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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1:1-10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 1:7).
그리스도교 역사가 시작한 이래 많은 이단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달콤하게 유혹했습니다. 지금도 이단들이 곳곳에 산재해 그럴듯한 이론으로 우리를 미혹하여 믿음을 교란시키고 가정을 파괴하며 사회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 내에도 예외없이 이단들이 나타나 성도들을 미혹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직을 부인하여 바울이 전한 복음까지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만을 가지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며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그들에게 다른 복음은 없으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주제는 로마서와 같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갈라디아서 강해를 두 권이나 썼습니다. 로마서 강해보다 갈라디아서 강해가 배나 더 두껍습니다. 그는 그만큼 갈라디아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본문을 통해 이단이 난무하는 시대에 복음 진리를 확립하고 복음 진리를 힘써 전하고 변증하기를 기도합니다.
1. 사도된 바울(갈 1:1-3)
갈라디아서 1장 1절을 보겠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바울 자신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원래 사도란 세례 요한 때부터 주님과 생활을 같이 한 자, 주님께서 친히 임명하신 자,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12제자들을 말합니다(행 1:2,22, 마 3:14).
그 후 바울과 바나바, 주의 형제 야고보, 실누아노,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행 14:4,14, 고전 15:7, 갈 1:19, 살전2:17, 롬 16:7, 살전 2:6). 제롬은 두 가지 유형을 들어 사도를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12사도들과 바울처럼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사도들입니다. 이들만이 성경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사도들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성경을 기록할 수 없고 원 사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바로 우리가 여기에 속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사도가 되었습니까? 바울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도의 근원이 인간이나 사람들의 추천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습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그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 극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데에 앞장섰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떠났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해보다 빛난 영광의 빛이 그를 둘러 비췄습니다. 바울은 해보다 빛난 부활하신 예수님, 영광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사도면 어떻고, 아니라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신경을 일일이 쓸 것 없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면 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변명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여 바울이 전한 복음까지 부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그리스도와 그를 살리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변증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부르심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부르심을 상대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전도의 열매가 있든 없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구원과 부르심에는 그 어떤 것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시고 세우셨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3절을 보면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은혜와 평강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서로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고, 평강은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보호자가 되시고 내 편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2. 우리 죄를 위해 대속하신 예수님(갈 1:4-5)
갈라디아서 1장 4-5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리스도께서는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내기 위하여 자기 몸을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악한 세대는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고후 4:4,고전 2:6, 엡 2:2). 악한 세대는 거짓 진리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악한 세대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입니다(딤후 3:1-5). 이때는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고 사나우며 쾌락 사랑하기를 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주님께서는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죄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교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교만으로 인한 죄의 결과가 어떠합니까? 로마서 6장 23후절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저주스럽게 살다가 결국에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을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고 했습니다. 죽는 것도 비참한데 심판까지 받으니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거기에다 심판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록 21장 8절을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자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의 결과는 무섭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아이스크림 먹듯이 쉽게 짓습니다. 그러나 죄는 쉽게 지을 것이 아닙니다. 죄 짓기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멸망할 인간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딤전 2:6, 딛 2:14, 벧전 3:18).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다 내어 주셨습니다. 채찍과 조롱과 멸시를 받고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손발을 마비시키고 생각도 마비시킵니다. 죽음은 우리를 두렵고 불안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허무하게 만듭니다. 죽음은 우리의 젊고 탄력 있는 피부를 쇠하게 합니다. 죽음은 회의와 절망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과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벧전 1:3-4).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에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3. 복음과 다른 복음(갈 1:6-9)
갈라디아 성도들은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1장 6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그 시초부터 그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든지 따르든지 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갈 1:9).
그런데 그들은 다른 복음을 좇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선언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7절을 보겠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교란시켜 복음을 변질시키는데 있습니다. ‘교란하다’는 파쟁과 분쟁을 뜻합니다. ‘변하다’는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닌 것처럼 하지만 궁극에 가서는 다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은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지고는 안 되고 할례를 행해야 하고,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갈 4:10,21, 5:2, 6:13). 그들은 스스로 복음을 충성스럽게 전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갈 1:6).
그러나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단 하나의 복음밖에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교의 이름을 도용하는 그리스도의 탈을 쓴 악마의 집단들입니다. 이런 집단에는 죄악에 빠지게 하는 무서운 독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다른 복음에 쉽게 빠집니까? 왜 사람들이 미혹됩니까? 참 된 것보다 가짜가 매혹적이고 순수보다 무엇을 가미한 것이 더 좋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불량 식품일수록 먹음직하게 보입니다. 조미료를 가미한 음식이 담백하고 순백한 음식보다 맛이 있어 보입니다. 백우유보다 무언가를 첨가한 바나나, 딸기 우유가 맛이 있어 보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무엇을 첨가했다 하면 무엇이 있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에 무엇을 가미했다 하면 진전된 복음, 깊고 오묘한 진리가 담겨진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미혹당합니다. 무엇보다도 미혹의 영이 있어 그런 것입니다.
복음은 첨가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복음은 은혜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복음은 그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 율법주의자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였습니까?
첫째, 개인적인 야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갈 4:17). 그리고 6장 13절을 보면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할례를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누구누구를 할례를 행하게 했다며 자신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들은 양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고, 양을 이용하여 사업체를 만들어 돈을 벌고 자기 유익을 챙겼습니다. 그래서 돈벌이를 위하여 모두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이단의 특징입니다.
둘째, 갈라디아 성도들의 약점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2절을 보겠습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할 때에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돌에 맞아 죽었다가 살아나기도 했습니다(행 14:19). 갈라디아 교회는 핍박 중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로 보건대 갈라디아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을까 짐작이 갑니다.
그들은 핍박을 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행하고 절기를 지키면 핍박을 받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한마디로 십자가의 고난을 내려놔 주겠다고 하니 그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복음의 핵심은 고난입니다. 고난을 통한 부활의 영광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십자가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상대화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나 복음 가지고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꼬리를 붙였습니다. 복음+α, 믿음+α를 붙였습니다. 이처럼 이단은 꼬리가 붙습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접두어를 붙이고, 직통 계시를 강조하고 무엇을 보았다고 가르칩니다.
‘이단’이란 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예수님인데 끝이 다릅니다. 사람과 원숭이는 외모로 볼 때 비슷한 것 같지만 완연히 다릅니다. 그것은 원숭이는 꼬리가 있고, 사람은 꼬리가 없습니다.
요즈음 은사를 강조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복음이나 믿음만을 가지고는 안 되고 은사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은사는 구원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특히 방언의 은사는 구원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은사는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구원의 조건은 결코 아닙니다.
복음은 순백하고 담백한 것입니다. 복음은 절대적입니다. 복음 자체가 절대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구조 또한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내가 믿는 교리, 그리고 절대적인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을 책장에 방치하지 말고 읽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창조신앙을 분명하게 갖기 바랍니다. 이단에 빠지는 이유 중 하나가 창조 신앙이 희미한데서 옵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 만난 복음”을 펴내고자 하는데 로마서를 통해 복음신앙과 크리스천 윤리를 확립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천사라도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저주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상을 파괴하듯이 철저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대학마을교회 성도들은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리지 마세요. 무슨 부흥회 한다면 쫓아가고, 무슨 모임이 있다고 하면 쫓아가고, 어디에서 성경을 공부한다고 하면 쫓아가지 마세요. 우리 교회에서 성경공부하고 주일에 선포되는 말씀과 매일 일용할양식으로 족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기본적인 해석은 문맥을 따라서 해야 합니다. 한 절만 딱 떼놓고 이것은 이것이라고 단정하면 위험합니다. 이단들의 특징이 한 절만 가지고 이것이 전체인양 강조합니다. 그리고 구약은 신약으로 풀어야 합니다. 성경을 상징이나 비유로 풀면 위험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십사만 사천 명이 나옵니다. 십사만 사천 명을 어떤 집단은 자신들의 신도수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십사만 사천 명은 히브리 사람들의 셈에 가장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십사만 사천 명의 수에 들었느냐 안 들었느냐를 가지고 미혹합니다. 여호와증인이 그러하고 과거 다미 선교회가 그러하고 지금 모 집단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그 숫자에 들어가야 구원을 받는다며 미혹합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하더라도 복음만은 절대 양보하면 안 됩니다. 생명의 힘은 절대성에 있습니다. 여기에 운명을 걸고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요즘 종교란 모든 게 다 좋은 것 아니냐. 그거 다 진리를 찾으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 바르게 살려는 운동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 다원주의 신앙와 그런 개념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교회에 꼭 나가야 하는가 하는 사람들은 신앙에 대한 악마적 도전이요 우상이요 악마입니다.
아무 신앙이 없는 사람이 차라리 낫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희망적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음을 영접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을 가진 자들은 악마, 사탄입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으면 왜 순교합니까? 그리스도교는 순교의 종교입니다. 이것은 절대성 때문입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기 때문입니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많은 이적을 행할 것이라고 하며 뭐 병도 고치고 뭐 굉장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적과 복음은 상관이 없습니다. 신기한 이적에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4. 그리스도의 종의 자세(갈 1:10)
갈라디아서 1장 10절을 보겠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리스도의 종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기의 영광을 취했습니다. 사람들의 귀를 간지럽게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없고 자기 부인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귀가 즐거웠겠습니까? 현혹이 안 되겠습니까? 성경 공부도 필요 없고, 힘들게 복음을 전할 필요도 없고, 헌금할 필요도 없고, 선교사로 나갈 필요도 없고, 오직 축복만 받는다고 해보십시오.
그러나 이는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3P(pure, poor, piety)를 가르칩니다. 대개 쓴 약에는 캡슐을 싸는데 이를 oblate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oblate, 사탕발림이 아닙니다. 사탕발림을 하는 사람들의 뒤에는 무서운 독이 있습니다. 무서운 악마가 서려 있습니다. 사람을 못 쓰게 하고, 가정을 못 쓰게 하고,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십자가의 고난을 강조하고 사랑하도록 합니다. 이런 교회가 진정으로 복음에 기초한 교회입니다. 예수의 고난의 흔적이 많이 있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다가 그 몸에는 많은 예수의 흔적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많은 상처와 매 맞음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많은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분들입니다.
우리가 받은 복음은 사도들이 계시로 받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힘써서 변증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 1:7).
그리스도교 역사가 시작한 이래 많은 이단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달콤하게 유혹했습니다. 지금도 이단들이 곳곳에 산재해 그럴듯한 이론으로 우리를 미혹하여 믿음을 교란시키고 가정을 파괴하며 사회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 내에도 예외없이 이단들이 나타나 성도들을 미혹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직을 부인하여 바울이 전한 복음까지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만을 가지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며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그들에게 다른 복음은 없으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주제는 로마서와 같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갈라디아서 강해를 두 권이나 썼습니다. 로마서 강해보다 갈라디아서 강해가 배나 더 두껍습니다. 그는 그만큼 갈라디아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본문을 통해 이단이 난무하는 시대에 복음 진리를 확립하고 복음 진리를 힘써 전하고 변증하기를 기도합니다.
1. 사도된 바울(갈 1:1-3)
갈라디아서 1장 1절을 보겠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바울 자신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원래 사도란 세례 요한 때부터 주님과 생활을 같이 한 자, 주님께서 친히 임명하신 자,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12제자들을 말합니다(행 1:2,22, 마 3:14).
그 후 바울과 바나바, 주의 형제 야고보, 실누아노,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행 14:4,14, 고전 15:7, 갈 1:19, 살전2:17, 롬 16:7, 살전 2:6). 제롬은 두 가지 유형을 들어 사도를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12사도들과 바울처럼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사도들입니다. 이들만이 성경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사도들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성경을 기록할 수 없고 원 사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바로 우리가 여기에 속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사도가 되었습니까? 바울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도의 근원이 인간이나 사람들의 추천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습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그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 극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데에 앞장섰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떠났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해보다 빛난 영광의 빛이 그를 둘러 비췄습니다. 바울은 해보다 빛난 부활하신 예수님, 영광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사도면 어떻고, 아니라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신경을 일일이 쓸 것 없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면 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변명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여 바울이 전한 복음까지 부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그리스도와 그를 살리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변증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부르심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부르심을 상대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전도의 열매가 있든 없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구원과 부르심에는 그 어떤 것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시고 세우셨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3절을 보면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은혜와 평강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서로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고, 평강은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보호자가 되시고 내 편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2. 우리 죄를 위해 대속하신 예수님(갈 1:4-5)
갈라디아서 1장 4-5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리스도께서는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내기 위하여 자기 몸을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악한 세대는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고후 4:4,고전 2:6, 엡 2:2). 악한 세대는 거짓 진리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악한 세대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입니다(딤후 3:1-5). 이때는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고 사나우며 쾌락 사랑하기를 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주님께서는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죄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교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교만으로 인한 죄의 결과가 어떠합니까? 로마서 6장 23후절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저주스럽게 살다가 결국에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을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고 했습니다. 죽는 것도 비참한데 심판까지 받으니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거기에다 심판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록 21장 8절을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자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의 결과는 무섭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아이스크림 먹듯이 쉽게 짓습니다. 그러나 죄는 쉽게 지을 것이 아닙니다. 죄 짓기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멸망할 인간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딤전 2:6, 딛 2:14, 벧전 3:18).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다 내어 주셨습니다. 채찍과 조롱과 멸시를 받고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손발을 마비시키고 생각도 마비시킵니다. 죽음은 우리를 두렵고 불안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허무하게 만듭니다. 죽음은 우리의 젊고 탄력 있는 피부를 쇠하게 합니다. 죽음은 회의와 절망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과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벧전 1:3-4).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에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3. 복음과 다른 복음(갈 1:6-9)
갈라디아 성도들은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1장 6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그 시초부터 그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든지 따르든지 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갈 1:9).
그런데 그들은 다른 복음을 좇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선언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7절을 보겠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교란시켜 복음을 변질시키는데 있습니다. ‘교란하다’는 파쟁과 분쟁을 뜻합니다. ‘변하다’는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닌 것처럼 하지만 궁극에 가서는 다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은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지고는 안 되고 할례를 행해야 하고,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갈 4:10,21, 5:2, 6:13). 그들은 스스로 복음을 충성스럽게 전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갈 1:6).
그러나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단 하나의 복음밖에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교의 이름을 도용하는 그리스도의 탈을 쓴 악마의 집단들입니다. 이런 집단에는 죄악에 빠지게 하는 무서운 독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다른 복음에 쉽게 빠집니까? 왜 사람들이 미혹됩니까? 참 된 것보다 가짜가 매혹적이고 순수보다 무엇을 가미한 것이 더 좋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불량 식품일수록 먹음직하게 보입니다. 조미료를 가미한 음식이 담백하고 순백한 음식보다 맛이 있어 보입니다. 백우유보다 무언가를 첨가한 바나나, 딸기 우유가 맛이 있어 보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무엇을 첨가했다 하면 무엇이 있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에 무엇을 가미했다 하면 진전된 복음, 깊고 오묘한 진리가 담겨진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미혹당합니다. 무엇보다도 미혹의 영이 있어 그런 것입니다.
복음은 첨가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복음은 은혜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복음은 그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 율법주의자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였습니까?
첫째, 개인적인 야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갈 4:17). 그리고 6장 13절을 보면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할례를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누구누구를 할례를 행하게 했다며 자신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들은 양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고, 양을 이용하여 사업체를 만들어 돈을 벌고 자기 유익을 챙겼습니다. 그래서 돈벌이를 위하여 모두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이단의 특징입니다.
둘째, 갈라디아 성도들의 약점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2절을 보겠습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할 때에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돌에 맞아 죽었다가 살아나기도 했습니다(행 14:19). 갈라디아 교회는 핍박 중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로 보건대 갈라디아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을까 짐작이 갑니다.
그들은 핍박을 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행하고 절기를 지키면 핍박을 받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한마디로 십자가의 고난을 내려놔 주겠다고 하니 그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복음의 핵심은 고난입니다. 고난을 통한 부활의 영광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십자가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상대화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나 복음 가지고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꼬리를 붙였습니다. 복음+α, 믿음+α를 붙였습니다. 이처럼 이단은 꼬리가 붙습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접두어를 붙이고, 직통 계시를 강조하고 무엇을 보았다고 가르칩니다.
‘이단’이란 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예수님인데 끝이 다릅니다. 사람과 원숭이는 외모로 볼 때 비슷한 것 같지만 완연히 다릅니다. 그것은 원숭이는 꼬리가 있고, 사람은 꼬리가 없습니다.
요즈음 은사를 강조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복음이나 믿음만을 가지고는 안 되고 은사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은사는 구원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특히 방언의 은사는 구원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은사는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구원의 조건은 결코 아닙니다.
복음은 순백하고 담백한 것입니다. 복음은 절대적입니다. 복음 자체가 절대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구조 또한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내가 믿는 교리, 그리고 절대적인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을 책장에 방치하지 말고 읽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창조신앙을 분명하게 갖기 바랍니다. 이단에 빠지는 이유 중 하나가 창조 신앙이 희미한데서 옵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 만난 복음”을 펴내고자 하는데 로마서를 통해 복음신앙과 크리스천 윤리를 확립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천사라도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저주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상을 파괴하듯이 철저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대학마을교회 성도들은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리지 마세요. 무슨 부흥회 한다면 쫓아가고, 무슨 모임이 있다고 하면 쫓아가고, 어디에서 성경을 공부한다고 하면 쫓아가지 마세요. 우리 교회에서 성경공부하고 주일에 선포되는 말씀과 매일 일용할양식으로 족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기본적인 해석은 문맥을 따라서 해야 합니다. 한 절만 딱 떼놓고 이것은 이것이라고 단정하면 위험합니다. 이단들의 특징이 한 절만 가지고 이것이 전체인양 강조합니다. 그리고 구약은 신약으로 풀어야 합니다. 성경을 상징이나 비유로 풀면 위험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십사만 사천 명이 나옵니다. 십사만 사천 명을 어떤 집단은 자신들의 신도수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십사만 사천 명은 히브리 사람들의 셈에 가장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십사만 사천 명의 수에 들었느냐 안 들었느냐를 가지고 미혹합니다. 여호와증인이 그러하고 과거 다미 선교회가 그러하고 지금 모 집단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그 숫자에 들어가야 구원을 받는다며 미혹합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하더라도 복음만은 절대 양보하면 안 됩니다. 생명의 힘은 절대성에 있습니다. 여기에 운명을 걸고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요즘 종교란 모든 게 다 좋은 것 아니냐. 그거 다 진리를 찾으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 바르게 살려는 운동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 다원주의 신앙와 그런 개념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교회에 꼭 나가야 하는가 하는 사람들은 신앙에 대한 악마적 도전이요 우상이요 악마입니다.
아무 신앙이 없는 사람이 차라리 낫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희망적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음을 영접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을 가진 자들은 악마, 사탄입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으면 왜 순교합니까? 그리스도교는 순교의 종교입니다. 이것은 절대성 때문입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기 때문입니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많은 이적을 행할 것이라고 하며 뭐 병도 고치고 뭐 굉장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적과 복음은 상관이 없습니다. 신기한 이적에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4. 그리스도의 종의 자세(갈 1:10)
갈라디아서 1장 10절을 보겠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리스도의 종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기의 영광을 취했습니다. 사람들의 귀를 간지럽게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없고 자기 부인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귀가 즐거웠겠습니까? 현혹이 안 되겠습니까? 성경 공부도 필요 없고, 힘들게 복음을 전할 필요도 없고, 헌금할 필요도 없고, 선교사로 나갈 필요도 없고, 오직 축복만 받는다고 해보십시오.
그러나 이는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3P(pure, poor, piety)를 가르칩니다. 대개 쓴 약에는 캡슐을 싸는데 이를 oblate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oblate, 사탕발림이 아닙니다. 사탕발림을 하는 사람들의 뒤에는 무서운 독이 있습니다. 무서운 악마가 서려 있습니다. 사람을 못 쓰게 하고, 가정을 못 쓰게 하고,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십자가의 고난을 강조하고 사랑하도록 합니다. 이런 교회가 진정으로 복음에 기초한 교회입니다. 예수의 고난의 흔적이 많이 있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다가 그 몸에는 많은 예수의 흔적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많은 상처와 매 맞음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많은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분들입니다.
우리가 받은 복음은 사도들이 계시로 받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힘써서 변증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