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3:1-14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사모하라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크게 여섯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이는 교만과 자만이 아닌 낮아지심과 겸손입니다. 둘째는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화해, 이웃과의 화해입니다. 셋째는 부활의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의 역사입니다. 넷째는 승천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만왕의 왕으로서의 선포입니다. 다섯째는 오순절 성령강림입니다. 이는 교회의 탄생으로 복음의 증인된 삶, 그리고 선교와 부흥의 역사입니다.
여섯째는 재림입니다. 이는 최후의 승리로 영광스러운 환희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 날은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승리와 영광의 날입니다. 반면에 이 날은 불신자들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복종하지 않고 자행자지한 자들에게는 형벌의 날입니다(살후 1:8). 곧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이 멸하게 됩니다(고전 15:24).
이 날은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이 되셔서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이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며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 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그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간절히 사모합니까? 돈입니까? 명예와 권세입니까? 아니면 애인입니까? 주님이 다시 오실 재림의 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면서 살기를 기도합니다.
1. 생각나고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벧후 3:1-9).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벧후 3:1-2).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쓰는 목적은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도록 함에 있습니다. 진실한 마음(pure mind, KJV)이란 헬라어 원문에 두 가지 뜻이 함의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겨가 섞여있지 않을 때까지 키질한다는 의미가 있고 다른 하나는 햇볕을 비춰본다는 뜻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깨진 그릇을 밀랍으로 때웠습니다. 그래서 그릇의 땜질 엽부를 확인하는 방법은 햇볕을 비춰봄을 통해서였습니다. 바로 진실한 마음이란 죄로 깨지지 않은 마음,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을 받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당시에 진실한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와 거짓 사상이 마치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과 같이 난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를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벧전 5:8). 베드로는 이런 그들에게 순수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거룩한 선지자들의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사도들에게 명하신 것을 기억나게 하기 위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Ebbinghaus와 King의 망각과 파지곡선을 보면 100이라는 것을 학습하고 하루가 지나면 50이 기억에 남고, 또 그냥 하루를 보내면 25가 남아 결국 한 주일만 놀아 버리면 학습한 것을 거의 잊어버리게 됩니다.
반면에 어제 100이란 것을 학습하고 오늘 배운 100을 학습하면 150이 기억하게 되고 다음 날에 다시 100을 학습하게 되면 175가 남게 됩니다. 생리학적으로도 반복 암기가 기억을 빠르게 할 수 있는 기전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새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말씀도 새롭게 배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말씀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배운 말씀을 기억하고 묵상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기억하고 묵상하게 되면 예수님의 은혜가 새로워집니다.
반면에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으면 금시 은혜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저 사람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인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시 태어나도 주님을 사랑하겠다고 한 사람인데, 아니 왜 저럴까”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주님의 은혜를 하루라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볼 때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배운 말씀을 기억하고 묵상하고 순종하며 매일 매일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먼저 이것을 알라고 경고했습니다. 말세에 믿는 이들을 조롱하는 자들을 향해 경고합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조롱하여”(벧후 3:3).
그들이 믿는 이들을 조롱하고 재림을 부정하는 것은 더 이상 정욕을 좇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이 오신다고 믿을 때, 다시 말해 주님께서 오셔서 쾌락과 정욕을 좇아 사는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정욕을 좇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재림을 부정하고 믿는 이들을 조롱합니다.
다른 하나는 균일설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은 창조 이래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4).
그들은 재림을 믿고 그날이 오기를 바라보았던 조상들이 이미 죽은 지 오래 되었는데 주님은 아직 오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물은 처음 창조할 때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똑같이 태양은 아침에 동쪽에서 떠서 황혼이 되면 서쪽으로 지고, 밤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아주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첫째,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함(벧후 3:5-7)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5).
하나님은 둘째 날에 궁창을 만드셨습니다. 셋째 날에는 땅과 바다를 나누시고 땅에는 각종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과목으로 아름답게 단장하셨습니다. 바다에는 각종 물고기를 창조하셨습니다(창 1:4-13).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고의로 잊으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을 노아 시대에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홍수 심판은 모든 인류에게 향한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우습게 여깁니다.
이제 하나님은 심판의 경고를 믿지 않고 경건하게 살지 않는 자들을 물이 아니라 불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하늘과 땅을 보존하신 것은 경건하게 살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로 심판하고자 하심입니다(벧후 3:5-7).
둘째,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무시함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다 알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시간 안에 삽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시지만 시간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시간의 과정 속에, 시간과 역사의 흐름 속에 포함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언제 종말이 옵니까?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날을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신비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재림의 날짜와 시간이 언제인가가 아니라 주님의 날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단들의 특징은 한 결 같이 재림의 일자를 못 박습니다. 재림의 시기를 못 박는 사람들은 모두 이단들입니다. 주님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하나님의 시간을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성품을 무시함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우리는 같은 죄인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용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자하심과 용납하심이 무한합니다(롬 2:4). 하나님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려 말하는 사람들에게 종일토록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십니다(롬 9:21).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며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최후 심판을 속히 이루지 않으십니까? 이는 죄인들이 한 사람이라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받도록 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악용하여 심판이 어디 있느냐, 재림이 어디 있느냐며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회개치 아니할 때에 진노의 날에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쌓는다’는 말은 보석을 잘 보관하려고 쌓아둘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보석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쏟아질 무서운 진노를 보석을 쌓듯이 정성스럽게 쌓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에 심판을 받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날 때의 광경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홍수 심판의 경고를 무시하고 홍수가 나던 날까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던 그들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적으로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에 불과 유황을 비같이 내려 그 성읍을 뒤엎어버리셨습니다(창 19:24). 보통 비는 우산을 쓰면 피할 수 있지만 불과 유황이 섞여 퍼붓는 소나기는 그 무엇으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자 작정하시면 한 사람도 그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경고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속히 분을 네게 쏟고 내 진노를 네게 이루어서 네 행위대로 너를 심판하여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네게 보응하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겔 7:8-9).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 거듭거듭 진노를 나타내시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진노조차도 마지막 진노의 날, 하나님의 날의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날이 오기 전에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재림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2.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벧후 3:10-14)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베드로는 구약성경을 배경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말씀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사 13:9).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욜 2:1-2).
주의 날은 도적같이 옵니다. 도둑은 예고하고 오지 않습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납니다.
그 날은 진노의 큰 날로서,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고 끔찍스러운 날입니다(계 6:17). 그날에 그들이 죄악 된 삶을 회개하려고 하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그 때에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집니다(계 21:8).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첫째, 그날을 사모해야 함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가기를 힘쓰라”(벧후 3:12-14).
‘바라보다’(looking forward)는 단어가 세 번 반복합니다. 이는 바라고 기대하고 고대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대와 소망은 이 세상에 기초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믿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귀한 것은 다가오는 영광과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단순히 주님께서 재림하여 믿는 자를 구원하시고 믿지 않는 자를 심판하신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재림 후에 영광스러운 새 땅과 새 하늘이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재림은 믿는 자들에게 참된 소망입니다. 이 날에 임할 복된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누구도 뺏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날을 바라보고 준비하며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에 너무나 집착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터넷 게임에 너무 집착하여 인터넷 중독환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세계, 있다가 순간에 사라질 것에 목숨을 겁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기대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가오는 영광스러운 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망해야 합니다.
둘째, 거룩하고 경건해야 함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가기를 힘쓰라”(벧후 3:11,14).
주님이 반드시 다시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날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지 않도록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거룩한 아들이신 우리 주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바로 우리는 예수님을 뵙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뵙기를 원한다면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날을 대비하는 길은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죄악 되고 음란한 세상에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을 대비하여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특히 음란하고 패역한 시대에 우리 자신의 마음에, 그리고 자녀들의 마음에 ‘거룩’이란 단어가 각인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전 11:9-10).
우리가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하여 거룩한 삶을 살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바라보고 사모할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고 사모하고 열망한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와 권세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정말 간절히 바라보고 열망하고 사모해야 할 것은 다시 오실 주님입니다. 그리고 그 날입니다. 그 날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과 거하며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 하게 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재림의 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면서 살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에 썩어질 것을 사모하지 말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