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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가정의 달(창세기 2:18-25, 2:24)
가정의 기본 원칙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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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변합니다. 생활양식도 변합니다. 풍속도 변합니다. 인정도 변하고 인심도 변합니다. 얼굴의 모양도 변하고 옷매무새도 변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해도 변치 않는 유일무이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법칙입니다. 물은 0도 되어야 얼고 100도 되어야 끓습니다. 이것은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또 하나의 법칙은 도덕입니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가정의 원칙입니다. 가정은 인륜과 천륜이 만나는 유기적인 공동체입니다.
가정의 정의는 학자들 견해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가정이란 가족이 생활하는 장소라고 보는 것이 보통입니다. 영어의 홈(home)이나 독일어의 하임(heim)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가정과 집(house)의 차이는 가정이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집은 건물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부부는 동거동재, 동거동손, 동거동찬이어야 합니다. 재물을 공유하지 않으면 부부가 아닙니다. 결혼과 동거의 차이점은 재물을 공유하느냐, 않느냐 입니다. 동거는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재물을 공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부는 재물을 공유합니다. 재물의 손해도 함께 집니다.
가정은 안식과 행복의 원천이며, 국가의 기본 단위이며 근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입니까? 만일 누군가 이런 질문을 여러분에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 가정이라고 해서 모두가 행복한 가정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얼굴에 미소를 띠고 행복한 표정을 짓지만 집에서는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불행한 삶을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가정이 건강한 가정입니까? 가정의 기본원칙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일부일처의 원칙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을 창조할 때 어린 아이로 창조하지 않고 성인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3장을 보면 감독과 집사의 자격을 열거할 때 “한 아내의 남편”이라고 했습니다. 두 아내의 남편이 아닌 한 아내의 남편, 이것은 창조의 질서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룹니다. 그런데 어떤 사회에서는 이 성스러운 창조질서를 깨고 일부다처주의를 허용합니다. 그래서 東家食西家宿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세 5경을 보면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일부다처의 흔적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솔로몬입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분열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일부일처가 창조의 원리임을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일부다처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데오도시오 황제 시대에 비로소 일부일처의 제도를 국법으로 선포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 국가 모두가 창조의 원리대로 일부일처 제도를 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개인적으로 현지처니, 뭐니 해서 일부일처의 제도를 실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부일처주의는 창조질서의 원리입니다. 이는 기독교 가정의 핵심 원리입니다.
둘째, 돕는 배필의 원칙입니다.
창세기 2장 18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의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돕는 배필’이란 suitable helper mate로, 가장 적합한 동역자란 뜻입니다. 아내는 바라는 배필이 아니라 ‘돕는 배필’입니다. 형제를 잘 도와 동역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것이 돕는 배필입니다. 남자는 허점이 많습니다. 따라서 허점이 발견되면 비난하기보다 그것을 채워주는 것이 아내의 본분입니다.
잠언 31장 10-12절 현숙한 여인의 축복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 그러한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 돕는다는 것은 무조건 형제를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형제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그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속이 비어 있어서 자매들의 행동 여하에 따라 형제들의 삶이 180도 달라집니다.
인류 역사상 훌륭한 남편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여자의 손을 거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의 손은 훌륭한 어머니이고, 또 하나는 어진 아내의 손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2-4).” 이 말은 화장도 하지 말고 옷도 구질구질하게 입고 다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겉모양보다 속사람을 더 아름답게 하라는 것입니다.
인사 포털 인쿠루트가 기업 인사담당자 329명을 대상으로 지원자 면접 탈락 순위를 보면 노출이 심한 옷차림(69.6%), 다음이 지나치게 짧은 치마나 여름의 민소매(67%), 단정하지 않은 머리(65.7%), 과도한 액세서리(53.5%), 지나치게 화려한 색깔의 옷(43.2%), 진한 메이크업(41.9%), 운동화(35.0%), 정장이 아닌 옷차림(22.5%), 치마가 아닌 바지차림(5.8%), 하이힐(4.3%) 등이었습니다. 가장 적합한 면접 옷차림으로 정장 형식을 갖추되 딱딱하지 않은 세미 정장(54.1%)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단정한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1883년에 동네 사람들의 비웃음 가운데서도 끝까지 자동차 발명에 몰두하여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의 아내의 헌신적인 믿음과 격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10시간씩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 낡은 오두막집에 틀어박혀 새로운 엔진의 제작을 위해 밤이 깊도록 몰두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그의 아내만은 그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를 ‘나를 신뢰하는 信者’라고 불렀습니다. 아내의 도움으로 자동차가 만들어졌습니다. 미국에 있는 그의 기념관에 가면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헨리 포드는 꿈꾸는 자이고, 그의 아내는 믿음의 사람이다.”
셋째, 연합의 원칙입니다.
24,25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결혼을 하면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해야 합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합일, 친밀성을 의미합니다. 부부 사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가장 가깝고 친밀한 관계입니다. 이 때 부끄러움이 없는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연합’이란 단어는 unite’, ‘cleave’로서 종이 두 장을 아교풀로 딱 붙여 놓은 완전한 하나 됨의 상태를 말합니다.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고, 영적으로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연합하기 위해서는 마음과 뜻이 같아야 됩니다. 믿음도 같고, 사명도 같고, 방향도 같고, 목적도 같고, 소망도 같아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가 된다는 것은 조화로운 연합을 의미합니다. 남녀에는 서로 다른 성차가 있습니다. 심리학자 융의 주장을 보면 남자는 겉으로 로고스적인 것 같지만 깊은 내면에는 에로스적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여자는 겉으로 에로스적인 것 같지만 깊은 내면에는 로고스적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남자는 사회적인 데 관심이 많은 반면에 여자는 가정적인데 관심이 많습니다. 남자는 논리적인데 반해 여자는 감성적입니다. 남자가 시각적이라면 여자는 청각적입니다. 이렇게 성차도 다르고 개성도 다르고 자란 환경도 다른 남녀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를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3,34)”고 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에 세 가지 비밀이 있는 데, 하나는 3위1체의 비밀, 또 하나는 성육신의 비밀, 또 다른 하나는 둘이 하나가 되는 부부의 비밀이다.”
그리고 부모를 떠나 연합하는 것은 그 누구도 부부 사이에 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시어머니도, 친정 부모님도, 아이도 끼어서는 안 됩니다. 부부가 잘 때 아이를 가운데 놓고 자는 것도 안 됩니다. 더구나 분방을 해사는 안 됩니다. 성경은 분방을 금합니다.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 합의 상 얼마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고 했습니다(고전7:5). 같은 방에서 잔다고 해서 분방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 싸움하고 등을 맛 대고 벽을 보고 자는 것도 분방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볼 수 없지만 부부와 연합되는 그 속에서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이혼 불가의 원칙입니다.
결혼은 사람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습니다. 이혼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이혼가정이 많은지 교회에서 이혼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이혼은 잘못된 것임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큰 죄입니다. 이혼은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이 무너지면 그 형벌을 제일 먼저 내 자신이 받습니다. 그 다음이 내 자녀가 받습니다. 그 다음이 우리 사회가 받게 됩니다. 가정은 공동체 중에 중요한 공동체입니다. 가정은 교회보다 앞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고 보호해야 합니다.
지난 토요일에 류규상 형제와 정다운 자매가 결혼한 예식장 이름이 두리원입니다. 둘이 하나가 된다는 뜻인 것 같았습니다. 결혼은 1+1=2 가 아니라 원, 하나입니다. 그래서 부부의 날도 두 사람이 모여 하나가 되었다는 뜻에서 5월 21일인 것입니다. 결혼하면 하나가 되기 때문에 나뉘게 되면 반푼이가 됩니다. 우리 몸은 지체들의 집합체가 아니고 유기체입니다. 유기체는 머리 따로, 몸 따로 놀 수가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각기 따로 행동한다는 것은 머리 따로, 몸 따로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기형적인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19:5,6).” 부부가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큰 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혼을 일시적인 감정이나 조건을 보고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다섯째, 성결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성결하게 보전하기 위하여 제 7계명을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4절을 보면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리차드 포스터가 쓴 “돈, 섹스, 권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성 문제가 가장 심각합니다. 인터넷을 켜면 음란 메일이 수도 없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여성의 모든 것을 sexy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불륜이 아름답게 미화되고, 간음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인기 있는 드라마의 주제는 불륜이 미화되는 것들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런 간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웬만한 성문란을 보아도 놀라지 않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Daniel Bel은 앞으로 포르노피아가 하나의 종교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정황 속에서 제 7 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현실성이 없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주님의 명령이요 계명입니다.
성경 곳곳에 가정의 성결을 강조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8-2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엄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히브리서 13장 4절에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성이란 단어의 어원이 six에서 왔습니다. 이는 6계명(천주교는 7계명이 6계명), 간음하지 말라, 순결에서 왔습니다. 세상에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입니다. 왜냐하면 성에서 생명이 잉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윤리보다 앞서는 것이 성윤리입니다. 우리가 성자체가 순결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때 성결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성결을 생명처럼 여길 때 가정은 성결하게 되는 것이고 성결이 보전될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 멸망의 역사를 썼던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이 망한 원인 중의 하나가 가정의 무너짐을 들었습니다. 남자들은 가정을 팽개치고 사냥과 주연을 일삼았습니다. 부인들은 사치와 쾌락에 몰입하여 가정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리 없고, 행복했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 로마 제국이 안 무너질 수 있어요? 가정은 사회의 올바른 성장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가정을 성결하게 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결은 결혼 전부터 시작됩니다. 몸은 성령의 전인 줄 알고 성결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결혼 전에 교제를 할 수 있어야 하지만 자제와 극기의 덕이 있어야 합니다.
여섯째, 사랑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이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심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여자를 남자의 머리로 만들었다면 남자의 브레인이 되어 형제를 좌지우지 할 것입니다. 또한 발가락으로 만들었다면 남자는 여자를 발로 차고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자의 갈빗대로 만드셨습니다. 갈비뼈는 몸의 중심에 있습니다. 갈비뼈는 팔 아래 있어서 팔로 갈비뼈를 보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살로 덮여 있습니다. 이처럼 남자는 여자를 잘 보호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데려오니 그 고백이 무엇입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0).” 이 고백은 최초의 사랑의 고백이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순종이 결과입니다. 가정의 원칙은 사랑입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을 보면 남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또 디도서 2장 4,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랑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을 읽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일곱째, 가정예배의 원칙입니다.
서양의 건축의 중심은 fireplace, 불 피우는 곳이 주택의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일본은 도꼬노마, 객실의 다다미방의 정면에 그림을 걸어놓은 곳이 있는 데, 그곳이 주택의 중심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주택 건축에는 중심이 없습니다. 우리 주택에 중심이 없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정의 중심입니다. 가정의 중심은 가정 예배입니다.
교회 안에 예배의 단이 있습니다. 강대상이 있는 곳이 교회의 제단입니다. 가정에는 가정예배를 드리는 곳,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가정 예배의 단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이것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가정 예배가 튼튼하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지켜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창설하셨습니다. 가정 속에 생명이 창조되고, 행복이 만들어집니다. 이런 행복한 가정을 통해 자녀들이 결혼의 진정한 의미를 찾게 되고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결혼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찬송하겠습니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가정의 기본 원칙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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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변합니다. 생활양식도 변합니다. 풍속도 변합니다. 인정도 변하고 인심도 변합니다. 얼굴의 모양도 변하고 옷매무새도 변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해도 변치 않는 유일무이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법칙입니다. 물은 0도 되어야 얼고 100도 되어야 끓습니다. 이것은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또 하나의 법칙은 도덕입니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가정의 원칙입니다. 가정은 인륜과 천륜이 만나는 유기적인 공동체입니다.
가정의 정의는 학자들 견해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가정이란 가족이 생활하는 장소라고 보는 것이 보통입니다. 영어의 홈(home)이나 독일어의 하임(heim)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가정과 집(house)의 차이는 가정이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집은 건물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부부는 동거동재, 동거동손, 동거동찬이어야 합니다. 재물을 공유하지 않으면 부부가 아닙니다. 결혼과 동거의 차이점은 재물을 공유하느냐, 않느냐 입니다. 동거는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재물을 공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부는 재물을 공유합니다. 재물의 손해도 함께 집니다.
가정은 안식과 행복의 원천이며, 국가의 기본 단위이며 근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입니까? 만일 누군가 이런 질문을 여러분에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 가정이라고 해서 모두가 행복한 가정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얼굴에 미소를 띠고 행복한 표정을 짓지만 집에서는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불행한 삶을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가정이 건강한 가정입니까? 가정의 기본원칙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일부일처의 원칙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을 창조할 때 어린 아이로 창조하지 않고 성인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3장을 보면 감독과 집사의 자격을 열거할 때 “한 아내의 남편”이라고 했습니다. 두 아내의 남편이 아닌 한 아내의 남편, 이것은 창조의 질서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룹니다. 그런데 어떤 사회에서는 이 성스러운 창조질서를 깨고 일부다처주의를 허용합니다. 그래서 東家食西家宿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세 5경을 보면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일부다처의 흔적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솔로몬입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분열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일부일처가 창조의 원리임을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일부다처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데오도시오 황제 시대에 비로소 일부일처의 제도를 국법으로 선포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 국가 모두가 창조의 원리대로 일부일처 제도를 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개인적으로 현지처니, 뭐니 해서 일부일처의 제도를 실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부일처주의는 창조질서의 원리입니다. 이는 기독교 가정의 핵심 원리입니다.
둘째, 돕는 배필의 원칙입니다.
창세기 2장 18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의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돕는 배필’이란 suitable helper mate로, 가장 적합한 동역자란 뜻입니다. 아내는 바라는 배필이 아니라 ‘돕는 배필’입니다. 형제를 잘 도와 동역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것이 돕는 배필입니다. 남자는 허점이 많습니다. 따라서 허점이 발견되면 비난하기보다 그것을 채워주는 것이 아내의 본분입니다.
잠언 31장 10-12절 현숙한 여인의 축복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 그러한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 돕는다는 것은 무조건 형제를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형제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그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속이 비어 있어서 자매들의 행동 여하에 따라 형제들의 삶이 180도 달라집니다.
인류 역사상 훌륭한 남편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여자의 손을 거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의 손은 훌륭한 어머니이고, 또 하나는 어진 아내의 손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2-4).” 이 말은 화장도 하지 말고 옷도 구질구질하게 입고 다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겉모양보다 속사람을 더 아름답게 하라는 것입니다.
인사 포털 인쿠루트가 기업 인사담당자 329명을 대상으로 지원자 면접 탈락 순위를 보면 노출이 심한 옷차림(69.6%), 다음이 지나치게 짧은 치마나 여름의 민소매(67%), 단정하지 않은 머리(65.7%), 과도한 액세서리(53.5%), 지나치게 화려한 색깔의 옷(43.2%), 진한 메이크업(41.9%), 운동화(35.0%), 정장이 아닌 옷차림(22.5%), 치마가 아닌 바지차림(5.8%), 하이힐(4.3%) 등이었습니다. 가장 적합한 면접 옷차림으로 정장 형식을 갖추되 딱딱하지 않은 세미 정장(54.1%)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단정한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1883년에 동네 사람들의 비웃음 가운데서도 끝까지 자동차 발명에 몰두하여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의 아내의 헌신적인 믿음과 격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10시간씩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 낡은 오두막집에 틀어박혀 새로운 엔진의 제작을 위해 밤이 깊도록 몰두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그의 아내만은 그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를 ‘나를 신뢰하는 信者’라고 불렀습니다. 아내의 도움으로 자동차가 만들어졌습니다. 미국에 있는 그의 기념관에 가면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헨리 포드는 꿈꾸는 자이고, 그의 아내는 믿음의 사람이다.”
셋째, 연합의 원칙입니다.
24,25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결혼을 하면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해야 합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합일, 친밀성을 의미합니다. 부부 사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가장 가깝고 친밀한 관계입니다. 이 때 부끄러움이 없는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연합’이란 단어는 unite’, ‘cleave’로서 종이 두 장을 아교풀로 딱 붙여 놓은 완전한 하나 됨의 상태를 말합니다.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고, 영적으로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연합하기 위해서는 마음과 뜻이 같아야 됩니다. 믿음도 같고, 사명도 같고, 방향도 같고, 목적도 같고, 소망도 같아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가 된다는 것은 조화로운 연합을 의미합니다. 남녀에는 서로 다른 성차가 있습니다. 심리학자 융의 주장을 보면 남자는 겉으로 로고스적인 것 같지만 깊은 내면에는 에로스적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여자는 겉으로 에로스적인 것 같지만 깊은 내면에는 로고스적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남자는 사회적인 데 관심이 많은 반면에 여자는 가정적인데 관심이 많습니다. 남자는 논리적인데 반해 여자는 감성적입니다. 남자가 시각적이라면 여자는 청각적입니다. 이렇게 성차도 다르고 개성도 다르고 자란 환경도 다른 남녀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를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3,34)”고 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에 세 가지 비밀이 있는 데, 하나는 3위1체의 비밀, 또 하나는 성육신의 비밀, 또 다른 하나는 둘이 하나가 되는 부부의 비밀이다.”
그리고 부모를 떠나 연합하는 것은 그 누구도 부부 사이에 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시어머니도, 친정 부모님도, 아이도 끼어서는 안 됩니다. 부부가 잘 때 아이를 가운데 놓고 자는 것도 안 됩니다. 더구나 분방을 해사는 안 됩니다. 성경은 분방을 금합니다.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 합의 상 얼마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고 했습니다(고전7:5). 같은 방에서 잔다고 해서 분방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 싸움하고 등을 맛 대고 벽을 보고 자는 것도 분방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볼 수 없지만 부부와 연합되는 그 속에서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이혼 불가의 원칙입니다.
결혼은 사람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습니다. 이혼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이혼가정이 많은지 교회에서 이혼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이혼은 잘못된 것임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큰 죄입니다. 이혼은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이 무너지면 그 형벌을 제일 먼저 내 자신이 받습니다. 그 다음이 내 자녀가 받습니다. 그 다음이 우리 사회가 받게 됩니다. 가정은 공동체 중에 중요한 공동체입니다. 가정은 교회보다 앞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고 보호해야 합니다.
지난 토요일에 류규상 형제와 정다운 자매가 결혼한 예식장 이름이 두리원입니다. 둘이 하나가 된다는 뜻인 것 같았습니다. 결혼은 1+1=2 가 아니라 원, 하나입니다. 그래서 부부의 날도 두 사람이 모여 하나가 되었다는 뜻에서 5월 21일인 것입니다. 결혼하면 하나가 되기 때문에 나뉘게 되면 반푼이가 됩니다. 우리 몸은 지체들의 집합체가 아니고 유기체입니다. 유기체는 머리 따로, 몸 따로 놀 수가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각기 따로 행동한다는 것은 머리 따로, 몸 따로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기형적인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19:5,6).” 부부가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큰 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혼을 일시적인 감정이나 조건을 보고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다섯째, 성결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성결하게 보전하기 위하여 제 7계명을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4절을 보면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리차드 포스터가 쓴 “돈, 섹스, 권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성 문제가 가장 심각합니다. 인터넷을 켜면 음란 메일이 수도 없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여성의 모든 것을 sexy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불륜이 아름답게 미화되고, 간음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인기 있는 드라마의 주제는 불륜이 미화되는 것들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런 간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웬만한 성문란을 보아도 놀라지 않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Daniel Bel은 앞으로 포르노피아가 하나의 종교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정황 속에서 제 7 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현실성이 없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주님의 명령이요 계명입니다.
성경 곳곳에 가정의 성결을 강조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8-2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엄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히브리서 13장 4절에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성이란 단어의 어원이 six에서 왔습니다. 이는 6계명(천주교는 7계명이 6계명), 간음하지 말라, 순결에서 왔습니다. 세상에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입니다. 왜냐하면 성에서 생명이 잉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윤리보다 앞서는 것이 성윤리입니다. 우리가 성자체가 순결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때 성결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성결을 생명처럼 여길 때 가정은 성결하게 되는 것이고 성결이 보전될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 멸망의 역사를 썼던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이 망한 원인 중의 하나가 가정의 무너짐을 들었습니다. 남자들은 가정을 팽개치고 사냥과 주연을 일삼았습니다. 부인들은 사치와 쾌락에 몰입하여 가정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리 없고, 행복했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 로마 제국이 안 무너질 수 있어요? 가정은 사회의 올바른 성장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가정을 성결하게 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결은 결혼 전부터 시작됩니다. 몸은 성령의 전인 줄 알고 성결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결혼 전에 교제를 할 수 있어야 하지만 자제와 극기의 덕이 있어야 합니다.
여섯째, 사랑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이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심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여자를 남자의 머리로 만들었다면 남자의 브레인이 되어 형제를 좌지우지 할 것입니다. 또한 발가락으로 만들었다면 남자는 여자를 발로 차고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자의 갈빗대로 만드셨습니다. 갈비뼈는 몸의 중심에 있습니다. 갈비뼈는 팔 아래 있어서 팔로 갈비뼈를 보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살로 덮여 있습니다. 이처럼 남자는 여자를 잘 보호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데려오니 그 고백이 무엇입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0).” 이 고백은 최초의 사랑의 고백이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순종이 결과입니다. 가정의 원칙은 사랑입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을 보면 남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또 디도서 2장 4,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랑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을 읽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일곱째, 가정예배의 원칙입니다.
서양의 건축의 중심은 fireplace, 불 피우는 곳이 주택의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일본은 도꼬노마, 객실의 다다미방의 정면에 그림을 걸어놓은 곳이 있는 데, 그곳이 주택의 중심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주택 건축에는 중심이 없습니다. 우리 주택에 중심이 없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정의 중심입니다. 가정의 중심은 가정 예배입니다.
교회 안에 예배의 단이 있습니다. 강대상이 있는 곳이 교회의 제단입니다. 가정에는 가정예배를 드리는 곳,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가정 예배의 단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이것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가정 예배가 튼튼하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지켜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창설하셨습니다. 가정 속에 생명이 창조되고, 행복이 만들어집니다. 이런 행복한 가정을 통해 자녀들이 결혼의 진정한 의미를 찾게 되고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결혼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찬송하겠습니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