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1-12

이혼하지 말라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니”(마 19:6).

 

인생은 모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래에 대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혼이야 말로 모험 중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바다로 갈 때에는 한번 기도하여라. 전쟁터로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여라. 그러나 결혼식장에 나갈 때는 세 번 기도하여라.”

결혼이란 바다의 항해와 포탄이 터지는 전장보다 더 위험한 모험의 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결혼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결혼은 위험한 것이 아니라 가슴을 설레게 하는 하나님의 천국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결혼은 가정의 출발점입니다. 가정은 천국의 모형이요 하나님의 복을 담는 그릇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결혼의 의미를 새롭게 마음에 각인하여 결혼할 적령기에 있는 사람들이나 이미 결혼한 여러분들에게 결혼의 항해가 주님 안에서 건강한 항해, 멋진 항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하나님(마 19:1-4)

예수님 당시에 헤롯왕의 이혼 사건으로 전국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의 이혼을 비판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유태인들 사이에 힐렐파와 샴마이파로 있었는데, 힐렐파는 이혼에 대해 관용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반면에 샴마이파는 이혼 불가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혼 문제를 갖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것은 어떤 해답을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정치적 곤경에 빠트리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9:3).

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혼이란 인간의 죄성 때문에 허용될 수밖에 없었던 제도라고 전제합니다. 그러나 본래는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8).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했지만 노예근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노예근성의 특징은 보이는 대로, 듣는 대로, 느끼는 대로 육신과 감정을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했다가 마음에 맞지 않으면 아무 죄책감 없이 쉽게 이혼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완악함으로 함부로 이혼하는 백성들에게 이혼 하려면 반드시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도록 명했습니다. 그리고 이혼 조건도 아주 까다로웠습니다. 간음, 음행의 연고 외에 어떤 이혼도 금했습니다(마 19:9).

예수님은 이제 그들에게 이혼이 합법적인가, 불법적인가를 말씀하시지 않고 창세기 말씀에 기초한 결혼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마 19:4).

하나님은 본래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요즘 남자와 여자 외의 다른 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성(남성 여성) 평등이 아니라 그냥 성평등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남성과 여성 외의 다른 성이 있음을 전재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이제 성을 구별하는 란에 남성, 여성, 동성, 양성, 트랜스 젠더 등의 여러 성을 열거할 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은 남자와 여자 외의 성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이란 라틴어로 sec, seco, setus인데, 이는 나누다 분리하다 구별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성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람이가 태어나서 처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아람이가 태어날 때 이미 남성으로 태어났습니다. 반면에 온유는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들이 태어나서 자라다가 여성으로 남성으로 구별되고 또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본래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 이외의 다른 성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 이외의 다른 성을 인정하는 것은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발상입니다.

둘째, 부모를 떠나라(마 19: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마 19:5전).

결혼은 떠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누구로부터 떠나야 합니까? 부모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여기서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부모를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모를 소홀히 여기라는 의미는 더욱 더 아닙니다. 이것은 결혼의 사회적 혹은 법적인 의미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결혼이란 새로운 하나의 가정을 만들기 위한 제도적 독립성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자녀들이 결혼하기 전에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습니다. 부모님의 우산 아래 있습니다. 부모님을 의존하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결혼하여 하나의 새로운 가정이 세워지면 부모님으로부터 심리적, 그리고 경제적인 독립을 해야 합니다.

결혼하여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이제 우리의 자력으로 인생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결단을 뜻합니다. 이것을 법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혼인신고입니다. 만일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해 부모님의 도움을 기대한다든지, 부모가 자녀를 안쓰럽게 생각하여 계속 도움을 준다면 이것은 본인이나 자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도움은커녕 부모를 의존하는 중풍병자로 만드는 큰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결혼하면 신랑 부모는 아들을 며느리에게로 떠나보내야 합니다. 끝까지 붙들고 헬리콥터 형으로 자녀를 키우면 안 됩니다. 요즘 남편은 미워도 다시 한 번, 딸은 영원한 나의 사랑, 아들은 며느리의 남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잘나면 국가의 아들, 돈 잘 벌면 장모의 아들, 빚지면 내 아들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아들을 떠나보냄으로 인한 섭섭한 마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철저하게 아들을 며느리의 남편이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만일 우리 중에 결혼하고도 부모님을 계속 의존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하루 빨리 그 의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론 자녀들이 안타까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한두 번 도움을 주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들이 부모를 의존하는 데서 벗어나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나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부부가 다투고 나서 짐 싸들고 친정으로 가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부모를 떠나지 않은 것입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부부끼리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짐 싸들고 오는 딸 집안으로 들이는 것은 그 딸을 망치게 만드는 행태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 줄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대개 가정이 우애의 금이 가는 것은 유산 때문입니다. 청교도들의 전통 중의 하나는 유산을 자녀들에게 남겨주지 않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의 유산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자녀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개척하기보다, 부모님의 유산을 바라보는, 자립적이지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자녀를 잘 돕는 법은 부모님을 의존하는 의존의 끈을 끊어 자립적인, 스스로 개척하는 삶을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재산이 있다면 지금부터 자녀들에게 이렇게 교육을 시키십시오.

“이 집은 하나님이 주신 집인데 앞으로 아빠 엄마가 죽으면 이 집을 교회의 선교 사업을 위해, 나를 키워준 사회에 장학재단으로 증여할 거야. 그러나 아빠 엄마가 힘닿는 데까지 공부를 시켜 줄 거야. 그리고 결혼할 때 힘닿는 데까지 도와 줄 거야. 그러나 결혼하면 이제는 네가 자립해서 살아야 해.”

자녀가 결혼했는데도 부모가 헬리콥터 형으로 도와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결혼을 했으면 부모님을 의존하는 의존심에서 떠나야 합니다.

셋째, 둘이 한 몸이 되어라(마 19:5후)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마 19:5하).

부모를 떠났으면 이제 합하여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분명히 다른 두 개체입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면 하나가 됩니다. 1+1=2 가 아니라 ‘1’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연합이란 말은 영어로 cleave로, 종이 대용품인 파피루스에 본드 같은 것으로 붙이는 것을 뜻합니다. 두 장의 파피루스를 아교풀 같은 것으로 붙이면 하나의 파피루스처럼 딱 붙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연합입니다.

붙어있는 두 장의 종이는 다시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이처럼 결혼하게 되면 부부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 떨어져도 안 되는 관계,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아무도 끼어 들어갈 수 없는 하나 됨, 그것이 부부의 연합이요, 결혼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부모로부터 떠나라는 사실만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성, 내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배우자를 찾아 그에게 소속하고 연합하고 100% 묶이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독립, 해방, 혼자 마음대로 살고 싶은 욕망,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어느 단체에 소속해서 안정을 찾고 싶어 하는 이중적인 심리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이 소속감이 충족되지 않으면 방황하게 됩니다.

결혼은 서로가 서로에게 소속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안정, 인간의 삶의 욕구가 충족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혼자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없습니다. 보통 ‘올드미스 히스테리’, ‘노총각 심술’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으려면 결혼해야 합니다.

이제 둘이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도 그 사이에 낄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는 심지어는 자녀도 낄 수가 없습니다. 한국의 여인들은 아기를 낳으면 그 다음부터 남편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식들에게 집착하는 어머니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자녀를 낳아도 우선순위는 부부입니다. 내가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내 남편이고, 내 아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우선순위가 깨지면 사랑의 정서가 메말라가기 시작합니다.

사랑의 정서가 메마르게 되면 마음의 안정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들은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시선을 다른 데로 옮겨 가게 됩니다. 이때부터 가정의 위기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한 남자와 한 여인이 온전히 연합하도록 가르칩니다.

결혼은 둘이 하나가 되는 연합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육체적으로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는 사람과 결혼하도록 강조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고후 6:14-15).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4).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노아 시대가 강포가 충만하고 패역했던 것은 신자들이 불신자들과 자연스럽게 결혼한 데 있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삼고 그 아내들을 위해 이방 신전을 세워줌으로 인해 영적인 타락과 이스라엘의 분열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과 결혼해서 조화로운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넷째,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히 13:4).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었으면 서로에게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히 13:4).

그리고 잠언에 부부의 결혼생활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이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잠 5:15-18).

아내를 즐거워하라(satisfy)는 것은 만족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부는 성적 교제를 통해 삶의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부는 서로의 성적 요구를 거절하지 말고 수용할 줄 아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고 했습니다(고전 7:5). 따라서 외도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부부의 성적 교제를 통해 자녀가 출산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녀를 낳고 자녀를 키우는 것은 우리 가정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만듭니다. 우리가 키우는 자녀들이 우리 다음의 역사를 만들어냅니다.

이를 볼 때 결혼하여 자녀 출산과 양육은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라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따라서 결혼이란 장난이 아닙니다. 결혼은 게임이 아닙니다. 결혼은 역사적 의미와 책임을 수반하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앞으로 결혼해야 될 형제자매들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계승하는 역사적 소명감을 가지고 결혼하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나누지 못할지니라다(마 19:6).

이혼은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말 2:16전).

미워하신다(hate)는 싫어한다는 강력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이혼 그 자체를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 19:6).

이혼은 하나님의 창조계획을 파괴하는 죄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이혼은 하나님의 복을 담는 그릇을 깨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십니다. 이혼은 죄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함부로 이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결혼하지 않고, 정욕을 좇아 자기 원하는 대로 함부로 결혼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이 신성시되지 않고 상대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신과 이기심과 정욕 때문입니다. 사람이 불신하게 되면 남편이 아내에게 통장을 맡기지 못하고 인감을 맡기지 못하고 서로 각자 비자금을 관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기심과 정욕은 가정을 파괴합니다. 이혼의 밑바탕에는 죄가 도사려 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복을 담는 그릇입니다. 우리는 결혼 진리를 새롭게 하여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을 계승하고, 아이들이 건전한 가정에서 건전하게 자라 건전한 사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나의 이기심과 불신과 정욕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죄 사함을 받아 가정이 회복되고 건강한 가정을 이루고 가꾸어 하나님의 복을 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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