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0:1-15
열 두 제자를 사도로 세워 내어 보내신 예수님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 10:1).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정도로 복음 역사가 왕성했던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터키는 소아시아 지방으로 바울이 제 1,2차 전도여행과 요한이 사역한 지방이요 비잔틴제국이 1000년이나 지속되었던 나라입니다. 특히 이스탄불은 비잔틴 문명을 꽃피운 도시입니다. 갑파도기야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토굴과 동굴에서 살다가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죽어간 성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독교는 온데간데없고 거의 모든 국민이 무슬림화되어 마음 놓고 예배도 드릴 수 없고 찬송도 부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예수님과 바울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보니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교회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라고 터키처럼 안 된다는 보장이 없고 우리교회 또한 터키처럼 안 된다는 보장이 없음을 깨닫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복음역사를 감당하실 때 세상은 희망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종 질병과 악령에 시달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죄로 인해 신음했습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대에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세상으로 내보내어 전도하게 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주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아 교회를 살리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부르심(마 10:1)
마태복음 9장 37-38절을 보면 그 시대는 추수할 일꾼들이 절실히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그런데 열두 제자는 너무 적은 숫자 같습니다. 온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려면 120명이나 1,200명 정도는 키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세우셔서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복을 잘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열두 제자를 새 이스라엘로 세우셔서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12란 숫자는 완전한 숫자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소수 몇 사람을 키우고자 하시는 주님의 깊이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역사는 많은 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소수 몇 사람을 통해 창조되어 갑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몇 사람을 부르셔서 역사의 위기를 극복하고 역사를 계승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미국역사를 보면 이민 초기에는 윈슬롭을 통해 미국의 위기를 극복했으며, 그리고 디모데 드왓이트, 윗트 필드, 요나단 에드워드 등이 미국을 위기에서 건졌습니다. 이것은 미국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 역사의 공통점입니다.
그렇다면 비잔틴 문명을 꽃피웠던 터키가 왜 모슬렘 국가가 되었습니까? 저는 이를 한 마디로 소수 몇 사람의 믿음의 사람을 키우지 않은 데 있다고 봅니다.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이 선포되기 이전까지는 토굴이나 암굴이나 지하에서 일대일로 말씀으로 도제교육을 했습니다. 그때에 말씀은 생명이 있어 들불처럼 소리 없이 퍼져나갔습니다. 그런데 밀라노 칙령이후 크리스천들은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해서 고난과 박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편안함과 세상이 주는 온갖 영예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증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가난하고 핍박 받던 교회가 너무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많은 특권을 부여 받게 되었습니다. 권력과 돈과 명예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교회는 매일 만원사례였습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할 리 없고 힘들게 제자를 양성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순순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보다 복음을 윤색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선지자적인 사명보다 시대 상황과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교회가 점점 정체성을 잃고 세속화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어떻고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한국 교회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습니다. 우리 교회 또한 어떠합니까? 뭐가 부족합니까? 제가 볼 때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제 금요일 기도 모임에서 문태균 목자에게 “우리 교회에 없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다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없습니다.” 대답했습니다. 그의 대답은 명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교회가 텅텅 비어있습니까? 텅텅 비어 있는 교회에 왜 연료비가 120만원이나 나옵니까? 이것은 전도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8,90년대의 우리는 없는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형제 캠프가 있기 전에는 교회의 일대일 책상 위에서 잤고, 캠프가 생긴 이후에는 좁은 방에서 15명이 칼잠을 자며 매일 새벽을 깨워 기도하고 낮에는 전도하고 일대일 하고 저녁에는 모여 합심 기도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없지만 부유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배가 불러있습니다.
우리는 금년 한 해에 부름 받은 자들로서 사도직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캠퍼스로 나가야 합니다. 오민정 목자도 햇볕도 들어오지 않는 골방에만 있지 말고 일어나 캠퍼스로 나가 전도해야 합니다. 서정욱과 박은혜 목자, 이지혜 목자는 틈틈이 캠퍼스에서 전도하고 일대일로 제자를 양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올 한 해 캠퍼스와 직장에서 각기 한 명을 전도하여 제자를 세워야 합니다. 이것만이 한국교회가 살 길이요 우리교회가 살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살 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시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영적인 권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질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입니다. 죄와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이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위로부터 영적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열두 사도(마 10:2-4)
마태복음 10장 2상절을 보겠습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나니” 열 두 제자의 이름이 나오는데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사도라고 불렀습니다. ‘사도’란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ἀπὀστολος)로, 기독교에서만 쓰는 독특한 용어인데 ‘보냄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사도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친히 부여받은 칭호로서 공적인 특권과 존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란 예수님의 전권대사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하-4절을 보면 열두 제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인간적으로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12 사도의 일원 중에 제일 먼저 베드로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나서기를 좋아하고 뒷감당을 하지 못하면서도 큰 소리를 잘 치는 입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순수한 열정과 순수한 심정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는 장차 반석이 될 만한 그릇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소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지어 주셨습니다. 요한은 세상 만민을 향한 요한복음과 계시록을 기록하고, 야고보는 첫 순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마태는 세리 출신이요, 시몬은 운동권 출신입니다. 안드레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은 계산적인 사람이요, 도마는 의심병에 시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대오, 야고보는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 역사 환경을 만드는 사람이요, 바돌로매는 눈물을 잘 흘리는 순정파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할 자였습니다.
사도 공동체를 이룬 개인 개인을 보면 인간적인 기초가 없고, 배우지 못한 어부 출신들이었습니다. 형식도 없고 내용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인 배경도 없고 가문도 변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내놓을 만한 명함 한 장 없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에 굴러다니는 광석과 같이 거칠었습니다.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헌신과 사랑과 이해가 요구됩니다. 옆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격이 다르고, 출신 성분이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삼 년 반 동안 이들을 인내와 겸손과 사랑으로 섬기고 훈련하시고 키우셨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예수님의 비전과 인내와 사랑으로 위대한 사도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사도 공동체를 이루었을 때 1세기 역사를 바꾸는 역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다름의 사람들이 모여 한 공동체를 이룰 때 그 파급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내면을 볼 때 천박합니다. 겸손하지도 못하고 충성심도 없습니다. 형식과 내용도 없습니다. 쉽게 자리에 눕습니다. 전도는 그만 두고 자기 자신 하나 감당치 못합니다. 생각은 좁고 편협합니다. 쉽게 자학하고 불의에 잘 빠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이루었을 때 나의 겉모습과 내면이 어떠하든지 간에 세계 지성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믿음의 용장이 될 수 있습니다. 시대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사도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행 1:13-14전). 그들은 하나가 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이루어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행 1:14하). 그때에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비전 한 기도제목 한 소망을 붙들고 한 공동체를 이룰 때 다시 한 번 캠퍼스에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셋째, 보내심(마 10:5-15)
마태복음 10장 5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신 것은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예수님이 그들을 내보내신 세상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은 이들을 보내시면서 이방의 길이나 사마리아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먼저 택한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방법 때문이요, 또한 어린 제자들이 자신들이 성장해 온 문화권이 다른 이방에 가서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사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그들을 통해 온 세상 만민을 구원코자 하셨습니다(출 19:6).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저버리고 현실 문제로 마음이 좁아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하나님을 떠나 잃어버린 양과 같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여기에 택한 백성에 대한 주님의 크신 뜻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은 다 잃어버린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인간을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아들에 비유하셨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고귀한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잃어버린 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품에 돌아가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찾을 때 비로소 안정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할 일도 하나님의 품을 떠난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할 메시지 내용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0장 7절을 보겠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 반드시 우상을 섬깁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우상이란 피조물인 인간이 필요에 따라 신을 만들어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상의 지배를 받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물질을 섬길 때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지상낙원을 가져다주었습니까? 공산주의는 1989년 10월 9일 동독이 무너지는 동시에 마감했습니다. 자본주의도 2008년 금융위기로 그 한계가 들어났습니다. 자본주의는 빈부의 격차를 해결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졌고, 공산주의는 가난의 평준화를 가져왔습니다.
한동안 우리는 넓은 아파트, 큰 차를 선호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필요 이상의 넓은 주택을 얻기 위해 과도한 빚을 얻어 구입했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나는 언제 저런 아파트를 소유할 수 있을까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넓은 아파트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너무 과도하지 말라, 후회함이 없도록” 무엇이든지 분에 넘치고 과한 것은 반드시 화를 불러옵니다.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고, 영어로 Too much is as bad as too little란 말이 있습니다. 덜함이 과함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었다 할지라도 그 마음에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고 죄와 사단이 지배한다면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때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사단의 세력을 멸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하여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8절을 보겠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이 말씀은 잃어버린 양들이 세상에서 당하고 있는 고통이 어떠한가를 잘 말해 줍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면 자유롭고 행복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로 인해 내면이 병들고, 사망권세에 시달리며, 내면은 문둥이와 같이 추하고 더러워지고, 귀신들려 자아를 상실하고 울부짖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자들을 거룩한 진리의 말씀과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병든 내면을 싸매주어야 합니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귀한 일입니다. 또한 영혼에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
보냄을 받아 세상으로 갈 때 물질과 의복과 신발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행에 필요한 기본 필수품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물질을 의지하지 않고 매사에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공부하는 것, 취직하는 것, 결혼하는 것 등 매사에 모든 것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역사를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들이 집에 들어갈 때는 평안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평화의 사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든지 평안을 비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이는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닙니다. 평안을 빌었을 때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그 평안이 거기 임하게 되고,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또 사람들이 우리를 영접하지 않고 듣지 않을 때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그런가 생각하고 불의에 빠져 자학하거나 또 복음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하고 회의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불의에 빠져 자학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임할 심판의 표시로 발의 먼지를 털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서 털지 말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털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영접하지 않으면 소돔 고모라가 받은 심판보다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마 10:15).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사 사도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큰 소원을 두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단순히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사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동일하게 우리에게 큰 소원을 두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금년 한 해에는 절박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양육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캠퍼스를 살리고 직장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