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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1-6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다윗은 어느 날 어린 시절 목동이었을 때를 회상했습니다. 그는 푸른 초원에서 양떼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어먹고, 잔잔한 물가에서 물을 마시는 양떼들의 모습을 회상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을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자신의 목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목자가 되셔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시원한 물가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목자가 되셔서 환난 날에 지켜주셨습니다. 사망의 골짜기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에게서 시가 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나의 목자 되심을 영접하기를 바랍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 23:1-2).
시편 23편 1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이 목자가 되심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축복할 때 나의 태어남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의 목자가 되어주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창 48:15).
시편 80편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떼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목자와 양을 비유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는 양들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먼저 양들의 존재를 살펴보면 양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동물입니다. 다른 양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한편 양은 순진합니다.
모든 짐승들에게는 저마다의 공격무기와 방어 무기가 있습니다. 곰의 무서운 발톱, 사자의 날카로운 이빨, 호랑이의 위용, 말의 뒷발질, 소의 무서운 뿔 등은 저마다 적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고 자신의 몸을 보호합니다.
그러나 양은 모든 짐승들로부터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입니다. 더우기 양은 눈이 근시여서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양은 그저 눈 앞에 먹을 것만 있으면 그것을 향해 달려가다가 웅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이리나 맹수에게 잡혀먹기도 합니다.
그리고 양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양이 목자를 잃게 되면 아무 풀이나 뜯어먹다가 독초를 뜯어먹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양하면 아주 깨끗한 동물로 생각하지만 목자가 하루라도 돌보아주지 않으면 양털에 더러운 오물을 묻히고 다니는 지저분한 동물입니다.
그런데 양에게도 특별한 한 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청각이 기가 잘 발달된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음성을 기가 막히게 잘 압니다. 양은 죽으나 사나 목자의 말을 잘 따라야 들어야 합니다. 그 때에 맹수로부터 보호받고 푸른 초원에서 풀을 뜯으며 시원한 물가에서 물을 마시며 포동포동 살찔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일컬어 양으로 비유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주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장래의 일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아시고 우리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것은 주님께 나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100% 신뢰하고 의탁하는 순간에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길을 걸을 때에도 곁에서 함께 걸으십니다. 내가 잠을 잘 때에도 곁에서 지켜보십니다. 내가 방황할 때에도 곁에 계십니다. 내가 슬픈 눈물을 흘릴 때에도 곁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심중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여러분의 목자는 누구입니까? 현대인들의 시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TV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소파에 누이시며” “돈은 나의 목자시니”, “쾌락은 나의 목자시니” “컴퓨터는 나의 목자시니”, “파워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를 목자로 모시지 않는 사람들은 목마름과 궁핍함으로 지내게 됩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이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여섯 번이나 바꾸어가며 자신의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했지만 그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을 만났을 때 참된 만족을 얻었습니다. 그때 그는 동네로 달려가 주님을 만났다고 전도했습니다.
다윗은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그가 소유하고 싶은 모든 것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소유의 근원이신, 생명의 근원이신, 복의 근원이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특징은 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부족하다, 없다는 것이 입버릇이 되었습니다. “비싼 커피를 마시면서도 저 돈 없어요.”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저 시간 없어요.” 그들은 있으면서도 없다는 말을 밥 먹듯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도 늘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아직도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보다도 주님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통하여 물질을 구하고, 주님을 통하여 건강을 얻고, 주님을 통하여 인생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주님을 통해서 결혼하고, 주님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기 때문에 늘 궁핍하고 부족함을 느낍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생명이 결탁되어 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를 통하여 무엇을 얻으려고 합니까?
가지가 포도나무의 진액을 얻으려고 애쓰고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고 광합성작용을 하려고 애씁니까?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으면 절로 과실을 맺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곧 주님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십자가의 보혈을 믿을 때에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받습니다. 구원받은 이 생명은 영원합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나의 생명의 뿌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뿌리를 내리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의 모든 것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 2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양이 살아가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풀이요 또 하나는 물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에 누입니다. 이는 양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행복과 기쁨의 표현입니다.
양은 두려움을 느끼거나 배고플 때 결코 눕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의 인도함을 받아 푸른 초장에서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배불리 먹어 포만감을 느끼면서 눕습니다. 목자는 양떼들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급류가 흐르는 물가가 아니라 잔잔한 물가입니다. 이는 평화와 안식을 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목자로 고백하는 순간 우리는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내면에 평안과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be in want.
2. 여호와는 나를 소생시키십니다(시 23:3-4).
시편 23편 3절을 읽겠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킨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네페쉬’란 뜻으로 내 존재, 육신과 영혼을 포함한 전 인격의 다시 살아남을 뜻합니다.
과거 우리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우리는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자기중심의 반대는 하나님 중심입니다. 자기중심은 아담의 본성입니다. 아담의 본성은 교만과 불순종입니다.
자기중심은 사람중심입니다. 자기중심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자기중심은 사탄의 영의 지배를 받습니다. 자기중심은 죄의 근원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은 생명입니다(고전 15:22).
그 뿐만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양은 한곳에 오래 동안 머물게 되면 초장이 황폐해집니다. 그래서 목자는 항상 새로운 초장을 찾아 나섭니다. 그 초장을 찾아 나설 때 그 길이 좋은 길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 길이 험난하고, 때로는 그 길이 홍수로 웅덩이 길이 될 수 있고, 꼬불꼬불한 산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목자가 볼 때 가장 안전한 길, 양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좋은 일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 우리는 자기중심으로 바라보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십자가로 구원을 받은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매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길이 바른 길임을 알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시편 23편 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골짜기는 영어로 보면 사망의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고 허상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실 때 죽음은 이미 파해졌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의 실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종이호랑이나 종이칼은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이 너무나 우리에게 두려운 대상이기 때문에 죽음의 그림자만 봐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죽음의 그림자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다보면 핍박과 환난을 당합니다. 질병을 경험합니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저는 2000년 대 초 개혁의 광풍을 겪었습니다. 그때 자고 일어나면 사랑하던 양들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없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가장 사랑했던 형제자매들이 나를 비방하고 떠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결혼 주례도 서고 자녀들이 출생하면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서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고 복을 빌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죽음의 계곡을 수없이 건넜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생명이 결탁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결탁된 한 몸입니다(롬 6:5). 우리와 한 몸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한 몸이 되었다는 믿음이 있을 때 죽음의 골짜기가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 믿음이 강해지고 하나님을 더욱더 신뢰하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은 죽음의 골짜기에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안위하십니다. 막대기와 지팡이는 하나인데 둘로 표현했습니다. 지팡이의 위쪽은 구부러져 실족한 양을 구하고 옆으로 탈선하는 양은 목이나 다리에 이것을 걸어서 제 길로 올려 세웁니다. 때때로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지팡이의 끝으로 톡톡 쳐서 경고를 보냅니다.
그리고 맹수의 침입을 막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동들에게 있어서의 막대기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위로를 경험하면서 비로소 어두움의 골짜기를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3.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잔을 넘치게 하시니(시 23:5-6).
시편 23편 5절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계절이 바뀔 때, 우기에서 건기로, 여름에서 겨울로 바뀔 때 목자들은 양들을 높은 고원지대로 인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고원 지대에는 평평한 바위들이 펼쳐집니다. 그것을 “메사”라고 합니다. 목자들은 이런 바위를 보면 함성을 지르며 양떼들보다 먼저 달려가 바위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치웁니다. 그러면 양들은 목자를 따라와 바위 위에서 서로 뒹굴며 즐겁게 놉니다.
저 멀리에서 이리떼가 추격할지라도 목자는 양떼들을 공격해오는 원수의 목전에서 사랑하는 양떼들과 함께 축제의 향연을 즐깁니다. 한 양 한양을 가슴에 안고 그 머리에 기름을 바릅니다. 그러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다가 다친 상처들이 모두 치유됩니다.
이 때 양들은 마냥 행복해 합니다. 한없는 기쁨 속에 뒹굴게 됩니다. 때로 목자는 물병을 열어 끼얹어주기도 하고 목을 적셔주기도 합니다. 그때 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내 잔이 넘치나이다”입니다.
이스라엘은 귀한 손님이 오면 기름을 붓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손님에게 포도주 잔을 들게 하고 최상의 포도주를 잔이 넘칠 때까지 붓습니다. 잔을 넘치게 하는 것은 손님으로 있는 한 무엇이든지 넘치게 마시고 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 잔치에 귀빈으로 초청하여 넘치도록 복을 주십니다. 자비와 은총의 잔을 넘치게 부어주십니다. 세상의 잔은 채우면 채울수록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잔은 언제나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넘치는 잔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잔을 경험하지 못하게 합니까? 탐심이 넘치는 하나님의 넘치는 잔을 막습니다. 내가 볼 때 하나님의 잔이 넘치는데 늘 인상을 쓰고 다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탐심이 하나님의 은총의 잔을 가로 막습니다.
그리고 불신이 넘치는 하나님의 넘치는 잔을 막습니다. 사람이 의심하게 되면 모든 것이 거꾸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늘 부족하게 주신다고 불평합니다. 탐욕과 의심, 불신과 원망, 그리고 정욕이 주님의 잔을 덮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잔이 넘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온전한 믿음은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령이 충만할 때 넘치는 잔을 체험하게 됩니다.
언제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게 됩니까? 첫째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부인은 내가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나의 죄악을 담당하신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나의 죄를 십자가에 넘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십자가에 넘기는 순간 우리는 죄 사함을 누리게 되고 죄 사함과 동시에 성령 충만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잔이 넘치게 됩니다.
시편 23편 6절을 보겠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은 지금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은 자신의 신념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인자하심’이란 성실한 사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배반하였지만 그 성실한 주님의 사랑과 변함없는 사랑으로 마침내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인생은 때로 그 길이 고속도로일 수 있고, 때로 사망의 골짜기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시고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잔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지금도 주님은 내 곁에 계셔서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시고 안위하시고 보호하시고 상처를 싸매 주시고 새롭게 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30년 전 저와 제 아내는 돐이 지난 다윗과 태중에 조은이를 데리고 인천에 왔습니다. 저는 모교에서 사역을 하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인하대로 보내셨습니다. 저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 오면서 막 16장 15절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한분만 믿고 캠퍼스 목자로 부르심을 좇아서 왔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저의 목자가 되셔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제가 안정된 고등학교 교사의 길을 포기하고 이름도 없고 사회적인 지위도 없는 캠퍼스 목자의 길로 들어섰을 때, 저의 가족들은 실망이 컸습니다.
저의 부모님과 형님 누나들은 가난한 목자의 길을 가는 저를 불쌍히 여기고 항상 먹을 것을 챙겨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측은하게 여겼지만 저는 항상 당당하게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캠퍼스와 세계 선교에 도전하며 캠퍼스를 밟으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마음에 세계 캠퍼스 복음역사의 비전을 주시고 동행하시고 인천 개척 사역을 친히 앞서 이루셨습니다. 1982년 개척 후 10년 동안 인하대 개척에 전심전력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양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이 제자로 자라나서 또 다른 제자들을 섬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저의 심령에 기쁨을 넘치게 하였습니다.
1989년 샤미나드 신년 수양회에서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해 1월1일 첫선교사를 호주에 파송하기 시작하면서 기라성 같은 개척 동역자들이 연이어 독일 일본 헝거리로 파송되었습니다.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장막터가 세계로 넓어졌습니다.
복음의 씨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러시아로, 동구유럽으로, 독일로 일본으로, 아프리카로, 미국으로 선교사들이 파송되고 여러 나라 양떼들이 인천에 와서 기도와 사랑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1990년 10년 동안은 거의 세계선교에 열정을 쏟아 부으며 지냈습니다.
저는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는 2000년에는 큰 희망을 안고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은 광야의 연단과 시련의 때였습니다. 저는 2000년에 많은 시련 속에서 캠퍼스 개척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이 부르심으로 저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저는 좁은 대전을 떠나왔지만 하나님은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안정된 교사의 꿈을 접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많은 믿음의 제자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고교 교사대신 대학 교수로서 대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대학마을교회 제자들 중에 10명의 목사들을 키우시고 54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전문인들인 박사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저는 주님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의 삶에 더 넘치는 복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남은 삶을 통해 인천 CMI 개척과 대학마을교회 사역과 CMI 캠퍼스 사역을 계승할 제자들을 세워나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인천대 송도 마을개척과 평양과기대 개척, 미국 한 지부를 개척하여 우리 교회 자녀들이 마음껏 영어공부하고 학문을 할 수 있는 교두보를 세우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잔이 넘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다윗은 어느 날 어린 시절 목동이었을 때를 회상했습니다. 그는 푸른 초원에서 양떼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어먹고, 잔잔한 물가에서 물을 마시는 양떼들의 모습을 회상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을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자신의 목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목자가 되셔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시원한 물가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목자가 되셔서 환난 날에 지켜주셨습니다. 사망의 골짜기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에게서 시가 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나의 목자 되심을 영접하기를 바랍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 23:1-2).
시편 23편 1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이 목자가 되심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축복할 때 나의 태어남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의 목자가 되어주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창 48:15).
시편 80편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떼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목자와 양을 비유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는 양들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먼저 양들의 존재를 살펴보면 양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동물입니다. 다른 양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한편 양은 순진합니다.
모든 짐승들에게는 저마다의 공격무기와 방어 무기가 있습니다. 곰의 무서운 발톱, 사자의 날카로운 이빨, 호랑이의 위용, 말의 뒷발질, 소의 무서운 뿔 등은 저마다 적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고 자신의 몸을 보호합니다.
그러나 양은 모든 짐승들로부터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입니다. 더우기 양은 눈이 근시여서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양은 그저 눈 앞에 먹을 것만 있으면 그것을 향해 달려가다가 웅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이리나 맹수에게 잡혀먹기도 합니다.
그리고 양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양이 목자를 잃게 되면 아무 풀이나 뜯어먹다가 독초를 뜯어먹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양하면 아주 깨끗한 동물로 생각하지만 목자가 하루라도 돌보아주지 않으면 양털에 더러운 오물을 묻히고 다니는 지저분한 동물입니다.
그런데 양에게도 특별한 한 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청각이 기가 잘 발달된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음성을 기가 막히게 잘 압니다. 양은 죽으나 사나 목자의 말을 잘 따라야 들어야 합니다. 그 때에 맹수로부터 보호받고 푸른 초원에서 풀을 뜯으며 시원한 물가에서 물을 마시며 포동포동 살찔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일컬어 양으로 비유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주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장래의 일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아시고 우리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것은 주님께 나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100% 신뢰하고 의탁하는 순간에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길을 걸을 때에도 곁에서 함께 걸으십니다. 내가 잠을 잘 때에도 곁에서 지켜보십니다. 내가 방황할 때에도 곁에 계십니다. 내가 슬픈 눈물을 흘릴 때에도 곁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심중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여러분의 목자는 누구입니까? 현대인들의 시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TV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소파에 누이시며” “돈은 나의 목자시니”, “쾌락은 나의 목자시니” “컴퓨터는 나의 목자시니”, “파워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를 목자로 모시지 않는 사람들은 목마름과 궁핍함으로 지내게 됩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이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여섯 번이나 바꾸어가며 자신의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했지만 그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을 만났을 때 참된 만족을 얻었습니다. 그때 그는 동네로 달려가 주님을 만났다고 전도했습니다.
다윗은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그가 소유하고 싶은 모든 것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소유의 근원이신, 생명의 근원이신, 복의 근원이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특징은 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부족하다, 없다는 것이 입버릇이 되었습니다. “비싼 커피를 마시면서도 저 돈 없어요.”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저 시간 없어요.” 그들은 있으면서도 없다는 말을 밥 먹듯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도 늘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아직도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보다도 주님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통하여 물질을 구하고, 주님을 통하여 건강을 얻고, 주님을 통하여 인생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주님을 통해서 결혼하고, 주님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기 때문에 늘 궁핍하고 부족함을 느낍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생명이 결탁되어 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를 통하여 무엇을 얻으려고 합니까?
가지가 포도나무의 진액을 얻으려고 애쓰고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고 광합성작용을 하려고 애씁니까?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으면 절로 과실을 맺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곧 주님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십자가의 보혈을 믿을 때에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받습니다. 구원받은 이 생명은 영원합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나의 생명의 뿌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뿌리를 내리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의 모든 것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 2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양이 살아가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풀이요 또 하나는 물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에 누입니다. 이는 양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행복과 기쁨의 표현입니다.
양은 두려움을 느끼거나 배고플 때 결코 눕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의 인도함을 받아 푸른 초장에서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배불리 먹어 포만감을 느끼면서 눕습니다. 목자는 양떼들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급류가 흐르는 물가가 아니라 잔잔한 물가입니다. 이는 평화와 안식을 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목자로 고백하는 순간 우리는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내면에 평안과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be in want.
2. 여호와는 나를 소생시키십니다(시 23:3-4).
시편 23편 3절을 읽겠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킨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네페쉬’란 뜻으로 내 존재, 육신과 영혼을 포함한 전 인격의 다시 살아남을 뜻합니다.
과거 우리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우리는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자기중심의 반대는 하나님 중심입니다. 자기중심은 아담의 본성입니다. 아담의 본성은 교만과 불순종입니다.
자기중심은 사람중심입니다. 자기중심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자기중심은 사탄의 영의 지배를 받습니다. 자기중심은 죄의 근원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은 생명입니다(고전 15:22).
그 뿐만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양은 한곳에 오래 동안 머물게 되면 초장이 황폐해집니다. 그래서 목자는 항상 새로운 초장을 찾아 나섭니다. 그 초장을 찾아 나설 때 그 길이 좋은 길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 길이 험난하고, 때로는 그 길이 홍수로 웅덩이 길이 될 수 있고, 꼬불꼬불한 산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목자가 볼 때 가장 안전한 길, 양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좋은 일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 우리는 자기중심으로 바라보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십자가로 구원을 받은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매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길이 바른 길임을 알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시편 23편 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골짜기는 영어로 보면 사망의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고 허상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실 때 죽음은 이미 파해졌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의 실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종이호랑이나 종이칼은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이 너무나 우리에게 두려운 대상이기 때문에 죽음의 그림자만 봐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죽음의 그림자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다보면 핍박과 환난을 당합니다. 질병을 경험합니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저는 2000년 대 초 개혁의 광풍을 겪었습니다. 그때 자고 일어나면 사랑하던 양들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없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가장 사랑했던 형제자매들이 나를 비방하고 떠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결혼 주례도 서고 자녀들이 출생하면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서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고 복을 빌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죽음의 계곡을 수없이 건넜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생명이 결탁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결탁된 한 몸입니다(롬 6:5). 우리와 한 몸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한 몸이 되었다는 믿음이 있을 때 죽음의 골짜기가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 믿음이 강해지고 하나님을 더욱더 신뢰하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은 죽음의 골짜기에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안위하십니다. 막대기와 지팡이는 하나인데 둘로 표현했습니다. 지팡이의 위쪽은 구부러져 실족한 양을 구하고 옆으로 탈선하는 양은 목이나 다리에 이것을 걸어서 제 길로 올려 세웁니다. 때때로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지팡이의 끝으로 톡톡 쳐서 경고를 보냅니다.
그리고 맹수의 침입을 막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동들에게 있어서의 막대기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위로를 경험하면서 비로소 어두움의 골짜기를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3.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잔을 넘치게 하시니(시 23:5-6).
시편 23편 5절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계절이 바뀔 때, 우기에서 건기로, 여름에서 겨울로 바뀔 때 목자들은 양들을 높은 고원지대로 인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고원 지대에는 평평한 바위들이 펼쳐집니다. 그것을 “메사”라고 합니다. 목자들은 이런 바위를 보면 함성을 지르며 양떼들보다 먼저 달려가 바위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치웁니다. 그러면 양들은 목자를 따라와 바위 위에서 서로 뒹굴며 즐겁게 놉니다.
저 멀리에서 이리떼가 추격할지라도 목자는 양떼들을 공격해오는 원수의 목전에서 사랑하는 양떼들과 함께 축제의 향연을 즐깁니다. 한 양 한양을 가슴에 안고 그 머리에 기름을 바릅니다. 그러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다가 다친 상처들이 모두 치유됩니다.
이 때 양들은 마냥 행복해 합니다. 한없는 기쁨 속에 뒹굴게 됩니다. 때로 목자는 물병을 열어 끼얹어주기도 하고 목을 적셔주기도 합니다. 그때 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내 잔이 넘치나이다”입니다.
이스라엘은 귀한 손님이 오면 기름을 붓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손님에게 포도주 잔을 들게 하고 최상의 포도주를 잔이 넘칠 때까지 붓습니다. 잔을 넘치게 하는 것은 손님으로 있는 한 무엇이든지 넘치게 마시고 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 잔치에 귀빈으로 초청하여 넘치도록 복을 주십니다. 자비와 은총의 잔을 넘치게 부어주십니다. 세상의 잔은 채우면 채울수록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잔은 언제나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넘치는 잔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잔을 경험하지 못하게 합니까? 탐심이 넘치는 하나님의 넘치는 잔을 막습니다. 내가 볼 때 하나님의 잔이 넘치는데 늘 인상을 쓰고 다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탐심이 하나님의 은총의 잔을 가로 막습니다.
그리고 불신이 넘치는 하나님의 넘치는 잔을 막습니다. 사람이 의심하게 되면 모든 것이 거꾸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늘 부족하게 주신다고 불평합니다. 탐욕과 의심, 불신과 원망, 그리고 정욕이 주님의 잔을 덮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잔이 넘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온전한 믿음은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령이 충만할 때 넘치는 잔을 체험하게 됩니다.
언제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게 됩니까? 첫째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부인은 내가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나의 죄악을 담당하신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나의 죄를 십자가에 넘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십자가에 넘기는 순간 우리는 죄 사함을 누리게 되고 죄 사함과 동시에 성령 충만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잔이 넘치게 됩니다.
시편 23편 6절을 보겠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은 지금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은 자신의 신념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인자하심’이란 성실한 사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배반하였지만 그 성실한 주님의 사랑과 변함없는 사랑으로 마침내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인생은 때로 그 길이 고속도로일 수 있고, 때로 사망의 골짜기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시고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잔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지금도 주님은 내 곁에 계셔서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시고 안위하시고 보호하시고 상처를 싸매 주시고 새롭게 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30년 전 저와 제 아내는 돐이 지난 다윗과 태중에 조은이를 데리고 인천에 왔습니다. 저는 모교에서 사역을 하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인하대로 보내셨습니다. 저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 오면서 막 16장 15절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한분만 믿고 캠퍼스 목자로 부르심을 좇아서 왔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저의 목자가 되셔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제가 안정된 고등학교 교사의 길을 포기하고 이름도 없고 사회적인 지위도 없는 캠퍼스 목자의 길로 들어섰을 때, 저의 가족들은 실망이 컸습니다.
저의 부모님과 형님 누나들은 가난한 목자의 길을 가는 저를 불쌍히 여기고 항상 먹을 것을 챙겨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측은하게 여겼지만 저는 항상 당당하게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캠퍼스와 세계 선교에 도전하며 캠퍼스를 밟으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마음에 세계 캠퍼스 복음역사의 비전을 주시고 동행하시고 인천 개척 사역을 친히 앞서 이루셨습니다. 1982년 개척 후 10년 동안 인하대 개척에 전심전력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양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이 제자로 자라나서 또 다른 제자들을 섬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저의 심령에 기쁨을 넘치게 하였습니다.
1989년 샤미나드 신년 수양회에서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해 1월1일 첫선교사를 호주에 파송하기 시작하면서 기라성 같은 개척 동역자들이 연이어 독일 일본 헝거리로 파송되었습니다.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장막터가 세계로 넓어졌습니다.
복음의 씨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러시아로, 동구유럽으로, 독일로 일본으로, 아프리카로, 미국으로 선교사들이 파송되고 여러 나라 양떼들이 인천에 와서 기도와 사랑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1990년 10년 동안은 거의 세계선교에 열정을 쏟아 부으며 지냈습니다.
저는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는 2000년에는 큰 희망을 안고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은 광야의 연단과 시련의 때였습니다. 저는 2000년에 많은 시련 속에서 캠퍼스 개척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이 부르심으로 저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저는 좁은 대전을 떠나왔지만 하나님은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안정된 교사의 꿈을 접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많은 믿음의 제자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고교 교사대신 대학 교수로서 대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대학마을교회 제자들 중에 10명의 목사들을 키우시고 54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전문인들인 박사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저는 주님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의 삶에 더 넘치는 복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남은 삶을 통해 인천 CMI 개척과 대학마을교회 사역과 CMI 캠퍼스 사역을 계승할 제자들을 세워나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인천대 송도 마을개척과 평양과기대 개척, 미국 한 지부를 개척하여 우리 교회 자녀들이 마음껏 영어공부하고 학문을 할 수 있는 교두보를 세우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잔이 넘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