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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제 5 강 3:1-18, 요절 3:2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되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씌우리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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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크리스천은 시련을 믿음으로 인내합니다(1장). 온전한 크리스천은 믿음으로 행합니다(2장). 온전한 크리스천은 말에 실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2).
말이란 단순히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닙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과 사상의 표현입니다. 속된 사람은 속된 말, 비속어를 사용합니다. 속된 말을 하는 사람은 속된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고상한 사람은 고상한 말을 하고, 고상한 행동을 합니다.
평범한 사람은 평범한 이야기를 하고 평범한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상을 가진 사람은 위대한 말을 하고 위대한 행동을 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크리스천은 성숙하지 못한 말을 하고 행함도 성숙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크리스천은 성숙한 말을 하고 행함 또한 성숙합니다. 이처럼 말은 단순히 소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과 사상과 인격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행동을 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2011년 6월 5일 교육개발원에서 ‘학교생활에서의 욕설사용실태 및 순화대책’을 발표했는데 청소년들이 20명 중 19명이 욕설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매일 한 번 이상 욕설을 한다는 응답은 73.4%(925명), 욕설을 하기는 하지만 ‘거의 쓰지 않는다’는 응답은 21.2%(267명)였습니다. 욕설을 배우는 경로는 친구(47.7%), 인터넷(26.4%), 영화(10.2%) 등이었고, 배우는 시기는 초교 고학년(58.2%), 초교 저학년(22.1), 중1(7.9%) 등 순이었습니다. 욕설을 하는 대상은 친구(70.3%)가 대부분이었지만, 아무한테나 욕설을 한다는 답도 일부(5.2%) 있었고, 욕설을 하는 이유로는 습관(25.7%), 남들이 쓰니까(18.2%), 스트레스 해소(17.0%), 친근감 표현(16.7%) 등 순이었습니다. 응답자의 절 반 가량(40.7%)은 자주 또는 가끔 교사에게 욕설을 들은 적이 있다고 답했으며, 이중 40.4%는 교사의 욕설을 들으면 겉으로 표시는 안 해도 속으로 욕을 한다고 답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현상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말에 실수가 없는 참된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1)
1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유대인들의 열망 중의 하나는 선생, 곧 랍비가 되는 것입니다. 랍비란 위대한 분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비단 유대인들만의 소망은 아닐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에는 각기 자신이 자칭 위대한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성도들 또한 교회의 기둥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학부모들은 우리 자녀들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사람들이 왜 이처럼 지도자가 되려고 합니까? 물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정말 참된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지도자로서의 특권을 누리며 존경과 섬김을 받고자 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누구나 지배욕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에서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말라’는 헬라어로 μἠ로 이는 선택적인 권고가 아니라 금지의 명령어입니다.
왜 선생이 되지 말라고 명령합니까? 이는 선생된 우리가 더 많은 심판을 받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심판을 많이 받습니까? 선생은 말이 많고 그와 비례하여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행함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24절을 보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니” 하셨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2장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하셨습니다.
KJV 성경에 보면 선생을 master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master의 반대는 종, servant입니다.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는 것은 바꿔 말해서 “종이 많이 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종은 섬기는 이입니다. 섬기는 이는 말이 없습니다. 말보다 행하는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반면에 master, 지도자는 말이 많습니다. 특히 목사와 선생, 정치인은 옳은 말을 제일 많이 합니다. 그래서 물에 빠지면 ‘입’만 둥둥 떠다닌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종은 말보다 행함이 앞섭니다.
master가 많은 곳은 어느 사회나 어느 공동체나 시끄럽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 기둥이 많으면 강대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에 기둥이 많으면 걸지적거립니다. 그렇다고 기둥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기둥이 필요 없다고 모두 잘라내면 삼풍백화점처럼 무너지게 됩니다. 기둥은 적당히 있어야 하고, 불필요한 기둥은 모두 숨는, 다시 말하여 종이 되어 섬겨야 합니다. 안철수씨의 이론을 보면 의사 결정은 만장일치가 가장 좋은데 5명 이상이면 만장일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되기보다 섬기는 자가 되고자 하는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섬기는 자가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10:44,45).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눅20:46). 그러므로 우리는 많이 지도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많이 종이 되어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선생보다 행함으로 섬기는 섬김의 종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되라(2-12)
혀에 대한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가위와 톱과 혀가 서로 힘을 자랑했습니다. 먼저 가위가 입을 열어 자랑했습니다. “나는 어떤 천이라도 내 이빨로 끊어낼 수 있다.’ 이 말을 들은 톱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내 이빨은 장작과 고물도 깨끗하게 베어낼 수 있다.’ 이를 듣고 있던 혀가 이렇게 자랑했습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자랑해도 나하고는 비교가 안 돼, 나는 남들이 쌓아 놓은 명성, 명예, 우정 등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힘을 가졌거든, 내가 끼어들면 죽마고우도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고, 눈앞에 둔 대권도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 몰라! 가위야, 너는 옷을 썰다 보면 이가 상하고 녹슬 수도 있고, 톱은 굳은 것을 썰고 나면 망가지기도 하지만 나는 아무리 지껄여도 닳는 일이나 파손되는 일이 없어! 나는 내 생명이 다 할 때까지 활동하지!’”
이처럼 혀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그리고 혀는 우리 신체 중에 3치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것이지만 실상은 세상과 같이 넓고 큽니다. 그래서 인구, 식구, 호구 등을 말할 때 모두 ‘口’자를 씁니다. 이는 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대표합니다. 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고 역사가 달라집니다. 정치인들이 설화 사건으로 정치 생명이 끝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금언 중에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씌우리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는 말씀은 “말을 하라! 그러나 실수가 없도록 하라!”는 말씀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입 뒀다 뭐합니까? 다른 기관과 달리 입은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먹고 말하기 위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한 광훈 목사나 이에스더 선교사에게 입을 다물고 있으라면 그분들은 존재의미를 찾지 못해 아마 이상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면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의 책을 보면 여성들은 말을 많이 하여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래 말을 많이 해, 그러나 실수가 없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지도자는 말에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도자란 말을 많이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의 실수는 지도자 뿐만 아니라 인간 모두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말에 실수가 있으면 은 몸에 굴레를 씌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저자는 2-12절에서 말(馬), 배(船), 불(火), 샘(泉) 등에 비유하여 말에 실수가 없도록 말씀합니다. 말에 실수가 있을 때 우리의 전인격에 중대한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반면 말에 실수가 없을 때 온 몸이 승리하게 됩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말(馬)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말의 입에 재갈을 먹이지 않은 채 놓쳤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커다란 인명피해와 많은 파괴와 손실을 가져오게 됩니다. 굴레를 벗은 말은 고함을 지르고 앞 뒷발을 차기 때문에 다루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재갈이 풀린 말이 뒷발질하면 당할 장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야생마의 입에 굴레를 씌워 놓으면 어린아이도 부릴 수 있습니다. 사람이나 짐을 실어 나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말(言語)은 굴레 없는 말(馬)과 같아 제어하지 않으면 우리 인간 자체가 쓸모없게 됩니다. 잠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10:19).” 또 잠언 20: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함부로 말을 하는 자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잠13:3). 그러므로 혀를 재갈 물려야 합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바다 위에 떠다니는 거대한 배도 작은 키 하나에 따라 방향이 결정됩니다. 배의 키를 잘못잡으면 암초에 걸려 파선할 위험이 있습니다. 광풍의 노도에 표류되어 화를 당할 수 있고, 적진에 들어가 포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키는 작고, 또 배의 뒤쪽에 있지만 이 키에 의하여 거대한 선체가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혀가 아무리 작지만 중요한 인생행로를 결정지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혀는 우리의 온 몸의 행동을 지배합니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도 자기 혀를 지배하지 못하면 비극의 종말을 맞게 됩니다. 혀의 중요성을 깨닫고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5,6절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성냥 한 개비의 불이 비록 작은 것이지만 온 집을 태우고, 더 나아가 온 동리를 태우고, 전 세계를 태울 수 있습니다. 불이 지닌 파괴력은 엄청납니다. 그래서 불을 보고 겁내고, 피하게 됩니다. 우리의 혀도 이처럼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타오르는 불길이 퍼질 때 그것을 다스리기 어렵듯이 우리의 혀도 다스리기 어려우며 화재가 남긴 비참한 현장처럼 혀도 사람들에게 재앙과 상처와 비극을 가져다줍니다.
혀를 불에 비교한 예는 성경 곳곳에 있습니다. 잠언 16장 27절을 보면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잠언 26장 18-20절을 보면 “횃불을 던지며 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고 했습니다. 말쟁이가 없으면 평화가 오고, 말쟁이이가 많으면 주위에 다툼을 확산시킵니다. 도둑질과 거짓말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쁩니까? 물론 도둑질도 나쁘지만 거짓말은 더 나쁩니다.
왜냐하면 도둑질은 도둑질한 물건을 갖다 놓으면 되지만 한번 토한 말은 다시 담을 수 없고, 말로 다른 사람에게 인격과 생애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면 그 사람은 다시 회복할 수 없게 됩니다. “무심코 저 사람 빨갱이야!”하면 한국에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7,8절을 보겠습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사나운 짐승을 잘 길들여 놓으면 효용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길들여지지 않는 짐승들은 난폭합니다. 그런데 짐승을 길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훈련시키면 또 됩니다. 그런데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날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컴퓨터로 모든 기계를 제어한다고 하지만 혀를 제어하는 과학은 아직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훈련되지 않은 혀는 어떻게 됩니까?
9-12절을 보겠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훈련되지 않은 혀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다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을 저주합니다.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옵니다.
성경은 반문합니다. 같은 샘에서 단 물이 나오며 쓴 물이 나올 수 있습니까? 여기에서 단 물이란 영어로 fresh로 신선한 물을 말하며, 쓴 물은 짠물을 말합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에서 감람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포도나무에서 무화과를 맺을 수 없습니다.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를,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리는 것처럼 자연은 일관성 있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무화과를 심었는데 감람 열매가 맺혔다면 그것은 감람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원망과 불평과 불신, 그리고 부정적인 복음적이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예수 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육신의 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외쳐도 입이 할례를 받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예수 나무를 심지 않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일구이언하는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3장 8절을 보면 집사의 자격을 말할 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온전한 성도란 두 가지가 동시에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서 악과 선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나온다는 것은 중대한 잘못입니다.
누가복음 6장 45절을 보면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고 했습니다. 악을 쌓으면 악한 말을 하고 악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을 말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하려면 선을 쌓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창고와 같아서 무엇인가를 쌓아야 합니다. 그런데 선을 쌓으면 선한 사람이 되고 악을 쌓으면 악한 사람이 됩니다. 선은 예수님의 성품, 성령의 열매, 성경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도생활입니다. 쌓는다는 것은 계속적인 뜻이 있습니다. 빌딩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벽돌 한 장 한 장 쌓음을 통해 거대한 빌딩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생각을 계속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물량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작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처럼 매일 끊임없이 쌓으면 선하고 아름다운 인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럭키 금성의 창업자인 구인회씨는 큰돈보다 작은 돈을 귀히 여겼다고 합니다. 그 때 그는 대기업의 총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일용할양식을 먹고 몇 분이라도 매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별 것 아닐 것처럼 생각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1년, 5년, 10년이 지나고 보면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믿음, 사랑, 진실, 겸손, 온유, 섬김, 인내 등을 마음의 창고에 조금씩 조금씩 쌓으면 믿음의 사람, 사랑과 의의 사람, 겸손한 사람,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공동체가 어려워집니다. 반면에 혀를 잘 훈련시키면 위대한 생명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혀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로 결심하고 소원해야 합니다. 자기 의지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나의 반석이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창조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환경에 많이 좌우됩니다. 대부분 그릇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쁜 친구들을 사귀었기 때문입니다. 욕설을 배우는 경로는 친구(47.7%), 인터넷(26.4%), 영화(10.2%) 등인데 친구가 단연 높은 수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나야 합니다. 저는 자녀들읃 위해 기도할 때 세 사람을 잘 만나도록 기도합니다. 하나는 좋은 스승, 또 하나는 좋은 배우자, 또 다른 하나는 친구입니다.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친구 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좋은 친구 되신 예수님께 기도할 때 언어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지배를 받을 때 우리는 성숙해집니다. 주님은 강포를 행치 않습니다. 그 입에는 궤사가 없습니다(사53:9). 마가복음 7장 21절을 보면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4장 23,24절을 보면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내면을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이 때 우리가 주님의 순결하고 아름다운 언어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궤사를 행하던 혀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셋째,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라(13-18)
지혜란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지혜는 혀와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사람이 아무리 지혜가 많아도 그것이 삶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 지혜는 무의미합니다.
지식이 어떠한 사실에 대해 아는 것이라면 지혜는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그의 삶에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그의 삶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면서도 그의 삶에 자신의 지혜를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했습니다. 온유함은 유약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람으로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지혜는 이 세상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은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라”(잠8:11)고 했습니다.
지혜에는 참 지혜와 거짓 지혜, 하늘의 지혜와 땅의 지혜, 하나님께 속한 지혜와 사단에게 속한 지혜가 있습니다. 미국의 사상가요 시인이었던 에머슨은 “라파엘은 지혜로 그림을 그렸고, 헨델은 지혜로 노래했고, 세익스피어는 지혜로 썼고, 콜럼버스는 지혜로 항해했고, 루터는 지혜로 설파했고, 워싱톤은 지혜로 무장했고, 왓트는 지혜로 기계화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지혜는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는 매우 귀중한 요소입니다(잠8:11).
성경은 땅의 지혜와 하늘의 지혜를 말씀합니다.
첫째로 땅의 지혜는 바람직하지 못한 지혜입니다. 14-16절을 보면 땅의 지혜는 독한 시기입니다. 독한 시기는 그릇된 열심을 말합니다. 다툼입니다. 또 자기를 드러냅니다. 진리를 거슬려 거짓말합니다. 이런 세상적인 특징의 결과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입니다.
둘째로 위로부터 오는 참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17-18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하나님의 지혜의 첫째는 성결입니다. 둘째는 화평입니다. 셋째는 관용입니다. 넷째는 양순입니다. 다섯째는 긍휼과 선한 열매입니다. 선한 열매는 긍휼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여섯째로 편견과 거짓이 없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결과는 화평과 의입니다.
우리는 입으로 많은 죄를 짓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줍니다. 그러므로 말에 실수가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 혀를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가 혀를 제어할 때 성숙한 성도가 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성숙한 성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되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씌우리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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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크리스천은 시련을 믿음으로 인내합니다(1장). 온전한 크리스천은 믿음으로 행합니다(2장). 온전한 크리스천은 말에 실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2).
말이란 단순히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닙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과 사상의 표현입니다. 속된 사람은 속된 말, 비속어를 사용합니다. 속된 말을 하는 사람은 속된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고상한 사람은 고상한 말을 하고, 고상한 행동을 합니다.
평범한 사람은 평범한 이야기를 하고 평범한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상을 가진 사람은 위대한 말을 하고 위대한 행동을 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크리스천은 성숙하지 못한 말을 하고 행함도 성숙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크리스천은 성숙한 말을 하고 행함 또한 성숙합니다. 이처럼 말은 단순히 소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과 사상과 인격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행동을 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2011년 6월 5일 교육개발원에서 ‘학교생활에서의 욕설사용실태 및 순화대책’을 발표했는데 청소년들이 20명 중 19명이 욕설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매일 한 번 이상 욕설을 한다는 응답은 73.4%(925명), 욕설을 하기는 하지만 ‘거의 쓰지 않는다’는 응답은 21.2%(267명)였습니다. 욕설을 배우는 경로는 친구(47.7%), 인터넷(26.4%), 영화(10.2%) 등이었고, 배우는 시기는 초교 고학년(58.2%), 초교 저학년(22.1), 중1(7.9%) 등 순이었습니다. 욕설을 하는 대상은 친구(70.3%)가 대부분이었지만, 아무한테나 욕설을 한다는 답도 일부(5.2%) 있었고, 욕설을 하는 이유로는 습관(25.7%), 남들이 쓰니까(18.2%), 스트레스 해소(17.0%), 친근감 표현(16.7%) 등 순이었습니다. 응답자의 절 반 가량(40.7%)은 자주 또는 가끔 교사에게 욕설을 들은 적이 있다고 답했으며, 이중 40.4%는 교사의 욕설을 들으면 겉으로 표시는 안 해도 속으로 욕을 한다고 답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현상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말에 실수가 없는 참된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1)
1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유대인들의 열망 중의 하나는 선생, 곧 랍비가 되는 것입니다. 랍비란 위대한 분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비단 유대인들만의 소망은 아닐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에는 각기 자신이 자칭 위대한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성도들 또한 교회의 기둥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학부모들은 우리 자녀들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사람들이 왜 이처럼 지도자가 되려고 합니까? 물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정말 참된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지도자로서의 특권을 누리며 존경과 섬김을 받고자 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누구나 지배욕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에서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말라’는 헬라어로 μἠ로 이는 선택적인 권고가 아니라 금지의 명령어입니다.
왜 선생이 되지 말라고 명령합니까? 이는 선생된 우리가 더 많은 심판을 받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심판을 많이 받습니까? 선생은 말이 많고 그와 비례하여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행함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24절을 보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니” 하셨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2장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하셨습니다.
KJV 성경에 보면 선생을 master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master의 반대는 종, servant입니다.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는 것은 바꿔 말해서 “종이 많이 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종은 섬기는 이입니다. 섬기는 이는 말이 없습니다. 말보다 행하는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반면에 master, 지도자는 말이 많습니다. 특히 목사와 선생, 정치인은 옳은 말을 제일 많이 합니다. 그래서 물에 빠지면 ‘입’만 둥둥 떠다닌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종은 말보다 행함이 앞섭니다.
master가 많은 곳은 어느 사회나 어느 공동체나 시끄럽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 기둥이 많으면 강대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에 기둥이 많으면 걸지적거립니다. 그렇다고 기둥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기둥이 필요 없다고 모두 잘라내면 삼풍백화점처럼 무너지게 됩니다. 기둥은 적당히 있어야 하고, 불필요한 기둥은 모두 숨는, 다시 말하여 종이 되어 섬겨야 합니다. 안철수씨의 이론을 보면 의사 결정은 만장일치가 가장 좋은데 5명 이상이면 만장일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되기보다 섬기는 자가 되고자 하는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섬기는 자가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10:44,45).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눅20:46). 그러므로 우리는 많이 지도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많이 종이 되어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선생보다 행함으로 섬기는 섬김의 종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되라(2-12)
혀에 대한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가위와 톱과 혀가 서로 힘을 자랑했습니다. 먼저 가위가 입을 열어 자랑했습니다. “나는 어떤 천이라도 내 이빨로 끊어낼 수 있다.’ 이 말을 들은 톱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내 이빨은 장작과 고물도 깨끗하게 베어낼 수 있다.’ 이를 듣고 있던 혀가 이렇게 자랑했습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자랑해도 나하고는 비교가 안 돼, 나는 남들이 쌓아 놓은 명성, 명예, 우정 등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힘을 가졌거든, 내가 끼어들면 죽마고우도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고, 눈앞에 둔 대권도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 몰라! 가위야, 너는 옷을 썰다 보면 이가 상하고 녹슬 수도 있고, 톱은 굳은 것을 썰고 나면 망가지기도 하지만 나는 아무리 지껄여도 닳는 일이나 파손되는 일이 없어! 나는 내 생명이 다 할 때까지 활동하지!’”
이처럼 혀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그리고 혀는 우리 신체 중에 3치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것이지만 실상은 세상과 같이 넓고 큽니다. 그래서 인구, 식구, 호구 등을 말할 때 모두 ‘口’자를 씁니다. 이는 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대표합니다. 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고 역사가 달라집니다. 정치인들이 설화 사건으로 정치 생명이 끝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금언 중에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씌우리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는 말씀은 “말을 하라! 그러나 실수가 없도록 하라!”는 말씀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입 뒀다 뭐합니까? 다른 기관과 달리 입은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먹고 말하기 위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한 광훈 목사나 이에스더 선교사에게 입을 다물고 있으라면 그분들은 존재의미를 찾지 못해 아마 이상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면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의 책을 보면 여성들은 말을 많이 하여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래 말을 많이 해, 그러나 실수가 없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지도자는 말에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도자란 말을 많이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의 실수는 지도자 뿐만 아니라 인간 모두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말에 실수가 있으면 은 몸에 굴레를 씌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저자는 2-12절에서 말(馬), 배(船), 불(火), 샘(泉) 등에 비유하여 말에 실수가 없도록 말씀합니다. 말에 실수가 있을 때 우리의 전인격에 중대한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반면 말에 실수가 없을 때 온 몸이 승리하게 됩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말(馬)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말의 입에 재갈을 먹이지 않은 채 놓쳤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커다란 인명피해와 많은 파괴와 손실을 가져오게 됩니다. 굴레를 벗은 말은 고함을 지르고 앞 뒷발을 차기 때문에 다루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재갈이 풀린 말이 뒷발질하면 당할 장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야생마의 입에 굴레를 씌워 놓으면 어린아이도 부릴 수 있습니다. 사람이나 짐을 실어 나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말(言語)은 굴레 없는 말(馬)과 같아 제어하지 않으면 우리 인간 자체가 쓸모없게 됩니다. 잠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10:19).” 또 잠언 20: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함부로 말을 하는 자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잠13:3). 그러므로 혀를 재갈 물려야 합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바다 위에 떠다니는 거대한 배도 작은 키 하나에 따라 방향이 결정됩니다. 배의 키를 잘못잡으면 암초에 걸려 파선할 위험이 있습니다. 광풍의 노도에 표류되어 화를 당할 수 있고, 적진에 들어가 포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키는 작고, 또 배의 뒤쪽에 있지만 이 키에 의하여 거대한 선체가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혀가 아무리 작지만 중요한 인생행로를 결정지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혀는 우리의 온 몸의 행동을 지배합니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도 자기 혀를 지배하지 못하면 비극의 종말을 맞게 됩니다. 혀의 중요성을 깨닫고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5,6절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성냥 한 개비의 불이 비록 작은 것이지만 온 집을 태우고, 더 나아가 온 동리를 태우고, 전 세계를 태울 수 있습니다. 불이 지닌 파괴력은 엄청납니다. 그래서 불을 보고 겁내고, 피하게 됩니다. 우리의 혀도 이처럼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타오르는 불길이 퍼질 때 그것을 다스리기 어렵듯이 우리의 혀도 다스리기 어려우며 화재가 남긴 비참한 현장처럼 혀도 사람들에게 재앙과 상처와 비극을 가져다줍니다.
혀를 불에 비교한 예는 성경 곳곳에 있습니다. 잠언 16장 27절을 보면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잠언 26장 18-20절을 보면 “횃불을 던지며 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고 했습니다. 말쟁이가 없으면 평화가 오고, 말쟁이이가 많으면 주위에 다툼을 확산시킵니다. 도둑질과 거짓말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쁩니까? 물론 도둑질도 나쁘지만 거짓말은 더 나쁩니다.
왜냐하면 도둑질은 도둑질한 물건을 갖다 놓으면 되지만 한번 토한 말은 다시 담을 수 없고, 말로 다른 사람에게 인격과 생애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면 그 사람은 다시 회복할 수 없게 됩니다. “무심코 저 사람 빨갱이야!”하면 한국에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7,8절을 보겠습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사나운 짐승을 잘 길들여 놓으면 효용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길들여지지 않는 짐승들은 난폭합니다. 그런데 짐승을 길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훈련시키면 또 됩니다. 그런데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날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컴퓨터로 모든 기계를 제어한다고 하지만 혀를 제어하는 과학은 아직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훈련되지 않은 혀는 어떻게 됩니까?
9-12절을 보겠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훈련되지 않은 혀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다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을 저주합니다.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옵니다.
성경은 반문합니다. 같은 샘에서 단 물이 나오며 쓴 물이 나올 수 있습니까? 여기에서 단 물이란 영어로 fresh로 신선한 물을 말하며, 쓴 물은 짠물을 말합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에서 감람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포도나무에서 무화과를 맺을 수 없습니다.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를,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리는 것처럼 자연은 일관성 있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무화과를 심었는데 감람 열매가 맺혔다면 그것은 감람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원망과 불평과 불신, 그리고 부정적인 복음적이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예수 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육신의 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외쳐도 입이 할례를 받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예수 나무를 심지 않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일구이언하는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3장 8절을 보면 집사의 자격을 말할 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온전한 성도란 두 가지가 동시에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서 악과 선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나온다는 것은 중대한 잘못입니다.
누가복음 6장 45절을 보면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고 했습니다. 악을 쌓으면 악한 말을 하고 악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을 말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하려면 선을 쌓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창고와 같아서 무엇인가를 쌓아야 합니다. 그런데 선을 쌓으면 선한 사람이 되고 악을 쌓으면 악한 사람이 됩니다. 선은 예수님의 성품, 성령의 열매, 성경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도생활입니다. 쌓는다는 것은 계속적인 뜻이 있습니다. 빌딩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벽돌 한 장 한 장 쌓음을 통해 거대한 빌딩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생각을 계속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물량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작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처럼 매일 끊임없이 쌓으면 선하고 아름다운 인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럭키 금성의 창업자인 구인회씨는 큰돈보다 작은 돈을 귀히 여겼다고 합니다. 그 때 그는 대기업의 총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일용할양식을 먹고 몇 분이라도 매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별 것 아닐 것처럼 생각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1년, 5년, 10년이 지나고 보면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믿음, 사랑, 진실, 겸손, 온유, 섬김, 인내 등을 마음의 창고에 조금씩 조금씩 쌓으면 믿음의 사람, 사랑과 의의 사람, 겸손한 사람,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공동체가 어려워집니다. 반면에 혀를 잘 훈련시키면 위대한 생명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혀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로 결심하고 소원해야 합니다. 자기 의지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나의 반석이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창조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환경에 많이 좌우됩니다. 대부분 그릇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쁜 친구들을 사귀었기 때문입니다. 욕설을 배우는 경로는 친구(47.7%), 인터넷(26.4%), 영화(10.2%) 등인데 친구가 단연 높은 수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나야 합니다. 저는 자녀들읃 위해 기도할 때 세 사람을 잘 만나도록 기도합니다. 하나는 좋은 스승, 또 하나는 좋은 배우자, 또 다른 하나는 친구입니다.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친구 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좋은 친구 되신 예수님께 기도할 때 언어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지배를 받을 때 우리는 성숙해집니다. 주님은 강포를 행치 않습니다. 그 입에는 궤사가 없습니다(사53:9). 마가복음 7장 21절을 보면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4장 23,24절을 보면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내면을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이 때 우리가 주님의 순결하고 아름다운 언어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궤사를 행하던 혀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셋째,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라(13-18)
지혜란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지혜는 혀와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사람이 아무리 지혜가 많아도 그것이 삶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 지혜는 무의미합니다.
지식이 어떠한 사실에 대해 아는 것이라면 지혜는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그의 삶에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그의 삶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면서도 그의 삶에 자신의 지혜를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했습니다. 온유함은 유약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람으로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지혜는 이 세상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은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라”(잠8:11)고 했습니다.
지혜에는 참 지혜와 거짓 지혜, 하늘의 지혜와 땅의 지혜, 하나님께 속한 지혜와 사단에게 속한 지혜가 있습니다. 미국의 사상가요 시인이었던 에머슨은 “라파엘은 지혜로 그림을 그렸고, 헨델은 지혜로 노래했고, 세익스피어는 지혜로 썼고, 콜럼버스는 지혜로 항해했고, 루터는 지혜로 설파했고, 워싱톤은 지혜로 무장했고, 왓트는 지혜로 기계화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지혜는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는 매우 귀중한 요소입니다(잠8:11).
성경은 땅의 지혜와 하늘의 지혜를 말씀합니다.
첫째로 땅의 지혜는 바람직하지 못한 지혜입니다. 14-16절을 보면 땅의 지혜는 독한 시기입니다. 독한 시기는 그릇된 열심을 말합니다. 다툼입니다. 또 자기를 드러냅니다. 진리를 거슬려 거짓말합니다. 이런 세상적인 특징의 결과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입니다.
둘째로 위로부터 오는 참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17-18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하나님의 지혜의 첫째는 성결입니다. 둘째는 화평입니다. 셋째는 관용입니다. 넷째는 양순입니다. 다섯째는 긍휼과 선한 열매입니다. 선한 열매는 긍휼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여섯째로 편견과 거짓이 없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결과는 화평과 의입니다.
우리는 입으로 많은 죄를 짓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줍니다. 그러므로 말에 실수가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 혀를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가 혀를 제어할 때 성숙한 성도가 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성숙한 성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