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15
사도행전 제 41 강(말씀, 16:11-18, 요절, 16:14)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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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드로아에서 환상을 본 후 곧 방향을 바꾸어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였습니다. 바울은 환상을 보고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유럽의 첫 성인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 빌립보는 알렉산더 빌립보입니다. 이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이름입니다. 외국에는 그런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 뉴욕공항은 존 에프 케네디를 기념하여 존 에프 케네디 공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파리 공항은 드골을 기념하여 드골 공항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빌립보를 마게도냐의 첫 관문, 그리고 로마의 식민지라고 했습니다. 마게도냐는 4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었습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역에서 제일 큰 성입니다. 당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지 않으면 그리스도교가 세계화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로마의 식민지 빌립보에 도착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는 약 240킬로미터입니다. 바울은 이틀 동안 240킬로미터를 항해한 것을 보면 바울이 탄 배가 순풍을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 20장 6절을 보면 돌아오는 길은 닷새나 걸렸습니다. 하나님은 빌립보 전도가 시급하기 때문에 순풍을 만나게 하여 바울이 빨리 도착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큰 환상을 보고 빌립보에 왔지만 아무도 그를 환영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환상 속의 손짓하던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때 바울은 내가 혹시 환상을 잘못 본 것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루디아 한 사람을 만나게 하심으로 유럽 선교의 문을 구체적으로 여셨습니다. 하나님의 환상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고 유럽 선교는 한 사람으로부터 구체화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부왕부왕한 역사가 아니라 조용히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됨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 루디아를 만난 바울(11-15)
11-13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에 도착하여 수일을 유하다보니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가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에 회당이 없었습니다. 이는 빌립보가 로마 식민지이고 유대인들이 몇 명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10가족만 모이면 회당을 지었습니다. 유대인이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할례이고 다른 하나는 안식일을 회당에서 지키는 것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안식을 지키지 않으면 그것은 이방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이방인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유대 공동체에서 이탈되는 것으로 유대 사회에서 매장되는 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목숨을 걸고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24시간 안식일을 깨끗하게 지켰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반드시 회당이라는 공간에 가야 했습니다. 집에서 안식일을 보면 안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회당중심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지 회당부터 먼저 지었습니다. 그리고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인 타운, 게토가 형성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일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일에 집에서 나와 교회로 와야 교인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말씀공부하고 듣고 배우고 결심하고 헌신해야 교인입니다.
바울은 회당이 없다고, 복음 전할 환경이 안 되었다며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찾아 나섰습니다. 바울은 기도로 환경을 극복하고 한적한 강가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이 성 밖 강가에 이르자 여자들 몇 명이 거기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회당이 없으면 한적한 곳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유대인의 관습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보았을 때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들 중에 루디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루디아를 예비해 놓으시고 바울을 빌립보로 보내신 것입니다. 루디아는 어떤 사람입니까? 14절을 보겠습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성경은 루디아의 프로필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루디아는 여자입니다. 바울은 유럽 선교의 전초기지인 빌립보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여자이었습니다. 당시 여자들은 무시 받고 괄시 받던 시대였습니다. 사람 숫자에 넣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럽의 첫 교회가 여성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둘째는 두아디라 시에서 자색 옷감을 파는 비단장수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루디아는 빌립보에 살고 있지만 두아디라 시에서 자색 옷감을 사서 파는 비단 장수였습니다. 한 마디로 두아디라 비단 장수였습니다. 두아디라 성은 수세기에 걸쳐 염료 생산지로 유명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염색은 고급 기술이 필요로 합니다. 염색 기술이 안 좋으면 빨래할 때 물이 빠져 다른 옷도 못쓰게 합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성은 염료 생산지로 유명합니다. 그중에 자색 염료는 값이 비싸기로 유명합니다. 루디아가 바로 자주를 취급하는 비단 장수였습니다. 루디아는 두아디라에서 자주색을 사와서 빌립보에서 팔정도면 생활력이 아주 강했을 것이며 비단 장수이니 돈도 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단순히 돈 많은 수전노나 천민자본주의에 물든 그런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녀를 표현할 때 그냥 루디아라고 하지 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을 일컬을 때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이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루디아는 이방인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유대교로 개종하고 하나님을 적당히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겼습니다.
셋째는 루디아는 사랑의 여인입니다. 그는 돈을 벌어 자기 집의 살림만 꾸리는 그런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사업으로 번 돈을 빌립보 교회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연보를 하여 바울을 도왔습니다.
넷째는 루디아는 자기 집을 오픈하여 하우스 처치로 만들었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그녀는 온 집안이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바울에게 나를 예수님을 믿는 자로 여긴다면 우리 집에 유하라고 강권했습니다. 그녀는 바울에게 자기 자신을 “여자로 보지 말고 주님을 믿는 자”로 알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바울에게 자기 집을 하우스 처치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다섯째는 루디아는 이론적인 사람이 아니라 행동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행동하지 않는 창백한 여인이 아니라 알고 믿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행동주의 자였습니다. 그녀는 “나는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여인이었습니다.
까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나는 기록한다. 고로 존재한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헌신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충성스러운 믿음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루디아는 믿고 헌신하는 데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는 신실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믿음이 있고 주님을 경외하며 헌신적이고 사랑의 여인이었습니다.
둘째,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 하나님(14)
바울은 강가에서 그들을 만나자 마자 곧 성령에 감동되어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말씀에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선교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선교의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를 하지만 그 사람의 마음을 여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면 전도가 되는 것이고, 열어주시지 않으면 전도가 안 됩니다. 하나님은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토머스 키다가 쓴 “생각의 오류”라는 책을 보면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하는 심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카이사르도 “사람들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한다”고 했습니다. 이게 편견이고 선입견입니다. 그런데 루디아는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마음을 열고 낯선 바울로부터 말씀을 겸손히 들었습니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말씀을 전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열리면 전하는 사람과 상관없이 말씀이 들립니다. 그런데 마음은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누가 시킨다고 열리고 닫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내가 열고 싶다고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주시면 편견 없이 선입견이 없이 말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리처드 칼슨은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말라(부자 되는 법)에서 “마음을 여세요”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그는 반응하는 자세보다 호응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호응하는 자가 부자가 되더라는 내용입니다. 반응에는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부정적인 반응은 냉소적입니다. 그러나 호응에는 긍정적인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아, 그래요. 맞아요. 그런 것 같습니다. 동감입니다.” 그러면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동질감이 생기기 때문에 효능감이 높습니다.
박동근 시인은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그대의 창가에 세레나데를 보냅니다. 사랑이 들게 마음 문을 열어다오 마음의 창으로 사랑이 들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안 믿는 것은 내 의지나 부모님의 의지나 목자의 의지나 남편이나 아내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13).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성령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게 됩니다.
아무나 그리고 그냥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한 것은 네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성령을 주셔서 마음 문을 열어 주어야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 주라고 시인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이 없이는 하늘나라 일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마음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감동을 받아야 예수님이 날 위하여 죽으시고 날 위하여 장사지내시고 날 위하여 부활한 것을 믿게 됩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로 14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8절에서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마음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이 열려 하늘의 영적 신비를 알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면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도 이해가 되고 순종하기 힘든 말씀도 기쁨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의 영적인 세계를 알게 됩니다.
셋째, 바울의 괴로움(16-18)
16절을 보면 바울 일행이 계속해서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이제는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났습니다. 주인은 그녀로 인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귀신들린 여인 얼마나 불쌍한 여인입니까?
그녀는 제 정신이 아닌 여인입니다. 그녀는 주인에게 팔려온 여인입니다. 자유가 없는 여인입니다. 거기다가 주인에게 돈벌이해주는 하나의 도구 수단에 불과한 여인입니다. 19절을 보면 그녀의 주인은 그녀가 돈을 더 이상 벌지 못하게 되자 바울 일행을 관에 넘겼습니다. 자기 집에 경제적인 유익이 없어지자 소송을 한 것입니다. 주인은 그녀를 사람으로 취급을 하지 않고 돈을 버는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이 심히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따라와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한번만 이렇게 하면 괜찮았을 텐 데 며칠 동안 계속 이렇게 하자 바울은 심히 괴로웠습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 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그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왜 바울이 괴로워했을까요? 바울을 칭찬하지 않습니까? 사실 귀신들린 여인은 바울을 바르게 봤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괴로움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마귀가 칭찬하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칭찬은 언제나 함정이 있습니다. 올무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알고 그의 칭찬이 괴로웠습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을 보면 하나님이 누구신가는 귀신도 잘 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귀신같이 잘 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귀신은 잘 알지만 회개가 없습니다. 믿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습니다. 헌신하지 않습니다.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믿고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말을 그럴듯하게 말하고 따르지 않으면 거짓말이요 진리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의 셋째 계명에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깊은 심중에서 존경과 찬양과 무거운 마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귀신으로부터 자신이 증거된다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신앙 있는 분이 자기를 소개하고 칭찬하면 그것은 영광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자로부터 증거를 받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기분 좋겠습니까? 그리고 바울은 그녀의 주인으로 인해 괴로웠던 것 같습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 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그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여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29년 전에 저는 제 아내와 함께 인천 하버드인 인하대학교 개척이라는 큰 꿈을 가지고 인천에 왔습니다. 그런데 제게 붙여준 사람은 인하대생이 아닌 간호전문대학 졸업반 3학년 졸업반 여학생 조봉순이었습니다. 제가 온 것은 인하대생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는데 생각도 안했던 간호전문대학 그것도 졸업반 3학년 여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와 제 아내는 그녀를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람, 루디아로 영접하고 옥이냐 금이냐로 섬겼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믿고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긴 머리를 짧게 깎고 높은 구두를 버리고 운동화로 갈아 신고 인하대를 발바닥이 닳도록 심방하며 복음을 전하는 여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녀는 세광병원과 고대부속병원을 근무하며 병원의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하여 우에스더 선교사를 비롯하여 윤미소 간호사들이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 인천 개척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은 동구권 선교에 크게 쓰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환상을 본 후 큰 환상 때문에 붕붕 떠다니기 쉽습니다. 그러나 환상을 구체적으로 현실화하지 않으면 환상은 망상으로 끝납니다. 바울은 유럽 선교의 큰 환상 가운데 구체적으로 자매님 몇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에게 환상이 있다면 붕붕 떠다니지 말고 구체화하고 현실화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great vision, small decision”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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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드로아에서 환상을 본 후 곧 방향을 바꾸어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였습니다. 바울은 환상을 보고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유럽의 첫 성인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 빌립보는 알렉산더 빌립보입니다. 이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이름입니다. 외국에는 그런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 뉴욕공항은 존 에프 케네디를 기념하여 존 에프 케네디 공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파리 공항은 드골을 기념하여 드골 공항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빌립보를 마게도냐의 첫 관문, 그리고 로마의 식민지라고 했습니다. 마게도냐는 4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었습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역에서 제일 큰 성입니다. 당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지 않으면 그리스도교가 세계화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로마의 식민지 빌립보에 도착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는 약 240킬로미터입니다. 바울은 이틀 동안 240킬로미터를 항해한 것을 보면 바울이 탄 배가 순풍을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 20장 6절을 보면 돌아오는 길은 닷새나 걸렸습니다. 하나님은 빌립보 전도가 시급하기 때문에 순풍을 만나게 하여 바울이 빨리 도착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큰 환상을 보고 빌립보에 왔지만 아무도 그를 환영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환상 속의 손짓하던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때 바울은 내가 혹시 환상을 잘못 본 것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루디아 한 사람을 만나게 하심으로 유럽 선교의 문을 구체적으로 여셨습니다. 하나님의 환상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고 유럽 선교는 한 사람으로부터 구체화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부왕부왕한 역사가 아니라 조용히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됨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 루디아를 만난 바울(11-15)
11-13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에 도착하여 수일을 유하다보니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가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에 회당이 없었습니다. 이는 빌립보가 로마 식민지이고 유대인들이 몇 명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10가족만 모이면 회당을 지었습니다. 유대인이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할례이고 다른 하나는 안식일을 회당에서 지키는 것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안식을 지키지 않으면 그것은 이방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이방인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유대 공동체에서 이탈되는 것으로 유대 사회에서 매장되는 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목숨을 걸고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24시간 안식일을 깨끗하게 지켰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반드시 회당이라는 공간에 가야 했습니다. 집에서 안식일을 보면 안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회당중심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지 회당부터 먼저 지었습니다. 그리고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인 타운, 게토가 형성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일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일에 집에서 나와 교회로 와야 교인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말씀공부하고 듣고 배우고 결심하고 헌신해야 교인입니다.
바울은 회당이 없다고, 복음 전할 환경이 안 되었다며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찾아 나섰습니다. 바울은 기도로 환경을 극복하고 한적한 강가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이 성 밖 강가에 이르자 여자들 몇 명이 거기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회당이 없으면 한적한 곳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유대인의 관습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보았을 때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들 중에 루디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루디아를 예비해 놓으시고 바울을 빌립보로 보내신 것입니다. 루디아는 어떤 사람입니까? 14절을 보겠습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성경은 루디아의 프로필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루디아는 여자입니다. 바울은 유럽 선교의 전초기지인 빌립보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여자이었습니다. 당시 여자들은 무시 받고 괄시 받던 시대였습니다. 사람 숫자에 넣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럽의 첫 교회가 여성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둘째는 두아디라 시에서 자색 옷감을 파는 비단장수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루디아는 빌립보에 살고 있지만 두아디라 시에서 자색 옷감을 사서 파는 비단 장수였습니다. 한 마디로 두아디라 비단 장수였습니다. 두아디라 성은 수세기에 걸쳐 염료 생산지로 유명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염색은 고급 기술이 필요로 합니다. 염색 기술이 안 좋으면 빨래할 때 물이 빠져 다른 옷도 못쓰게 합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성은 염료 생산지로 유명합니다. 그중에 자색 염료는 값이 비싸기로 유명합니다. 루디아가 바로 자주를 취급하는 비단 장수였습니다. 루디아는 두아디라에서 자주색을 사와서 빌립보에서 팔정도면 생활력이 아주 강했을 것이며 비단 장수이니 돈도 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단순히 돈 많은 수전노나 천민자본주의에 물든 그런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녀를 표현할 때 그냥 루디아라고 하지 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을 일컬을 때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이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루디아는 이방인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유대교로 개종하고 하나님을 적당히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겼습니다.
셋째는 루디아는 사랑의 여인입니다. 그는 돈을 벌어 자기 집의 살림만 꾸리는 그런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사업으로 번 돈을 빌립보 교회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연보를 하여 바울을 도왔습니다.
넷째는 루디아는 자기 집을 오픈하여 하우스 처치로 만들었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그녀는 온 집안이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바울에게 나를 예수님을 믿는 자로 여긴다면 우리 집에 유하라고 강권했습니다. 그녀는 바울에게 자기 자신을 “여자로 보지 말고 주님을 믿는 자”로 알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바울에게 자기 집을 하우스 처치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다섯째는 루디아는 이론적인 사람이 아니라 행동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행동하지 않는 창백한 여인이 아니라 알고 믿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행동주의 자였습니다. 그녀는 “나는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여인이었습니다.
까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나는 기록한다. 고로 존재한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헌신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충성스러운 믿음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루디아는 믿고 헌신하는 데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는 신실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믿음이 있고 주님을 경외하며 헌신적이고 사랑의 여인이었습니다.
둘째,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 하나님(14)
바울은 강가에서 그들을 만나자 마자 곧 성령에 감동되어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말씀에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선교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선교의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를 하지만 그 사람의 마음을 여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면 전도가 되는 것이고, 열어주시지 않으면 전도가 안 됩니다. 하나님은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토머스 키다가 쓴 “생각의 오류”라는 책을 보면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하는 심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카이사르도 “사람들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한다”고 했습니다. 이게 편견이고 선입견입니다. 그런데 루디아는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마음을 열고 낯선 바울로부터 말씀을 겸손히 들었습니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말씀을 전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열리면 전하는 사람과 상관없이 말씀이 들립니다. 그런데 마음은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누가 시킨다고 열리고 닫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내가 열고 싶다고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주시면 편견 없이 선입견이 없이 말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리처드 칼슨은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말라(부자 되는 법)에서 “마음을 여세요”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그는 반응하는 자세보다 호응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호응하는 자가 부자가 되더라는 내용입니다. 반응에는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부정적인 반응은 냉소적입니다. 그러나 호응에는 긍정적인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아, 그래요. 맞아요. 그런 것 같습니다. 동감입니다.” 그러면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동질감이 생기기 때문에 효능감이 높습니다.
박동근 시인은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그대의 창가에 세레나데를 보냅니다. 사랑이 들게 마음 문을 열어다오 마음의 창으로 사랑이 들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안 믿는 것은 내 의지나 부모님의 의지나 목자의 의지나 남편이나 아내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13).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성령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게 됩니다.
아무나 그리고 그냥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한 것은 네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성령을 주셔서 마음 문을 열어 주어야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 주라고 시인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이 없이는 하늘나라 일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마음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감동을 받아야 예수님이 날 위하여 죽으시고 날 위하여 장사지내시고 날 위하여 부활한 것을 믿게 됩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로 14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8절에서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마음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이 열려 하늘의 영적 신비를 알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면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도 이해가 되고 순종하기 힘든 말씀도 기쁨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의 영적인 세계를 알게 됩니다.
셋째, 바울의 괴로움(16-18)
16절을 보면 바울 일행이 계속해서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이제는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났습니다. 주인은 그녀로 인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귀신들린 여인 얼마나 불쌍한 여인입니까?
그녀는 제 정신이 아닌 여인입니다. 그녀는 주인에게 팔려온 여인입니다. 자유가 없는 여인입니다. 거기다가 주인에게 돈벌이해주는 하나의 도구 수단에 불과한 여인입니다. 19절을 보면 그녀의 주인은 그녀가 돈을 더 이상 벌지 못하게 되자 바울 일행을 관에 넘겼습니다. 자기 집에 경제적인 유익이 없어지자 소송을 한 것입니다. 주인은 그녀를 사람으로 취급을 하지 않고 돈을 버는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이 심히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따라와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한번만 이렇게 하면 괜찮았을 텐 데 며칠 동안 계속 이렇게 하자 바울은 심히 괴로웠습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 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그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왜 바울이 괴로워했을까요? 바울을 칭찬하지 않습니까? 사실 귀신들린 여인은 바울을 바르게 봤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괴로움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마귀가 칭찬하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칭찬은 언제나 함정이 있습니다. 올무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알고 그의 칭찬이 괴로웠습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을 보면 하나님이 누구신가는 귀신도 잘 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귀신같이 잘 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귀신은 잘 알지만 회개가 없습니다. 믿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습니다. 헌신하지 않습니다.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믿고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말을 그럴듯하게 말하고 따르지 않으면 거짓말이요 진리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의 셋째 계명에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깊은 심중에서 존경과 찬양과 무거운 마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귀신으로부터 자신이 증거된다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신앙 있는 분이 자기를 소개하고 칭찬하면 그것은 영광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자로부터 증거를 받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기분 좋겠습니까? 그리고 바울은 그녀의 주인으로 인해 괴로웠던 것 같습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 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그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여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29년 전에 저는 제 아내와 함께 인천 하버드인 인하대학교 개척이라는 큰 꿈을 가지고 인천에 왔습니다. 그런데 제게 붙여준 사람은 인하대생이 아닌 간호전문대학 졸업반 3학년 졸업반 여학생 조봉순이었습니다. 제가 온 것은 인하대생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는데 생각도 안했던 간호전문대학 그것도 졸업반 3학년 여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와 제 아내는 그녀를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람, 루디아로 영접하고 옥이냐 금이냐로 섬겼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믿고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긴 머리를 짧게 깎고 높은 구두를 버리고 운동화로 갈아 신고 인하대를 발바닥이 닳도록 심방하며 복음을 전하는 여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녀는 세광병원과 고대부속병원을 근무하며 병원의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하여 우에스더 선교사를 비롯하여 윤미소 간호사들이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 인천 개척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은 동구권 선교에 크게 쓰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환상을 본 후 큰 환상 때문에 붕붕 떠다니기 쉽습니다. 그러나 환상을 구체적으로 현실화하지 않으면 환상은 망상으로 끝납니다. 바울은 유럽 선교의 큰 환상 가운데 구체적으로 자매님 몇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에게 환상이 있다면 붕붕 떠다니지 말고 구체화하고 현실화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great vision, small deci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