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7:14-27
겨자씨만한 믿음의 능력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라파엘은 변화산 위의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광경과 산 아래의 참경을 대조적으로 화폭에 담았습니다. 변화산 위는 영광과 거룩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는 치욕과 슬픔과 낙심으로 가득합니다. 이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는 죄가 득실대고 악령이 득세합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는 혼돈과 어두움이 가득합니다. 이런 곳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 그 능력을 행하십니다. 그 믿음은 어떤 이단에서 말하는 큰 믿음이 아니라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은 온전한 믿음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은 주님을 100%믿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한계 상황에 도전하여 믿음의 승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마 17:14-17)
예수님은 세 제자와 함께 변화산에서 무리와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산 아래로 내려 오셨습니다. 이때 누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한 아버지가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이는 그의 아들이 간질로 고생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니이다”(마 17:15-16). 아이의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간질병 환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마태복음 17장 18절을 보면 귀신들린 것이었습니다. 귀신이 그를 사로잡으면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눈이 뒤집어지고 경련을 일으키면서 입에서는 거품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귀신의 세력에 이끌려 불에도 들어가고 물에도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계속 되었습니다.
이를 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누가복음 9장 38절을 보면 아이는 외아들이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귀신들려 발작할 때마다 아버지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절망 중에 예수님께 나아왔으나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 했지만 고치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제자들은 망신과 부끄럼을 당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왔을 때 제자들은 정중하게 “잠깐만 기다리세요. 예수님이 내려오시면 이 아이를 즉석에서 고쳐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기다리세요” 해야 옳습니다. 그랬으면 망신을 당하지 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각기 해보겠다고 나섰습니다. 아홉 제자가 저마다 나서가지고 한번 씩 해봤습니다. 누가 먼저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귀신아! 나가라!” 했는데 귀신이 순순히 나갔으면 좋았는데 나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혹시 귀신 내쫓기 위해 기도해 본일 있습니까? 기도한 다음에 즉시 나가면 좋겠는데 그게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무능으로 망신을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깊은 실망과 낙심과 좌절을 당해야 했습니다. “아이를 고치기 위해서 백방으로 애써서 여기까지 기대하며 찾아왔는데 또 허탕을 쳤어.”
또 마가복음 9장을 보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을 본 서기관들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조롱하며 비난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너희가 무슨 권세로 귀신을 내어 쫓아!’ 제자들은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아이와 실의에 빠져있는 아버지는 안중에 없고 이에 뒤질세라 서기관과 침을 튀기며 변론했습니다.
성경은 변론을 경계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딤후 2:23). 변론은 자신의 무능력과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데서 옵니다. 성경은 이런 이들에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이를 보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마 17:17).
예수님은 간질하는 아들의 문제보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세대’란 동시대에 사는 모두를 포함합니다. 인류 역사는 아담 이후 지금까지 불신과 패역의 연속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다’란 헬라어로 믿음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패역하다(perverse)란 사고방식과 태도와 가치관이 비뚤어진 상태, 하나님을 거스르고 저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물질에 대한 바른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바른 자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기뻐하며 순종하고 말씀과 늘 함께 하는 것입니다. 또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의 노예로 살지 않고 재물과 소산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인간과는 서로 사랑하고, 만물과는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믿지 않고 선악과를 먹어 패역했습니다. 노아의 시대에는 인간의 모든 생각과 계획이 악하고 패역하여 홍수 심판으로 노아 가정 외에 모두 심판을 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말씀을 농담으로 여길 정도로 불신이 가득하여 패역하여 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대적하고 우상 숭배하다가 패역하여 망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자는 망합니다.
반면에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반드시 삽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 살았습니다. 백부장이 “예수여, 당신이 내게 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거기서 말씀만 하시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라고 외쳤을 때 예수께서 “네 믿음이 크다”고 하시면서 그의 하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보기를 원하는 소경에게 예수님께서 “너희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믿음을 확인하시고 눈을 열어 보게 해주셨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의 겉옷이라도 만지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날 사회가 왜 이처럼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져 짐승들이 사는 세계처럼 되어 가고 있습니까? 지금 어느 정도 타락했냐 하면 미국 대법원에서는 동성결혼을 합법으로 판결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가정과 사회가 왜 이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습니까?
이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슬픔이 가득합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죄악이 관영합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소망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더럽고 추합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절대적인 가치관이 붕괴되어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이 가득합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이단과 악령이 판을 칩니다.
그러면 이 병든 사회를 어떻게 치료할 수 있습니까? 답은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때 바른 가치관, 바른 가정, 바른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마 17:18-21)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귀신이 나가고 아이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님께 나아와 실패의 원인을 물었습니다. 왜 우리는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까? 왜 우리는 능력이 없습니까? 왜 전에는 귀신을 내쫓았는데 지금을 할 수 없습니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예수님은 한 마디로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믿음이 없는 불신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나라의 문제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경제지표도 괜찮고 무역도 흑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서로 믿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누구의 말도 믿지 못하고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이 불안한 것입니다.
지난 대선 때 국정원이 댓글을 다는 등 선거를 개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절차가 중요한데 절차를 무시하고 집권당이 비밀문서를 자기들 마음대로 열람하고 공포했습니다. 그러니 국민이 정부를 믿을 수 있습니까? 국민이 정부를 믿지 못하고 불신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CJ회장은 비자금으로 인해 구속수감 되었습니다. 누가 이런 회사를 믿을 수 있습니까? 지금은 어느 시대보다도 믿음이 중요합니다. 서로 신뢰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제자들이 파송 받아 전도했을 때 분명히 귀신을 내쫓고 병도 고쳤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주님이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을 말씀하신 것은 개탄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최소한의 믿음만 있어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 없었습니다. 겨자씨 한 알 만 만큼의 믿음이란 작지만 살아있는 믿음이요 생명력이 있는 온전한 믿음입니다. 겨자씨 한 알 만 만큼의 믿음은 작지만 주님을 100% 신뢰하고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현재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과거 그들이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친 것은 제자들이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가라고 해서 그들이 갔고, 주님이 함께 했을 때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친 것입니다. 제자들이 고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비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일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능력자가 되고 능력의 사람이 되어 한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주님의 도구, 심부름을 했을 것뿐입니다. 우리는 이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으면 태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은 100% 온전한 믿음입니다. 1%의 불신이 없는 믿음입니다. 우주만한 큰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1%의 불신이 있으면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물은 99.999도가 돼도 끓지 않습니다. 물은 100도가 돼야 끓습니다. 이처럼 100%, 온전한 믿음이어야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으면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으면 현재의 상황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으면 현재의 역경을 디디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으면 어떤 절망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으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으면 불가능에 도전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힘과 내 지혜와 열정과 젊음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다보면 인간의 힘과 능력과 지혜로 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의지나 노력으로 안 됩니다. 영적 세계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 우리의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힘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으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큰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존 윌튼은 26살까지 탕자처럼 지냈습니다. 그는 되는대로 먹고 마시며 못된 짓을 다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내가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인생을 마쳐서는 안 되지 하며 어느 주일에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날 말씀이 마침 오늘처럼 “겨자씨만한 믿음! 믿음이 제일 중요하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순간 “아! 이거다” 크게 감동을 받고 겨자씨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믿음의 의심이 생길 때마다 겨자씨를 꺼내어 보면서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 믿으면 불가능한 일을 능히 할 수 있다.” 그는 그는 71살 때 엘리자베스의 2세로부터 작위까지 받아 귀족이 됐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백작님, 성공한 비결이 뭡니까?” 그는 서슴치 않고 주머니에서 겨자씨를 꺼내어 “이것 때문입니다. 순간순간 겨자씨를 들여다보며 겨자씨만한 믿음. 믿음만 있으면 된다. 그래서 오늘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겨자씨는 작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성장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기에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생명과 성장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바사의 다리우스왕이 헬라의 알렉산더대왕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두 군인이 대치하고 있을 때 다리우스왕이 알렉산더대왕에게 선물을 보냈습니다. 선물은 커다란 부대에다가 참깨를 가득히 넣어서 보냈습니다. 그 속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군사가 이 참깨처럼 많으니 어리석게 나하고 싸우려고 하지 말라.”
이 뜻을 알아챈 알렉산더대왕은 조그마한 봉투에다가 겨자씨 하나를 넣어서 다리우스 전령에게 주었습니다. 다리우스 왕의 전령은 기가 막혔습니다. 이때 알렉산더대왕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군대의 숫자는 미미하지만 믿음이 있다.” 두 나라가 싸웠을 때 알렉산더대왕이 이겼습니다. 믿음이 없는 군대는 아무리 많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똑바른 생명력이 있는 믿음의 군인이 있으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온전한 믿음을 가진 한 사람만 있으면 인하대 인천대 연세대 그리고 세계 캠퍼스를 개척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온전한 믿음만 있으면 하버드대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나는 안된다는 이상한 믿음, 나는 할 수 없다는 불신이 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실패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는 아덴에서 생각만큼 믿음의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우리는 믿음으로 살지만 현실이란 복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현실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주님 안에서 주님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믿을 때 현실의 벽을 넘어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내가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불신입니다. 불신이란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불신, 믿어지지 않는 것은 사탄의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사실을 열거해야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신뢰하는 사이에는 여러 말이 필요 없습니다. 신뢰한다는 것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귀납적인 것이 아니라 연역적입니다. 주님을 믿게 되면 그 믿음 안에서 다 이해가 되고 믿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이란 의심과 싸우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
마태복음 17장 22-23절을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에 모였을 때 또 다시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근심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4-27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지만 사람들로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세금을 내셨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있습니까? 아니면 믿음의 흉내만 내지는 않습니까? 그저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이 있거니 하고 생각하고 살았던 저희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말씀에 순종하면서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