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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제 49강(말씀 : 20:26-38, 요절 20:35)
바울의 물질관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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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지켜 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나눔의 축복에 대해 은헤를 받고자 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지 강줄기의 끝은 바다로 이어집니다. 강물은 흘러가면서 주변을 옥토로 만들고 많은 생물들을 살리다가 바다로 들어갑니다. 한강이 태백의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주변을 옥토로 만들고 2,000만 명을 살리고 서해로 흘러갑니다.
이스라엘의 요단강은 헬몬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호수를 만들고, 갈릴리 호수는 다시 사해로 내보냅니다. 그런데 사해는 밖으로 흘러내 보내지 않습니다. 사해의 특징은 받기만 합니다. 그래서 사해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사해는 물이 짜서 고기가 살 수 없고, 주변의 풀 한포기도 없고 사람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는 물을 받아서 밖으로 흘러 보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젖줄이 되고, 각종 물고기가 서식하며, 주변을
초원으로 만들어 양떼들이 뛰놀고 나무들이 자랍니다.
우리가 받기만 하고 주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사해와 같이 되어 자신을 물론 다른 이까지 죽이게 됩니다. 반면에 갈릴리와 같이 베풀고 나눠주고 주는 생활을 하게 되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살리게 됩니다.
본문은 9복 중의 하나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받는 것만 좋아하는지. 아니면 베풀고 나눠주는 것을 즐거워하는지 자신을 돌이켜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는 것이 복이요,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 복임을 마음에 새겨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다(행 20:26-27).
사도행전 20장 26-2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바울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기 때문입니다. “꺼리지 않았다”는 사도행전 20장 20절에도 나오는데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다 전했다는 것입니다. “피에 대해 깨끗하다”는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영적 생명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3장 17-18절을 보겠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이 말씀은 이러합니다. 전도자가 복음을 전했는데도 믿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 이의 책임이지 복음을 전한 사람에게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복음을 전하지 않아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죽었다면 그 복음을 전하지 않은 사람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내버려둔 것은 간접 살인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나 핍박이 있었고 환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담대하게 복음을 다 전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가감 없이 전했습니다. 바울은 3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에베소가 망하더라도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아 멸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게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핍박이 없어야 복음이 잘 전해질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복음은 핍박을 통해 전해집니다. 핍박을 통해 전도자가 강해집니다. 핍박을 받아야 순수한 복음이 전해집니다. 복음은 능란한 화술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희생과 핍박을 통해 전해집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람이 핍박을 받으면 위축되기 쉽습니다. 제가 개척 초기에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한 자매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와서 주일예배 때에 딸을 예수 믿게 한다고 소리를 지르며 총으로 쏴죽이겠다고 난리를 피웠습니다. 그리고 한 선교사 어머니는 식구들을 다 동원하여 와서 욕을 하시는데 참 무서웠습니다.
저는 보기보다 속 두려움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면 속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속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입에서 “예”자가 나오다가 맙니다. 그리고 부족하다는 열등감을 깨야 합니다. “나는 부족해, 나는 아직도 복음을 전하기에는 멀었다” 하면 일생동안 복음을 전하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학문이 일천한 어부 출신입니다. 그런데 그가 꺼리지 않고 3,000명 앞에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 때 3000명이 회개했습니다(행 2:41).. 그는 본래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제일 먼저 뒤꽁무니를 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부활의 믿음이 있었을 때 자신의 연약함과 열등감을 깨고 담대한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둘째, 흉악한 이리떼를 조심하라(행 20:28-32).
신앙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바울이 권면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0장 28절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무슨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친목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피로 사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피로 사셨다”는 것은 생명을 주고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모든 직분자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섬겨야 합니다. 무슨 친목회 회장이나 부장이나 팀장보다도 못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 교회에 바울이 떠나 있는 동안 양 떼를 어지럽히는 흉악한 이리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돌보는데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흉악한 이리떼라고 했습니다. 이리떼의 특징은 양떼들을 흩어 놓고 물어뜯는데 있습니다. 흉악한 이리떼는 이단들입니다. 당시 이단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살리는 복음입니다. 구원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입니다. 네 편 내 편을 가릅니다.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이단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이 제일 잘 믿고, 자기들만이 옳고, 자기들만이 큰 믿음이고, 기존 교회는 모두 부패하고 썩었다고 공격합니다. 지금도 이단들이 교묘하게 교회에 침투하여 복음을 자기 멋대로 윤색하고 목자와 양들을 이간질하여 분열시키고 파괴시킵니다. 이러한 이리떼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말씀으로 잘 양육 받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3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평생 동안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 사회에도 평생교육이 있습니다. 숭실대학은 교육학과 이름을 아예 평생교육학과라고 했습니다. 신앙도 life-long education, 평생 동안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부탁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32절을 보겠습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서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말씀이 우리를 든든히 세운다고 했습니다. 은혜의 말씀만이 교묘한 이단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양떼들을 하나님과 은혜의 말씀에 부탁했습니다.
특히 우리는 자녀들을 하나님과 은혜의 말씀에 부탁해야 합니다. 지금 각종 미디어 매체는 자녀들을 세속문화와 다원주의 사상, 그리고 불신앙에 빠지도록 몰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상으로부터 자녀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없습니다. 하나님과 은혜의 말씀에 맡기고 깨어 기도하는 길 이외 없습니다.
셋째,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3-35).
바울은 안디옥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입니다. 바울은 안디옥으로부터 선교비를 지원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를 지켜 행했습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0장 35절을 보겠습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은 9복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범사에 본을 보였습니다. 그는 텐트를 만드는 자비량 선교사가 되어 본인 것뿐만 아니라 자기와 동행하는 이들의 생활비까지 충당했습니다. 그는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러면 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될까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다 내어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구원을 받고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을 보겠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주면 하나님은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십니다.
우리가 산술적으로 생각하면 주는 생활은 당장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2-1은 분명 1입니다. 그러나 주는 생활은 2-1=1+a입니다. 주는 생활은 초등학교 산수가 아니라 고등수학의 고차원적인 삶입니다.
주는 생활은 마치 샘과 같습니다. 샘에서 샘물을 떠내면 떠낼수록 계속 맑은 물이 고입니다. 주는 삶은 엄마의 사랑의 젖과 같습니다. 아기가 엄마의 전을 빨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젖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기가 젖을 빨지 않으면 나오지 않습니다. 주는 삶은 엄마의 사랑의 젖과 같습니다. 그리고 주는 생활은 마치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씨를 많이 뿌리면 거둘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기보다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는 마치 손이 밖으로 펴는 것보다 안으로 구부리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선물을 주기보다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인정하고 칭찬하기보다 인정과 칭찬 받기를 원합니다. 사랑하기보다 사랑 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받기 싫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훈련입니다.
사람들은 먹는 것이 남는 것이고 받는 것이 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심히 먹되 국물까지도 남김없이 먹습니다. 그런데 과연 먹는 것이 남는 것일까요? 우리의 육신은 길어야 백년이지만 2010년 세계보건기구의 발표에 의하며 남자 평균 나이가 76세, 여자는 83세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인생 80이면 끝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남는 것은 사진이라며 열심히 사진을 찍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남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금실 좋은 부부가 여행 때 남는 것은 사진이라며 사진 찍는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어 재혼했습니다. 재혼을 하고 나니 과거의 사진들이 부담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남는 것은 먹는 것도 아니고 받는 것도 아니고 사진도 아니라 주는 것만이 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에게 뭣이 있어야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유가 없는데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는가 말합니다. 그런데 있어서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있어서 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없지만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람이 여유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주는 것 또한 아닙니다. 욕심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99섬을 가진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한 섬을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100섬을 채우고자 함입니다. 99%를 가진 사람이 1%를 더 가지려고 합니다.
우리는 기부하면 돈을 기탁하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주는 생활이란 내게 돈이 없다면 내가 가진 은사나 재주나 노동, 그리고 따뜻한 마음 한 자락과 아름다운 미소가 이웃과 나누는 기부의 삶입니다.
토마스 람게가 쓴 행복한 기부를 보면 마지막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비전을 가까이 있고 구체적이다. 암에 걸린 러시아 소년을 15년 넘게 도와준 허센의 부부에게 아주 진중한 한 사람이 ‘그래봐야 당신들은 한 사람만 도와줄 수 있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답변은 금방 돌아왔다. ‘당신도 한 사람 도우세요. 그럼 벌써 둘이잖아요.” 우리가 한 가정에서, 나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도우면 그것이 하찮은 것 같지만 둘이 됩니다.
나눔의 행복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에 플레밍이라는 가난한 농부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 비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가 보니 웬 소년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농부는 침착하게 들어가 아이를 살렸습니다.
다음날 농부의 집에 으리으리한 마차를 탄 귀족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농부가 구해준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라며 보답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농부가 그럴 필요 없다며 사양하자 귀족은 농부의 곁에 서 있던 아이를 바라보며 자신의 아이와 똑같은 수준의 교육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귀족은 약속을 지켜 그 아이가 런던의 세인트메리 의과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농부의 아들은 의사가 되어 곰팡이 균에 대해 연구하다가 페니실린을 발견하여 귀족 작위까지 얻게 된 알렉산더 플레밍 박사입니다.
귀족의 아들 또한 잘 자라났지만 후에 폐렴에 걸려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농부의 아들, 알렉산더 플레밍이 발견한 페니실린 덕분에 다시 한 번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구해낸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입니다.
농부의 선행은 결국 자신과 소중한 가족에게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버스 안에서 노약자에게 양보하는 행실이 별것 아닐 수 있지만 후에 그 행실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누구도 모릅니다. 행복은 베풀고 주고 나누는데 있습니다.
에모리 총장이자 주한 대사이었던 제임스 레이니 교수는 출퇴근하다가 쓸쓸하게 집 앞에 나이 늙은 노인을 보았습니다. 그는 쓸쓸하게 집 앞의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과 출퇴근하며 말동무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는 그 노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 작은 섬김에 큰 감동을 받은 노인은 죽으며 레이니 대사에게 25억 달라와 주식 5%를 남기고 갔습니다. 그 노인이 누구냐 하면 코카콜라 회장이었습니다.
조지 베일런트의 하버드대학교 인생성장 보고서를 보면 노인부부가 남을 돕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남을 돕는 사람이 금연이나,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섬기고 봉사하고 나누는 삶은 엔돌핀을 솟구치게 하여 행복지수가 올라갑니다.
인천 CMI는 개척 초기부터 주는 삶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자립도 하지 못하는 형편에 천안과 공주에 선교비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개척 조상들을 세계선교 일선으로 보냈고, 세계선교를 위해 아낌없이 후원했습니다. 이는 산술적으로 인천이 힘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개척 10년 만에 1992년에 졸업한 학사 몇 명과 학생들의 자력으로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라성 같은 89-91학번들을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에는 한 사가랴 선교사 가정을 비롯하여 이요셉 선교사 가정 등 12가정을 미국으로 파송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우남식 목사는 굶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를 굶기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이 말씀을 마친 후 무릎을 꿇고 합심해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목을 안고 크게 울며 배에까지 전송을 했습니다. 바울과 이들이 얼마나 깊은 사랑의 관계성으로 맺어져 있는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주는 생활은 현실적으로 계산하면 손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는 생활은 손해가 아니라 행복의 근원입니다. 주는 생활은 삶을 윤택하게 하고 부유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색한 마음을 회개하고 주고 섬기고 나눠주는 삶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을 나눠주는 삶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다시 사용하여 송도를 개척하고 더 나아가 서울을 개척하도록 강력한 방향을 주십니다.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버리는 것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 이상하다 동전 한 잎 움켜잡으면 없어지고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땅위에 가득 하네 오,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바울의 물질관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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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지켜 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나눔의 축복에 대해 은헤를 받고자 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지 강줄기의 끝은 바다로 이어집니다. 강물은 흘러가면서 주변을 옥토로 만들고 많은 생물들을 살리다가 바다로 들어갑니다. 한강이 태백의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주변을 옥토로 만들고 2,000만 명을 살리고 서해로 흘러갑니다.
이스라엘의 요단강은 헬몬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호수를 만들고, 갈릴리 호수는 다시 사해로 내보냅니다. 그런데 사해는 밖으로 흘러내 보내지 않습니다. 사해의 특징은 받기만 합니다. 그래서 사해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사해는 물이 짜서 고기가 살 수 없고, 주변의 풀 한포기도 없고 사람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는 물을 받아서 밖으로 흘러 보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젖줄이 되고, 각종 물고기가 서식하며, 주변을
초원으로 만들어 양떼들이 뛰놀고 나무들이 자랍니다.
우리가 받기만 하고 주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사해와 같이 되어 자신을 물론 다른 이까지 죽이게 됩니다. 반면에 갈릴리와 같이 베풀고 나눠주고 주는 생활을 하게 되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살리게 됩니다.
본문은 9복 중의 하나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받는 것만 좋아하는지. 아니면 베풀고 나눠주는 것을 즐거워하는지 자신을 돌이켜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는 것이 복이요,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 복임을 마음에 새겨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다(행 20:26-27).
사도행전 20장 26-2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바울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기 때문입니다. “꺼리지 않았다”는 사도행전 20장 20절에도 나오는데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다 전했다는 것입니다. “피에 대해 깨끗하다”는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영적 생명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3장 17-18절을 보겠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이 말씀은 이러합니다. 전도자가 복음을 전했는데도 믿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 이의 책임이지 복음을 전한 사람에게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복음을 전하지 않아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죽었다면 그 복음을 전하지 않은 사람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내버려둔 것은 간접 살인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나 핍박이 있었고 환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담대하게 복음을 다 전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가감 없이 전했습니다. 바울은 3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에베소가 망하더라도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아 멸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게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핍박이 없어야 복음이 잘 전해질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복음은 핍박을 통해 전해집니다. 핍박을 통해 전도자가 강해집니다. 핍박을 받아야 순수한 복음이 전해집니다. 복음은 능란한 화술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희생과 핍박을 통해 전해집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람이 핍박을 받으면 위축되기 쉽습니다. 제가 개척 초기에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한 자매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와서 주일예배 때에 딸을 예수 믿게 한다고 소리를 지르며 총으로 쏴죽이겠다고 난리를 피웠습니다. 그리고 한 선교사 어머니는 식구들을 다 동원하여 와서 욕을 하시는데 참 무서웠습니다.
저는 보기보다 속 두려움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면 속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속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입에서 “예”자가 나오다가 맙니다. 그리고 부족하다는 열등감을 깨야 합니다. “나는 부족해, 나는 아직도 복음을 전하기에는 멀었다” 하면 일생동안 복음을 전하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학문이 일천한 어부 출신입니다. 그런데 그가 꺼리지 않고 3,000명 앞에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 때 3000명이 회개했습니다(행 2:41).. 그는 본래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제일 먼저 뒤꽁무니를 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부활의 믿음이 있었을 때 자신의 연약함과 열등감을 깨고 담대한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둘째, 흉악한 이리떼를 조심하라(행 20:28-32).
신앙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바울이 권면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0장 28절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무슨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친목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피로 사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피로 사셨다”는 것은 생명을 주고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모든 직분자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섬겨야 합니다. 무슨 친목회 회장이나 부장이나 팀장보다도 못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 교회에 바울이 떠나 있는 동안 양 떼를 어지럽히는 흉악한 이리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돌보는데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흉악한 이리떼라고 했습니다. 이리떼의 특징은 양떼들을 흩어 놓고 물어뜯는데 있습니다. 흉악한 이리떼는 이단들입니다. 당시 이단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살리는 복음입니다. 구원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입니다. 네 편 내 편을 가릅니다.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이단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이 제일 잘 믿고, 자기들만이 옳고, 자기들만이 큰 믿음이고, 기존 교회는 모두 부패하고 썩었다고 공격합니다. 지금도 이단들이 교묘하게 교회에 침투하여 복음을 자기 멋대로 윤색하고 목자와 양들을 이간질하여 분열시키고 파괴시킵니다. 이러한 이리떼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말씀으로 잘 양육 받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3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평생 동안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 사회에도 평생교육이 있습니다. 숭실대학은 교육학과 이름을 아예 평생교육학과라고 했습니다. 신앙도 life-long education, 평생 동안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부탁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32절을 보겠습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서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말씀이 우리를 든든히 세운다고 했습니다. 은혜의 말씀만이 교묘한 이단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양떼들을 하나님과 은혜의 말씀에 부탁했습니다.
특히 우리는 자녀들을 하나님과 은혜의 말씀에 부탁해야 합니다. 지금 각종 미디어 매체는 자녀들을 세속문화와 다원주의 사상, 그리고 불신앙에 빠지도록 몰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상으로부터 자녀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없습니다. 하나님과 은혜의 말씀에 맡기고 깨어 기도하는 길 이외 없습니다.
셋째,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3-35).
바울은 안디옥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입니다. 바울은 안디옥으로부터 선교비를 지원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를 지켜 행했습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0장 35절을 보겠습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은 9복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범사에 본을 보였습니다. 그는 텐트를 만드는 자비량 선교사가 되어 본인 것뿐만 아니라 자기와 동행하는 이들의 생활비까지 충당했습니다. 그는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러면 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될까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다 내어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구원을 받고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을 보겠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주면 하나님은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십니다.
우리가 산술적으로 생각하면 주는 생활은 당장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2-1은 분명 1입니다. 그러나 주는 생활은 2-1=1+a입니다. 주는 생활은 초등학교 산수가 아니라 고등수학의 고차원적인 삶입니다.
주는 생활은 마치 샘과 같습니다. 샘에서 샘물을 떠내면 떠낼수록 계속 맑은 물이 고입니다. 주는 삶은 엄마의 사랑의 젖과 같습니다. 아기가 엄마의 전을 빨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젖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기가 젖을 빨지 않으면 나오지 않습니다. 주는 삶은 엄마의 사랑의 젖과 같습니다. 그리고 주는 생활은 마치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씨를 많이 뿌리면 거둘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기보다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는 마치 손이 밖으로 펴는 것보다 안으로 구부리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선물을 주기보다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인정하고 칭찬하기보다 인정과 칭찬 받기를 원합니다. 사랑하기보다 사랑 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받기 싫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훈련입니다.
사람들은 먹는 것이 남는 것이고 받는 것이 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심히 먹되 국물까지도 남김없이 먹습니다. 그런데 과연 먹는 것이 남는 것일까요? 우리의 육신은 길어야 백년이지만 2010년 세계보건기구의 발표에 의하며 남자 평균 나이가 76세, 여자는 83세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인생 80이면 끝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남는 것은 사진이라며 열심히 사진을 찍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남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금실 좋은 부부가 여행 때 남는 것은 사진이라며 사진 찍는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어 재혼했습니다. 재혼을 하고 나니 과거의 사진들이 부담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남는 것은 먹는 것도 아니고 받는 것도 아니고 사진도 아니라 주는 것만이 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에게 뭣이 있어야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유가 없는데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는가 말합니다. 그런데 있어서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있어서 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없지만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람이 여유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주는 것 또한 아닙니다. 욕심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99섬을 가진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한 섬을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100섬을 채우고자 함입니다. 99%를 가진 사람이 1%를 더 가지려고 합니다.
우리는 기부하면 돈을 기탁하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주는 생활이란 내게 돈이 없다면 내가 가진 은사나 재주나 노동, 그리고 따뜻한 마음 한 자락과 아름다운 미소가 이웃과 나누는 기부의 삶입니다.
토마스 람게가 쓴 행복한 기부를 보면 마지막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비전을 가까이 있고 구체적이다. 암에 걸린 러시아 소년을 15년 넘게 도와준 허센의 부부에게 아주 진중한 한 사람이 ‘그래봐야 당신들은 한 사람만 도와줄 수 있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답변은 금방 돌아왔다. ‘당신도 한 사람 도우세요. 그럼 벌써 둘이잖아요.” 우리가 한 가정에서, 나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도우면 그것이 하찮은 것 같지만 둘이 됩니다.
나눔의 행복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에 플레밍이라는 가난한 농부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 비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가 보니 웬 소년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농부는 침착하게 들어가 아이를 살렸습니다.
다음날 농부의 집에 으리으리한 마차를 탄 귀족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농부가 구해준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라며 보답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농부가 그럴 필요 없다며 사양하자 귀족은 농부의 곁에 서 있던 아이를 바라보며 자신의 아이와 똑같은 수준의 교육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귀족은 약속을 지켜 그 아이가 런던의 세인트메리 의과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농부의 아들은 의사가 되어 곰팡이 균에 대해 연구하다가 페니실린을 발견하여 귀족 작위까지 얻게 된 알렉산더 플레밍 박사입니다.
귀족의 아들 또한 잘 자라났지만 후에 폐렴에 걸려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농부의 아들, 알렉산더 플레밍이 발견한 페니실린 덕분에 다시 한 번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구해낸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입니다.
농부의 선행은 결국 자신과 소중한 가족에게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버스 안에서 노약자에게 양보하는 행실이 별것 아닐 수 있지만 후에 그 행실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누구도 모릅니다. 행복은 베풀고 주고 나누는데 있습니다.
에모리 총장이자 주한 대사이었던 제임스 레이니 교수는 출퇴근하다가 쓸쓸하게 집 앞에 나이 늙은 노인을 보았습니다. 그는 쓸쓸하게 집 앞의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과 출퇴근하며 말동무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는 그 노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 작은 섬김에 큰 감동을 받은 노인은 죽으며 레이니 대사에게 25억 달라와 주식 5%를 남기고 갔습니다. 그 노인이 누구냐 하면 코카콜라 회장이었습니다.
조지 베일런트의 하버드대학교 인생성장 보고서를 보면 노인부부가 남을 돕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남을 돕는 사람이 금연이나,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섬기고 봉사하고 나누는 삶은 엔돌핀을 솟구치게 하여 행복지수가 올라갑니다.
인천 CMI는 개척 초기부터 주는 삶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자립도 하지 못하는 형편에 천안과 공주에 선교비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개척 조상들을 세계선교 일선으로 보냈고, 세계선교를 위해 아낌없이 후원했습니다. 이는 산술적으로 인천이 힘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개척 10년 만에 1992년에 졸업한 학사 몇 명과 학생들의 자력으로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라성 같은 89-91학번들을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에는 한 사가랴 선교사 가정을 비롯하여 이요셉 선교사 가정 등 12가정을 미국으로 파송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우남식 목사는 굶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를 굶기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이 말씀을 마친 후 무릎을 꿇고 합심해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목을 안고 크게 울며 배에까지 전송을 했습니다. 바울과 이들이 얼마나 깊은 사랑의 관계성으로 맺어져 있는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주는 생활은 현실적으로 계산하면 손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는 생활은 손해가 아니라 행복의 근원입니다. 주는 생활은 삶을 윤택하게 하고 부유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색한 마음을 회개하고 주고 섬기고 나눠주는 삶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을 나눠주는 삶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다시 사용하여 송도를 개척하고 더 나아가 서울을 개척하도록 강력한 방향을 주십니다.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버리는 것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 이상하다 동전 한 잎 움켜잡으면 없어지고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땅위에 가득 하네 오,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버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