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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강 5:13-20, 요절 5:13
고난의 때에 기도하라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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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믿음의 기도에 대한 시가 있기에 한번 소개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유창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말이 필요치도 않습니다.
조리있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정열적인 기도는 더 더욱 아닙니다.
믿음의 기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많은 소원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굳이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많은 고난을 만납니다. 한 바울 형제는 군에서 이병이 과하게 군기를 잡았다고 소원수리 해서 군 영창을 가게 됐는데 포상 때문에 영창은 가지 않고 대신 황금 같은 휴가가 깎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이는 전혀 그런 사실이 없는데 어떻게 엮여져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고난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병원에 가보면 우리의 상상 이외로 아픈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고난, 심적 고난이 있습니다. 요즘 스트레스에서 오는 정신적 고난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스트레스 장염, 스트레스 탈모, 스트레스 위염, 스트레스 두통, 스트레스 궤양, 스트레스 유산, 스트레스 불임, 스트레스 쇼크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외상 후의 정신적 고통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민족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지난 주 남부 경찰서 경목위원회 주관으로 육군 7사단을 방문했습니다. 505 GOP는 해발 1,000m 고지인데 멀리에는 금강산댐이 보였고 설악산과 금강산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남북이 총을 겨누고 있는 민족의 고통을 보고 왔습니다.
천재지변에서 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리고 믿는 우리에게는 영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이 고난은 가난한 이나 부유한 이나 유식한 이나 무식한 이나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고난이 닥치면 원망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낙심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절망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반항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자포자기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극단적인 행동, 심지어 자살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50:15). 그리고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여러분 중에 질병으로 고생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낙심하고 절망하는 분이 계십니까? 원망하거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고난을 당할 때 주님께 나가 기도하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고난당할 때 기도하라(13)
1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사람들은 어떤 고난이 닥치면 인과응보로 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상은 유대의 뿌리 깊은 사상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날 때부터 소경 거지를 보는 순간 제자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뉘 죄입니까? 본인입니까? 아니면 부모입니까? 이 때 주님은 누구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가 잘못해서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닌가, 조상의 죄로 인함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죄를 지은 결과로 어려운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고난은 죄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고난입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쉽습니다. 대개 자기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면 상대방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이를 원망하고 심지어 복수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제일 먼저 하여야 할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두 가지 응답을 받게 되는데 하나는 고통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40절을 보면 문둥병자가 나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문둥병은 천형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정과 사회로부터 추방되어 외진 섬에서 살도록 격리수용합니다.
사람에게는 몇 가지 기본 욕구가 있습니다. 사회 심리학자인 매슬로우는 인간에게 결핍욕구와 성취욕구가 있다고 했습니다. 결핍욕구 중에 소속감과 사랑의 욕구(belonging and love needs)가 있습니다. 사랑은 터치입니다. 사랑하면 터치하고 싶습니다. 손을 잡고 싶습니다. 포옹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문둥병자와는 터치할 수 없습니다. 그는 사랑을 주거나 받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그는 이 고통을 안고 주님께 나아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은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 1:41). 예수님은 그의 기도를 즉시 응답하사 그를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깨끗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고난이 내게서 떠나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그 대신에 고난을 극복할 힘을 주십니다. 그 고난을 피할 지혜를 주십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안질일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는 간질일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에게는 육체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주님께 매달려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성경에서 셋이라는 숫자는 완전 수자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울의 육체의 고통을 제해주시지 않고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a). 그 후 그는 도리어 그 육체의 가시를 주심을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육체의 가시를 자랑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바울에게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약할 때 강하게 해 주시는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십자가 죄 사하셨네 주님의 이름 찬양해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그리고 우리는 기도하여 고난에서 벗어났을 때 주님께 감사 찬양해야 합니다.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b). 그런데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1-19절을 보면 열 명의 문둥이가 주님의 은혜로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때 아홉 사람은 감사를 모르고 그냥 가 버렸습니다. 그 중에 사마리아 출신 문둥이만이 주님께 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물으시고 감사하는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사람이 화장실에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돈을 빌릴 때와 갚을 때가 다르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여 그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님께 감사의 단을 쌓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이 올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고난을 해결하여 주실 것을 믿고 감사 찬양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를 개척하다가 옥에 투옥되게 됐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의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아니라 기도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대신에 찬양이 흘러나왔습니다(행 16:25). 그 때 큰 지진이 일어나고 옥터가 움직여 문이 열리고 수갑이 풀렸습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기도하고 고난이 해결됐을 때 주님께 감사 찬양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고난 중에 기도하고, 그 기도가 해결될 줄로 믿고 감사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둘째, 병들었을 때 기도하라(14)
14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여기서 말하는 병자는 죄 때문에 병든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계시는데 중풍 걸린 병자가 네 친구에 의해 들것에 실려 왔습니다. 네 친구는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그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이 사람의 병은 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그에게 주님의 종을 초청하여 기도를 요청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기름은 의약품을 말합니다. 당시 길르앗의 유향은 의약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프면 약도 복용하라는 것입니다.
대개 믿음이 있다고 하는 이 중에는 약을 먹으며 기도하면 믿음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약을 먹지 말고 오직 믿음, 오직 기도만 하라고 합니다. 또 감기만 걸려도 기도원으로 달려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약을 복용하였다고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매도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치료의 정당한 수단을 사용하면서 기도하도록 합니다. 성경은 약을 쓰는 것은 믿음 없는 일이고, 의사선생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이 아니므로 병원에도 가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이나 현대 의학을 사용하지 않고자 하는 그 마음만큼은 귀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모든 일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 23절을 보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의약품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포도주와 기름이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의학적인 수단이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의사의 필요성을 인정했기에 “병든 자라야 의원이 쓸데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의사인 누가와 평생 동행했습니다. 육체의 가시 때문에 의사 누가와 동행했던 것 같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포도주와 기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의사나 약품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유명한 기독교 의사 중의 한 사람인 암브로스 파레는 자기 진료실 앞에 이런 표어를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나 의사 파레는 상처를 치료하고 하나님은 병을 낫게 하신다.”
의사는 상처를 돌볼 뿐 진정한 치료는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여호와 라파(출 15:26), 여호와 하나님은 치료자이십니다.
셋째, 서로 기도하라(15-20)
15,16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함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기도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치료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되면 우리의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에 앞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께 진실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은 기도의 기초입니다. 기도 받는 사람이 믿음이 있으면 더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응답하십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이를 구원하십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이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기도의 모범을 엘리야의 기도에서 찾았습니다. 야고보서 5장 17,18절을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목청을 높여 기도해서 그렇습니까?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의 목청이 훨씬 더 컸습니다. 그들은 칼로 몸을 상하면서 아우성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르는 신은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엘리야는 기도의 용사,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까? 열왕기상 18장 36절을 보겠습니다. “저녁 소제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엘리야는 반드시 언약을 성취하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바알이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심을 알도록 심령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성경에서 응답되는 기도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요 12:28).
그리고 그는 엘리야가 주의 종이 됨과 엘리야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임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명예와 이름을 위하는 것,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하는 그것 밖에 없었습니다(왕상 18:37). 그는 자기를 들어내지 않았습니다. 자기 명예를 들어내고자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백성이 있을까 하여 “자기는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중언부언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도는 짧았습니다. 짧았지만 간절했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주님께 복종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기도는 부르짖는 기도였습니다. 울부짖는 기도는 통회하는 기도입니다. 그가 그렇게 기도했을 때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그가 그렇게 기도했을 때 사단의 권세에 매인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가 그렇게 기도했을 때 바알 선지자들이 멸절당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기도했을 때 3년 6개월 동안의 기근이 풀리고, 큰 비가 내렸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간구하는 바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할 때 죄인들이 미혹의 길에서 돌아서게 되며 사망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19,20).
우리는 환난을 당할 때 기도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의인은 간구는 역사함이 큽니다. 그러나 정욕으로 구할 때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믿음의 기도, 의인의 하나님의 보좌를 흔듭니다. 의인은 간구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게 됩니다(렘33:3). 하나님은 영혼을 위한 믿음의 기도를 기뻐하시고 능력으로 응답하십니다.
고난의 때에 기도하라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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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믿음의 기도에 대한 시가 있기에 한번 소개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유창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말이 필요치도 않습니다.
조리있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정열적인 기도는 더 더욱 아닙니다.
믿음의 기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많은 소원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굳이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많은 고난을 만납니다. 한 바울 형제는 군에서 이병이 과하게 군기를 잡았다고 소원수리 해서 군 영창을 가게 됐는데 포상 때문에 영창은 가지 않고 대신 황금 같은 휴가가 깎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이는 전혀 그런 사실이 없는데 어떻게 엮여져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고난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병원에 가보면 우리의 상상 이외로 아픈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고난, 심적 고난이 있습니다. 요즘 스트레스에서 오는 정신적 고난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스트레스 장염, 스트레스 탈모, 스트레스 위염, 스트레스 두통, 스트레스 궤양, 스트레스 유산, 스트레스 불임, 스트레스 쇼크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외상 후의 정신적 고통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민족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지난 주 남부 경찰서 경목위원회 주관으로 육군 7사단을 방문했습니다. 505 GOP는 해발 1,000m 고지인데 멀리에는 금강산댐이 보였고 설악산과 금강산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남북이 총을 겨누고 있는 민족의 고통을 보고 왔습니다.
천재지변에서 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리고 믿는 우리에게는 영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이 고난은 가난한 이나 부유한 이나 유식한 이나 무식한 이나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고난이 닥치면 원망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낙심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절망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반항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자포자기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극단적인 행동, 심지어 자살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50:15). 그리고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여러분 중에 질병으로 고생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낙심하고 절망하는 분이 계십니까? 원망하거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고난을 당할 때 주님께 나가 기도하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고난당할 때 기도하라(13)
1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사람들은 어떤 고난이 닥치면 인과응보로 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상은 유대의 뿌리 깊은 사상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날 때부터 소경 거지를 보는 순간 제자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뉘 죄입니까? 본인입니까? 아니면 부모입니까? 이 때 주님은 누구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가 잘못해서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닌가, 조상의 죄로 인함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죄를 지은 결과로 어려운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고난은 죄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고난입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쉽습니다. 대개 자기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면 상대방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이를 원망하고 심지어 복수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제일 먼저 하여야 할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두 가지 응답을 받게 되는데 하나는 고통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40절을 보면 문둥병자가 나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문둥병은 천형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정과 사회로부터 추방되어 외진 섬에서 살도록 격리수용합니다.
사람에게는 몇 가지 기본 욕구가 있습니다. 사회 심리학자인 매슬로우는 인간에게 결핍욕구와 성취욕구가 있다고 했습니다. 결핍욕구 중에 소속감과 사랑의 욕구(belonging and love needs)가 있습니다. 사랑은 터치입니다. 사랑하면 터치하고 싶습니다. 손을 잡고 싶습니다. 포옹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문둥병자와는 터치할 수 없습니다. 그는 사랑을 주거나 받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그는 이 고통을 안고 주님께 나아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은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 1:41). 예수님은 그의 기도를 즉시 응답하사 그를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깨끗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고난이 내게서 떠나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그 대신에 고난을 극복할 힘을 주십니다. 그 고난을 피할 지혜를 주십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안질일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는 간질일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에게는 육체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주님께 매달려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성경에서 셋이라는 숫자는 완전 수자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울의 육체의 고통을 제해주시지 않고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a). 그 후 그는 도리어 그 육체의 가시를 주심을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육체의 가시를 자랑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바울에게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약할 때 강하게 해 주시는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십자가 죄 사하셨네 주님의 이름 찬양해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그리고 우리는 기도하여 고난에서 벗어났을 때 주님께 감사 찬양해야 합니다.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b). 그런데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1-19절을 보면 열 명의 문둥이가 주님의 은혜로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때 아홉 사람은 감사를 모르고 그냥 가 버렸습니다. 그 중에 사마리아 출신 문둥이만이 주님께 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물으시고 감사하는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사람이 화장실에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돈을 빌릴 때와 갚을 때가 다르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여 그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님께 감사의 단을 쌓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이 올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고난을 해결하여 주실 것을 믿고 감사 찬양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를 개척하다가 옥에 투옥되게 됐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의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아니라 기도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대신에 찬양이 흘러나왔습니다(행 16:25). 그 때 큰 지진이 일어나고 옥터가 움직여 문이 열리고 수갑이 풀렸습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기도하고 고난이 해결됐을 때 주님께 감사 찬양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고난 중에 기도하고, 그 기도가 해결될 줄로 믿고 감사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둘째, 병들었을 때 기도하라(14)
14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여기서 말하는 병자는 죄 때문에 병든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계시는데 중풍 걸린 병자가 네 친구에 의해 들것에 실려 왔습니다. 네 친구는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그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이 사람의 병은 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그에게 주님의 종을 초청하여 기도를 요청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기름은 의약품을 말합니다. 당시 길르앗의 유향은 의약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프면 약도 복용하라는 것입니다.
대개 믿음이 있다고 하는 이 중에는 약을 먹으며 기도하면 믿음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약을 먹지 말고 오직 믿음, 오직 기도만 하라고 합니다. 또 감기만 걸려도 기도원으로 달려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약을 복용하였다고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매도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치료의 정당한 수단을 사용하면서 기도하도록 합니다. 성경은 약을 쓰는 것은 믿음 없는 일이고, 의사선생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이 아니므로 병원에도 가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이나 현대 의학을 사용하지 않고자 하는 그 마음만큼은 귀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모든 일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 23절을 보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의약품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포도주와 기름이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의학적인 수단이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의사의 필요성을 인정했기에 “병든 자라야 의원이 쓸데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의사인 누가와 평생 동행했습니다. 육체의 가시 때문에 의사 누가와 동행했던 것 같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포도주와 기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의사나 약품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유명한 기독교 의사 중의 한 사람인 암브로스 파레는 자기 진료실 앞에 이런 표어를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나 의사 파레는 상처를 치료하고 하나님은 병을 낫게 하신다.”
의사는 상처를 돌볼 뿐 진정한 치료는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여호와 라파(출 15:26), 여호와 하나님은 치료자이십니다.
셋째, 서로 기도하라(15-20)
15,16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함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기도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치료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되면 우리의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에 앞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께 진실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은 기도의 기초입니다. 기도 받는 사람이 믿음이 있으면 더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응답하십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이를 구원하십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이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기도의 모범을 엘리야의 기도에서 찾았습니다. 야고보서 5장 17,18절을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목청을 높여 기도해서 그렇습니까?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의 목청이 훨씬 더 컸습니다. 그들은 칼로 몸을 상하면서 아우성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르는 신은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엘리야는 기도의 용사,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까? 열왕기상 18장 36절을 보겠습니다. “저녁 소제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엘리야는 반드시 언약을 성취하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바알이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심을 알도록 심령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성경에서 응답되는 기도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요 12:28).
그리고 그는 엘리야가 주의 종이 됨과 엘리야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임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명예와 이름을 위하는 것,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하는 그것 밖에 없었습니다(왕상 18:37). 그는 자기를 들어내지 않았습니다. 자기 명예를 들어내고자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백성이 있을까 하여 “자기는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중언부언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도는 짧았습니다. 짧았지만 간절했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주님께 복종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기도는 부르짖는 기도였습니다. 울부짖는 기도는 통회하는 기도입니다. 그가 그렇게 기도했을 때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그가 그렇게 기도했을 때 사단의 권세에 매인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가 그렇게 기도했을 때 바알 선지자들이 멸절당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기도했을 때 3년 6개월 동안의 기근이 풀리고, 큰 비가 내렸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간구하는 바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할 때 죄인들이 미혹의 길에서 돌아서게 되며 사망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19,20).
우리는 환난을 당할 때 기도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의인은 간구는 역사함이 큽니다. 그러나 정욕으로 구할 때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믿음의 기도, 의인의 하나님의 보좌를 흔듭니다. 의인은 간구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게 됩니다(렘33:3). 하나님은 영혼을 위한 믿음의 기도를 기뻐하시고 능력으로 응답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