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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강 사도행전 24:1-27
하나님께 향한 소망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라”(행 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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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바울의 세 번째 변증 메시지입니다. 바울의 첫 번째 변증은 영문 층대에서였고, 두 번째 변증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였습니다. 세 번째는 본문의 벨릭스 총독 앞에서의 변증입니다. 바울은 벨릭스 총독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자리는 생사 문제가 걸려 있는 자리입니다. 유대 대제사장은 사형을 선고하거나 사형을 집행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로마 사람들에게 사형을 요청할 수 있지만 사형에 대한 권한은 없습니다. 그러나 총독은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법적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사형언도를 받고 곧 집행이 되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지금 바울은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신 것처럼 총독 앞에 서 있습니다. 바울은 총독 한 마디에 죽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도 살기 위해 구차하게 자신을 변증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짧지만 감동적으로 고발한 내용을 들어 복음을 변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함을 변증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의 삶의 자세와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사람이라(행 24:1-9)
바울은 예루살렘에 체포되어 천부장 앞에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천부장은 자기 소관으로 재판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간파하고 심문을 멈추고 총독에게 바울을 넘겼습니다. 총독에게 넘긴지 닷새가 지나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가이사랴까지 와서 바울을 총독에게 고발했습니다.
대제사장은 마땅히 예루살렘 성전에 있어야 합니다. 대제사장의 본분은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가이사랴의 총독의 관저에게까지 와서 바울을 고발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만나기를 꺼려합니다. 더욱더 이방인의 집에 제 발로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방인의 집도 아니고 총독의 관저까지 찾아갔습니다. 그는 이미 대제사장으로서의 위상과 직분, 그리고 품위를 상실했습니다.
그보다 더 가관인 것은 총독에 대한 아첨입니다. 그는 벨릭스를 한껏 치켜세웠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총독과 대제사장은 불편한 관계를 넘어서서 원수지간입니다. 그런데 그는 총독에게 기생오라비 같이 아양을 떨고 있습니다. 그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민족의 반역자,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짓고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불의한 사람은 불의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도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아첨을 떨었습니다. 그는 아무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이렇게 아양을 떨었습니다. “우리에게 왕은 가이사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예수를 죽이지 않는다면 로마의 가이샤 충신이 아닙니다.”
바울에 대한 그의 고발장은 이러합니다. 24장 5-6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그는 바울을 전염병 같은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염병과 같다는 이유를 세 가지로 들어 설명합니다. 첫째는 소요하게 하는 trouble maker라는 것이고, 둘째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것이고, 셋째는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염병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전염병은 순식간에 퍼지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 흑사병으로 유럽의 인구가 지역에 따라 30%-50%의 규모로 감소하였습니다.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희생자는 총 7천5백만 명에서 2억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유럽 중세사를 연구하는 사학자 필립 데이리더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습니다.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한 초기 4년간의 희생자는 통상 인구의 45%-50% 로 추산되고 있으나 이는 총괄적인 수준의 기록이다. 실제 유럽에서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사망률을 보였는데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남부 등에서는 지역에 따라 인구의 80%가 희생되었고, 북부 독일, 잉글랜드 등지에서 초기 4년 동안의 사망률은 20% 정도였다.”
예수님은 복음의 영향력을 누룩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누룩의 특징 또한 삽시간에 변화를 줍니다. 그는 바울을 고발하기 위해 전염병 같은 자로 말했지만 역설적으로 복음을 잘 설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3주간 복음을 전했을 때 사람들은 바울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행 17:6후).
복음이 전해지면 반드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인격이 달라집니다. 삶이 달라집니다.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세계관이 달라지고 인간관계도 달라집니다. 건강도 달라집니다. 복음은 이처럼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두 가지 면에서 능력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정적인 것을 죽이는 능력이 있고 둘째는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죄를 죽입니다. 복음은 교만을 죽입니다. 복음은 위선과 거짓을 죽입니다. 복음은 모든 죄악과 죄악의 속성을 죽입니다. 반면에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삶의 존재가치와 존재의미가 살아납니다. 병든 내면이 치유됩니다. 용서가 생깁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소망이 살아납니다.
이처럼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에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수용하지 않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변화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영접한 사람은 전염병이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지 않는 벙어리 교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속담에 “소금 먹은 사람 물을 먹지 않겠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복음을 영접한 사람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어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이 정말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영접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는 체크 리스트는 단 한가지로, 그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사를 보면 최권능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노방 전도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분의 메시지는 간단하며 명료했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입니다. 하루는 채필근 목사님이 버스에 타고 있었는데 최권능 목사님이 버스에 올라와서 채필근 목사님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앞에 서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채필근 목사님은 최권능 목사님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런 줄 알고 “최 목사, 나 채필근 목사야” 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최권능 목사님이 하는 말이 “벙어리 교인이구먼” 하더라는 것입니다. 금년 한 해 열심히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금년에 세 명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 바울의 변명(행 24:10-23)
총독은 바울에게 변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변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벨릭스 총독은 오랫동안 사마리아에서 총독을 지냈고 예루살렘 총독도 지냈고 이제 가이사랴에서 총독을 하고 있으니 우리 종교 문제나 내 문제에 대해 충분히 알 것이라고 했습니다(행 24:10).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부활이 무엇이며,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를 짧고도 감동적으로 전했습니다. 그러자 벨릭스가 호감을 갖고 바울의 변증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길게 말해야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짧은 말이라도 진실을 말할 때 감동이 됩니다.
첫째, 나는 trouble maker가 아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을 trouble maker라고 고발했습니다. 바울은 이를 이렇게 변증했습니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것이 열이틀 밖에 안 되었고”(행 24:11). 바울은 예루살렘에 머문 기간이 열이틀, 채 2주도 안 되는데 무슨 선동할 일으키고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4장 19-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서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바울은 자신이 선동할 시간도 없었고, 선동할 이유도 없었고, 선동할 기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선동하였다고 죄인으로 몰고 가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어 법정에 서 있다면 즐거이 고난을 받겠지만 오해로 박해를 받는다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바라는 바도 아니고 로마를 위해서도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으로 말하지만 바울은 사실에 기초해서 진실하게 변명했습니다.
둘째,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단의 도를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
바울은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죄명에 대해 변증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란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행 24:14). 예배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봉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긴 ‘나’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도를 따라 섬긴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와 방법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을 고발한 대제사장도 하나님을 섬깁니다. 과거 바울도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되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기까지 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 이단이라는 도를 따라 섬긴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따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다 믿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Christ is the end of the Law)이라고 했습니다(롬 10:4). 율법의 마침이란 그 효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끝났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제사 제도가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형,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본체가 나타나면 물러가게 마련입니다.
십계명 또한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인간 상호간의 의무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다 보여 주셨습니다. 참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제사법이 완성되고, 모든 의식과 십계명이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외에는 어떤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구원이 있습니다.
셋째, 나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이 있다.
“그들이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라”(행 24:15). 바울을 고발한 대제사장도 하나님께 향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메시아가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초림의 메사아를 대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이미 오셨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 10-12절을 보면 그들은 이미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메시아는 장치적인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하나님께 향한 소망은 이미 오신 메시아, 장차 재림하실 예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믿는다고 다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단들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Let God be God).”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 하나님이 계시한 대로 섬기는 것, 내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대로 섬기는 것,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는 것, 내 발상이 아닌 하나님의 발상대로 섬기는 것,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바른 자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나의 뜻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내 뜻대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받은 것이고, 바울을 법정에 세운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자기 목적을 위하여 섬겼습니다. 목적이 잘못되면 방법이 틀리게 됩니다. 목적이 선해야 방법도 선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을 수단으로 섬겼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양심의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행 24:16).
우리는 오신 메시아를 믿고 장차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되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육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2원론을 파괴하셨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면 몸의 부활도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죄의 용서와 모든 벽을 허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극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게까지 하셨다면 다른 그 무엇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하나님의 절대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은 인간의 최대 원수인 죽음의 권세를 파한 승리의 찬가입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이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고전 15:20).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땅 끝까지 이르러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재림 신앙을 갖도록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믿고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주님의 몸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의 부활과 더불어 완전한 영화,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소망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심문을 받는 것은 그들이고 고소하는 대로 율법이나 성전 문제가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 문제임을 밝혔습니다(행 24:21).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의 터위에 세워졌습니다.
3.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행 24:24-27)
벨릭스는 수일 후에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을 불러 예수 믿는 도를 다시 듣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석방을 위해 돈을 주거나 구차히 변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강론했습니까? 사도행전 24장 25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의의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는 자객을 보내어 대제사장 요나단을 살해하고 포악한 짓을 행했습니다. 또 드루실라는 남의 아내였는데 그가 절세의 미인이므로 8장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의 중매로 그를 빼앗아 세 번째 아내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의 죄악 된 생활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와 절제와 심판을 강론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회개하지 않으면 영원한 불심판을 받게 됨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임한 복음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총독이요, 바울은 비록 죄수의 신분이지만 위치는 거꾸로 되었습니다. 바울은 조금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자로서 그에게 담대히 심판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회개의 복음을 들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죄악된 생활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재판의 결과는 무죄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재판을 연기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고자 하는 탐욕과 유대인의 환심을 얻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행 24:26).
우리는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로 복음에 대해 벙어리가 돼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복음의 전염병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의 법대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향한 소망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라”(행 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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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바울의 세 번째 변증 메시지입니다. 바울의 첫 번째 변증은 영문 층대에서였고, 두 번째 변증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였습니다. 세 번째는 본문의 벨릭스 총독 앞에서의 변증입니다. 바울은 벨릭스 총독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자리는 생사 문제가 걸려 있는 자리입니다. 유대 대제사장은 사형을 선고하거나 사형을 집행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로마 사람들에게 사형을 요청할 수 있지만 사형에 대한 권한은 없습니다. 그러나 총독은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법적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사형언도를 받고 곧 집행이 되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지금 바울은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신 것처럼 총독 앞에 서 있습니다. 바울은 총독 한 마디에 죽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도 살기 위해 구차하게 자신을 변증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짧지만 감동적으로 고발한 내용을 들어 복음을 변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함을 변증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의 삶의 자세와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사람이라(행 24:1-9)
바울은 예루살렘에 체포되어 천부장 앞에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천부장은 자기 소관으로 재판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간파하고 심문을 멈추고 총독에게 바울을 넘겼습니다. 총독에게 넘긴지 닷새가 지나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가이사랴까지 와서 바울을 총독에게 고발했습니다.
대제사장은 마땅히 예루살렘 성전에 있어야 합니다. 대제사장의 본분은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가이사랴의 총독의 관저에게까지 와서 바울을 고발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만나기를 꺼려합니다. 더욱더 이방인의 집에 제 발로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방인의 집도 아니고 총독의 관저까지 찾아갔습니다. 그는 이미 대제사장으로서의 위상과 직분, 그리고 품위를 상실했습니다.
그보다 더 가관인 것은 총독에 대한 아첨입니다. 그는 벨릭스를 한껏 치켜세웠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총독과 대제사장은 불편한 관계를 넘어서서 원수지간입니다. 그런데 그는 총독에게 기생오라비 같이 아양을 떨고 있습니다. 그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민족의 반역자,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짓고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불의한 사람은 불의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도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아첨을 떨었습니다. 그는 아무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이렇게 아양을 떨었습니다. “우리에게 왕은 가이사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예수를 죽이지 않는다면 로마의 가이샤 충신이 아닙니다.”
바울에 대한 그의 고발장은 이러합니다. 24장 5-6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그는 바울을 전염병 같은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염병과 같다는 이유를 세 가지로 들어 설명합니다. 첫째는 소요하게 하는 trouble maker라는 것이고, 둘째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것이고, 셋째는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염병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전염병은 순식간에 퍼지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 흑사병으로 유럽의 인구가 지역에 따라 30%-50%의 규모로 감소하였습니다.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희생자는 총 7천5백만 명에서 2억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유럽 중세사를 연구하는 사학자 필립 데이리더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습니다.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한 초기 4년간의 희생자는 통상 인구의 45%-50% 로 추산되고 있으나 이는 총괄적인 수준의 기록이다. 실제 유럽에서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사망률을 보였는데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남부 등에서는 지역에 따라 인구의 80%가 희생되었고, 북부 독일, 잉글랜드 등지에서 초기 4년 동안의 사망률은 20% 정도였다.”
예수님은 복음의 영향력을 누룩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누룩의 특징 또한 삽시간에 변화를 줍니다. 그는 바울을 고발하기 위해 전염병 같은 자로 말했지만 역설적으로 복음을 잘 설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3주간 복음을 전했을 때 사람들은 바울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행 17:6후).
복음이 전해지면 반드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인격이 달라집니다. 삶이 달라집니다.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세계관이 달라지고 인간관계도 달라집니다. 건강도 달라집니다. 복음은 이처럼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두 가지 면에서 능력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정적인 것을 죽이는 능력이 있고 둘째는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죄를 죽입니다. 복음은 교만을 죽입니다. 복음은 위선과 거짓을 죽입니다. 복음은 모든 죄악과 죄악의 속성을 죽입니다. 반면에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삶의 존재가치와 존재의미가 살아납니다. 병든 내면이 치유됩니다. 용서가 생깁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소망이 살아납니다.
이처럼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에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수용하지 않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변화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영접한 사람은 전염병이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지 않는 벙어리 교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속담에 “소금 먹은 사람 물을 먹지 않겠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복음을 영접한 사람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어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이 정말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영접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는 체크 리스트는 단 한가지로, 그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사를 보면 최권능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노방 전도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분의 메시지는 간단하며 명료했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입니다. 하루는 채필근 목사님이 버스에 타고 있었는데 최권능 목사님이 버스에 올라와서 채필근 목사님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앞에 서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채필근 목사님은 최권능 목사님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런 줄 알고 “최 목사, 나 채필근 목사야” 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최권능 목사님이 하는 말이 “벙어리 교인이구먼” 하더라는 것입니다. 금년 한 해 열심히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금년에 세 명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 바울의 변명(행 24:10-23)
총독은 바울에게 변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변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벨릭스 총독은 오랫동안 사마리아에서 총독을 지냈고 예루살렘 총독도 지냈고 이제 가이사랴에서 총독을 하고 있으니 우리 종교 문제나 내 문제에 대해 충분히 알 것이라고 했습니다(행 24:10).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부활이 무엇이며,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를 짧고도 감동적으로 전했습니다. 그러자 벨릭스가 호감을 갖고 바울의 변증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길게 말해야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짧은 말이라도 진실을 말할 때 감동이 됩니다.
첫째, 나는 trouble maker가 아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을 trouble maker라고 고발했습니다. 바울은 이를 이렇게 변증했습니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것이 열이틀 밖에 안 되었고”(행 24:11). 바울은 예루살렘에 머문 기간이 열이틀, 채 2주도 안 되는데 무슨 선동할 일으키고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4장 19-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서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바울은 자신이 선동할 시간도 없었고, 선동할 이유도 없었고, 선동할 기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선동하였다고 죄인으로 몰고 가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어 법정에 서 있다면 즐거이 고난을 받겠지만 오해로 박해를 받는다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바라는 바도 아니고 로마를 위해서도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으로 말하지만 바울은 사실에 기초해서 진실하게 변명했습니다.
둘째,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단의 도를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
바울은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죄명에 대해 변증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란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행 24:14). 예배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봉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긴 ‘나’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도를 따라 섬긴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와 방법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을 고발한 대제사장도 하나님을 섬깁니다. 과거 바울도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되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기까지 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 이단이라는 도를 따라 섬긴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따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다 믿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Christ is the end of the Law)이라고 했습니다(롬 10:4). 율법의 마침이란 그 효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끝났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제사 제도가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형,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본체가 나타나면 물러가게 마련입니다.
십계명 또한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인간 상호간의 의무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다 보여 주셨습니다. 참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제사법이 완성되고, 모든 의식과 십계명이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외에는 어떤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구원이 있습니다.
셋째, 나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이 있다.
“그들이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라”(행 24:15). 바울을 고발한 대제사장도 하나님께 향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메시아가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초림의 메사아를 대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이미 오셨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 10-12절을 보면 그들은 이미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메시아는 장치적인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하나님께 향한 소망은 이미 오신 메시아, 장차 재림하실 예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믿는다고 다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단들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Let God be God).”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 하나님이 계시한 대로 섬기는 것, 내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대로 섬기는 것,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는 것, 내 발상이 아닌 하나님의 발상대로 섬기는 것,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바른 자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나의 뜻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내 뜻대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받은 것이고, 바울을 법정에 세운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자기 목적을 위하여 섬겼습니다. 목적이 잘못되면 방법이 틀리게 됩니다. 목적이 선해야 방법도 선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을 수단으로 섬겼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양심의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행 24:16).
우리는 오신 메시아를 믿고 장차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되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육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2원론을 파괴하셨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면 몸의 부활도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죄의 용서와 모든 벽을 허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극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게까지 하셨다면 다른 그 무엇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하나님의 절대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은 인간의 최대 원수인 죽음의 권세를 파한 승리의 찬가입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이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고전 15:20).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땅 끝까지 이르러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재림 신앙을 갖도록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믿고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주님의 몸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의 부활과 더불어 완전한 영화,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소망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심문을 받는 것은 그들이고 고소하는 대로 율법이나 성전 문제가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 문제임을 밝혔습니다(행 24:21).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의 터위에 세워졌습니다.
3.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행 24:24-27)
벨릭스는 수일 후에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을 불러 예수 믿는 도를 다시 듣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석방을 위해 돈을 주거나 구차히 변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강론했습니까? 사도행전 24장 25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의의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는 자객을 보내어 대제사장 요나단을 살해하고 포악한 짓을 행했습니다. 또 드루실라는 남의 아내였는데 그가 절세의 미인이므로 8장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의 중매로 그를 빼앗아 세 번째 아내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의 죄악 된 생활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와 절제와 심판을 강론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회개하지 않으면 영원한 불심판을 받게 됨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임한 복음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총독이요, 바울은 비록 죄수의 신분이지만 위치는 거꾸로 되었습니다. 바울은 조금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자로서 그에게 담대히 심판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회개의 복음을 들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죄악된 생활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재판의 결과는 무죄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재판을 연기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고자 하는 탐욕과 유대인의 환심을 얻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행 24:26).
우리는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로 복음에 대해 벙어리가 돼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복음의 전염병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의 법대로 섬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