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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제 7 강 4:11-17, 요절 4:12
남을 비방하지 말고 자기를 자랑하지 말라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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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은 앞에서 덤벼들지만 비방은 언제나 뒤에서 몰래 덮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남을 비방하고 헐뜯습니까? 이는 각기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각기 생각이 다르면 서로 다투고 그러다가 뒤에서 험담하고 비방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방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하든 일단은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수용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러고 나서 자기의 주장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 주장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화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인의 약점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회의나 토론을 잘 못하여 싸움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원수로 여깁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릇이 큰 사람은 상대가 나와 다르기 때문에 친하게 지내려고 하고, 소인은 나와 다른 것 때문에 싸우고 원수를 맺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다른 사람을 비방하기보다 칭찬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행복하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법은 남을 칭찬하면 됩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큰 것을 얻어야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말 한 마디에 행복을 느끼고 불행을 느낍니다.
천국방언은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방언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이해합니다’ 입니다. 우리가 천국방언을 하여 나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11,12)
첫째로 비방하지 말라
11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신약 성경에 ‘비방’에 대한 말씀이 56번 나옵니다. 바울이 비방에 대한 말씀을 많이 했고, 베드로도 비방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야고보가 비방에 대해 교훈을 합니다.
마음속의 온갖 악한 생각을 다른 사람이 알 수 없습니다. 또 그 생각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있는 악한 생각이 말을 통해 밖으로 나오면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남의 생각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닙니다.
만약 서로가 서로의 마음속의 생각과 상상을 뻔히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루도 같이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서로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서로의 마음속의 생각을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큰 복입니다. 상대방의 마음 아는 것은 병이고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속에 있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지를 못합니다. 저도 그래요. 제가 좀 억울하고 섭섭한 일을 당하면 그 억울함을 내 마음속에 담지를 못합니다. 무의식중에 속에 담아 둔 생각이 말로 무심코 툭 튀어나옵니다. 우리 같은 범인들은 아무리 조심해도, 아무리 참을 인자를 외워도 속에 있는 말을 담아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을 비방합니다.
이 말씀은 교회 공동체에 주는 말씀입니다. “형제들아”라고 부른 것은 교회 공동체를 향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는 자도 듣는 자도 교회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비방’은 남을 무시하고, 험담하고, 깔아뭉개기 위해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back biting, 즉 당사자가 없는 데서 무는 겁니다. 뒤에서 헐뜯고 욕하고 중상모략 하는 것입니다. 칭찬은 본인이 없는데서 해야 하고, 비방 또한 본인이 없는 데서는 하지 않는 것이 덕입니다.
비방은 살인행위입니다. 자살하는 연예인들을 보면 거의가 비방을 견디지 못해서입니다. 인터넷의 특징은 비대면성, 익명성입니다. 그러다 보니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함부로 합니다. 비방하고 헐뜯습니다. 살인은 칼이나 총으로만 하는 것이 압니다. 사슴이 사냥꾼이 쏜 화살을 급소에 맞으면 그 자리에 꼬꾸라지지만, 빗맞으면 도망갑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피를 많이 흘려 결국은 죽고 맙니다. 비방의 화살은 상대방의 급소를 맞힐 수도 있지만 빗맞힐 수도 있습니다. 충격적인 비방의 말을 들으면 3-4년 후에 심장병과 암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에게 비방의 화살을 쏴서는 안 됩니다.
말로 상처를 많이 받는 곳이 어떤 의미에서는 가정입니다. 사람이 부모로부터 가장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상처를 많이 주고 는 것이 남편과 아내입니다. 상처를 주고받는 곳은 이웃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아니라 바로 내 주변의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의 말 때문에 상처를 받았으면 그 상처는 반드시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병에 걸려 스스로 불에 타 죽게 됩니다. 로마의 철인 세네카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악한 마음을 품으면 그 해독의 절반은 이미 자기가 마시는 셈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남을 비방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마음속에 좋은 생각을 담아야 합니다. 좋은 생각은 상대방에 대한 감사,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생각, 선한 일을 생각하고, 진리 편에 서고,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생각을 하면 좋은 말이 튀어 나옵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 품격입니다. 좋은 생각, 좋은 사상, 좋은 뜻을 품고 있으면 말도 그렇게 나옵니다. 마음속에 좋지 못한 생각과 사상과 뜻을 품고 있으면 튀어나오는 말도 그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존귀하십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특권과 영광과 권세를 다 버리고 이 땅에 가장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한계적인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의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영광스러운 예수님이 종의 모습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영화로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가난한 목수의 아들, 비천한 자들을 위해 가장 낮은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까지 그들을 겸손히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생각이 천박한 인간들을 겸손히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요(히9:26),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과 희생을 배워야 합니다.
둘째로 판단하지 말라
1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판단’이란 재판정에서 판사가 판정을 내리는 정죄를 뜻합니다. 판단은 결정적입니다. 우리는 무심코 “그 사람 구원받았어?”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함부로 구원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말할 수 없습니다. 무디는 그런 질문을 받고 “나는 예수님 앞에 있는 생명책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고 했다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예수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뿐입니다. 누가 천국 갔고 누가 지옥 갔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다 형제요 자매입니다. 누구는 나쁘고 누구는 좋다고 판정을 내리면 안 됩니다. 사람은 다 별 수 없습니다. 내게 잘해주면 좋은 사람이고 나에게 잘 못하면 나쁜 사람입니다. 우리의 판단기준이 그 수준입니다. 밥 한 그릇 사주면 좋은 사람이고, 좋은 자리에 나만 쏙 빼놓으면 나쁜 사람입니다. 저도 이 범주에 벗어나지 못합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율법을 비방하는 것이고,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율법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비방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남을 비방하는 것은 마귀의 일을 돕는 것이고,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일은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간 붙이는 자요 참소자입니다. 서로 불화하고 싸우고 비방하는 것은 마귀의 일을 돕는 것이고 내가 망하는 것이고 남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은 평생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아무 생각 없이 입법자도 되고 재판자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고는 누구도 사람을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성경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성경에 어디에도 보복하라, 정죄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 기뻐하라, 복음전하라’ 하십니다. 심판과 복수는 하나님의 고유 영역입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입니다.
예레미야서 51장 24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눈 앞에서 그들이 모든 악을 행한 대로 내가 바벨론과 갈대아 모든 주민에게 갚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직접 갈대아 모든 거민에게 갚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손에 피를 묻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다 아시고 직접 복수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정죄와 심판을 주님께 맡기고 다만 감사하고 기뻐하고 용서하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격려하고 위로하며 봉사하고 사랑으로 대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둘째, 자기를 자랑하지 말라(13-17)
13절을 보겠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유대인들은 1세기에도 상술이 뛰어나 유대인들이 가는 곳마다 도시가 발달되고 무역이 흥왕하여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오는 것을 대환영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새 도시를 찾아 무역 범위를 확장하고, 새로운 개척지로 나아가 이윤을 취했습니다. 그들은 늘 어느 곳에 가면 돈을 많이 벌고, 늘 어떻게 하면 떼돈을 벌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야고보는 그들에게 ‘들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욕망만을 쫓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사람들이 ‘오늘 이 도시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은 돈이 그들의 구주가 됩니다.
그들의 최후가 어떠합니까? 14절을 보겠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보인다’는 것은 빛난다는 뜻입니다. 인생은 잠깐 반짝이다가 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세월은 날아가는 화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쏜 화살이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내가 목표로 하는 과녁에 반드시 맞으라는 법 없습니다. 우리가 계획을 세우지만 눈앞의 내일을 알 수 없습니다.
어제 신문을 보니 지금 주식 시장이 말이 아닙니다. 누가 경제 동향을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은 계획성 있는 생활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계획은 미래를 보장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2장에서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농부가 농사일이 잘 되어 소출이 많아졌습니다. 그는 금년에는 현재의 곡간에 양식을 보관할 수 없을 것 같아 각기 곡간을 인수 합병하여 크게 늘렸습니다. 드디어 곡간마다 풍성한 곡물로 채워졌습니다.
그는 그날 저녁에 이렇게 독백했습니다. “또 내가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눅 12:19). 그런데 하나님이 그날 밤에 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 12:20). 이처럼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오직 영원하신 주님과 연합한 삶을 살 때만이 확실하고 영원합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인간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생명을 들의 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사 40:6-7). 욥기는 바람 같다(욥 14:2), 낙엽과 같다(욥 13:25), 그림자 같다고 하였습니다(욥 14:2). 시편 기자는 그림자 같다고 했습니다(시 39:6). 에드워드 영은 “시간의 급류 위에 떠오르는 물거품 같은 인생이라”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인생을 안개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이 안개라는 사실을 알 때 이 땅에서 다투며 욕망을 부리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내일을 모릅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령을 의지함이 필요합니다.
15,16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허탄하다’는 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자랑은 모두 악한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안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재물이 있다, 나는 힘이 있다.’ 우리의 자랑은 허탄한 자랑이 됩니다.
성경은 부득불 자랑하고 싶으면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사면이 거울로 만들어진 좁은 통로 길을 만들고 지나가는 여자들을 관찰하였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 본 여자는 못생기고 볼품없는 사람이 아닌 예쁘고 매력 있게 보이는 여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매력적인 모습을 확인하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을 자랑하면 가난한 사람이 부러워하고, 지식을 자랑하면 무지한 자가 부러워하고, 옷을 자랑하면 수수한 자가 부러워하고, 건강을 자랑하면 약한 자가 부러워하게 되고 상처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행여 내 가족이라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다이어트하고 정말 자랑하고 싶으면 예수님만 자랑하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한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사람들이 왜 망합니까? 지식이 없어서입니까? 물질이 없어서입니까? 지혜가 없어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삶에 적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고도 행치 않으면 죄입니다. 죄는 영원한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아름다운 삶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선한 일은 돈을 벌고 난 다음에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일은 돈 벌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 벌어서 선한 일 하는 것은 선한 일이 못되고 생색내는 일이 되기 쉽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은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선이란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선은 행해야 온전해 집니다.
어느 날 돼지가 이렇게 투덜댑니다. “사람들은 왜 나보고 먹고 놀기만 한다고 하는 거야. 내가 먹고 놀기는 하지만 결국은 고기와 뼈까지 다 사람들에게 바치는데” 그 불평을 옆에서 듣고 있는 소가 말합니다. “나는 살아서도 뼈 빠지게 주인을 위해 일하고 죽어서도 고기와 가죽과 뼈까지 주인에게 바치지만 너는 죽은 다음에 뼈와 살이 필요 없게 되니까 주인에게 주는 거 아니냐. 그러니까 사람들이 너보고 먹고 놀기만 하는 돼지라고 하지”
우리는 죽을 때 교회나 사회나 학교에 기부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죽을 때 내 놓는 것 보다는 살아서 내 놓는 것이 더 좋습니다. 돈을 쓸 수 없게 되어 내 놓는 것보다 내가 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놓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공부하는 것은 때가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선은 항상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도 기회가 있습니다. 망설이다가 선을 행할 기회를 잃게 됩니다. 야고보서는 경고합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이 죄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선을 행하기를 기도합니다.
남을 비방하지 말고 자기를 자랑하지 말라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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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은 앞에서 덤벼들지만 비방은 언제나 뒤에서 몰래 덮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남을 비방하고 헐뜯습니까? 이는 각기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각기 생각이 다르면 서로 다투고 그러다가 뒤에서 험담하고 비방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방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하든 일단은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수용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러고 나서 자기의 주장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 주장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화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인의 약점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회의나 토론을 잘 못하여 싸움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원수로 여깁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릇이 큰 사람은 상대가 나와 다르기 때문에 친하게 지내려고 하고, 소인은 나와 다른 것 때문에 싸우고 원수를 맺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다른 사람을 비방하기보다 칭찬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행복하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법은 남을 칭찬하면 됩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큰 것을 얻어야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말 한 마디에 행복을 느끼고 불행을 느낍니다.
천국방언은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방언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이해합니다’ 입니다. 우리가 천국방언을 하여 나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11,12)
첫째로 비방하지 말라
11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신약 성경에 ‘비방’에 대한 말씀이 56번 나옵니다. 바울이 비방에 대한 말씀을 많이 했고, 베드로도 비방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야고보가 비방에 대해 교훈을 합니다.
마음속의 온갖 악한 생각을 다른 사람이 알 수 없습니다. 또 그 생각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있는 악한 생각이 말을 통해 밖으로 나오면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남의 생각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닙니다.
만약 서로가 서로의 마음속의 생각과 상상을 뻔히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루도 같이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서로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서로의 마음속의 생각을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큰 복입니다. 상대방의 마음 아는 것은 병이고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속에 있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지를 못합니다. 저도 그래요. 제가 좀 억울하고 섭섭한 일을 당하면 그 억울함을 내 마음속에 담지를 못합니다. 무의식중에 속에 담아 둔 생각이 말로 무심코 툭 튀어나옵니다. 우리 같은 범인들은 아무리 조심해도, 아무리 참을 인자를 외워도 속에 있는 말을 담아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을 비방합니다.
이 말씀은 교회 공동체에 주는 말씀입니다. “형제들아”라고 부른 것은 교회 공동체를 향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는 자도 듣는 자도 교회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비방’은 남을 무시하고, 험담하고, 깔아뭉개기 위해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back biting, 즉 당사자가 없는 데서 무는 겁니다. 뒤에서 헐뜯고 욕하고 중상모략 하는 것입니다. 칭찬은 본인이 없는데서 해야 하고, 비방 또한 본인이 없는 데서는 하지 않는 것이 덕입니다.
비방은 살인행위입니다. 자살하는 연예인들을 보면 거의가 비방을 견디지 못해서입니다. 인터넷의 특징은 비대면성, 익명성입니다. 그러다 보니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함부로 합니다. 비방하고 헐뜯습니다. 살인은 칼이나 총으로만 하는 것이 압니다. 사슴이 사냥꾼이 쏜 화살을 급소에 맞으면 그 자리에 꼬꾸라지지만, 빗맞으면 도망갑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피를 많이 흘려 결국은 죽고 맙니다. 비방의 화살은 상대방의 급소를 맞힐 수도 있지만 빗맞힐 수도 있습니다. 충격적인 비방의 말을 들으면 3-4년 후에 심장병과 암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에게 비방의 화살을 쏴서는 안 됩니다.
말로 상처를 많이 받는 곳이 어떤 의미에서는 가정입니다. 사람이 부모로부터 가장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상처를 많이 주고 는 것이 남편과 아내입니다. 상처를 주고받는 곳은 이웃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아니라 바로 내 주변의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의 말 때문에 상처를 받았으면 그 상처는 반드시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병에 걸려 스스로 불에 타 죽게 됩니다. 로마의 철인 세네카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악한 마음을 품으면 그 해독의 절반은 이미 자기가 마시는 셈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남을 비방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마음속에 좋은 생각을 담아야 합니다. 좋은 생각은 상대방에 대한 감사,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생각, 선한 일을 생각하고, 진리 편에 서고,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생각을 하면 좋은 말이 튀어 나옵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 품격입니다. 좋은 생각, 좋은 사상, 좋은 뜻을 품고 있으면 말도 그렇게 나옵니다. 마음속에 좋지 못한 생각과 사상과 뜻을 품고 있으면 튀어나오는 말도 그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존귀하십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특권과 영광과 권세를 다 버리고 이 땅에 가장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한계적인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의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영광스러운 예수님이 종의 모습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영화로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가난한 목수의 아들, 비천한 자들을 위해 가장 낮은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까지 그들을 겸손히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생각이 천박한 인간들을 겸손히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요(히9:26),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과 희생을 배워야 합니다.
둘째로 판단하지 말라
1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판단’이란 재판정에서 판사가 판정을 내리는 정죄를 뜻합니다. 판단은 결정적입니다. 우리는 무심코 “그 사람 구원받았어?”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함부로 구원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말할 수 없습니다. 무디는 그런 질문을 받고 “나는 예수님 앞에 있는 생명책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고 했다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예수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뿐입니다. 누가 천국 갔고 누가 지옥 갔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다 형제요 자매입니다. 누구는 나쁘고 누구는 좋다고 판정을 내리면 안 됩니다. 사람은 다 별 수 없습니다. 내게 잘해주면 좋은 사람이고 나에게 잘 못하면 나쁜 사람입니다. 우리의 판단기준이 그 수준입니다. 밥 한 그릇 사주면 좋은 사람이고, 좋은 자리에 나만 쏙 빼놓으면 나쁜 사람입니다. 저도 이 범주에 벗어나지 못합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율법을 비방하는 것이고,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율법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비방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남을 비방하는 것은 마귀의 일을 돕는 것이고,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일은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간 붙이는 자요 참소자입니다. 서로 불화하고 싸우고 비방하는 것은 마귀의 일을 돕는 것이고 내가 망하는 것이고 남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은 평생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아무 생각 없이 입법자도 되고 재판자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고는 누구도 사람을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성경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성경에 어디에도 보복하라, 정죄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 기뻐하라, 복음전하라’ 하십니다. 심판과 복수는 하나님의 고유 영역입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입니다.
예레미야서 51장 24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눈 앞에서 그들이 모든 악을 행한 대로 내가 바벨론과 갈대아 모든 주민에게 갚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직접 갈대아 모든 거민에게 갚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손에 피를 묻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다 아시고 직접 복수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정죄와 심판을 주님께 맡기고 다만 감사하고 기뻐하고 용서하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격려하고 위로하며 봉사하고 사랑으로 대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둘째, 자기를 자랑하지 말라(13-17)
13절을 보겠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유대인들은 1세기에도 상술이 뛰어나 유대인들이 가는 곳마다 도시가 발달되고 무역이 흥왕하여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오는 것을 대환영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새 도시를 찾아 무역 범위를 확장하고, 새로운 개척지로 나아가 이윤을 취했습니다. 그들은 늘 어느 곳에 가면 돈을 많이 벌고, 늘 어떻게 하면 떼돈을 벌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야고보는 그들에게 ‘들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욕망만을 쫓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사람들이 ‘오늘 이 도시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은 돈이 그들의 구주가 됩니다.
그들의 최후가 어떠합니까? 14절을 보겠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보인다’는 것은 빛난다는 뜻입니다. 인생은 잠깐 반짝이다가 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세월은 날아가는 화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쏜 화살이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내가 목표로 하는 과녁에 반드시 맞으라는 법 없습니다. 우리가 계획을 세우지만 눈앞의 내일을 알 수 없습니다.
어제 신문을 보니 지금 주식 시장이 말이 아닙니다. 누가 경제 동향을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은 계획성 있는 생활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계획은 미래를 보장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2장에서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농부가 농사일이 잘 되어 소출이 많아졌습니다. 그는 금년에는 현재의 곡간에 양식을 보관할 수 없을 것 같아 각기 곡간을 인수 합병하여 크게 늘렸습니다. 드디어 곡간마다 풍성한 곡물로 채워졌습니다.
그는 그날 저녁에 이렇게 독백했습니다. “또 내가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눅 12:19). 그런데 하나님이 그날 밤에 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 12:20). 이처럼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오직 영원하신 주님과 연합한 삶을 살 때만이 확실하고 영원합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인간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생명을 들의 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사 40:6-7). 욥기는 바람 같다(욥 14:2), 낙엽과 같다(욥 13:25), 그림자 같다고 하였습니다(욥 14:2). 시편 기자는 그림자 같다고 했습니다(시 39:6). 에드워드 영은 “시간의 급류 위에 떠오르는 물거품 같은 인생이라”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인생을 안개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이 안개라는 사실을 알 때 이 땅에서 다투며 욕망을 부리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내일을 모릅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령을 의지함이 필요합니다.
15,16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허탄하다’는 것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자랑은 모두 악한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안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재물이 있다, 나는 힘이 있다.’ 우리의 자랑은 허탄한 자랑이 됩니다.
성경은 부득불 자랑하고 싶으면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사면이 거울로 만들어진 좁은 통로 길을 만들고 지나가는 여자들을 관찰하였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 본 여자는 못생기고 볼품없는 사람이 아닌 예쁘고 매력 있게 보이는 여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매력적인 모습을 확인하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을 자랑하면 가난한 사람이 부러워하고, 지식을 자랑하면 무지한 자가 부러워하고, 옷을 자랑하면 수수한 자가 부러워하고, 건강을 자랑하면 약한 자가 부러워하게 되고 상처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행여 내 가족이라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다이어트하고 정말 자랑하고 싶으면 예수님만 자랑하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한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사람들이 왜 망합니까? 지식이 없어서입니까? 물질이 없어서입니까? 지혜가 없어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삶에 적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고도 행치 않으면 죄입니다. 죄는 영원한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아름다운 삶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선한 일은 돈을 벌고 난 다음에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일은 돈 벌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 벌어서 선한 일 하는 것은 선한 일이 못되고 생색내는 일이 되기 쉽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은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선이란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선은 행해야 온전해 집니다.
어느 날 돼지가 이렇게 투덜댑니다. “사람들은 왜 나보고 먹고 놀기만 한다고 하는 거야. 내가 먹고 놀기는 하지만 결국은 고기와 뼈까지 다 사람들에게 바치는데” 그 불평을 옆에서 듣고 있는 소가 말합니다. “나는 살아서도 뼈 빠지게 주인을 위해 일하고 죽어서도 고기와 가죽과 뼈까지 주인에게 바치지만 너는 죽은 다음에 뼈와 살이 필요 없게 되니까 주인에게 주는 거 아니냐. 그러니까 사람들이 너보고 먹고 놀기만 하는 돼지라고 하지”
우리는 죽을 때 교회나 사회나 학교에 기부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죽을 때 내 놓는 것 보다는 살아서 내 놓는 것이 더 좋습니다. 돈을 쓸 수 없게 되어 내 놓는 것보다 내가 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놓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공부하는 것은 때가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선은 항상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도 기회가 있습니다. 망설이다가 선을 행할 기회를 잃게 됩니다. 야고보서는 경고합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이 죄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선을 행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