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2:1-13
자비를 원하시는 예수님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 12:7).
종교는 의식도 중요하고 그에 비례하여 내용도 중요합니다. 의식이 없는 내용은 경박합니다. 반면에 내용이 없고 의식만 있으면 위선이 되고 형식적이 됩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내용보다 의식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성경 말씀보다 사람들이 만든 교회의 전통과 의식을 더 앞세웠습니다.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유도 성경보다 전통과 의식을 더 중히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가톨릭은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이때 마르틴 루터가 의식을 버리고 순수하게 본질로 돌아가자. 순수 복음 진리로 돌아가자. 즉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a Deo Gloria)으로 돌아가자고 일어선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참 뜻을 알지 못해 율법으로 사람을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연약한 한 사람을 깊은 애정을 가지고 돌보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예수님(마 12:1-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자연스럽게 밀이삭을 잘라 비벼 불어 입에 툭 털어 넣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바리새인들이 달려와 예수님께 삿대질을 하며 비난했습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고 있소!”(마 12:2).
율법에 배고픈 사람들이 곡식밭을 지나갈 때 낫을 대서는 안 되나 손으로 이삭을 따서 비벼 먹는 것에 대해서는 허용하고 있습니다(신 23:25). 율법에는 은혜와 긍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은혜와 긍휼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한 일을 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장로들의 유전(미슈나)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을 순종하기 위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39가지 항목을 만들고, 각 항목마다 6가지의 시행 세칙(미슈나)을 만들었습니다. 그 항목 중에 “안식일에 추수하지 말라, 타작하지 말라, 탈곡하지 말라, 키질하지 말라”가 있습니다. 미슈나는 구전된 유대 율법을 집대성한 것이고 이를 주석한 것이 탈무드입니다. 반면에 미크라는 성문 율법을 말합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밀이삭을 자른 것은 추수요, 손으로 비빈 것은 탈곡이요, 입으로 껍질을 분 것은 키질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인해 곤경에 처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을 어떻게 변호했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마 12:3-4).
진설병은 성소 안의 금상 위에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따라 12개의 떡을 두 줄로 차려 놓은 것으로 매주 금요일에 새 떡으로 갈아 놓고 거둔 것은 제사장이 먹습니다(레위기 24:9). 예수님은 다윗의 예를 들어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놋 땅으로 갔을 때였습니다. 이 때 그는 배가 고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자기만 먹은 것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었습니다. 다윗은 법을 어겼기 때문에 율법에 의해 처벌을 받아야 옳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처벌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유대인들도 다윗이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다윗의 형편을 이해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고픈 형편을 이해하시고 다윗의 위치로 끌어 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마 12:5).
제사장들은 안식일이 가장 바쁜 날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율법을 어긴다고 누구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전 안에서 이들에게는 치외법권이 주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큰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원형이시고 성전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골 2:9). 원형이 나타나면 모형은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밀이삭을 잘라먹는 천박한 제자들을 예수님 안에서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는 제사장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셨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 12:7).
‘제사’(sacrifice)란 희생을 뜻합니다. 종교적인 열심을 뜻합니다. ‘자비’(mercy)는 긍휼을 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열심보다 긍휼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열심히 하는 것은 자기 열심입니다. 이것은 내용 없이 형식에 치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용 없이 형식적인 신앙 생활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2-13).
하나님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마음으로 주의 전을 섬기고, 마음으로 양들을 사랑하고, 마음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마음으로 전도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보다 믿음으로 드리는 아벨의 제사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십니다(삼상 15:22).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원하십니다(요 4:24). 마음 없이 드리는 헌금보다 진심으로 드리는 과부의 두 렙돈을 원하십니다(눅 21:2,3). 하나님은 교만한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애통하는 세리의 기도를 원하십니다(눅 18:11-14).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하나님은 애통하고 통회하는 상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산 제물입니다. 산 제물(a living sacrifice)은 삶의 전부를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자기가 다니던 교회에서 선교집회가 있어서 선교헌금시간이 있었는데 주머니를 뒤지다가 드릴 헌금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헌금 연보에 앉아 “저는 아프리카를 위해 저 자신을 바치고자 합니다”라고 소리쳤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고백은 헌신과 일치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심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통회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은 제물이 아니라 깨끗하고 거룩한 제물로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2.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마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8).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다른 날과 구별된 날입니다. 여기에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제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주님께서 제정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지켜야 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안식일은 천지창조의 안식일입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안식일은 출애굽한 날을 기념해서 지키는 날입니다(신 5:5).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을 주일로 정해 지키고 있습니다. 구약에 기록된 모든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출애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하시겠다는 예표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도록 10계명 중의 넷째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수 있습니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 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음이라”(출 20:8-11).
첫째, 6일 동안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6일 동안 빈둥빈둥 논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킬 수 없습니다. 주일에 안식할 자격이 없습니다. 설령 안식일을 지킨다 할지라도 밀린 숙제, 밀린 업무, 밀린 빨래, 밀린 공부 등으로 인해 마음에 기쁨이 없고 오히려 부담이 됩니다. 주일날 바쁜 사람들은 평소 자기 일을 안 한 사람들입니다.
월요일에 계획을 세워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심방을 해야 할 사람, 전화로 심방할 사람, 편지를 보낼 사람, 카운슬링이 필요한 사람, 커피를 마시며 대화가 필요한 사람, 집으로 초청해 대화를 해야 할 사람들을 나누어 기도해야 합니다. 시간을 아껴 일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일은 바쁘고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 아니라 영적인 축제가 될 것입니다. 주일은 spiritual festival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뜻은 ‘구별하다’는 뜻입니다. 주일은 다른 날과 구별된 날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날과는 구별해서 지켜야 합니다. 옷차림도 달라야 합니다. 평소에는 청바지 차림으로 다닐지라도 이 날만큼은 형제들은 정장을 하고, 자매들은 옷매무새도 단정히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형식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형식은 갖춰야 합니다.
셋째, 주일을 경건하게 보내야 합니다.
주일은 찬송가와 성경을 들고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무디는 할 수만 있으면 주일만큼은 크고 빨간 성경을 들고 다니도록 권장했습니다. 신자가 불신자와 다른 점은 주일날 어떻게 보내느냐에 있습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신자가 아닙니다.
주일에 오락을 삼가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양들과 함께 찬양을 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심방하고, 서로 격려하고 힘을 주는 주일이어야 합니다. 주일을 형식적으로 보내면 월요병을 앓게 됩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분들은 영육간에 쉼과 힘을 얻어 건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한 주를 힘차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 위해 준비하신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의 보따리를 잔뜩 가지고 오셔서 푸실 준비를 하시고 “너희들 꼭 오라. 내가 복을 주마. 6일 동안 얼마나 세상에서 고생이 많았느냐? 너희에게 은혜를 주마” 하시며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주일은 천국의 예표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우리 주님과 영원토록 안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을 누리듯이 이 땅에서 주일에 안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일은 안식을 누릴 대표 원리입니다. 주일은 바쁜 이 땅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예수님(막 12:9-13)
예수님께서 거기를 떠나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 안에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른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한 쪽 구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6장 6절을 보면 오른손이 말랐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두 손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손이 말라 불이익을 당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악수를 청할 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왼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왼손을 내민다는 것은 원수들과 악수할 때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한 손이 마름으로 마음과 생각과 생활이 모두가 말랐습니다. 사실 한 손이 말랐다 하여 생명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인생의 문제가 되어 그의 내면은 어둡고 운명적이며 열등감과 자의식의 골이 깊이 패여 있었습니다.
학점 나쁜 사람은 학점 이야기만 하면 그 자리에 앉아 있기가 거북한 것처럼, 그는 누가 ‘손’자만 이야기하면 그 자리를 피하곤 했을 것입니다. 그의 내면은 깊은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한 손 마른 자와 같은 자들이 많습니다. 겉으로 보면 모두 건강하고 아름답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을 살펴보면 100이면 100명 모두가 인생 문제를 안고 어둡게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사랑과 이해심과 인정이 메말라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남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도움이 필요한 자들로 가득합니다.
그런 그에게도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의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나음을 입고자 사람들의 눈을 피해 회당에 들어와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비와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돕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회당 안에는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대의 목자들로 마땅히 양을 돌보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양을 이용해 예수님을 송사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숨은 악한 의도를 보시고 양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마 12:11-12).
그들은 양이 구덩이에 빠진 것을 보면 말할 것도 없이 뛰어 들어가 꺼냅니다. 사람은 양과 비교할 수 없는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한 손 마른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이용가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인간조건을 보고 이용가치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 조건이나 이용 가치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절대적 가치로 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소유한 영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사람에게 명하셨습니다.
“손을 내밀라”(막 12:13상).
그가 사람들 앞에서 그의 병든 손을 내민다는 것은 죽기보다 힘들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을 바라보면 도저히 손을 내밀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순종을 통해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도록 함이었습니다. 수치심과 자의식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순종함으로 마른 손 뿐만 아니라 그의 마른 마음도 고쳐 주고자 함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자 함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수치심과 자의식을 깨고 병든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 손은 믿음의 손이요, 순종의 손이요, 기도의 손이었습니다. 이 때 마른 손이 회복되어 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어두움과 부정적인 생각, 운명과 슬픔, 자의식이 사라지고 그의 심령에 생명과 빛이 임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백합처럼 환해졌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이는 구원의 음성이요, 사랑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부끄러운 손을 들고 주님께 내밀면 주님은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병든 손을 내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을 드러내시기 위해 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 주님께 나오면 마른 영혼이 회복됩니다. 마른 심령이 치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