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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제 4 강 (2:14-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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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의 주제는 믿음의 행함,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핵심인 믿음의 의와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믿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의 전제가 믿음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믿음이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믿음의 행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위기입니다. 기독교는 말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을 보면 전반부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런 후에 후반부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말씀대로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11장까지 길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설명합니다. 그런 연후 12장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행함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은 추상적이고 공허할 뿐입니다. 올바른 믿음이란 행함을 수반하는 믿음입니다. 말로는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첫째, 행함이 없는 믿음은 유익이 없다(14-20)
14절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믿음은 중요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에 이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우리는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은 것을 자랑합니다.
세상 어느 종교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진리는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에만 있는 유일무이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를 자랑만 하고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이 있다면 밥을 주어야 하고, 헐벗은 사람이 있다면 옷을 주어야 합니다(15-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 25-37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찾아와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심중을 아시고 율법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저 없이 율법의 핵심을 정확히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대답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8절을 보겠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예수님은 그의 문제가 알고만 있지 행하지 않는 것임을 아시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행하라’는 것은 현재 명령형으로 계속 행하라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1장 46절을 보면 그는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입과 머리만 있었지 뜨거운 가슴이 없었습니다. 그는 뜨거운 심장이 없는 E.T와 같은 청년이었습니다. 이러고도 그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 것을 보면 유대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는 약 27km가 됩니다. 이 길은 가파르고 바위가 많고 계곡이 깊어 강도들의 출현이 많아 일명 ‘피의 길’이라고 합니다. 강도들은 한 유대인의 돈을 빼앗고, 옷을 벗기고 때려서 실신 상태가 되게 했습니다. 내버려 두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은 제사장이 가다가 강도 만나 피투성이가 되어 신음하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제사장으로서 마땅히 그를 도와주어야 옳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이방인이나 그들이 혐오하는 사마리아인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누가복음 10장 31절을 보면 그는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32절을 보면 레위인이 그 장소를 지나갔습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도 마땅히 그를 돌보아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못 본 척하고 지나갔습니다. 아마 그들의 양심은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머리에서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이 맴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고 그대로 지나쳐 버렸습니다.
왜 그리 했을까요? 아마 그를 돕다가 강도를 만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 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나 말고 누가 도와주겠지 하는 마음이 지나쳐 버리게 했는지 모릅니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파트 정원에서 성폭행 당하는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를 지켜보았지만 누구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안 해도 누군가가 신고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들은 바쁜 마음이 그를 그대로 지나쳐 버리게 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괜히 돕는다고 하다가 죽기라도 하면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 생기기 때문에 지나쳐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도 그런 사람 건드렸다가 죽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픕니다. 아니면 아마 제사장 가운이 더러워질 것 같아 그대로 지나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지나가면서 여러 가지로 자신을 합리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무엇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한 마디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경건한 모습, 스마트한 모습은 있었지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몸을 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계산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시간과 물질을 계산했습니다. 그들은 희생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어떻다고 말은 잘 하지만 내면에 사랑이 없었습니다. 가슴이 냉랭했습니다.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가슴을 가져야 하는데, 반대로 뜨거운 이성과 냉랭한 가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뜨거운 이성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예수님을 시험하여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레위인과 제사장을 욕하기 쉽습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우리의 모습이요, 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바쁜 마음과 이기적인 마음,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인해 지나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도와야 할 성도를 심방가지 못해 실족시킨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시간에 우리는 이를 회개합니다.
반면에 한 사마리아인은 어떠했습니까? 어떤 사마리아인은 지나가다가 거기 이르러 그를 보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과의 관계는 서로 상종치도 않았습니다. 아마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난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다가도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울화가 치밀어 올라와 한 대 때려 주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3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의 곁을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마음의 문이 닫혀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마음 문을 열어 그를 돕고자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를 돕도록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을 때에 그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어떤 신분의 사람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가까이 가게 했습니다. 그를 돕다가 드는 시간과 비용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을 초월하여 그를 순수하게 도울 수 있게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의 내면의 모든 두려움을 극복케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이해득실을 넘어서게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개의치 않게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4,35절을 보면 그는 즉시 달려가서 포도주와 기름을 상처 부위에 발라 주었습니다. 포도주는 소독제 역할을 하고, 기름은 진통제 역할을 합니다. 그는 즉시 응급조치를 하고는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데리고 가서 밤새 간호를 했습니다. 이튿날에는 두 데나리온을 주인에게 주고 이 사람을 잘 돌보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치료비가 더 들면 일을 마치고 돌아 올 때에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책임성 있게 돌봐 주었습니다. 그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선한 일을 했습니다.
이를 볼 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인종과 국경과 이념을 넘어서서 시간과 물질을 희생해서라도 도울 수 있게 합니다. 사람이 의무적으로, 선한 마음으로 돕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몇 번 하다가 피해의식이 들어 도울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환경과 상황을 넘어서서 도울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요3:16).
예수님은 더러운 문둥병자를 만났을 때 그를 민망히 여기시고 그에게 손을 대시며 그를 깨끗케 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실 때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해 불쌍히 여기시고 늦게까지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막6:34).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희생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에 인간의 본성을 넘어서서 어떤 사람도 도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물으셨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 이 때 그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듣고 말씀하셨습니다. 37b절을 보겠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바로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현재 강도를 만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캠퍼스에는 사단의 공격을 받아 많은 지성인들이 실신 상태에 있습니다. 30대들이 우울증에 사달립니다.
사단은 정욕의 뿔, 허무의 뿔, 절망의 뿔, 욕망의 뿔, 무기력의 뿔, 두려움의 뿔, 염려의 뿔, 의심의 뿔, 불신의 뿔로 공격하여 수많은 영혼들을 넘어뜨려 못쓰게 만들고 있습니다. 각종 이단들이 교묘한 방법으로 영혼을 파괴시키고 가정을 파멸시킵니다. 사람이 사단의 공격을 받게 되면 powerless하고, hopeless합니다.
누가 믿음의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now and here, 지금 여기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가지고 도와야 합니다. 이 때 죽어가는 젊은이들이 살아나게 됩니다. 사랑은 실제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돕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7,18절을 보면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고 했습니다.
좋아한다와 사랑한다는 말에는 하늘과 땅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본능에 속한 것으로 외적인 것들, 외모, 색깔, 기질, 행동이나 어떤 태도 등에 의해 결정되어 집니다. 그러나 사랑은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것을 뛰어 넘는 것이며 육감적이고 육신적인 매력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추하고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넘어서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역동적으로 행하게 합니다. 베풀고 섬기게 합니다. 사랑은 혀로만 하지 않고 행동이 따릅니다. 실제적인 문제인 궁핍함을 보고 도와줍니다. 이런 사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게 됩니다.
사랑은 진실합니다. 진실함은 순수한 사랑입니다.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하여 실질적인 형제애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18-20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하나님을 알고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교리적인 믿음, 지식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귀신도 잘 압니다. 마가복음 5장 1-11절을 보면 귀신 들린 젊은 청년이 나옵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말씀에 순종치 않고 말씀에 반발하고 불순종합니다. 이처럼 알고도 행하지 않는 믿음은 귀신적인 믿음. 허탄한 사람, 헛된 믿음, 죽은 믿음입니다.
둘째, 참 믿음이란(21-26)
야고보는 산 믿음을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를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21-24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아브라함은 자기 현실 문제에 빠져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밖은 어두웠지만 시원한 바람이 아브람의 옷깃을 파고들어 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현실 문제인 자식 문제에 빠져 있는 아브람을 높고 깊고 광대한 하나님의 세계,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셨습니다.
아브람은 밤하늘에 영롱하게 빛나는 수많은 별들, 끝없이 펼쳐진 보석처럼 박혀 있는 별들과 수많은 별들로 수놓인 은하수를 보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원대하심을 찬양하는 별들의 합창소리가 아브람에게 들려왔습니다. 아브람은 별들을 헤아려보았습니다. 별 하나, 별 둘, 별 셋! 그러자 그는 별들이 자식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별 하나 자식 하나, 별 둘 자식 둘, 별 셋 자식 셋! 아브람의 좁아진 마음 문이 열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영롱한 믿음의 세계, 하나님의 장엄한 비전과 구원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현재 딸자식 하나 없는 아브람에게 있어서는 황당무계한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이를 믿었습니다. 아브람이 이를 믿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넘어서서 이를 믿었습니다. 그는 뭇 별을 통하여 심령에 비쳐오는 한 줄기 빛을 보았습니다. 이 빛은 생명의 빛이요, 딱딱한 아브람의 마음을 녹이는 사랑의 빛이었습니다. 새로운 영적 세계에 대한 소망의 빛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이 빛을 통하여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충만한 사랑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행위로 의롭다 하지 않으시고 오직 믿음을 보고 의롭다 하셨습니다(롬 4:1-2). 하나님은 이 믿음을 기초로 아브람을 열국의 아비요,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온전케 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고 나서 이삭을 하나님께 받쳤을 때입니다. 믿음이 이론이 아닌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여호수아 2장 1-7절을 보면 가나안의 두 정탐군들은 라합이란 기생집에 들어가서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기생 라합은 두 정탐군들을 숨겨 두느냐 아니면 경찰이나 안기부에 신고하는냐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두 정탐군들은 여리고 군대로부터 보호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탐을 마치고 무사히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기생 라합이 모순을 극복하고 정탐군들을 은닉시켜 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녀는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음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이적을 들었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육지 같이 길을 내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사실도 들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라합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가나안의 신들은 모두 가짜 신들이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모순을 극복하고 정탐군들을 지붕에 올려놓은 삼대에 숨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드러난 것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준 후에 다른 길로 보낸 사실에 있습니다. 이처럼 온전한 믿음은 행함에 있습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은 악취가 납니다. 죽은 믿음은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줍니다. 죽은 믿음은 믿음의 목적을 이루는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산 믿음은 생명이 약동합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생명을 살리고 성장하게 됩니다. 죽은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환경을 바꾸고 역사를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게 됩니다.
지금 의식있는 사람들은 우리 민족이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대학생들이 꿈이 없습니다. 산야를 포효하는 호랑이 같은 삶이 아니라 주인이 던져주는 생선토막이나 받아먹으며 입을 헤 벌리는 삽삽개처럼 되어 가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30대들이 우울증으로 아주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있습니다. 20대 대학생들과 30대는 우리나라의 허리입니다. 허리가 지금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거기다가 지금 남북이 어느 때 보다도 적대적입니다. 그러니 우리 민족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있습니까? 평창 동계올림픽이 개최되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소유해야 됩니다. 우리가 믿는 만큼 아는 만큼 행하면 됩니다. 이때 캠퍼스와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게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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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의 주제는 믿음의 행함,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핵심인 믿음의 의와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믿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의 전제가 믿음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믿음이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믿음의 행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위기입니다. 기독교는 말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을 보면 전반부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런 후에 후반부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말씀대로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11장까지 길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설명합니다. 그런 연후 12장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행함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은 추상적이고 공허할 뿐입니다. 올바른 믿음이란 행함을 수반하는 믿음입니다. 말로는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첫째, 행함이 없는 믿음은 유익이 없다(14-20)
14절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믿음은 중요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에 이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우리는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은 것을 자랑합니다.
세상 어느 종교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진리는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에만 있는 유일무이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를 자랑만 하고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이 있다면 밥을 주어야 하고, 헐벗은 사람이 있다면 옷을 주어야 합니다(15-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 25-37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찾아와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심중을 아시고 율법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저 없이 율법의 핵심을 정확히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대답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8절을 보겠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예수님은 그의 문제가 알고만 있지 행하지 않는 것임을 아시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행하라’는 것은 현재 명령형으로 계속 행하라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1장 46절을 보면 그는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입과 머리만 있었지 뜨거운 가슴이 없었습니다. 그는 뜨거운 심장이 없는 E.T와 같은 청년이었습니다. 이러고도 그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 것을 보면 유대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는 약 27km가 됩니다. 이 길은 가파르고 바위가 많고 계곡이 깊어 강도들의 출현이 많아 일명 ‘피의 길’이라고 합니다. 강도들은 한 유대인의 돈을 빼앗고, 옷을 벗기고 때려서 실신 상태가 되게 했습니다. 내버려 두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은 제사장이 가다가 강도 만나 피투성이가 되어 신음하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제사장으로서 마땅히 그를 도와주어야 옳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이방인이나 그들이 혐오하는 사마리아인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누가복음 10장 31절을 보면 그는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32절을 보면 레위인이 그 장소를 지나갔습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도 마땅히 그를 돌보아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못 본 척하고 지나갔습니다. 아마 그들의 양심은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머리에서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이 맴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고 그대로 지나쳐 버렸습니다.
왜 그리 했을까요? 아마 그를 돕다가 강도를 만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 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나 말고 누가 도와주겠지 하는 마음이 지나쳐 버리게 했는지 모릅니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파트 정원에서 성폭행 당하는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를 지켜보았지만 누구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안 해도 누군가가 신고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들은 바쁜 마음이 그를 그대로 지나쳐 버리게 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괜히 돕는다고 하다가 죽기라도 하면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 생기기 때문에 지나쳐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도 그런 사람 건드렸다가 죽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픕니다. 아니면 아마 제사장 가운이 더러워질 것 같아 그대로 지나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지나가면서 여러 가지로 자신을 합리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무엇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한 마디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경건한 모습, 스마트한 모습은 있었지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몸을 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계산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시간과 물질을 계산했습니다. 그들은 희생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어떻다고 말은 잘 하지만 내면에 사랑이 없었습니다. 가슴이 냉랭했습니다.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가슴을 가져야 하는데, 반대로 뜨거운 이성과 냉랭한 가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뜨거운 이성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예수님을 시험하여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레위인과 제사장을 욕하기 쉽습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우리의 모습이요, 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바쁜 마음과 이기적인 마음,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인해 지나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도와야 할 성도를 심방가지 못해 실족시킨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시간에 우리는 이를 회개합니다.
반면에 한 사마리아인은 어떠했습니까? 어떤 사마리아인은 지나가다가 거기 이르러 그를 보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과의 관계는 서로 상종치도 않았습니다. 아마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난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다가도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울화가 치밀어 올라와 한 대 때려 주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3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의 곁을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마음의 문이 닫혀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마음 문을 열어 그를 돕고자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를 돕도록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을 때에 그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어떤 신분의 사람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가까이 가게 했습니다. 그를 돕다가 드는 시간과 비용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을 초월하여 그를 순수하게 도울 수 있게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의 내면의 모든 두려움을 극복케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이해득실을 넘어서게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개의치 않게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4,35절을 보면 그는 즉시 달려가서 포도주와 기름을 상처 부위에 발라 주었습니다. 포도주는 소독제 역할을 하고, 기름은 진통제 역할을 합니다. 그는 즉시 응급조치를 하고는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데리고 가서 밤새 간호를 했습니다. 이튿날에는 두 데나리온을 주인에게 주고 이 사람을 잘 돌보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치료비가 더 들면 일을 마치고 돌아 올 때에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책임성 있게 돌봐 주었습니다. 그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선한 일을 했습니다.
이를 볼 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인종과 국경과 이념을 넘어서서 시간과 물질을 희생해서라도 도울 수 있게 합니다. 사람이 의무적으로, 선한 마음으로 돕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몇 번 하다가 피해의식이 들어 도울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환경과 상황을 넘어서서 도울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요3:16).
예수님은 더러운 문둥병자를 만났을 때 그를 민망히 여기시고 그에게 손을 대시며 그를 깨끗케 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실 때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해 불쌍히 여기시고 늦게까지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막6:34).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희생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에 인간의 본성을 넘어서서 어떤 사람도 도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물으셨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 이 때 그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듣고 말씀하셨습니다. 37b절을 보겠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바로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현재 강도를 만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캠퍼스에는 사단의 공격을 받아 많은 지성인들이 실신 상태에 있습니다. 30대들이 우울증에 사달립니다.
사단은 정욕의 뿔, 허무의 뿔, 절망의 뿔, 욕망의 뿔, 무기력의 뿔, 두려움의 뿔, 염려의 뿔, 의심의 뿔, 불신의 뿔로 공격하여 수많은 영혼들을 넘어뜨려 못쓰게 만들고 있습니다. 각종 이단들이 교묘한 방법으로 영혼을 파괴시키고 가정을 파멸시킵니다. 사람이 사단의 공격을 받게 되면 powerless하고, hopeless합니다.
누가 믿음의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now and here, 지금 여기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가지고 도와야 합니다. 이 때 죽어가는 젊은이들이 살아나게 됩니다. 사랑은 실제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돕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7,18절을 보면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고 했습니다.
좋아한다와 사랑한다는 말에는 하늘과 땅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본능에 속한 것으로 외적인 것들, 외모, 색깔, 기질, 행동이나 어떤 태도 등에 의해 결정되어 집니다. 그러나 사랑은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것을 뛰어 넘는 것이며 육감적이고 육신적인 매력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추하고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넘어서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역동적으로 행하게 합니다. 베풀고 섬기게 합니다. 사랑은 혀로만 하지 않고 행동이 따릅니다. 실제적인 문제인 궁핍함을 보고 도와줍니다. 이런 사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게 됩니다.
사랑은 진실합니다. 진실함은 순수한 사랑입니다.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하여 실질적인 형제애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18-20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하나님을 알고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교리적인 믿음, 지식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귀신도 잘 압니다. 마가복음 5장 1-11절을 보면 귀신 들린 젊은 청년이 나옵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말씀에 순종치 않고 말씀에 반발하고 불순종합니다. 이처럼 알고도 행하지 않는 믿음은 귀신적인 믿음. 허탄한 사람, 헛된 믿음, 죽은 믿음입니다.
둘째, 참 믿음이란(21-26)
야고보는 산 믿음을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를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21-24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아브라함은 자기 현실 문제에 빠져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밖은 어두웠지만 시원한 바람이 아브람의 옷깃을 파고들어 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현실 문제인 자식 문제에 빠져 있는 아브람을 높고 깊고 광대한 하나님의 세계,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셨습니다.
아브람은 밤하늘에 영롱하게 빛나는 수많은 별들, 끝없이 펼쳐진 보석처럼 박혀 있는 별들과 수많은 별들로 수놓인 은하수를 보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원대하심을 찬양하는 별들의 합창소리가 아브람에게 들려왔습니다. 아브람은 별들을 헤아려보았습니다. 별 하나, 별 둘, 별 셋! 그러자 그는 별들이 자식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별 하나 자식 하나, 별 둘 자식 둘, 별 셋 자식 셋! 아브람의 좁아진 마음 문이 열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영롱한 믿음의 세계, 하나님의 장엄한 비전과 구원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현재 딸자식 하나 없는 아브람에게 있어서는 황당무계한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이를 믿었습니다. 아브람이 이를 믿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넘어서서 이를 믿었습니다. 그는 뭇 별을 통하여 심령에 비쳐오는 한 줄기 빛을 보았습니다. 이 빛은 생명의 빛이요, 딱딱한 아브람의 마음을 녹이는 사랑의 빛이었습니다. 새로운 영적 세계에 대한 소망의 빛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이 빛을 통하여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충만한 사랑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행위로 의롭다 하지 않으시고 오직 믿음을 보고 의롭다 하셨습니다(롬 4:1-2). 하나님은 이 믿음을 기초로 아브람을 열국의 아비요,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온전케 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고 나서 이삭을 하나님께 받쳤을 때입니다. 믿음이 이론이 아닌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여호수아 2장 1-7절을 보면 가나안의 두 정탐군들은 라합이란 기생집에 들어가서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기생 라합은 두 정탐군들을 숨겨 두느냐 아니면 경찰이나 안기부에 신고하는냐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두 정탐군들은 여리고 군대로부터 보호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탐을 마치고 무사히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기생 라합이 모순을 극복하고 정탐군들을 은닉시켜 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녀는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음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이적을 들었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육지 같이 길을 내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사실도 들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라합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가나안의 신들은 모두 가짜 신들이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모순을 극복하고 정탐군들을 지붕에 올려놓은 삼대에 숨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드러난 것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준 후에 다른 길로 보낸 사실에 있습니다. 이처럼 온전한 믿음은 행함에 있습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은 악취가 납니다. 죽은 믿음은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줍니다. 죽은 믿음은 믿음의 목적을 이루는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산 믿음은 생명이 약동합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생명을 살리고 성장하게 됩니다. 죽은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환경을 바꾸고 역사를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게 됩니다.
지금 의식있는 사람들은 우리 민족이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대학생들이 꿈이 없습니다. 산야를 포효하는 호랑이 같은 삶이 아니라 주인이 던져주는 생선토막이나 받아먹으며 입을 헤 벌리는 삽삽개처럼 되어 가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30대들이 우울증으로 아주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있습니다. 20대 대학생들과 30대는 우리나라의 허리입니다. 허리가 지금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거기다가 지금 남북이 어느 때 보다도 적대적입니다. 그러니 우리 민족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있습니까? 평창 동계올림픽이 개최되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소유해야 됩니다. 우리가 믿는 만큼 아는 만큼 행하면 됩니다. 이때 캠퍼스와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