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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1-4
한 마음을 품으라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빌 2:2).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로상을 수상한 일본의 수학자 히로나카는 “학문의 즐거움에서” 50여 년 동안 일상생활 속에서 만난 무명의 사람들에게서 살아가는 자세 같은 것을 보다 많이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평범한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친구와 스승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부모님은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친구는 선택의 여지가 있기에 친구 사귐의 중요성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계속합니다. “가까이 지냈던 많은 사람이 내 인생의 스승이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누구를 배우고자 하고,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나는 누구의 영향과 무슨 책으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보다도 부모님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란 말도 그런데서 나온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은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 한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왜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할까요? 사도 바울은 선교헌금을 가지고 온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빌립보 교회의 문제를 알았습니다. 그 문제는 빌립보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문제였습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반목과 분열이 있게 된다면 성령께서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 하나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 하나가 되는 교회가 되어 캠퍼스와 열방을 품고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1.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빌 2:1-2).
빌립보서 2장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빌립보 교회는 이런 점에서 훌륭했습니다. 첫째는 서로 권면했습니다. 권면(encourage)이란 ‘격려하다’, ‘힘을 북돋워 주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잘 도왔습니다. 둘째는 서로 사랑의 위로를 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끈으로 하나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서로 위로하였습니다. 셋째는 성령 안에서 서로 사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인정하고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모이면 성령 안에서 교제와 위로와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교회의 기능은 4 가지입니다. 첫째는 케리그마(말씀 선포), 둘째는 디다케(가르침), 셋째는 코이노니아(교제), 넷째는 디아코니아(봉사)입니다. 그들은 성령 안에서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실로 칭찬받을 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가 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2절을 보겠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 사랑으로 하나가 되도록 권면합니다.
빌립보서 1장 15절을 보면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그리고 빌립보서 4장 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매들인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여 서로 경쟁하고 시기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주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마주 보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어깨동무하며 나가는 공동체다.” 마주 보면 상대방의 얼굴에 죽은 깨 몇 개, 점이 몇 개, 여드름 몇 개, 얼굴의 모양을 보게 되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시골스럽게 생겼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친밀한 관계는 마주보는 관계가 아니라 옆에 있는 관계입니다. 마주보는 관계는 맞선 보는 자리, 면접 보는 부담스러운 자리입니다.
문제 많은 교회는 전도는 안 하고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의 약점이나 허물을 보고 서로 흉보고 정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아름다운 교회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어깨동무하며 앞으로 나가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습과 상대방의 아름다운 옆모습만 바라보고 예수님을 배우는 교회가 됩니다.
“같은 사랑”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깊이는 각기 달라도 사랑의 대상, 예수님은 같아야 됩니다. “뜻을 합한다”는 것은 사심이 없는, 순수한 인격과 인격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 됨을 말합니다. 어떤 something을 가지고 만나는 것이 아닌, 예수님을 중심한 순수한 만남입니다.
어느 공동체든 하나 됨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 됨의 반대는 분리입니다. 분리는 많은 상처를 가져다줍니다. 분리는 사탄이 노리는 것입니다. 남북 분단은 67년 동안 우리 민족에 많은 고통과 아픔을 안겨주었습니다. 동서의 갈등은 많은 상처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보·혁의 갈등으로 인해 남·북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사용자와 노동자와의 반목과 갈등은 경제 도약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부부가 하나가 되지 못하면 이혼하게 되고, 이혼은 자신을 물론 자녀들에게 큰 상처를 줍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리가 되면 성도들이 상처받고 교회를 떠납니다. 처음 한국 장로회는 한 교단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 식민지 치하를 거치면서 분리에 분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신사 참배로 인해 고신과 예장으로 나누어지더니,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와 기장과 예장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예장이 교회 일치 운동인 W.C.C.에 가입하느냐, 아니냐를 놓고 또 합동과 통합으로 나누어졌습니다. 합동은 또 다시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어졌습니다. 이제 합동은 몇 개로 나뉘어졌는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2000년 초에 개혁과 비개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다가 나누어지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가정이나 사회나 교회나 국가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분열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둘만 모이면 서로 싸우고 나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혼합주의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진리,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가 될 때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똑똑한 열 사람이 각기 약진하는 것보다 부족한 두 세 사람이 합심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전도서 4장을 보면 전도자는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함께 낙을 누릴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 때 그는 내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유보다 더 많은 친구가 필요하다는 소중한 진리를 깨닫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9-12).
우리 속담에 기쁨을 함께 나누면 그 기쁨이 배가되고 슬픔을 함께 나누면 그 슬픔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위로가 필요할 때 위로하여 줄 수 있는 친구, 기쁠 때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 슬플 때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 신앙의 침체 속으로 빠져들 때 바로 잡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함석헌 선생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의 시가 있습니다. “만리 길 떠나는 처자를 내맡기며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하며 구명대 서로 사양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런 친구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함께 길을 가며 서로 격려할 수 있다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같이 눈물을 나누고, 같이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말씀의 교제를 갖는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비전을 공유하여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서로 기도해 주는 사귐은 참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성공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진실한 친구를 만나 서로 격려하며 감싸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란 가르칠 ‘敎’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사귈‘交’자로서의 의미도 있습니다. 헬라어도 교회란 “코이노니아”인데 이는 사귐이란 뜻입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현실 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녹이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가 있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공동체가 생기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도행전 1장 14절 보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아우들과 또 예수님을 변함없이 사모하고 따랐던 여인들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한마음 한 뜻이 되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그들은 각기 개성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지기를 잘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놀랍게도 한마음 한 뜻으로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미미해 보였지만 한마음 한 뜻이 되어 기도했을 때 원자폭탄, 수소폭탄보다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하여 세계를 변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기도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초대교회를 세우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초대성도들의 특징은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사들로부터 배우며 서로 떡을 떼며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독일 수양회에 참석하여 하나 됨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독일 선교사들은 주님의 사랑의 끈으로 하나가 되어 독일 캠퍼스 선교라는 공통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했을 때 현지 학생 목자들이 세워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아버지 사역에 동참하여 주인이 되어 수양회를 섬기고 말씀 강사로 쓰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독일은 다음 세대를 확실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루마니아도 주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활발하게 주님의 역사를 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한 마음, 한 뜻, 한 비전을 가지고 인하대와 인천대, 너 나아가 세계 캠퍼스, 특히 모스크바 대학을 위해 기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세 모두 찬양하며 주의 사랑을 전하세 모두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알리세.”
2. 우리가 어떻게 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빌 2:3-4)
첫째,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빌 2:3전).
빌립보서 2장 3전절을 보겠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다툼(selfish ambition)은 이기적인 야망, 이기적인 욕망을 말합니다. 이기적인 야심, 야망이 있으면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은 동역의 관계가 아닌, 라이벌의 관계입니다. 음모와 술수, 음해가 판을 치고, 서로 헤게모니를 쥐고자 다투게 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인간적인 야심이 있었습니다. 최고 리더가 되어 군림하고 섬김 받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적인 야심을 버리고 “세상 땅 끝까지 복음 전파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붙들고 이 비전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졌을 때 놀랍게도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적인 야심을 버리고 주님의 지상 명령, 세상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비전이 넘치는 visionary가 되어야 합니다.
“허영”은 남에게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헛된 욕심,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허영은 외모만을 가꾸고 치장하고자 하는 내면성 없는 여인과 같고, 자기 분수를 모르는 팔푼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광을 내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nobody가 되기보다 somebody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노래를 하더라도 solo를 좋아합니다. 드러나지 않는 봉사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봉사하고자 합니다. 이런 허영심은 모든 죄악의 온상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깨진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헛된 허영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둘째, 오직 겸손하라(빌 2:3후).
허영심을 가진 사람은 배우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일절 허영심을 버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3후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이란 허리를 굽신거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일 수 있습니까? 우리말에 “자기 잘난 맛으로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교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낫게 여길 수 있습니까? 각기 사람에게는 모두 약점과 허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거룩한 존재요 각기 독특한 하나님의 은사가 있음을 인정하게 될 때 남을 낫게 여길 수 있습니다. 각 개인의 은사는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쁜 것, 천하고 귀한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은사를 지체로 비유했습니다. 우리의 지체 중에 열등한 지체 하나라도 있습니까? 모두 귀하고 중요합니다. 지체 하나 하나가 연합하여 우리 몸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하여 각기 성도들의 은사가 연합하여 성령께서 임재하는 곳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을 보면 각기 은사가 다른 점을 봅니다. 어떤 형제는 열정이 있습니다. 또 어떤 형제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성실함이 있습니다. 어떤 형제는 섬김의 은사가 있고, 어떤 자매는 찬양의 은사가 있고, 어떤 형제는 가르치는 은사가 있고, 어떤 자매는 권면의 은사가 있고, 어떤 형제는 능력의 은사가 있고, 어떤 자매는 돕는 은사가 있고, 어떤 자매는 믿음의 은사가 있습니다.
이처럼 각기 우리에게는 나에게는 없는 독특한 은사들이 있습니다. 이를 인정할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부부싸움 왜 합니까? 자기와 똑같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코 다른 사람이 나처럼 될 수 없고, 내가 다른 사람처럼 될 수 없습니다.
다름은 갈등의 요지가 되기도 하지만 다름을 인정할 때, 내가 없는 것을 상대방이 가지고 있고, 내게 있는 것이 상대방에게는 없음을 인정할 때 서로 조화를 이루어 몇 배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각기 부여받은 직임, 직분이 다릅니다. 교회에는 목사가 있고, 장로와 권사, 집사, 교사가 있습니다. 이런 직임은 계급이 아니라 직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각기 주신 직임을 소중히 여기고, 각기 주신 직임의 분량을 깨닫고 각기 직임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되고, 또한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셋째,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라(빌 2:4).
빌립보서 2장 4절을 보겠습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일만큼은 확실히 끝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또 다른 부류는 자기 일은 하지 않으면서 남의 일을 간섭하는 동네 시어머니 타입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일을 잘하는 것은 기본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돌보도록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가정 일을 소홀히 하거나, 자기 전공을 게을리 하거나,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남에게 책임전가해서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 자기 일을 잘 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기본입니다.
크리스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남을 돌아보려면 관심이 있어야 하고, 관심을 가지려면 희생해야 합니다. 희생 없이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돌아본 아름다운 일화가 있습니다. 인도에서 복음을 전했던 썬다싱이 하루는 친구와 함께 눈 덮인 산길을 가다가 얼어서 쓰러진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에 썬다싱은 함께 가던 친구에게 얼어서 쓰러진 사람을 돕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나도 힘든데 어떻게 그를 업고 갈 수 있느냐며 먼저 가 버렸습니다. 혼자 남은 썬다싱은 그를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갔습니다. 얼마 동안 가니 혼자 살겠다고 간 그 친구가 눈 속에 파 묻혀 죽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썬다싱은 얼어서 죽어 가는 사람을 업고 가다가 보니 땀이 나고 온기가 생겨 썬다싱도 살고, 졸도한 사람도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기 혼자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게 되고, 남을 살리고자 하면 남도 살고 나도 살게 됩니다. 성도는 남을 돕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살고 남도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5:12).
주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겸손과 희생과 순종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 사람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한 기도 제목 한 비전 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할 때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아멘.
한 마음을 품으라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빌 2:2).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로상을 수상한 일본의 수학자 히로나카는 “학문의 즐거움에서” 50여 년 동안 일상생활 속에서 만난 무명의 사람들에게서 살아가는 자세 같은 것을 보다 많이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평범한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친구와 스승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부모님은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친구는 선택의 여지가 있기에 친구 사귐의 중요성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계속합니다. “가까이 지냈던 많은 사람이 내 인생의 스승이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누구를 배우고자 하고,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나는 누구의 영향과 무슨 책으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보다도 부모님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란 말도 그런데서 나온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은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 한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왜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할까요? 사도 바울은 선교헌금을 가지고 온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빌립보 교회의 문제를 알았습니다. 그 문제는 빌립보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문제였습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반목과 분열이 있게 된다면 성령께서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 하나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 하나가 되는 교회가 되어 캠퍼스와 열방을 품고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1.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빌 2:1-2).
빌립보서 2장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빌립보 교회는 이런 점에서 훌륭했습니다. 첫째는 서로 권면했습니다. 권면(encourage)이란 ‘격려하다’, ‘힘을 북돋워 주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잘 도왔습니다. 둘째는 서로 사랑의 위로를 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끈으로 하나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서로 위로하였습니다. 셋째는 성령 안에서 서로 사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인정하고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모이면 성령 안에서 교제와 위로와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교회의 기능은 4 가지입니다. 첫째는 케리그마(말씀 선포), 둘째는 디다케(가르침), 셋째는 코이노니아(교제), 넷째는 디아코니아(봉사)입니다. 그들은 성령 안에서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실로 칭찬받을 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가 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2절을 보겠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 사랑으로 하나가 되도록 권면합니다.
빌립보서 1장 15절을 보면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그리고 빌립보서 4장 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매들인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여 서로 경쟁하고 시기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주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마주 보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어깨동무하며 나가는 공동체다.” 마주 보면 상대방의 얼굴에 죽은 깨 몇 개, 점이 몇 개, 여드름 몇 개, 얼굴의 모양을 보게 되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시골스럽게 생겼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친밀한 관계는 마주보는 관계가 아니라 옆에 있는 관계입니다. 마주보는 관계는 맞선 보는 자리, 면접 보는 부담스러운 자리입니다.
문제 많은 교회는 전도는 안 하고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의 약점이나 허물을 보고 서로 흉보고 정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아름다운 교회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어깨동무하며 앞으로 나가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습과 상대방의 아름다운 옆모습만 바라보고 예수님을 배우는 교회가 됩니다.
“같은 사랑”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깊이는 각기 달라도 사랑의 대상, 예수님은 같아야 됩니다. “뜻을 합한다”는 것은 사심이 없는, 순수한 인격과 인격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 됨을 말합니다. 어떤 something을 가지고 만나는 것이 아닌, 예수님을 중심한 순수한 만남입니다.
어느 공동체든 하나 됨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 됨의 반대는 분리입니다. 분리는 많은 상처를 가져다줍니다. 분리는 사탄이 노리는 것입니다. 남북 분단은 67년 동안 우리 민족에 많은 고통과 아픔을 안겨주었습니다. 동서의 갈등은 많은 상처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보·혁의 갈등으로 인해 남·북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사용자와 노동자와의 반목과 갈등은 경제 도약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부부가 하나가 되지 못하면 이혼하게 되고, 이혼은 자신을 물론 자녀들에게 큰 상처를 줍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리가 되면 성도들이 상처받고 교회를 떠납니다. 처음 한국 장로회는 한 교단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 식민지 치하를 거치면서 분리에 분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신사 참배로 인해 고신과 예장으로 나누어지더니,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와 기장과 예장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예장이 교회 일치 운동인 W.C.C.에 가입하느냐, 아니냐를 놓고 또 합동과 통합으로 나누어졌습니다. 합동은 또 다시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어졌습니다. 이제 합동은 몇 개로 나뉘어졌는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2000년 초에 개혁과 비개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다가 나누어지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가정이나 사회나 교회나 국가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분열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둘만 모이면 서로 싸우고 나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혼합주의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진리,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가 될 때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똑똑한 열 사람이 각기 약진하는 것보다 부족한 두 세 사람이 합심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전도서 4장을 보면 전도자는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함께 낙을 누릴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 때 그는 내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유보다 더 많은 친구가 필요하다는 소중한 진리를 깨닫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9-12).
우리 속담에 기쁨을 함께 나누면 그 기쁨이 배가되고 슬픔을 함께 나누면 그 슬픔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위로가 필요할 때 위로하여 줄 수 있는 친구, 기쁠 때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 슬플 때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 신앙의 침체 속으로 빠져들 때 바로 잡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함석헌 선생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의 시가 있습니다. “만리 길 떠나는 처자를 내맡기며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하며 구명대 서로 사양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런 친구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함께 길을 가며 서로 격려할 수 있다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같이 눈물을 나누고, 같이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말씀의 교제를 갖는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비전을 공유하여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서로 기도해 주는 사귐은 참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성공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진실한 친구를 만나 서로 격려하며 감싸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란 가르칠 ‘敎’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사귈‘交’자로서의 의미도 있습니다. 헬라어도 교회란 “코이노니아”인데 이는 사귐이란 뜻입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현실 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녹이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가 있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공동체가 생기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도행전 1장 14절 보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아우들과 또 예수님을 변함없이 사모하고 따랐던 여인들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한마음 한 뜻이 되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그들은 각기 개성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지기를 잘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놀랍게도 한마음 한 뜻으로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미미해 보였지만 한마음 한 뜻이 되어 기도했을 때 원자폭탄, 수소폭탄보다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하여 세계를 변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기도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초대교회를 세우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초대성도들의 특징은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사들로부터 배우며 서로 떡을 떼며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독일 수양회에 참석하여 하나 됨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독일 선교사들은 주님의 사랑의 끈으로 하나가 되어 독일 캠퍼스 선교라는 공통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했을 때 현지 학생 목자들이 세워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아버지 사역에 동참하여 주인이 되어 수양회를 섬기고 말씀 강사로 쓰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독일은 다음 세대를 확실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루마니아도 주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활발하게 주님의 역사를 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한 마음, 한 뜻, 한 비전을 가지고 인하대와 인천대, 너 나아가 세계 캠퍼스, 특히 모스크바 대학을 위해 기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세 모두 찬양하며 주의 사랑을 전하세 모두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알리세.”
2. 우리가 어떻게 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빌 2:3-4)
첫째,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빌 2:3전).
빌립보서 2장 3전절을 보겠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다툼(selfish ambition)은 이기적인 야망, 이기적인 욕망을 말합니다. 이기적인 야심, 야망이 있으면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은 동역의 관계가 아닌, 라이벌의 관계입니다. 음모와 술수, 음해가 판을 치고, 서로 헤게모니를 쥐고자 다투게 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인간적인 야심이 있었습니다. 최고 리더가 되어 군림하고 섬김 받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적인 야심을 버리고 “세상 땅 끝까지 복음 전파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붙들고 이 비전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졌을 때 놀랍게도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적인 야심을 버리고 주님의 지상 명령, 세상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비전이 넘치는 visionary가 되어야 합니다.
“허영”은 남에게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헛된 욕심,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허영은 외모만을 가꾸고 치장하고자 하는 내면성 없는 여인과 같고, 자기 분수를 모르는 팔푼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광을 내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nobody가 되기보다 somebody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노래를 하더라도 solo를 좋아합니다. 드러나지 않는 봉사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봉사하고자 합니다. 이런 허영심은 모든 죄악의 온상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깨진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헛된 허영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둘째, 오직 겸손하라(빌 2:3후).
허영심을 가진 사람은 배우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일절 허영심을 버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3후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이란 허리를 굽신거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일 수 있습니까? 우리말에 “자기 잘난 맛으로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교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낫게 여길 수 있습니까? 각기 사람에게는 모두 약점과 허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거룩한 존재요 각기 독특한 하나님의 은사가 있음을 인정하게 될 때 남을 낫게 여길 수 있습니다. 각 개인의 은사는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쁜 것, 천하고 귀한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은사를 지체로 비유했습니다. 우리의 지체 중에 열등한 지체 하나라도 있습니까? 모두 귀하고 중요합니다. 지체 하나 하나가 연합하여 우리 몸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하여 각기 성도들의 은사가 연합하여 성령께서 임재하는 곳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을 보면 각기 은사가 다른 점을 봅니다. 어떤 형제는 열정이 있습니다. 또 어떤 형제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성실함이 있습니다. 어떤 형제는 섬김의 은사가 있고, 어떤 자매는 찬양의 은사가 있고, 어떤 형제는 가르치는 은사가 있고, 어떤 자매는 권면의 은사가 있고, 어떤 형제는 능력의 은사가 있고, 어떤 자매는 돕는 은사가 있고, 어떤 자매는 믿음의 은사가 있습니다.
이처럼 각기 우리에게는 나에게는 없는 독특한 은사들이 있습니다. 이를 인정할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부부싸움 왜 합니까? 자기와 똑같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코 다른 사람이 나처럼 될 수 없고, 내가 다른 사람처럼 될 수 없습니다.
다름은 갈등의 요지가 되기도 하지만 다름을 인정할 때, 내가 없는 것을 상대방이 가지고 있고, 내게 있는 것이 상대방에게는 없음을 인정할 때 서로 조화를 이루어 몇 배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각기 부여받은 직임, 직분이 다릅니다. 교회에는 목사가 있고, 장로와 권사, 집사, 교사가 있습니다. 이런 직임은 계급이 아니라 직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각기 주신 직임을 소중히 여기고, 각기 주신 직임의 분량을 깨닫고 각기 직임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되고, 또한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셋째,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라(빌 2:4).
빌립보서 2장 4절을 보겠습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일만큼은 확실히 끝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또 다른 부류는 자기 일은 하지 않으면서 남의 일을 간섭하는 동네 시어머니 타입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일을 잘하는 것은 기본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돌보도록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가정 일을 소홀히 하거나, 자기 전공을 게을리 하거나,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남에게 책임전가해서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 자기 일을 잘 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기본입니다.
크리스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남을 돌아보려면 관심이 있어야 하고, 관심을 가지려면 희생해야 합니다. 희생 없이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돌아본 아름다운 일화가 있습니다. 인도에서 복음을 전했던 썬다싱이 하루는 친구와 함께 눈 덮인 산길을 가다가 얼어서 쓰러진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에 썬다싱은 함께 가던 친구에게 얼어서 쓰러진 사람을 돕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나도 힘든데 어떻게 그를 업고 갈 수 있느냐며 먼저 가 버렸습니다. 혼자 남은 썬다싱은 그를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갔습니다. 얼마 동안 가니 혼자 살겠다고 간 그 친구가 눈 속에 파 묻혀 죽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썬다싱은 얼어서 죽어 가는 사람을 업고 가다가 보니 땀이 나고 온기가 생겨 썬다싱도 살고, 졸도한 사람도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기 혼자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게 되고, 남을 살리고자 하면 남도 살고 나도 살게 됩니다. 성도는 남을 돕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살고 남도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5:12).
주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겸손과 희생과 순종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 사람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한 기도 제목 한 비전 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할 때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