. 우리 몸이 완성된 몸이라면 왜 죽습니까? 우리의 몸이 완성된 몸이라면 왜 아픕니까? 왜 나이가 들면 주름살이 생기고 허리가 굽어집니까? 우리 몸은 완전한 몸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은 연약하고 불안전합니다.
우리는 씨앗에 불과합니다. 씨앗은 반드시 죽어야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씨는 땅에 떨어져 묻히고 죽어야 살아납니다. 99% 죽어서도 안 되고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껍질이 다 벗겨지고 완전히 분해되어야 살아납니다. 다시 말하여 죽어야 생명이 탄생됩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요 원리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우리 육신이 죽고 썩어야 됩니다. 사람이 부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씨앗에 불과한 몸을 완전한 몸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몸은 씨에 불과합니다. 종자에 불과합니다. 우리 몸은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는 씨앗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썩어 분해되고 없어질 씨앗이 자신의 진 모습인 줄로 알고 살아갑니다. 썩어질 씨앗을 위해 발버둥 칩니다. 썩어져 없어질 씨앗에 목숨을 걸고,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썩어질 씨를 가꾸고 자랑합니다. 이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따라서 썩어질 씨앗에 목숨을 걸지 마십시오. 썩어질 씨앗에 물질과 시간을 과도하게 투자하지 마십시오. 썩어질 외모와 외적 것들에 마음 뺏기지 마십시오. 장차 부활의 영광으로 나타날 부활에 목숨을 거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을 투자하십시오.
둘째는, 바울은 씨를 뿌릴 때의 비유를 듭니다.
우리가 씨를 뿌릴 때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알맹이를 뿌립니다. 우리가 알맹이를 뿌리면 각기 형체로 나타납니다. 37,38절을 보겠습니다. “또 내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우리가 해바라기 씨를 뿌리면 그 씨와는 전혀 다른, 반 고흐가 즐겨 그렸던 강렬한 생명력을 가진 아름다운 해바라기로 태어납니다. 반 고흐가 그렸던 그 강렬한 해바라기를 심은 것이 아닙니다. 해바라기 씨를 심으니 그런 아름다운 해바라기가 된 것입니다. 토마토 씨를 심으니 토마토가 열리는 토마토가 됩니다. 해바라기 씨는 해바라기로 나타나고, 토마토 씨는 토마토로 나타나지 나팔꽃이나 백일홍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개성 자체가 바꿔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몸도 마찬 가지입니다.
나란 존재는 부활한 후에도 ‘나’이지 결코 다른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것으로 환생하지 않습니다. 동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물고기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결코 다른 어떤 존재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나는 나로 태어납니다.
셋째는, 바울은 육체의 여러 종류가 있음을 비유로 듭니다.
우리가 자연계를 보더라도 같은 몸이 아닌 것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몸은 각기 완전히 다른 구조와 다른 체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9절을 보겠습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 육체라.” 사람의 육체, 짐승의 육체, 새의 육체, 물고기 육체가 각기 다릅니다.
짐승은 땅에서 다닐 수 있도록 네 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축 중에는 두 발로 다니는 동물도 있습니다. 그리고 온 몸이 털로 덮여 있습니다. 새는 공중에 잘 날 수 있도록 날개와 가벼운 깃털로 덮여 있습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 수 있도록 지느러미와 아가미가 있습니다. 곤충은 머리 가슴 배 세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직립, 머리를 위로 하고 걸어 다니도록 되어 있고, 두 팔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유추를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새로운 제 4의 몸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중에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했습니다. 어느 곳에 일곱 형제가 있는데 맏이가 어떤 여자와 결혼했는데 아이를 낳지 못하고 맏이가 죽었습니다. 유대 법에 따라 여자는 둘째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없이 둘째가 또 죽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곱 동생에 이르기까지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부활 후에 그 여자는 누구의 남편이 되느냐 입니다. 그들은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지만 부활의 모순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한다면 지금과 똑같은 몸으로 부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아기는 아기의 모습으로, 할머니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부활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 29,30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능력으로 완전히 새로운 몸을 주십니다. 그것은 지금과 같은 전혀 다른 몸입니다. 지금 보다 말할 수 없는 새로운 영광의 모습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넷째는, 바울은 각기 영광이 다르다는 비유를 듭니다.
부활 시에 영광이 각기 다릅니다. 40,41절을 보겠습니다. “하늘에 속한 육체도 있고, 땅에 속한 육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또 별 중의 별들도 영광이 다 다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부활의 영광도 각기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부활했는데 해같이 빛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달빛처럼 희미한 영광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에도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영광 면에서 차별이 있습니다. 그러면 부활 시에도 비교가 되어 문제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시에는 각기 사람들이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르다는 것을 불평하지 않는 것처럼, 영광의 차이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만족해하고, 그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가장 큰 영광으로 나타날까요? 그것은 예수님께 가까운 순서일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다른 영혼을 위하여 많은 것을 버리고,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이 가장 영광스럽게 나타납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을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했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은 해같이 빛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리 희미한 영광으로 부활한다 할지라도 모두가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좇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지 않은 사람은 거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에 참예한 사람들은 모두가 무엇인가 주님을 위해 버린 사람들입니다. 가장 많은 것을 버린 사람은 가장 큰 영광으로 나타납니다. 그 한번 입은 영광은 영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가장 많이 헌신해야 됩니다.
둘째, 우리 몸은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는가(42-44)
첫째는, 썩지 아니할 몸으로 부활합니다.
42절을 보겠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고 썩어지고 쇠해집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좀 덜 변하고, 좀 덜 썩는 것을 귀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썩거나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썩을 몸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활의 몸은 이러한 신비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늙지 않고 병들지 않습니다. 우리 몸은 고통과 아픔이 없습니다. 과학이나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둘째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43a절을 보겠습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지음 바 된 인간의 형체를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저는 온유를 보면서 눈썹과 속눈썹, 눈, 코, 귀, 입, 두 손과 두 다리, 그리고 신체의 각 조직과 기능을 보면서 그 신비함에 놀랐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139:13,14).”
흙으로 빚어진 존재도 이럴진대 우리가 장차 변화될 부활의 몸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몸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신비스럽고 영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첫 열매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몸으로 영화롭게 되는 순간이 우리에게 가장 행복합니다.
셋째는, 강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43b절을 보겠습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인간의 몸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처럼 연약합니다. 인간은 몸속에 숨어있는 작은 질병 하나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능력 면에서도 연약합니다. 그러나 장차 부활하게 될 몸은 강합니다. 어떤 질병도 넘보지 못합니다.
넷째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44절을 보겠습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우리에게 두 종류의 몸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의 몸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몸입니다. 이 몸은 여러 차가 있습니다. 현빈 처럼 잘 생긴 남자가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김태희 같이 예쁜 여자가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재능 면에서도 그러합니다. 각기 차가 있습니다. 이 몸은 아담 안에 있는 몸입니다. 몸은 죄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원치 않게 죄를 짓고, 끊임없이 죄의 소욕에 시달립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이러한 육신의 몸이 어떻게 변화됩니까?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였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때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원하는 곳에 얼마든지 갈 수 있습니다. 신령한 몸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신령한 몸은 예수님처럼 구름을 타고 승천할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 몸이 어떻게 이같이 될 수 있는가(45-49)
이는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45절을 보겠습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지금 우리 몸은 최초의 사람 아담의 몸입니다. 지금 몸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령을 불어넣은 몸입니다. 생령을 불어놓은 몸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 몸은 스스로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살려주시는 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을 살려주는 영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은 누구도 스스로 살아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살려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로 죽은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이기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살려주시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마귀와 죄는 죽인 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살리는 영(a life giving spirit)입니다.
처음에 인간은 육있는 존재로 태어났지만 그 다음에 신령한 자가 됩니다(46절). 첫 사람은 땅에서 났기 때문에 흙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둘째 사람 예수님은 하늘에서 나셨습니다(47절). 첫 사람 아담은 흙에서 났고, 우리도 그 후손으로 땅에서 났습니다. 우리는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약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몸입니다. 우리는 흙에서 나서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려주는 영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됩니다(49). 이 형상은 하늘에 속한 자 예수그리스의 완전한 형상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신령한 형상을 덧입고 영원토록 주와 함께 살게 됩니다. 그때는 모든 불완전한 것은 다 사라지고, 또 부분적으로 알던 것도 사라지고,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온전히 주를 알게 됩니다. 부활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럽습니다. 우리는 이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장차 나타날 새로운 몸으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겠습니까? 이 땅에 속한 몸에 지나친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다. 썩어질 씨에 투자하지 않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썩어질 육체에 시간과 물질을 투자할 때 잠시는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지만 쓸 데 없는 투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의 죄와 쾌락을 즐기고, 썩어질 씨에 투자하게 되면 하나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광을 쫓지 말고, 앞으로 영광의 몸으로 부활을 사모하며 아름답고 지혜롭고 아름답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