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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제 8강 5:1-6, 요절 5:1
성도의 바른 물질관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리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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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금융위기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이 금융위기는 가정과 캠퍼스와 직장과 사회 곳곳에 파고 들어와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 줄 것입니다. 이 때 사람들은 믿을 것은 돈밖에 없다며 돈을 붙들고 돈에 소망을 두고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려울수록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붙들어야 어려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8장을 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극한 시련과 환난이 있었습니다. 극심한 가난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초근목피,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베껴 먹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힘써 기근으로 고통당하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도왔습니다. 이로 인해 좋은 믿음의 예를 남겼습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혹한과 배고픔과 맹수의 습격 등의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그들은 미국에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소망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그 때 그들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오늘의 미국을 건설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일제의 참혹한 학정으로 인해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참혹한 역경을 디디고 평양을 중심하여 제 2의 예루살렘 교회라 일컫는 큰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어려운 시대일수록 크리스천의 바른 물질관을 갖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은 부자라고 무조건 정죄하고, 가난한 자라고 무조건 동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귀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그릇된 목적을 가지고, 그릇된 방법으로 물질을 모으며 그릇된 곳에 물질을 쓰는 부자들에 대해 하나님은 엄히 경고하십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1). 야고보는 엄히 책망할 때 들으라고 경고하십니다. 야고보서 4장 13절을 보면 물질에 목적을 두고 사는 사람들을 향해 들으라고 했습니다. 이제 부한 자들을 향해 들으라고 했습니다.
부한 자들은 현재의 삶이 안락한 것처럼 미래에도 계속 평안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장래가 어떠합니까? 그들은 울며 통곡하게 됩니다. ‘울고 통곡한다’는 것은 처참한 심판에 대한 울부짖음을 말합니다. 왜 그토록 울고 통곡합니까? 그들에게 불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5장 3b절을 보면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불은 최후의 심판을 말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2절에 장차 임할 진노의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리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9장 48,49절을 보면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고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21장 8절을 보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의 날에 불로 심판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그리하셨고, 폼페이를 그리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환자는 화상을 입은 환자입니다. 그런데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는 불의 심판을 받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면 부한 자들이 왜 이처럼 참혹한 불심판을 받게 됩니까?
첫째, 물질을 모으는 목적이 불의했기 때문입니다
.
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그들은 재물을 부지런히 모았습니다. 누구도 재물을 부지런히 모은 것을 탓할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재물 모으는 방법이 불의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재물을 모았는지 아십니까? 얼마나 재물을 사재기했는지 창고에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옷을 사재기했는지 장롱 속에서는 옷이 좀 먹고 있었습니다. 입는 옷이나 싼 옷은 절대로 좀 먹지 않습니다. 입지 않는 옷과 실크나 순모 모직 등 비싼 옷에 좀이 습니다. 그들은 입지도 않는 옷을 장롱 속에 수북하게 쌓아 놓았습니다. 모아 놓은 재물이 창고에서 썩어가고, 옷이 옷장에서 좀이 먹어가자 이제는 녹이 슬지 않는다는 금과 은을 닥치는 대로 사재기하여 금고에 금과 은이 가득했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원래 금과 은은 녹이 슬지 않습니다. 그런데 금과 은이 금고에서 시퍼렇게 녹이 슬었습니다.
돈이란 돌고 돌아야 합니다.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그때부터 돈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한 자들은 재물을 쌓아 두기만 했습니다. 그들이 왜 이처럼 쌓아두기만 했습니까? 이는 장래가 불안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장래가 불안하자 믿을 것은 돈밖에 없다며 돈을 의지하고 돈을 움켜쥐고 돈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요즘 주식이 떨어지고 달라가 하락하자 금을 사재기합니다. 교회 자녀들의 돌이나 백일에 금 한 돈 반지를 선물했는데 요즘은 엄두도 못 냅니다. 장래가 불안하자 믿을 것은 금밖에 없다며 금을 사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현금밖에 믿을 것이 없다며 현금을 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동산이 얼어붙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수북하게 쌓아 놓은 금과 현금을 쳐다보며 안심했습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보다 돈신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돈신을 의지하고 돈신을 숭배하는 자들의 최후는 불심판 밖에 없습니다. 말세의 때에 롯의 아내는 두고 온 물질에 연연하여 뒤를 돌아보다 그만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쓰레기는 모으지 않고 돈을 모을까요? 돈에는 엄청난 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고,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동안 우리나라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돈은 큰 위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돈으로 황금 침대를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단잠을 잘 수 없습니다.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사 먹을 수 있지만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식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호화주택을 살 수 있지만 sweet home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보약을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사치를 부릴 수 있지만 문화는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쾌락을 살 수 있지만 행복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금 십자가를 살 수 있지만 십자가의 복음을 살 수 없습니다.
미다스는 술(酒)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디오니소스는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미다스가 만지는 대로 황금이 되었습니다. 정원수, 조각물, 가구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황금으로 변했습니다. 미다스는 신이 났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만지기만 하면 황금이 되니 도대체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음식을 만지니 황금으로 변하였습니다. 상심한 그는 무심코 자기 아내의 손을 잡았다가 기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부인이 금덩어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뒤늦게 지나친 욕심을 반성한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에게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달라고 간청했으며, 그 뒤 다시는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오늘날 미다스는 탐욕, 과욕을, 미다스의 손(Midas touch)은 돈 버는 재주라는 뜻을 지닌 숙어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탐심, 탐욕은 남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파멸로 내몹니다.
그리고 돈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부자 3대 못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2008년도 우리는 1850년에 설립된 역사가 깊은 미국 4대 투자 은행인 리먼 브러더스가 하루아침에 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기업이 60년이 채 안 됩니다. 3대 경영 체제가 갖춘 기업이 없습니다. 삼성, 현대, LG가 2대에서 3대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지금 3세대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두렵고 떨림으로 기업을 경영해야 합니다. 미다스와 같이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물불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손을 대면 안 됩니다. 중소기업이 해야 할 일까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루아침에 리먼 브러더스 꼴이 됩니다.
지금 글로벌 금융위기의 먹구름이 지구촌을 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는 또 다른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물신을 섬기고 황금만능주의에 몰든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고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돈을 의지하는 맘몬이즘, 돈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말세의 때 돈신, 맘몬이즘을 배격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믿음에 부한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5장 4,6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였도다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신명기 24장 14,15절과 레위기 19장 13절을 보면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임금을 지불하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노동자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만일 품삯을 주지 않으면 그 부양가족들이 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품삯을 떼어먹지 말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했습니다. 그들은 받을 때에는 현금으로 받고, 품삯을 줄 때에는 6 개월짜리 어음을 끊어주고, 그 자리에서 어음을 할인하는 수법으로 품삯을 착취했습니다. 어떤 부한 자들은 아예 품삯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등쳐서 재물을 모으는 등 가난한 자들의 얼굴에 맷돌질하였습니다. 품삯을 주지 않아 관가에 탄원서를 제출하면 오히려 그들은 관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명예 훼손죄로 집어넣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부한 자들은 심지어 대항하지 않는 이들까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습니다. 그들은 주식 투기, 환투기, 땅 투기 등으로 돈을 모았습니다. 이처럼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모은 부자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요즘 노동시장이 매우 불안합니다. 회사는 정규직을 뽑지 않고 비정규직을 뽑아 언제든지 해고시켜 노동시장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85호 크레인 위에서 200일째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씨는 한국 노동시장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노동시장은 안정이 돼야 합니다. 직장에서 갑자기 해고됐을 때 가정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세요. 가진 자들은 이윤만을 생각하지 말고 좀 더 양보하여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사회가 건강하게 됩니다.
셋째, 불의한 곳에 돈을 허비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5장 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그들은 모은 돈을 가지고 사치하고 연락했습니다. 룸 살롬에 가서 몇 백 만 원짜리 술을 마시고, 몇 백만 원씩 계집들에게 팁을 주고, 육신의 탐욕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성병에 걸려 비뇨기과를 찾았습니다. 몇 십 평짜리 아파트를 사서 위 아래로 헐어 풀장을 만들고, 호화롭게 장식하여 값비싼 가구를 사들였습니다. 보신 관광, 기생 관광, 골프관광을 일삼고 호의호식하여 그들의 배는 나오다 못해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사람이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면 향락과 쾌락에 탐닉하는 것은 변치 않는 하나의 공식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향락 산업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든지 천지가 술집입니다. 서울 강남에는 천지가 고급 요정이라 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육신의 쾌락을 위하여 그 많은 돈을 쓸 수 있습니까? 어떻게 몇 백 만 원짜리 술을 마시며 육신의 쾌락을 즐길 수 있습니까? 피땀 흘려서 번 돈, 정상적인 방법으로 번 돈을 가지고는 그렇게 흥청망청 쓸 수 없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쓸 수 있었던 것은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크리스천의 올바른 물질관이 어떠해야 합니까? 크리스천은 물질을 모으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물질은 어디까지나 삶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부하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이들은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되고(딤전 6:9),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딤전 6:10).
그리고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기를 잘해야 합니다. 성경은 돈을 모으는 방법과 쓰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성경은 충성스럽고, 열심히 장사하여 돈을 모으도록 말씀합니다(눅 19:12-27; 마 25:14-30). 성경은 불로소득을 원천적으로 봉쇄합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일하기를 싫어하는 이들은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습니다(살후 3:10). 그리고 성경은 쓰는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합니다. 성경은 모으는데 급급하여 쓸 줄 모르면 동록이 슬어 못쓰게 된다고 말씀합니다(마 6:19).
사해가 왜 썩습니까? 물을 담기만 하지 흘러 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열심히 수고하여 돈을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복음 역사를 위해 써야 합니다. 가정을 돌보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써야 합니다. 성경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딤전 6:17,18).
우리는 요셉의 물질관을 배워야 합니다. 요셉은 풍년의 때에 물질을 허튼 데 쓰지 않고 7년간 열심히 저축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은 재물을 흉년 들었을 때 세계 만민을 먹여 살리는데 요긴하게 아낌없이 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과 그의 형과 아우들을 먹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아버지와 형제들을 먹인 것이 아니라 세계 만민 구속 역사를 섬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세계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모으라. 그리고 저축하라. 그 후에 하나님과 의를 위하여 쓰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분명한 목적과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 올바른 동기로 써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돈을 모으는 데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10 위권에 드는 괄목한 경제성장을 이로었습니다. 그런데 버는 방법과 쓰는 법이 불의하여 졸부들이 득세하고, 이들이 부패천국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그런 게 아닙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책에서 진정한 자본주의란 경건주의, 청교도 정신에 기초한 청빈과 절제에 있다고 했습니다. 무절제, 낭비 등은 진정한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이는 하층 자본주의, 천민자본주의입니다.
‘There Will Be Blood’, 거기에 피가 있을 것이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야망과 탐욕을 그린 영화입니다. 1898년 지독한 알콜 중독자 대니얼 플레인뷰는 부인도 없이 홀로 아들을 키우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황무지 사막 한가운데서 금을 캐는 무일푼 광부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이곳에서 그는 석유 유전을 발굴하면서 일확천금의 행운을 누리게 됩니다. 석유에 대한 탐욕에 눈이 먼 다니엘 플레인뷰는 석유를 미친듯이 파냅니다. 그는 야심찬 석유 개발과 함께 시작된 야망은 어느새 탐욕과 폭력으로 바뀌게 되었고, 쉴 새 없이 샘솟는 석유와는 반대로 사랑과 존경, 희망, 믿음 등이 사라져가고 탐욕만이 남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아들의 귀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석유를 보고 환호했습니다. 이는 탐욕스러운 모습의 극치입니다.
탐욕은 기름에 불을 지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욕을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우상숭배는 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마약과 같습니다. 이단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이단에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이단을 폭력을 수반합니다. 요즘 교회 편지통에 신천지 광고가 꽂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단도 탐욕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탐욕을 멀리해야 합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 성에 대한 탐욕, 명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탐욕, 이것은 4대 탐욕입니다. 우리는 이런 탐욕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I'm finished.로 끝납니다. 탐욕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끝납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의 물질관은 땀을 흘려 정직하게 돈을 모아야 합니다. 투기는 크리스천이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빚얻어 주식투기 땅 뚜기 아파트 투기 하지 마세요. 투자는 좋지만 투기는 하지 마세요. 투자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하는 것이고 투기는 단기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일확천금을 꿈꿔서는 안 됩니다. 정직하게 노력하여 노력한 만큼 벌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모은 재물을 주님과 하나님 나라와 복음 역사를 위해, 그리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써야 합니다.
물질관이 분명해야 참된 크리스천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돈주머니를 회개할 때 진정한 회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른 물질관을 가질 때 글로벌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만이 진정한 소망이 됩니다. 세상의 것들은 하나님이 훅 불면 순간 다 날라 갑니다. 어려울수록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성도의 바른 물질관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리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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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금융위기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이 금융위기는 가정과 캠퍼스와 직장과 사회 곳곳에 파고 들어와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 줄 것입니다. 이 때 사람들은 믿을 것은 돈밖에 없다며 돈을 붙들고 돈에 소망을 두고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려울수록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붙들어야 어려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8장을 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극한 시련과 환난이 있었습니다. 극심한 가난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초근목피,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베껴 먹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힘써 기근으로 고통당하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도왔습니다. 이로 인해 좋은 믿음의 예를 남겼습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혹한과 배고픔과 맹수의 습격 등의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그들은 미국에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소망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그 때 그들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오늘의 미국을 건설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일제의 참혹한 학정으로 인해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참혹한 역경을 디디고 평양을 중심하여 제 2의 예루살렘 교회라 일컫는 큰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어려운 시대일수록 크리스천의 바른 물질관을 갖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은 부자라고 무조건 정죄하고, 가난한 자라고 무조건 동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귀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그릇된 목적을 가지고, 그릇된 방법으로 물질을 모으며 그릇된 곳에 물질을 쓰는 부자들에 대해 하나님은 엄히 경고하십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1). 야고보는 엄히 책망할 때 들으라고 경고하십니다. 야고보서 4장 13절을 보면 물질에 목적을 두고 사는 사람들을 향해 들으라고 했습니다. 이제 부한 자들을 향해 들으라고 했습니다.
부한 자들은 현재의 삶이 안락한 것처럼 미래에도 계속 평안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장래가 어떠합니까? 그들은 울며 통곡하게 됩니다. ‘울고 통곡한다’는 것은 처참한 심판에 대한 울부짖음을 말합니다. 왜 그토록 울고 통곡합니까? 그들에게 불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5장 3b절을 보면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불은 최후의 심판을 말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2절에 장차 임할 진노의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리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9장 48,49절을 보면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고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21장 8절을 보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의 날에 불로 심판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그리하셨고, 폼페이를 그리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환자는 화상을 입은 환자입니다. 그런데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는 불의 심판을 받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면 부한 자들이 왜 이처럼 참혹한 불심판을 받게 됩니까?
첫째, 물질을 모으는 목적이 불의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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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그들은 재물을 부지런히 모았습니다. 누구도 재물을 부지런히 모은 것을 탓할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재물 모으는 방법이 불의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재물을 모았는지 아십니까? 얼마나 재물을 사재기했는지 창고에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옷을 사재기했는지 장롱 속에서는 옷이 좀 먹고 있었습니다. 입는 옷이나 싼 옷은 절대로 좀 먹지 않습니다. 입지 않는 옷과 실크나 순모 모직 등 비싼 옷에 좀이 습니다. 그들은 입지도 않는 옷을 장롱 속에 수북하게 쌓아 놓았습니다. 모아 놓은 재물이 창고에서 썩어가고, 옷이 옷장에서 좀이 먹어가자 이제는 녹이 슬지 않는다는 금과 은을 닥치는 대로 사재기하여 금고에 금과 은이 가득했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원래 금과 은은 녹이 슬지 않습니다. 그런데 금과 은이 금고에서 시퍼렇게 녹이 슬었습니다.
돈이란 돌고 돌아야 합니다.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그때부터 돈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한 자들은 재물을 쌓아 두기만 했습니다. 그들이 왜 이처럼 쌓아두기만 했습니까? 이는 장래가 불안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장래가 불안하자 믿을 것은 돈밖에 없다며 돈을 의지하고 돈을 움켜쥐고 돈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요즘 주식이 떨어지고 달라가 하락하자 금을 사재기합니다. 교회 자녀들의 돌이나 백일에 금 한 돈 반지를 선물했는데 요즘은 엄두도 못 냅니다. 장래가 불안하자 믿을 것은 금밖에 없다며 금을 사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현금밖에 믿을 것이 없다며 현금을 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동산이 얼어붙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수북하게 쌓아 놓은 금과 현금을 쳐다보며 안심했습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보다 돈신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돈신을 의지하고 돈신을 숭배하는 자들의 최후는 불심판 밖에 없습니다. 말세의 때에 롯의 아내는 두고 온 물질에 연연하여 뒤를 돌아보다 그만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쓰레기는 모으지 않고 돈을 모을까요? 돈에는 엄청난 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고,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동안 우리나라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돈은 큰 위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돈으로 황금 침대를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단잠을 잘 수 없습니다.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사 먹을 수 있지만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식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호화주택을 살 수 있지만 sweet home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보약을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사치를 부릴 수 있지만 문화는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쾌락을 살 수 있지만 행복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금 십자가를 살 수 있지만 십자가의 복음을 살 수 없습니다.
미다스는 술(酒)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디오니소스는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미다스가 만지는 대로 황금이 되었습니다. 정원수, 조각물, 가구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황금으로 변했습니다. 미다스는 신이 났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만지기만 하면 황금이 되니 도대체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음식을 만지니 황금으로 변하였습니다. 상심한 그는 무심코 자기 아내의 손을 잡았다가 기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부인이 금덩어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뒤늦게 지나친 욕심을 반성한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에게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달라고 간청했으며, 그 뒤 다시는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오늘날 미다스는 탐욕, 과욕을, 미다스의 손(Midas touch)은 돈 버는 재주라는 뜻을 지닌 숙어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탐심, 탐욕은 남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파멸로 내몹니다.
그리고 돈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부자 3대 못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2008년도 우리는 1850년에 설립된 역사가 깊은 미국 4대 투자 은행인 리먼 브러더스가 하루아침에 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기업이 60년이 채 안 됩니다. 3대 경영 체제가 갖춘 기업이 없습니다. 삼성, 현대, LG가 2대에서 3대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지금 3세대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두렵고 떨림으로 기업을 경영해야 합니다. 미다스와 같이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물불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손을 대면 안 됩니다. 중소기업이 해야 할 일까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루아침에 리먼 브러더스 꼴이 됩니다.
지금 글로벌 금융위기의 먹구름이 지구촌을 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는 또 다른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물신을 섬기고 황금만능주의에 몰든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고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돈을 의지하는 맘몬이즘, 돈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말세의 때 돈신, 맘몬이즘을 배격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믿음에 부한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5장 4,6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였도다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신명기 24장 14,15절과 레위기 19장 13절을 보면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임금을 지불하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노동자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만일 품삯을 주지 않으면 그 부양가족들이 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품삯을 떼어먹지 말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했습니다. 그들은 받을 때에는 현금으로 받고, 품삯을 줄 때에는 6 개월짜리 어음을 끊어주고, 그 자리에서 어음을 할인하는 수법으로 품삯을 착취했습니다. 어떤 부한 자들은 아예 품삯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등쳐서 재물을 모으는 등 가난한 자들의 얼굴에 맷돌질하였습니다. 품삯을 주지 않아 관가에 탄원서를 제출하면 오히려 그들은 관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명예 훼손죄로 집어넣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부한 자들은 심지어 대항하지 않는 이들까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습니다. 그들은 주식 투기, 환투기, 땅 투기 등으로 돈을 모았습니다. 이처럼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모은 부자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요즘 노동시장이 매우 불안합니다. 회사는 정규직을 뽑지 않고 비정규직을 뽑아 언제든지 해고시켜 노동시장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85호 크레인 위에서 200일째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씨는 한국 노동시장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노동시장은 안정이 돼야 합니다. 직장에서 갑자기 해고됐을 때 가정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세요. 가진 자들은 이윤만을 생각하지 말고 좀 더 양보하여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사회가 건강하게 됩니다.
셋째, 불의한 곳에 돈을 허비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5장 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그들은 모은 돈을 가지고 사치하고 연락했습니다. 룸 살롬에 가서 몇 백 만 원짜리 술을 마시고, 몇 백만 원씩 계집들에게 팁을 주고, 육신의 탐욕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성병에 걸려 비뇨기과를 찾았습니다. 몇 십 평짜리 아파트를 사서 위 아래로 헐어 풀장을 만들고, 호화롭게 장식하여 값비싼 가구를 사들였습니다. 보신 관광, 기생 관광, 골프관광을 일삼고 호의호식하여 그들의 배는 나오다 못해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사람이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면 향락과 쾌락에 탐닉하는 것은 변치 않는 하나의 공식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향락 산업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든지 천지가 술집입니다. 서울 강남에는 천지가 고급 요정이라 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육신의 쾌락을 위하여 그 많은 돈을 쓸 수 있습니까? 어떻게 몇 백 만 원짜리 술을 마시며 육신의 쾌락을 즐길 수 있습니까? 피땀 흘려서 번 돈, 정상적인 방법으로 번 돈을 가지고는 그렇게 흥청망청 쓸 수 없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쓸 수 있었던 것은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크리스천의 올바른 물질관이 어떠해야 합니까? 크리스천은 물질을 모으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물질은 어디까지나 삶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부하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이들은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되고(딤전 6:9),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딤전 6:10).
그리고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기를 잘해야 합니다. 성경은 돈을 모으는 방법과 쓰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성경은 충성스럽고, 열심히 장사하여 돈을 모으도록 말씀합니다(눅 19:12-27; 마 25:14-30). 성경은 불로소득을 원천적으로 봉쇄합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일하기를 싫어하는 이들은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습니다(살후 3:10). 그리고 성경은 쓰는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합니다. 성경은 모으는데 급급하여 쓸 줄 모르면 동록이 슬어 못쓰게 된다고 말씀합니다(마 6:19).
사해가 왜 썩습니까? 물을 담기만 하지 흘러 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열심히 수고하여 돈을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복음 역사를 위해 써야 합니다. 가정을 돌보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써야 합니다. 성경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딤전 6:17,18).
우리는 요셉의 물질관을 배워야 합니다. 요셉은 풍년의 때에 물질을 허튼 데 쓰지 않고 7년간 열심히 저축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은 재물을 흉년 들었을 때 세계 만민을 먹여 살리는데 요긴하게 아낌없이 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과 그의 형과 아우들을 먹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아버지와 형제들을 먹인 것이 아니라 세계 만민 구속 역사를 섬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세계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모으라. 그리고 저축하라. 그 후에 하나님과 의를 위하여 쓰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분명한 목적과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 올바른 동기로 써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돈을 모으는 데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10 위권에 드는 괄목한 경제성장을 이로었습니다. 그런데 버는 방법과 쓰는 법이 불의하여 졸부들이 득세하고, 이들이 부패천국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그런 게 아닙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책에서 진정한 자본주의란 경건주의, 청교도 정신에 기초한 청빈과 절제에 있다고 했습니다. 무절제, 낭비 등은 진정한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이는 하층 자본주의, 천민자본주의입니다.
‘There Will Be Blood’, 거기에 피가 있을 것이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야망과 탐욕을 그린 영화입니다. 1898년 지독한 알콜 중독자 대니얼 플레인뷰는 부인도 없이 홀로 아들을 키우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황무지 사막 한가운데서 금을 캐는 무일푼 광부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이곳에서 그는 석유 유전을 발굴하면서 일확천금의 행운을 누리게 됩니다. 석유에 대한 탐욕에 눈이 먼 다니엘 플레인뷰는 석유를 미친듯이 파냅니다. 그는 야심찬 석유 개발과 함께 시작된 야망은 어느새 탐욕과 폭력으로 바뀌게 되었고, 쉴 새 없이 샘솟는 석유와는 반대로 사랑과 존경, 희망, 믿음 등이 사라져가고 탐욕만이 남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아들의 귀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석유를 보고 환호했습니다. 이는 탐욕스러운 모습의 극치입니다.
탐욕은 기름에 불을 지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욕을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우상숭배는 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마약과 같습니다. 이단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이단에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이단을 폭력을 수반합니다. 요즘 교회 편지통에 신천지 광고가 꽂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단도 탐욕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탐욕을 멀리해야 합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 성에 대한 탐욕, 명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탐욕, 이것은 4대 탐욕입니다. 우리는 이런 탐욕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I'm finished.로 끝납니다. 탐욕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끝납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의 물질관은 땀을 흘려 정직하게 돈을 모아야 합니다. 투기는 크리스천이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빚얻어 주식투기 땅 뚜기 아파트 투기 하지 마세요. 투자는 좋지만 투기는 하지 마세요. 투자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하는 것이고 투기는 단기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일확천금을 꿈꿔서는 안 됩니다. 정직하게 노력하여 노력한 만큼 벌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모은 재물을 주님과 하나님 나라와 복음 역사를 위해, 그리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써야 합니다.
물질관이 분명해야 참된 크리스천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돈주머니를 회개할 때 진정한 회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른 물질관을 가질 때 글로벌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만이 진정한 소망이 됩니다. 세상의 것들은 하나님이 훅 불면 순간 다 날라 갑니다. 어려울수록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