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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1-14, 요절 2:10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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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ry Christmas! 세상에는 수많은 나라와 민족과 종족들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민족과 종족들이 등을 맞대고 서로 으르렁거립니다. 또 세상에는 다양한 계층이 있습니다. 이런 계층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노사 간의 대립, 이념 간의 대립,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 등입니다. 천사는 이런 모든 이들에게 골고루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모든 사람, 빈부귀천, 남녀노소, 이념과 체제, 피부 색깔을 넘어 모든 이들에게 미치는 기쁨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믿음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기쁨이 더 충만케 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가 취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하늘나라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들에게 만족을 주고 영원히 지속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입니다(벧전 1:8). 그래서 천사는 이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면 천사가 전한 큰 기쁨의 소식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2011년 성탄을 맞아 큰 기쁨이 좋은 소식이 각기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성육신하셨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대로 인간의 몸을 입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14).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 1:14, 계 19:13).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이를 한 가지라도 부정하거나 덜 중요시해도 안 됩니다. 영과 육을 이분법으로 나눠 육은 악하고 영은 거룩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상이 당시 성행했는데 바로 영지주의, 2원론입니다.
그래서 이 사상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거부했고, 몸의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실 수 있고, 추한 육의 몸으로 부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지금도 음으로 양으로 교회 속에 파고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교회 안은 거룩하고 교회 밖은 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내에서는 믿는 이답게 거룩한 신자로 삽니다.
그런데 교회문을 나가는 순간 그렇지 못합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가 되지 않는 이중적인 삶의 신행불일치의 삶을 삽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도 계십니다. 교회 안에서만 신자로 행세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밖에서도 신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영혼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육도 거룩합니다.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자학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몸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혹적인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되지만 매력적인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옷차림도 경건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믿지 않는 이들에게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 믿지 않는 이들을 매료시켜야 합니다. 직장에 다니는 분들은 직장을 소명의 장, 성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목사만 성직이 아닙니다. 직장은 하나님이 나를 전도의 현장으로 보내신 소명의 장소입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안 믿는 이들에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매료시켜야 합니다. 이로 인해 믿지 않는 이들이 나의 삶을 보고 예수님을 믿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구주로 오셨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구주란 구원자란 뜻이고, 주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기름 부은 자란 뜻입니다. 당시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은 기름을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요 선지자요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입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대신 속죄합니다. 왕은 통치자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요 대제사장이시오 왕이십니다. 그리고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로 오셨다는 것은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이고,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다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할 존재이며,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는 것은 인간은 죄를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며, 예수님이 선지자로 오셨다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을 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란 뜻입니다.
세상에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문제는 죄입니다. 죄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 없이 사는 삶입니다. 죄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는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기기준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자기기준으로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그리고 자기애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자기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이게 첫 사람 아담의 죄성입니다.
죄는 육신과 생각과 영혼을 파괴시킵니다. 사람이 죄의 세력에 사로잡히게 되면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는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과학문명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고상한 철학이나 사상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종교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건강한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특히 요즘 20대는 좌절하고, 30대는 분노하고, 40대는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신조어가 유행합니다. 이구백, 20대 90%가 백수, 삼초땡, 30대 초 명예퇴직, 동태, 한겨울의 명예퇴직 등입니다.
죄는 각종 위장병, 두통, 편두통, 치통 등, 질병에 시달리게 합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질병에 시달립니다. 무(무기력, 무능력, 무표정)자와 허(허무, 공허)자와 절(절망, 좌절)자가 지배합니다. 대상이 없는 분노, 열등감에 시달립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물질을 가장 큰 우상으로 섬깁니다.
누가 몸과 마음과 영혼의 질병을 치료해 줄 수 있습니까? 친구나 부모님이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남편이나 아내가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친구가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누구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무디 목사님은 “당신은 자신을 믿어보라. 반드시 실망할 때가 있을 것이다. 친구를 믿어보라.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갈라놓을 것이다. 명예나 돈을 믿어보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믿어보라. 후회 없는 삶과 영생의 복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받아야 할 죄의 고통과 형벌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순간 우리는 온전히, 영원히 아담의 죄성에서 벗어나 예수 생명이 됩니다(히 9:11-15). 이 생명은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있습니다. 우리는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 3:20).
어떻게 믿는 순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땅에 묻히실 때 나도 묻혔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나도 부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나도 승천하고, 하늘의 우편에 계실 때 나도 우편에 앉습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들림 받고, 무덤에 묻힌 육의 몸이 부활합니다. 이것이 영화로운 영광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어떤 종교가 한번 믿음으로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을 수 있습니까?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래서 성경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죄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구주이심을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지은 인간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북한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영원히 보존하다고 하는데 이는 성경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약 1:15). 아담의 죄성에 속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타나 심판 후에는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영원히 참예하게 됩니다(계 21:8). 그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습니다(막 9:48).
우리는 실패하더라도 내일이 있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내일이 없습니다. 내일이 없는 삶은 가장 슬픈 소식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교수가 되고, 판검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열심히 돈을 벌어 재벌이 되고, CEO가 된다 할지라도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소식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예외 없이 다 죽습니다. 50에 죽던지, 천수를 누려 100세에 죽든지 죽는 것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먼저 가고 좀 늦게 가는 것뿐입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대로 ‘인간은 권태와 고통의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하는 시한부 인생’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는 날 동안 사망권세가 나를 지배합니다. 사망이 세도를 부려 세상을 공동묘지로 만듭니다. 그 아래 굴복하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처럼 사망은 잔인합니다. 사망은 쏘는 독화살과 같습니다.
사망이 지배하는 곳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운명적인 생각으로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됩니다. 안 된다, 못한다는 부정적 생각과 패배감에 시달립니다. 죽음은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영원히 갈라놓습니다. 깊은 슬픔을 가져다줍니다.
누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공자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삶의 문제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의 문제를 알 수 있느냐?”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석가는 세상에서 죽지 않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며 죽음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생명과학도 죽음만은 해결치 못합니다. 다만 생명을 잠시 연장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요 11:25). 예수님은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엡 2:1,5). 예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빛의 세계로 옮기셨습니다(골 1:13).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살려 영원한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산 소망 하나님 나라를 주셨습니다(벧전 1:3,4).
예수님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두려움에서 평강을, 어두움에서 빛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다.
넷째, 예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고통은 고독입니다. ‘리스먼이’는 고독한 군중이라고 했습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도 극도의 고독에서 비롯됩니다. 친구는 많은 데 진정한 우정을 나눌 벗이 없어 고독합니다. 선생은 많지만 참 스승이 없습니다. 저마다 리더라고 하지만 참 지도자가 없습니다. 목사는 많지만 목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고독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에서 오는 경쟁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고독하게 만듭니다. 1등만이 존재하는 사회, 숨 쉴 수 있습니까? 삶의 여백, 삶의 여유가 없습니다. 1등만이 존재하는 살벌한 정글의 법칙 속에 누가 함께만 해줘도 소망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나와 함께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와 늘 함께 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사망의 골짜기는 영어로 사망의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고 허상, 종이호랑이에 불과합니다.
다윗은 사울로부터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몰랐습니다. 사울의 칼날은 다윗의 심장을 겨눴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늘 다윗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다윗을 안전하게 지켜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연극 중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부요한 사람에게 죽음이 친절한 손님으로 가장하고 찾아왔습니다. 그 부자는 그를 친절하게 대접하다가, 그 사람의 신분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 부자는 죽음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다가, 결국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죽음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그것은 하루만이라도 시간을 주어, 동행자를 불러 같이 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그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는 서둘러 먼저 죽마고우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친구,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왔네.’ ‘그래 이야기 해봐. 우리 둘 사이에 못 들어 줄 것이 뭐 있겠나?’ ‘친구, 지금 내가 여행을 갈려고 하는데 동행해 줄 수 있겠나?’ ‘어떤 여행인데?’ ‘이 여행은 한번가면 다시 되돌아 올 수 없는 여행이라네.’
무슨 여행인데 말해봐. 백리면 어떻고 천리면 같이 못 가겠어? ‘친구, 그건 죽음의 여행이야’ ‘그러자 순간 친구는 당황하면서 안색이 변하며 미안하네. 그것만은 어쩔 수 없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가친척을 찾아다니며 말해봤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이제 그는 죽음의 사자와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다 거절하여도 아내만은 동행해 줄줄 알았습니다.
아내에게 사실대로 얘기하자 아내마저 ‘여보, 나는 아직 세상에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으니 같이 갈수 없어’하며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쁠 때에도 함께 하시고 슬플 때에도 함께 하시고 죽음의 강까지도 함께 건너십니다. 주님은 늘 나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구주 탄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표적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이 어디에 탄생하셨습니까? 1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천사는 온 세상을 구원하실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가 그리스도의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표적이란 이적과 달리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깊은 뜻은 메시아의 정신과 그 역사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요 1:3). 예수님은 영화와 존귀로 옷 입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백성들로부터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져서 사랑과 온유와 겸손으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은 겸손과 온유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 방법은 조용한 말구유 역사입니다. 가이사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명령하고 군림합니다. 그리고 가이샤는 매스컴을 동원하여 자기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생과 헌신과 섬김과 생명이 없습니다.
반면에 말구유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무력하고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희생과 헌신과 온유와 섬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온유와 희생은 강하고 화려한 가이샤의 로마 제국을 제패했습니다.
사람들은 가이샤의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북한의 지도자가 죽자 세계는 누가 북한의 가이샤가 되며, 우리나라는 내년에 누가 가이샤가 될 것인가에 초민의 관심입니다.
세상 역사는 겉으로 보면 가이샤가 이끌고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이샤가 세상을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조용한 말구유 역사, 겸손하고 온유하신 예수님, 희생과 섬김의 예수님께서 지금도 이끌고 가십니다.
2012년에는 가이샤의 역사보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과 섬김이 우리 속에 있기를 기도합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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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ry Christmas! 세상에는 수많은 나라와 민족과 종족들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민족과 종족들이 등을 맞대고 서로 으르렁거립니다. 또 세상에는 다양한 계층이 있습니다. 이런 계층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노사 간의 대립, 이념 간의 대립,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 등입니다. 천사는 이런 모든 이들에게 골고루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모든 사람, 빈부귀천, 남녀노소, 이념과 체제, 피부 색깔을 넘어 모든 이들에게 미치는 기쁨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믿음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기쁨이 더 충만케 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가 취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하늘나라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들에게 만족을 주고 영원히 지속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입니다(벧전 1:8). 그래서 천사는 이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면 천사가 전한 큰 기쁨의 소식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2011년 성탄을 맞아 큰 기쁨이 좋은 소식이 각기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성육신하셨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대로 인간의 몸을 입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14).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 1:14, 계 19:13).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이를 한 가지라도 부정하거나 덜 중요시해도 안 됩니다. 영과 육을 이분법으로 나눠 육은 악하고 영은 거룩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상이 당시 성행했는데 바로 영지주의, 2원론입니다.
그래서 이 사상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거부했고, 몸의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실 수 있고, 추한 육의 몸으로 부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지금도 음으로 양으로 교회 속에 파고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교회 안은 거룩하고 교회 밖은 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내에서는 믿는 이답게 거룩한 신자로 삽니다.
그런데 교회문을 나가는 순간 그렇지 못합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가 되지 않는 이중적인 삶의 신행불일치의 삶을 삽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도 계십니다. 교회 안에서만 신자로 행세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밖에서도 신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영혼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육도 거룩합니다.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자학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몸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혹적인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되지만 매력적인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옷차림도 경건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믿지 않는 이들에게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 믿지 않는 이들을 매료시켜야 합니다. 직장에 다니는 분들은 직장을 소명의 장, 성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목사만 성직이 아닙니다. 직장은 하나님이 나를 전도의 현장으로 보내신 소명의 장소입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안 믿는 이들에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매료시켜야 합니다. 이로 인해 믿지 않는 이들이 나의 삶을 보고 예수님을 믿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구주로 오셨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구주란 구원자란 뜻이고, 주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기름 부은 자란 뜻입니다. 당시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은 기름을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요 선지자요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입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대신 속죄합니다. 왕은 통치자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요 대제사장이시오 왕이십니다. 그리고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로 오셨다는 것은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이고,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다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할 존재이며,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는 것은 인간은 죄를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며, 예수님이 선지자로 오셨다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을 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란 뜻입니다.
세상에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문제는 죄입니다. 죄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 없이 사는 삶입니다. 죄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는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기기준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자기기준으로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그리고 자기애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자기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이게 첫 사람 아담의 죄성입니다.
죄는 육신과 생각과 영혼을 파괴시킵니다. 사람이 죄의 세력에 사로잡히게 되면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는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과학문명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고상한 철학이나 사상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종교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건강한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특히 요즘 20대는 좌절하고, 30대는 분노하고, 40대는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신조어가 유행합니다. 이구백, 20대 90%가 백수, 삼초땡, 30대 초 명예퇴직, 동태, 한겨울의 명예퇴직 등입니다.
죄는 각종 위장병, 두통, 편두통, 치통 등, 질병에 시달리게 합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질병에 시달립니다. 무(무기력, 무능력, 무표정)자와 허(허무, 공허)자와 절(절망, 좌절)자가 지배합니다. 대상이 없는 분노, 열등감에 시달립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물질을 가장 큰 우상으로 섬깁니다.
누가 몸과 마음과 영혼의 질병을 치료해 줄 수 있습니까? 친구나 부모님이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남편이나 아내가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친구가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누구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무디 목사님은 “당신은 자신을 믿어보라. 반드시 실망할 때가 있을 것이다. 친구를 믿어보라.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갈라놓을 것이다. 명예나 돈을 믿어보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믿어보라. 후회 없는 삶과 영생의 복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받아야 할 죄의 고통과 형벌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순간 우리는 온전히, 영원히 아담의 죄성에서 벗어나 예수 생명이 됩니다(히 9:11-15). 이 생명은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있습니다. 우리는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 3:20).
어떻게 믿는 순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땅에 묻히실 때 나도 묻혔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나도 부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나도 승천하고, 하늘의 우편에 계실 때 나도 우편에 앉습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들림 받고, 무덤에 묻힌 육의 몸이 부활합니다. 이것이 영화로운 영광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어떤 종교가 한번 믿음으로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을 수 있습니까?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래서 성경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죄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구주이심을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지은 인간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북한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영원히 보존하다고 하는데 이는 성경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약 1:15). 아담의 죄성에 속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타나 심판 후에는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영원히 참예하게 됩니다(계 21:8). 그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습니다(막 9:48).
우리는 실패하더라도 내일이 있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내일이 없습니다. 내일이 없는 삶은 가장 슬픈 소식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교수가 되고, 판검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열심히 돈을 벌어 재벌이 되고, CEO가 된다 할지라도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소식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예외 없이 다 죽습니다. 50에 죽던지, 천수를 누려 100세에 죽든지 죽는 것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먼저 가고 좀 늦게 가는 것뿐입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대로 ‘인간은 권태와 고통의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하는 시한부 인생’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는 날 동안 사망권세가 나를 지배합니다. 사망이 세도를 부려 세상을 공동묘지로 만듭니다. 그 아래 굴복하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처럼 사망은 잔인합니다. 사망은 쏘는 독화살과 같습니다.
사망이 지배하는 곳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운명적인 생각으로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됩니다. 안 된다, 못한다는 부정적 생각과 패배감에 시달립니다. 죽음은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영원히 갈라놓습니다. 깊은 슬픔을 가져다줍니다.
누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공자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삶의 문제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의 문제를 알 수 있느냐?”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석가는 세상에서 죽지 않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며 죽음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생명과학도 죽음만은 해결치 못합니다. 다만 생명을 잠시 연장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요 11:25). 예수님은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엡 2:1,5). 예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빛의 세계로 옮기셨습니다(골 1:13).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살려 영원한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산 소망 하나님 나라를 주셨습니다(벧전 1:3,4).
예수님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두려움에서 평강을, 어두움에서 빛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다.
넷째, 예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고통은 고독입니다. ‘리스먼이’는 고독한 군중이라고 했습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도 극도의 고독에서 비롯됩니다. 친구는 많은 데 진정한 우정을 나눌 벗이 없어 고독합니다. 선생은 많지만 참 스승이 없습니다. 저마다 리더라고 하지만 참 지도자가 없습니다. 목사는 많지만 목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고독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에서 오는 경쟁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고독하게 만듭니다. 1등만이 존재하는 사회, 숨 쉴 수 있습니까? 삶의 여백, 삶의 여유가 없습니다. 1등만이 존재하는 살벌한 정글의 법칙 속에 누가 함께만 해줘도 소망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나와 함께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와 늘 함께 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사망의 골짜기는 영어로 사망의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고 허상, 종이호랑이에 불과합니다.
다윗은 사울로부터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몰랐습니다. 사울의 칼날은 다윗의 심장을 겨눴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늘 다윗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다윗을 안전하게 지켜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연극 중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부요한 사람에게 죽음이 친절한 손님으로 가장하고 찾아왔습니다. 그 부자는 그를 친절하게 대접하다가, 그 사람의 신분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 부자는 죽음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다가, 결국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죽음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그것은 하루만이라도 시간을 주어, 동행자를 불러 같이 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그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는 서둘러 먼저 죽마고우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친구,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왔네.’ ‘그래 이야기 해봐. 우리 둘 사이에 못 들어 줄 것이 뭐 있겠나?’ ‘친구, 지금 내가 여행을 갈려고 하는데 동행해 줄 수 있겠나?’ ‘어떤 여행인데?’ ‘이 여행은 한번가면 다시 되돌아 올 수 없는 여행이라네.’
무슨 여행인데 말해봐. 백리면 어떻고 천리면 같이 못 가겠어? ‘친구, 그건 죽음의 여행이야’ ‘그러자 순간 친구는 당황하면서 안색이 변하며 미안하네. 그것만은 어쩔 수 없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가친척을 찾아다니며 말해봤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이제 그는 죽음의 사자와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다 거절하여도 아내만은 동행해 줄줄 알았습니다.
아내에게 사실대로 얘기하자 아내마저 ‘여보, 나는 아직 세상에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으니 같이 갈수 없어’하며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쁠 때에도 함께 하시고 슬플 때에도 함께 하시고 죽음의 강까지도 함께 건너십니다. 주님은 늘 나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구주 탄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표적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이 어디에 탄생하셨습니까? 1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천사는 온 세상을 구원하실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가 그리스도의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표적이란 이적과 달리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깊은 뜻은 메시아의 정신과 그 역사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요 1:3). 예수님은 영화와 존귀로 옷 입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백성들로부터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져서 사랑과 온유와 겸손으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은 겸손과 온유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 방법은 조용한 말구유 역사입니다. 가이사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명령하고 군림합니다. 그리고 가이샤는 매스컴을 동원하여 자기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생과 헌신과 섬김과 생명이 없습니다.
반면에 말구유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무력하고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희생과 헌신과 온유와 섬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온유와 희생은 강하고 화려한 가이샤의 로마 제국을 제패했습니다.
사람들은 가이샤의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북한의 지도자가 죽자 세계는 누가 북한의 가이샤가 되며, 우리나라는 내년에 누가 가이샤가 될 것인가에 초민의 관심입니다.
세상 역사는 겉으로 보면 가이샤가 이끌고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이샤가 세상을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조용한 말구유 역사, 겸손하고 온유하신 예수님, 희생과 섬김의 예수님께서 지금도 이끌고 가십니다.
2012년에는 가이샤의 역사보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과 섬김이 우리 속에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