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5:32-39, 16:1-12
역사교육을 시키시는 예수님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마 16:9-10).
E, H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현재를 거울삼아 과거를 통찰하고,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바라보며,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창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까마귀 고기를 먹어서 그런지, 과거의 역사를 쉽게 잊었습니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빈들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도 12 광주리를 남기는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제자들은 현장에서 그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마태복음 14장과 똑같은 상황이 전개됩니다.
그들은 과거의 역사를 오늘에 적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역사를 오늘에 적용하지 못했을 때 장래 먹고사는 염려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먹는 문제로 연결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영적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내면성과 경계해야 할 악영향이 무엇인가 배울 수 있습니다.
1.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마 15:32-39)
예수님은 사흘 동안 먹지 못하고 기진맥진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 15:32).
그들은 사흘 동안 먹지 못해 허기져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먼 곳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먼 길을 허기진 배를 움켜 안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이유는 육신의 배고픔 문제였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예수님은 인간의 육의 문제는 무시하고 영혼의 문제에만 관심을 갖고 계신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현실문제, 곧 세상을 살아갈 때 생기는 결핍의 문제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배고픈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아시고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육신의 질병도 치료해주시고 귀신들려 울부짖는 자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물질 문제, 건강문제, 성격문제, 학점문제, 결혼문제도 다 아시고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에 동참하셔서 함께 슬퍼하시고 함께 고통하시며 도와주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제적인 문제를 잔 머리로 해결하려고 고생하지 말고 주님께 들고 나아가 아뢰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리를 불쌍히 여긴다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마 15:33).
그들은 오천명을 먹일 때도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부정적이었습니다. 물론 어떻게 배부르게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할 정도로 생각이 진전되었지만 그들의 생각은 여전히 과야의 현실 앞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불가능한 현실에 도전하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어떤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한계를 극복하여 이를 해결하려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도 장미꽃이 피게 하고, 반석에서도 샘물이 나게 하는 믿음의 비밀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광야라는 현실만 보았지 옆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스스로 답을 찾고 정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내 삶이 고달프고 연약하지만 그 자리에서 약속을 믿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구하고 찾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상).
답을 찾다가 광야라는 문제 앞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앉아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마 15:34상) 예수님은 그들에게 현재 있는 것을 찾아보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불가능한 가운데서 어떤 가능성을 찾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찾았을 때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가 예수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받으시고 축사하사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이 차고 넘쳤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항상 광야라는 현실에 부딪힙니다. 우리 앞에는 이웃을 향한 지역복음화, 미래를 향한 대학복음화, 열방을 향한 세계선교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어느 하나 쉽지 않습니다. 대학 전도 쉽지 않습니다. 지역복음화 쉽지 않습니다. 세계 선교 쉽지 않습니다. 이런 광야를 생각하면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면 정답이 보입니다. 주님께 위대한 것을 기대하며 낙망치 않고 기도하다보면 답이 찾아집니다. 우리가 현실을 바라보면 막막하지만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먹이고자 하시는 주님의 목자의 심정에 동참하면 해결책이 보입니다.
광야와 같이 불가능한 상황 중에도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떡 몇 개가 보입니다. 주님께 이것을 들고 나가면 주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기적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 상황을 도전할 수 있는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가 광야 앞에서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문제를 들고 나아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마 16:1-12)
첫째, 시대의 징조를 분별할 줄 모르는 종교 지도자들
예수님은 무리들을 배불리 먹인 후에 배를 타고 마가단 지경에 이르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이들이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한 것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이심을 표적을 통해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시는 목적은 이를 통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도록 함이었습니다(요 20:31).
그러나 그들은 마음이 악하고 예수님을 불신했기 때문에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들이 원하는 지상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메시아의 표적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2-3). 예수님은 그들이 날씨를 분별할 능력이 있다면 시대의 징조도 능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기상예보에 대해서는 잘 알았고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주말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과 역사의 변화를 알리는 사건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역사를 보는 통찰력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아야 할 시대의 징조가 무엇입니까? 이 시대는 누가 보나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큰 능력과 영광을 재림하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세의 징조에 대해 여러 가지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은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딤후 3:1-4).
문명학자들은 오늘의 인류문명을 마치 호랑이 등에 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호랑이가 질주하고 있기 때문에 내릴 수도 없고 또 호랑이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방향 없이 어디론가 무섭게 달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국은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문명은 급속도로 성장 발달했습니다. 바이오테크노를 통해 생산극대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GMO 유전자 조작 식품이 인류의 건강을 절망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분명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마 16:4).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난 것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표적 중의 표적입니다. 이는 메시아의 표적으로서 승리의 표적이요 영광의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가 전한 메시지를 듣고 회개한 것 같이 그들도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악하고 음란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인해 심히 슬퍼하시며 떠나가셨습니다.
둘째, 역사의식이 없는 제자들
예수님과 제자들이 호수 건너편으로 갔을 때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습니다. 이때 마침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 16:6).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악영향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의논한 후 예수님이 떡에 관해 말씀하신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떡을 가지고 오지 않은 일로 예수님께로부터 책망 들을 것을 걱정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마 16:8). 결혼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결혼문제와 관련시켜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평소 떡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떡과 관련시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누룩하면 떡으로 연결시켰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장래 안정(security), 떡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장래에 대한 염려로 늘 불안하고 얼굴에 수심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젊고 미래가 창창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좀 더 높고 좀 더 고상한 것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먹는 문제에 매여 큰 꿈을 꾸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식의 빈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마 16:10).
그들은 장차 지도자들로서 역사의식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의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심하게 책망하시면서 역사교육을 시키셨습니다.
사람이 역사의식이 없으면 시대에 대한 소명과 미래에 나아갈 방향 감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람이 역사의식이 없으면 과거의 사건이 현재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역사의식이 없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6,70년대 젊은이들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이상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8,90년대부터 ‘무’ 시대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무관심, 무기력, 무도덕, 무신론, 무행동, 무책임, 무이상 등 모든 것에 ‘없을 無자’를 붙였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와서는 혼돈과 방황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정립되지 않은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바람에 휘날리는 구름처럼, 흘러가는 물처럼 그저 흘러가는 시대가 됐습니다. 젊은이들이 드높은 이상이나 꿈이 없이 그저 인생을 즐기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살아갑니다. 교회도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기독교 역사의식이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의식이란 과거에 나를 도우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현재도 도우시고, 미래도 반드시 도와주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염려 대신에 주님을 의뢰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밝은 미래를 꿈꾸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역사의식을 가지고 사리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역사의식의 빈곤을 책망하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마 16:11). 누룩은 조금만 넣어도 반죽덩어리 전체를 보이지 않는 사이에 빠르게 변화시킵니다.
여기서 누룩은 좋지 못한 영향력을 말합니다. 지극히 작은 악영향이라 할지라도 순수한 성도들에게 침투해 들어오면 모임 전체를 오염시켜 버립니다. 특히 악영향은 침투력이 매우 빠르게 진전됩니다.
요즘 한국교회에 이단이 무섭게 파고듭니다. 그리고 각종 이단들이 그럴듯하게 교회와 대학을 침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악영향은 꼭 이단만이 아닙니다. 원망이나 불평, 비방 등도 악영향입니다. 안 좋은 소문은 좋은 소문보다 훨씬 빨리 확산됩니다. 한 보고서에 보면 20대의 경우 부정적 소문은 81% 듣고, 86%가 그 소문을 전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긍정적 소문은 불과 18% 소문을 듣고, 4%만이 소식을 전한다고 합니다. 한편 40,50대의 경우에는 나쁜 소문은 84%, 좋은 소문은 16%를 전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좋은 소식을 듣고 전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3단 논법에 3체가 있습니다. 3번 체질, 다시 말해 3번 필터링을 하라는 것입니다. 첫 단계는 사실 유무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무슨 의도로 그런 얘기를 하는가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사회는 훨씬 건강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종류의 악영향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하나는 헤롯입니다. 바리새인은 종교지도자이고 헤롯은 정치지도자입니다. 바리새인은 종교 지도자들로서 백성들의 정신세계와 영적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헤롯은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의 악영향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첫째, 바리새인들의 외식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외식, 이중생활입니다. 그들은 겉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지만 내면을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살지 않고 사람 앞에 살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 사는 인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신앙은 인본주의 신앙입니다. 인본주의 신앙의 특징은 회개, 순종, 헌신, 사명, 헌신 등의 단어들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은혜, 복, 자유 등의 단어만 좋아합니다. 이들은 자기 원하는 대로, 편리한 대로 신앙 생활합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없고 사명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신앙생활은 날마다 자기를 생각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입니다.
둘째, 사두개인의 쾌락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부정하기 때문에 죽으면 끝이기 때문에 육신의 쾌락에 탐닉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 바리새인의 누룩은 쾌락과 음란입니다. 오늘날 음란문화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음란의 뒤에는 물욕이 있습니다. 음욕이 있는 곳에 물욕이 있고, 물욕이 있는 곳에 음란이 있습니다. 음란과 물욕은 성도와 교회를 세속화시킵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예수님을 본받아 믿는 이로서의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우리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이 시대의 악한 영향을 받지 않고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닮아 이 시대 예수 믿지 않는 그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